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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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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부활

 

흑해지역의 후기구석기시대 여성형상물은 대부분 주거지에서 출토되며, 남성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시베리아와 대조적이다(김재윤 2019a).

시베리아에서는 14000년 전 말타(Мальта, Malta)와 부레티(Буреть, Buret') 유적에서부터 인간형상물의 전통이 확인되었다. 말타 유적은 주거지 15기가 있는 취락유적으로 각 주거지에서 1개 이상의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원형의 지상식 주거지 안에 화덕자리에는 인골과 함께 인간형상물(그림 3, 그림 4) 및 동물형상물(그림 5)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집 속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며, 인간형상물 부장의 시원적인 모습이다. 여성(그림 3, 4-1)은 머리, 몸통, 팔 다리가 뚜렷하게 구분되며, 가슴과 엉덩이를 표현했고, 하반신에 Y존을 뚜렷하게 그려서 여성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남성(그림 4-2)은 남성상징형태이고, 몸통 표현은 없고 얼굴만 표현되었다(김재윤 2021b).

 

 

 

 

구석기시대 마지막 기간에 집 속에 인간형상물을 부장한다는 현상은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에서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이를 하는 사람들의 행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흑해지역에서 순수한 특정한 ‘집’에 왕창 넣어준다던지, 여성만을 형상물화 한다던지 하는 현상은 시베리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평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23000년 전 동유럽 후기구석기문화에서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는 여성형상물에 비해서 숫자가 적고, 간단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남성들도 형상물로 만들어졌다. 동유럽에 비해서 살찌거나 임신한 여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지 않은 점도 여성을 ‘생산’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고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담았을 수 있다. 말타 유적의 여성형상물은 집 안에 인골과 함께 매장되었고, 무덤 속의 매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집 안에 무덤을 만들어서, 그가 다시 부활하기를 바랬을 수 있다. 미라를 만들었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말타 유적의 모든 집에서는 인간형상물들이 1개 이상 발견된다는 점도 흑해와는 구분된다(김재윤 2022a).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여신이 표현된 금속제품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거울, 침발카 유적의 마면장식, 쿨 오바 유적과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의 장식판,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의 귀걸이가 있다. 그 중에서 켈레르메스 유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원전 4세기이다.

 

기원전 4세기의 여신은 소형의 유물이 대부분이지만, 오늘 보여 드리는 유물은 비교적 크고 여신의 모습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청동에 표현된 여신은 고곤 메두사의 얼굴이다. 머리가 크고 눈이 크게 과장되고, 혀를 내밀고 있다. 머리는 곱슬머리이고, 머리에서 대칭형으로 올라가는 뱀이 돋을 새김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문양이 장식되었다.

 

이 유물은 어디의 일부일까?

 

스키타이 문화에서 방호용구로 투구(헬멧), 방패를 소개해 드렸는데, 이 유물은 인체의 상반신을 보호하는 갑옷이다.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진 갑옷 조각은 가슴가리개 부분인데,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리스로부터 수입된 유물이다.

 

 

그림 1. 엘리자베틴스키 유적의 5호분, 기원전 5~4세기, 1914년 베셀로프스키 발굴, 너비 41cm, 길이 44cm.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진 갑옷은 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4호(그림 2, 그림 3)에서도 출토되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갑옷은 철판을 잘라서 가죽끈으로 이어 붙인 미늘 갑옷(찰갑)이다. 메두사의 얼굴이 장식된 갑옷보다는 보호의 기능에 충실한 유물이 대부분이다. 기원전 6세기의 코스트롬스카야 유적과 우스티-라빈스키 유적에서 미늘갑옷이 출토된다.

 

그림 2. 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4호에서 출토된 갑옷조각, 기원전 4세기

 

그림 3. 그림 2의 복원

 

미늘갑옷을 구성하는 철판의 길이는 2~5cm가량이고, 길이의 1/2 혹은 2/3이상 겹쳐서 가죽으로 이은 것이다(그림 4). 몸통, 어깨, 배꼽아래 부분의 크기가 다르다(그림 4).

 

 

그림 4. 주로프카 유적의 401호 출토품, 보르빈스키 1903년 발굴, 기원전 5세기.

 

그런데 우리는 이미 비슷한 미늘 갑옷을 본 적이 있다.

 

솔로하 유적(기원전 4세기)에서 출토된 황금빗에 표현된 말탄 무사는 이렇게 생긴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그리스식 투구를 쓰고 있는 그리스 전사이다(포스팅 참고).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

eastsearoad.tistory.com

 

 

마면장식이나 갑옷에 표현된 스키타이 여신은 일종의 보호용구에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의 작은 장식판도 부적의 기능을 했다.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는 원래 다산의 여신이었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모습도 각양각색이고, 엄격한 모습(침발카 유적)부터 배 나온 여신(톨스타야 마길라)까지 표현도 자유로워진다. 여신의 역할을 사람들이 거의 기억 못했을 수 있다.  대신 보호구와 장식판으로 사용되는 점을 보아서  단순한 보호(부적)의 의미(기능)가 강해졌을 수 있다. 알 수 없다.

 

상상해 본다. '어디서 들었는데,,이 얼굴이 있으면 안 다친데,,,,그냥 보호만 해준다면 어떤 얼굴이라도 상관없어...라고 하면서' 갑옷을 입는 스키타이 전사를..

 

 

참고문헌

Черненко Е.В. 1968 : Скифский доспех. Кие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68. 190 с(체르넨코 1968, 스키타이 갑옷)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는 스키타이 신화 속의 인물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여신인 아르김파사 혹은 소아시아(현재의 아나톨리지역)에서 유행한 키벨레(Cybele)가 자주 등장한다.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 침발카 유적의 마면장식, 쿨-오바 유적의 황금장식판 등이 있다. 켈레르메스 유적은 기원전 7세기이고 나머지 유적은 기원전 4세기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은 그리스에서 제작되어서 주인공 여성이 키벨레라고도 하지만, 원래 키벨레 숭배사상은 아나톨리 지역에서 먼저 생겨서 그리스가 수입해 간 것이다. 또 쿨-오바 유적의 여성이 한 손에는 단검, 한 손에는 헤라클레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키벨레 보다는 스키타이 신화의 아르김파사를 상징할 가능성이 많다.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유적에서 비슷한 구도의 여성이 계속 출토되는데, 제작지가 다른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의 형상이 계속 유물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요구가 강력하게 반영된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주문자는 스키타이 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화 속 인물을 주문한 물건에 반영했을 가능성이 많다(김재윤).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신의 모습에 변화가 많다.

침발카 유적, 쿨-오바 유적의 여신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여신과 양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달라지고, 날개 표현이 다르다. 옷자락의 끝에 뱀의 몸통을 한 그리핀을 장식한 것은 같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의 유물 중에는 두 손과 동물이 없고 날개만 있는 여신이 출토된다. 볼쇼야 블리즈니차(Большая Близница, Bol'shaya Bliznitsa)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그림 1)이 있고, 유적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접한 곳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장식판이다(그림 2).

손은 없고 날개와 하반부의 옷자락 끝이 둥근게 말려 있다. 두 유물 모두 날개 끝과 머리장식, 옷자락(하반식)에 구멍이 있는데, 어딘가에 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두 유물은 얼굴의 크기와 몸 통의 전체 비율에 차이, 하반부의 옷 자락에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다산의 상징인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지니차 유적 출토, 황금장식판, 길이 5.3cm(아르타모프 1961)

 

 

그림 2. 기원전 4세기의 여신상, 황금장식판, 흑해부근 출토.(굴랴예프 2005)

 

기원전 4세기의 유물 가운데 두 손 대신 날개표현 및 옷 자락 끝에 나선모양 장식으로 변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보스포러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된다고 한다.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가 동물문양 대신에 옷자락 끝이 나선문양으로 바뀌게 된 것도 사회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1 : Антропоморфные божества в религии скифов. // АСГЭ. [Вып.] 2. Л.: 1961. С. 57-87.(아르타모프 1961, 스키타이 의례 속의 의인화된 신)

Гуляев В.И. 2005 : Скифы. Расцвет и падение великого царства. М.: «Алетейя». 2005(굴랴예프 2005, 스키타이, 위대한 왕국의 흥망성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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