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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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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고고학 개론서』는 필자가 박사졸업후 10년간 연구한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 이다. 개론서 이기 때문에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각 시대별로 고고문화를 소개한다.

 

  연해주는 우리나라의 중부지역 혹은 남부지역 일부와 함께 환동해문화권역으로 역사적 공간으로써 자리매김했다.  이 문화권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지만, 구석기시대도 설명한다. 사실 후기구석기시대는 시베리아와 문화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환동해문화권으로 분리하기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연해주의 역사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본고에서 설명하고자 하지만 연구자가 부족해서 유적조사가 많지 않은 점은 시베리아와 큰 차이점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 철기시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및 동강문화까지 포함된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를 뒷이은 폴체문화도 철기시대에 포함시키지만, 이미 역사 시대로 진입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포함되지 않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환동해문화권은 남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자료의 단순한 기원지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이다. 다만 전 기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시대별로 시간적인 추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두대간 북쪽으로 연결되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를 공유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생업형태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많이 위치한다.

 

 반면에 청동기시대는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가 남한에서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일대에서 발견되고 특히 남강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연해주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생업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인 농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시작은 신석기시대 후기인 자이사노프카 문화부터이다. 각종 석기 및 곡물자료를 근거로 한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인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물질 자료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심지어 남강의 충적대지에서도 발견된다. 남강 대평유적의 곡옥형 청동기는 비파형동검 이전의 자료로 최초로 발견된 청동유물이지만 출토당시에는 의심스러운 자료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청동기시대 조기인 정선의 아우라지 유적에서 청동유물이 발견되면서, 비파형동검 보다 이른 단계에 동검이 아닌 청동유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남강 대평의 곡옥형 청동기는 환동해문화권 북부의 시니가이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밝혀졌다.

   따라서 필자는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남강 유역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와 토기 중에 일부는 시니가이 문화 및 흥성문화의 물질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한의 청동기시대 형성과정 중에는 많은 요소가 있었을 것이며,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 때문에 한강 이남지역에서 농경문화가 주요하게 자리잡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동해문화권의 철기시대는 얀콥스키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폴체문화가 알려졌는데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이미 단결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III기(기원전 1~기원후 1세기)에 ‘옥저’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이를 뒤이은 폴체문화는 철기시대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동해문화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별로 권역의 차이가 있다(표 2). 주로 연해주 및 인접한 두만강과 목단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이고, 우리나라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비롯한 중부지역은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이다. 시간에 따라서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에는 아무르강 하류도 포함된다.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연해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시베리아 카라숙문화의 청동유물과 같은 성분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에서는 카라숙 문화 및 타가르 문화의 동검을 모방한 석검 등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 문화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서도 간접적인 시베리아 문화의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매우 일부이며, 연해주만이 주요한 길목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연구에 한계가 많다.

 

필자가 전고에서 밝혔듯이 ‘기원 찾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제인식을 지닌 지역범위에 대한 별 다른 고민 없이 현대의 『국경』을 전제로 해서, 국경에 속하지 않으면 전부 외부로만 인식하고 있다. 문화의 원류, 기원, 계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 문화의 범위는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닌 『선사인의 생활권역』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필자가 연구했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물질문화의 요소 찾기는 기원찾기가 아니라 문화권역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림 1. 사카치 알리안의 91번 돌에 그려진 배 그림(오클라드니코프 1971), 현재 이 돌은 없어짐. 아무르 강 하류의 현무암 바위에 그려진 암각화는 아무르강의 범람으로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할 당시와 매우 위치가 달라져서 유적 파괴가 심각함. 유실된 돌도 많은편이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고고학 개론서』, 진인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18. 09:22 책소개

 

오늘은 우라르트를 떠나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박사 졸업 후 10년동안 쓴 논문을 바탕으로 한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선사고고학개론』가 인쇄 중이다.

 

책의 맺음말에서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인 연해주는 늘 한국사의 영역이었다. 가장 가깝게는 독립운동의 기지 중에 한 곳이었다. 연해주는 북경조약(1860년)으로 러시아제국의 영토로 들어갔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주로 살던 사람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한국인마을 20개소 7000명, 중국인은 90,000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에 이는 러시아인 보다 더 많은 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블라디보스톡의 거리 이름 인데, 지금은 개명되었지만 한국거리, 중국거리, 일본거리 등이 있었다. 또한 연해주의 중국식 혹은 한국식 지명들을 1970년대가 되어서야 모두 일괄해서 러시아식으로 바꾸었는데, 예를 들면 핫산지역의 강 이름 중에 신석기시대 대표유적인 자이사노프카 1이 위치한 글라드카야 강은 개명 이전에는 삼거리였다. 이외도 고개, 거리 등은 특히 한국식 이름이 많았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세종 때 여진의 약탈을 막기 위해 녹둔도를 개척하였는데 그 위치가 현재 두만강의 북쪽, 러시아 핫산의 가장 남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징 조약 이후, 고종 26년(1889년)에 이에 대한 반환요구가 있었지만 체결되지 못했다.

고려시대는 예종 3년에 윤관이 여진을 토벌하고 동북지역에 9성을 지었는데, 그 위치는 정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국학을 연구하는 미하일 보로비요프는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우스리스크시 근처의 유즈노-우스리스크 성과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을 윤관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공험진(公險鎭)으로 보았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고고학연구소에서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곽은 매해 발굴조사 하고 있는데, 여진성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 정황과 역사적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최소한 연해주가 여진족의 주요 근거 지였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윤관의 9성 중 일부가 존재했을 것이다.

 

  남북국시대로 남쪽에 통일신라가 위치했을 때, 북쪽에 발해가 현재의 국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등에 걸쳐서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이 공동연구 할 수 있는 지역은 러시아로 크라스키노(鹽州城)성, 코크샤로프카 성터, 체르냐치노 무덤군 등은 한국과 공동조사가 이루어졌다. 발해에 대한 역사기록이 아주 미흡한 상황에서 고고학적 자료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운 점은 발해사의 역사 인식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도 자신의 역사로 인식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연구의 관점차이가 심하다.

  발해 이전에 알려진 정치체는 옥저와 읍루가 있다. 옥저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읍루는 폴체 문화일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 들이 많다. 물론 필자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전체를 옥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이 문화의 가장 마지막 기간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II, III 장에서 다룬 것은 위에서 말한 역사의 그 이전 시대이고, 연해주는 한국사의 영역이었다.

머리말에서 다루었지만 필자가 연구한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은 기원지로서의 검토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을 찾고 구체화 한 것이다.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문화가 남쪽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기후변화와 관련있다. 기온 상승기의 문화 가운데 이 동한 것은 신석기문화인 아무르강 하류 말리세보문화와 연해주 루드나야문화(세르게예프카 유형)과 청동기시대 시니가이 문화이며,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에서 뚜렷하게 특징이 드러 난다. 기온 하강기에 발생한 문화이지만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으로 이동한 단결-크로우 노프카 문화는 그 이전 문화들과 달리 집에 쪽구들을 설치해서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책의 표지, 사카치 알리안 유적과 키야 유적의 암각화 편집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7세기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다량 발굴되면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고 보고 있다.

스키타이 유물은 화살촉 뿐만 아니라 재갈멈치 및 철제 무기와 구슬 등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라르트 왕국의 특징적인 유물들도 전해지는데 청동으로 된 인물상 뿐만 아니라 우라르트 재갈멈치, 투부도 있다.

 

그림 1.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 테이시바이니 유적출토

 

그림 2. 우라르트의 재갈멈치,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림 3. 앗시리아의 청동그릇,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런데 우라르트에는 역시 앗시라아 제품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그릇, 실린더 모양의 도장과 같은 유물이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유물은 우라르트를 통해서 수입된 것이다.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그림 1)은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은제거울이나 투부가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논거의 반박자료로 충분하다.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 설득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이유는, 서양의 고대근원이 그리스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우라르트 보다는 그리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먹혔?다고 할까?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성곽 주변에서는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골제로 된 동물장식이 발견되었는데, 굴레장식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그림 4. 카미르 블루르 유적

 

유적을 발굴한 피오트로프스키는 이 유물을 그리핀으로 보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말이 매장된 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코카서스 산맥도 충분히 높기 때문에 문화적 구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유적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매우 흡사하다.

 

 

 

참고문헌

Б.Б. Пиотровский Скифы и древний Восток(Доклад на Конференции по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й археологии).// СА. 1954. XIX. С. 141-158(피오트로프스키 1954, 스키타이와 고대동방)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 성곽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된다. 이 성은 스키타이 화살촉 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 및 구슬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엄청난 숫자의 스키타이 화살촉으로 보아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화살촉


비슷한 화살촉이 앗시리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화살촉이다. 토파흐 칼레, 앗시리아의 수도 아수르 등지에서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화살촉을 사용했다.

그림 2. 테에시바이니 유적 스키타이 청동화살촉, 앗시리아에서 발견됨. 1,2,3-하이카베르드, 4-토파흐-칼레, 5,6-아슈르, 7,8-바비론, 9,10-타르스, 11,12-데르아르



처음에 앗시리아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화살촉의 경부에 구부러진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화범의 재료를 부착하는 장치로 설명했다. 하지만 보네트는 이러한 유형의 청동화살촉은 코카서스 부근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지적했다.

무구 중에는 왕의 이름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는데 청동으로 된 찰갑이다. 아르기티치 I세라는 명칭이 씌여 있었다. 청동투구도 우라르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투구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는 우라르트 최대의 유적으로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 유적이다. 벽의 두께가 3.5m에 달하는 지점도 있다. 계단식의 구조인 건축물은 한방의 창이 다른 방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고, 벽돌의 1개의 크기 중에 가장 큰 것은 0.5m이상이다.

 

모든 창고(약 120개의 방)는 방별로 인감으로 밀봉되었다. 성곽에서는 라즈단 강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도관이 설치되었는데, 도관은 둥근 돌 파이프로 연결되었는데, 에레부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거주공간에서는 녹로, 빵을 굽던 화덕자리, 곡물 분쇄기 및 가정용품 등이 발견되었다.

 

성곽은 메소포타미아 건물스타일로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무암 기초위에 진흙 벽돌로 쌓은 것이다. 현재는 원시 벽돌은 벽동 세공의 선이 보이는 정도로 점토 덩어리로 변했다(그림 4)

 

그림 1. 1950년 사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정리된 바닥

 

그림 2. 1950년 점토벽돌로 된 성벽, 6줄의 벽돌

 

 

그림 3. 테이스바이니 성곽의 중앙문 복원도

 

그림 4. 현재 남아 있는 성벽

 

그림 5. 구글 위성으로 본 테이시바이니 유적

 

유적에서는 금속가공소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은 구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철제품은 남아 있는데 처음에는 무기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노동도구를 제작했다고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금속덩어리와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장검, 단검, 창, 화살 등과 같은 무기가 많다.

 

그림 6.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삽날

 

그림 7.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철제품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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