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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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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는 스키타이 세계와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고, 특히 에레부니 성곽 이후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성벽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최대전성기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에레부니는 2개의 사원지가 가장 주목받는다. 특히 수시 사원이라고 이름 지워진 곳에서는 1958년에 Argishti I세가 Ivarsha(신)을 위해서 지었다는 비문(설형문자)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에레부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다(그림 3). 비문은 사원의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수시 사원은 칼디 신의 사원과는 달리 면적이 40㎡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메소포타미아 건축 스타일이라고 한다. 전체 평면적은 10.00 × 13.45 m이지만, 내부 면적은 5.05 × 8.08 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벽이 매우 두텁다(그림 2).

 

그림 1. 예레부니 성곽 유적의 평면도

 

그림 2. 수시 사원의 평면도

 

그림 3. 수시 사원의 입구, 비문이 걸려 있다.

 

그림 4. 수시 사원의 입구 안쪽,

 

그림 5. 예레부니 성곽의 복원도, 그림 1의 네모 속의 위치를 복원함. 안뜰.

 

수시 사원의 벽은 하단은 특히 정밀하고 돌로된 블록을 쌓은 것인데, 유적에서 가장 정밀하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진에도 거의 간극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지워졌다(그림 3). 발굴당시에 확인된 수시 사원 성벽의 높이는 2.6m가량이다(그림 4). 현재는 성벽의 하단 부만 남아 있다(그림 3).

 

수시 사원은 예레부니 성곽 내에서 예레부니 사람들에 의해서 지워지지 않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아마도 하티(hatti)사람들이거나 혹은 다른 곳이라고 한다. 성곽 내의 다른 방들과 비교해 볼 때 수시 사원이 다른 방법으로 지워져서 그렇게 추정하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시대에 페르시아 사원으로 재건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림 6. 오른쪽이 예레부니 성곽의 평면도, 왼쪽의 붉은 색이 수시 사원을 재건한 모습이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다시 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로 돌아가자.

우라르트에는 두 개의 성이 알려져 있다. 기원전 782년에 세워진 에레부니와 그 뒤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성곽이다. 이 후에는 흔적이 없다가 기원 후 3세기부터 에레반이라는 이름으로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다. 기원전 8세기 에레부니 성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9개의 요새라는 이름으로 포브스 잡지(2012년 9월 17일)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일단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도시는 성곽을 포함해서 전부 200헥타르 정도 되고, 아린-베르드 언덕(약 65미터 높이)의 꼭대기에 위치한다. 유적은 체적으로 모양이 삼각형인데, 성곽을 만들면서 봉우리가 편평해 졌다고 한다.

 

도시의 면적은 전부 약 200 헥타르 정도약 8헥타르 정도 되고, 테이시바이니 성곽에서는 점토블록을 이용한 것과는 달리 현무암 블록으로 지어져서, 현재도 그 모습이 후대의 테이시바이니 보다 잘 남아 있다. 입구는 남동쪽에 있는데, 경사면이 매우 가파른 곳이다. 정문의 기초 아래에서 1958년에 Argishti I의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에레부니의 기초에 대한 것이었다.

 

인접한 언덕에서도 에레부니 성곽에서 발견한 토기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어서, 우라르트의 도시 유적이 그 곳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타깝게도 유적은 20세기 중반까지 아르메니아 수도 에레반의 교외에 위치하면서 집중적으로 건설되어서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에레부니는 철저하게 군사목적으로 지어진 성곽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 건물과 달리 눈에 띄지 않게 지어진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아라라트 계곡과 이 지역을 통과하는 대부분의 도로가 매우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후대의 학자들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은 사원지이다. 2개의 사원지가 발견되었는데, 칼디의 사원과 수시 사원이다.

 

 

그림1. 예레부니 성곽의 평면도(오른쪽), 노란색 구역: 내성의 궁전영역, 연두색 영역: Peristyle, 내성 안뜰,  녹색: 수시 사원, Argishti I세가 신(神) Ivarsha을 위해서 지음.   귤색 영역: 붉은 방, 와인저장고,   연보라색 영역: 신(神) 칼디의 사원, 그리드는 50m간격.

 

 

그림 2.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남쪽 벽(포브스 참고)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 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 Ереван: Издательст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로 살펴본 아린- 베르드 I, 예리부니의 건축)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22. 09:22 책소개

 

인쇄 중인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고고학 개론』에서 아직 블로그에 공개되지 않은 부분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 한 부분은 환동해문화권 고고자료와 고아시아족 문제와 관련된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은 오클라드니코프가 자신이 발굴한 고고자료를 민족과 접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가 민족지자료로 고고자료를 해석하려 한 점은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할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아무르강 하류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제 인간형상물의 용도가 민족지 자료로 보아서 집과 관련된 제의적인 유물일 수 있다는데 동의한 부분이다. 또한 무덤에서 나온 자료를 민족지자료와 비교해서 얻은 성과도 상당하고 필자도 한국고고학에서 이러한 부분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1. 바이칼 유역의 글라스코보 문화와 민족지자료의 비교, 1~23: 우스티 우다 4호 출토품, 24: 나나이족 샤먼의 모습

 

하지만 정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여러 논고를 통해서 고아시아족을 아무르강 하류의 신석기시대 사람들로 생각했다가 고고학 자료가 증가하면서 기원전 일천년기의 철기시대 폴체문화와 관련시켰고, 다시 만주-퉁구스족으로 정정했다.

그가 최초로 언급한 고아시아족인 나나이족, 울치족은 현재는 만주퉁구스어군으로 분류되고, 고아시아족 혹은 고시베리아족 혹은 니흐브족이 해당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연구성과가 쌓이면서 생긴문제이기 때문에 오클라드니코프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는 당시에 충실하게 연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클라드니코프는 아무르강과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주민이 고아시아족의 원류임을 전하면서 한국을 언급했는데, 동삼동 유적의 토기 및 패총을 들어서 연해주와 한국의 신석기시대 주민이 밀접하게 접촉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65).

문제는 이 연구관점이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져서 한국민족의 원류가 퉁구스 및 예맥인이 아닌 고아시아족이라는 관점일부에서는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고아시아족으로 예를 든 바이칼 유역의 글라스코보 문화는 신석기시대가 아니고 순동이 확인되는 시대이며, 한국동삼동 유적과 연해주의 신석기문화는 관련성이 크지 않다. 물론 연해주와 강원도는 환동해문화권이지만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 이남의 자료인 죽변, 세죽과 같은 출토품은 오산리 유적과 관련성이 더 많다.

오클라드니코프의 논저 당시에는 알려진 동삼동 유적의 예는 미국인 샘플이 조사한 것을 주로 참고했을 것인데, 그 이후에 동삼동 유적은 다섯 번에 걸쳐서 재조사되었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연해주 신석기인과 한반도 신석기인의 ‘관련성’을 ‘접촉’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를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원류로 파악하고, 더 나아가 고아시아족으로 해석한 것은 문제가 있다.

 

한반도 소백산맥 이동의 남부지역에는 독자적인 신석기문화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남부지역 신석기문화가 단계적으로 발전된 사실은 자명하다.

따라서 환동해문화권의 동심원문 암각화가 소백산맥 이동에서 확인된다고 해도 이는 환동해문화권 사람들과의 교류 흔적이며, 환동해문화권이 고립적인 지역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한반도 남부지역 신석기문화 전체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없고, 더욱이 아무르강 민족문제와도 관련시키기도 힘들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고고학 개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21. 09:22 책소개

연해주 선사시대 문화의 이동이 있는 기간은 6500~6000B.P.과 3400~2900B.P.인데, 현재 보다 따뜻한 시점이며, 기온 상승기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카로트키의 그래프(표 1)에서 기온 상승기이면서 4500~3800B.P.(표 1의 E)에는 환동해문화권에서 문화이동의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시점에는 연해주에는 자이사노프카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고, 동해안에는 환동해북부의 평저토기(바닥이 편평한 토기)가 아닌 중서부 지역의 첨저토기(바닥이 뾰족한 토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각 지역의 문화는 기온 하강기에 5000년 전 후(표 1의E)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일대의 자이사노프카 문화는 추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등장해서 홀로세 기간동안 가장 추운 시점을 찍고 다시 기온이 상승하는 기간 존재했다. 이 문화가 영위되는 동안 매우 극심한 기후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온 상승기인 A와 G 기간에 새로운 문화가 각각 생기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그래서 4500~3800B.P.는 기온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남쪽으로는 이동하기 힘든 사회적 동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동해안의 신석기문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변화는 5100B.P. 평저토기 대신해서 중서부지역의 첨저토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5100년 전 이전부터 평저토기인 오산리식 토기와 융기문토기가 마지막 발견된 5800년 전 사이 동안(표 1의 B)은 환동해문화권 남부 지역에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산리 유적 C지구의 2호와 문암리 10호 야외노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이전 시기와 같이 취락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왜 동해안에서 유적이 없는 기간이 나타난 것일까?

 

연해주에서 강원도로 이동했던 루드나야 문화(세르게예프카 유형)가 사라지면서 이를 기억하던 루드나야 문화 사람들이 살던 사회적 배경이 바뀌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표 1). 이 문화는 5800년 전 무렵에 기후가 가장 따뜻했다가 이후로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이동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연해주 보이스만(Бойсман, Boisman) 문화의 3단계와 4단계가 펼쳐지고 있긴 하지만 이 문화의 토기가 강원도에서 출토되지는 않는다. 다만 보이스만 문화의 토기는 북한 라진 유적에서는 발견되기 때문에 두만강 유역 부근에서 그 문화가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드나야 문화가 끝나면서 추워지기 시작한 5800B.P.이후부터 계속 기온이 떨어져서 5500B.P.무렵 추웠던 기간(표 1의 D)에는 남쪽으로 문화는 움직이지 않았고, 동해안에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5100B.P. 무렵에 강원도 문암리 유적에서 평저토기 보다 상층에서 첨저토기가 발견되면서, 중서부 지역의 첨저토기를 쓰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새로운 생계를 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해주의 신석기 마지막 문화인 자이사노프카 문화는 기온 하강하는 시점인 5000년 전에 생겨나며, 기온하강기(D)와 기온상승기(E)를 모두 거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때 환동해문화권의 영역은 연해주~목단강 일대로 좁아졌다.

 

또 다른 기온하강기인 2900~1900년 전 동안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등이 생겨났다. 리도프카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는 기후 하강기에 등장한 자이사노프카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연해주 및 목단강 유역, 두만강 유역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반도 중서부지역과 중동부 지역에서 확인된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 문화에서 고안되기 시작한 주거지의 구들 때문이었을 수 있다.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사람들이 발명품을 만들었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그림 1. 카로트키 박사의 동해안 기온변화 그래프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고고학개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20. 09:22 책소개

 

 

필자는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각 고고문화와 동해의 기온변화를 비교했다. 동해의 기온변화는 카로트키 박사의 것을 참고로 했다.

러시아에서 기온변화의 연구는 카로트키 박사의 것을 참고 할 수 있다. 카로트키 박사가 그린 기온 그래프에서 기온 변화가 있는 구간을 A~H로 표시했다.

 

 

표1. 카로트키 박사가 작성한 동해안의 기온변화, 김재윤 편집

 

7000~5100B.P,까지는 현재보다 따뜻하지만 기온변화가 심한데, 세 구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7000B.P.부터 기온이 상승하는데 5800B.P.까지 지속된다( 표 1의 A). 이후 기온은 하강하는데 5500B.P.까지 흐름이 지속되다가(표 1의 B) 5100년 전(표 1의 C)까지 다시 기온이 올라간다. 그 이후로 4500B.P.까지 계속 하강해서 해수면 높이가 지금보다 가장 내려간 시점으로 4m나 내려가는 가장 추워진다(표 1의 D). 이 시점을 지나면서 현재의 해수면을 회복하며 3800B.P.까지 해수면이 급격하게 올라간다(표 1의 E). 하지만 3400년 전까지 현재의 해수면 보다 낮아졌다(표1의 F). 그 이후 2900 B.P.까지 기온은 꾸준히 상승하다가(표 1의 G) 1900년 전(표 1의 H)까지 기온은 다시 하강한다.

 

7000~6000B.P.는 홀로세 기간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간(표 1의 A기간)이다. 현재 아무르 강을 떠올리면 매우 추운지역으로 생각할 수 도 있지만, 현재보다 해수면이 높아서 이 기간은 매우 따뜻했다(표 1의A). 이 시점에 아무르 강 하류에는 말리셰보 문화와 연해주에는 보이스만 문화가 새롭게 등장했고, 루드나야 문화는 지속되는 시점이다. 보이스만-2 유적이 위치하는 보이스만 만은 석호에 형성되었는데 현재와는 달리 6000년 전 당시에는 보이스만-2 유적은 해안가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온 상승기에 해당하는 신석기시대 A(7000~6000년 전)기간과 청동기시대 G기간(3400~2900년 전)중에 시작 시점은 각 각 루드나야 문화와 시니가이 문화가 등장한다. 루드나야 문화는 환동해문화권 남부 지역인 강원도 동해안의 유적에 확인되고, 청동기시대 시니가이 문화는 강원도 내륙 영서지역 및 남강 유역까지 이 문화가 이동한 정황이 나타났다.

 

현재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오산리 C 지구의 신석기시대 최하층이 형성된 시점은 7000B.P.이다. 뿐만 아니라 최하층 보다 윗 층에서 출토되는 오산리식 토기와 융기문토기는 오산리 C지구의 V~III층, 문암리, 망상동 유적 등에서 6100~5700년 전에 출토된다. 환동해문화권 남과 북에서 모두 기온 상승기에 유적이 형성되었다.

 

6500~6000B.P.동안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 동해안 유적이 연해주와 아무르 강 하류와 관련성이 깊은 기간이다(김재윤 2017). 이때는 기온상승기로 6000~5800B.P.전후가 가장 따뜻했다(표1의 A)인데, 한반도 동해안 유적에서 아무르 강 하류와 연해주의 문화양상이 확인된다(김재윤 2015).

 

3400~2900 B.P.는 동해안의 기온 상승으로 다시 현재의 해수면 보다 올라간 기간으로 시니가이 문화가 연해주 전역에 번성했다. 연해주 해안가에 위치한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유형은 강원도에서 토기가 발견되면서 이 문화가 이동한 흔적이 확연해진다. 물론 서부유형의 토기와 석기도 강원도 및 남강 유역의 평거동 유적의 3-1지구에서 출토되며 시니가이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곡옥형 청동기가 남강유역에서 나왔다(김재윤 2018).

즉 연해주에서 선사시대 문화의 이동이 있는 기간은 6500~6000B.P.과 3400~2900B.P.인데, 현재 보다 따뜻한 시점이며, 기온 상승기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