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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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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눈길끄는 이야기가 없는 이 공간에서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유적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필자가 지난 6월에 답사 다녀온 박물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2019/06/24 - [세계의 박물관/중국의 박물관] -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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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가 앞으로 홍산문화 옥기와 관련해서 많이 자료를 활용할 것인데,

중국 내몽골 통요부근에 있는 하민망합 유적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클릭하시면,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유적 위에 박물관을 지었음으로 그 곳이 유적의 위치도 된다. 구글지도와 포토 기능 너무 좋다....ㅋㅋ, 아래에 붉은 워터마크 표시가 박물관의 입구이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43%C2%B058'45.7%22N+122%C2%B012'59.7%22E/@43.9805481,122.2100397,2115m/data=!3m1!1e3!4m5!3m4!1s0x0:0x0!8m2!3d43.9793694!4d122.2165833

 

 

43°58'45.7"N 122°12'59.7"E

102 Xiang Dao, Keerqinzuoyizhong Qi, Tongliao Shi, Neimenggu Zizhiqu, 중국

www.google.com

이 유적은 5년에 걸쳐서 주거지 78기와 무덤 14기를 발굴했다 한다.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한 분석을 끝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 설명하면

 

유적 전체 분포도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주거지+홍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홍산문화와 비슷한 옥기+그 외 홍산문화와 다른 석기’로 이해된다. 연대는 5500~5000년 전에 해당되며, 홍산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5기(5000~4400년 전, 김재윤 2019)보다 빠르다.

당연히 앞으로의 논점은 이 유적이 홍산문화의 것인지 아닌지. 혹은 홍산문화 자체에 대한 검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유적에는 40호 주거지 안에 사람이 98기가 들어간 채로 발굴되었다.

98기는 시신이 완전히 사지가 굽어진 것이다.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 98기의 시신을 굽혀서 한 주거지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한 건 아닐 것이다.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다.

책에는 전염병이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아래참고문헌). 이 유적에는 여러 집터에 인골이 묻혀 있는데, 40호를 제외하고 6인, 17인, 22인 등이 묻힌 집터도 있다. 무덤에 인골을 집어 넣은 것도 의도적이었고, 집에 불낸 것도 의도적이다. 불난 집은 12채이다. 불난 집 모두가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보고서가 완간 된건 아닌데,, 하단에 소개해 둘 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완전히 보고서 나오기 전에 이런 책이 나온 거 보면....이걸로 끝내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다....)

 

40호 집터 안의 98인이 확인된 정황.
37호에는 22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화재난 주거지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집터의 가장 하단에 남아 있는 것이 집을 지었던 목재의 흔적이다. 

 

32호는 불은 났는데, 인골을 뭍고 불을 낸건 아니다. 무덤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불나면서 죽은 사람은 확인되었다.

 

아마 여러방면에 학자들이 연구하면 재밌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유물과 유적중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보면, 한 가지 더 떠오르는 생각.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무덤과 집은 구분된다(김재윤 2017).

즉 이 단계는 이미 무덤이 마을유적과는 별도로 확인됨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이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요(通遼)는 그간 유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데....

너무 좋은 유적이 중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너무 좋은? 연구하기에 좋은....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香港中文大壑中國考古藝術硏究中心, 2018, 『哈民玉器研究』, 中國書房

김재윤 2016, 5000B.P.이후 평저토기문화권 동부지역의 무덤으로 전용된 주거지에 대한 이해, 한국신석기연구

김재윤 2019,  「홍산문화의 편년에 대한 검토-‘압인之자문토기’를 중심으로」, 『고고학』, 18-2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의 글에서 위와 같은 명칭을 자주 발견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

별로 어렵지 않다.

 

유적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살던 곳이다.

인간이 살다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인간이 살던 곳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을까?

인간은 한 지역에 오래 머물고 싶다. 단, 안정적이라면, 살만하다면, 살기좋다면.

(물론 살기 좋더라도 어떤 이유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유적 즉 인간이 살던 곳은 어떤 한 시간에만 인간이 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크게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 이후로 서울은 항상 서울이었다.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과 현대의 서울은 다르다.

무엇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이 우리나라 서울이 아닌가?

구지 답은 않더라도....알 것이다.

 

서울은 크게는 조선시대 서울, 근대의 서울, 현대의 서울로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 서울도 그 구분은 아주 세세할 수 있다.

 

즉 00하층문화와 00상층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야기 한다.

그럼 왜 명칭을 달리해도 되는데, 헷갈리게 부르냐?

 

아래 그림은 어떤 유적의 토층그림이다.

 

압록강 유역의 신암리 유적 3지점 토층도

 

쉽게 말해서 00 유적의 아래층(하층)(a층)과 00 유적의 윗층(상층)문화(b층)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달리해서 부른 것이다.

 

무엇이?

a층에서 확인된 문화내용 즉 토기, 석기, 이를 이용한 시간대

b층에서 확인된 문화내용 토기, 석기, 이를 이용한 시간대

(좀 더 세밀하게 이야기 하면, a와 b는 지역적 범위도 달라질 수 있는데, 헷갈릴 수 있음으로 좀 더 심도 깊은 내용은 다음으로 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역에서 그 시간대에 알려진 문화가 없는데, 어떤 특정한 유적이 발굴되었고, 그 유적의 층위 문화내용이 다른 경우에 그 특정한 유적의 명칭에 따라서 00하층문화와 00상층문화로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00유적의 하층=00하층문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포스팅 내용 가운데, ‘후와하층문화에 해당하는 유적은 후와유적의 하층과 북우둔 유적의 하층이 해당된다’라는 내용이 될 수 있다.

2019/09/0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요서지역 홍산문화토기 와 한반도비교] - 우하량 1지점과 여성형상물 2

 

우하량 1지점과 여성형상물 2

앞서서 우하량 1지점이 여신묘일 억측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 근거가 된 우하량에서 출토된 얼굴형마스크 및 5지점에서 출토된 여성형상물을 홍산문화와 인접한 지역의 문화와 검토하고 있다. 요서지역에서는 신석..

eastsearoad.tistory.com

 

물론 00문화는 대개의 경우 특정 성격의 유적 집합소를 이야기 한다.

집합체는 여러 유적의 합을 이야기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즉 하나의 유적이 특정 문화로 될 수도 있다.

 위에서 필자의 글을 잘 읽어보면, ‘그 시간대에 알려진 문화가 없는데’라는 말이 있다.

 

즉 그 시간대에 그 지역에서 알려진 문화가 없으면, 어떤 특정한 유적을 중심으로 '00유적에서 알려진 문화'라는 의미의 '00문화'를 쓰기도 한다.

별로 어렵지 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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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고고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인데, 그 대상물이 사람이 적어 놓은 사료가 아닌

사람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이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글을 쓸 때 이성과 감정이 같이 있는 존재여서

절대로 남겨놓은 글에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가치관, 관점, 등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의 어떤 정책을 당시에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어떠한 이유(당리, 당략, 개인의 이익 등등)로 반대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남겨 좋은 보고서 등에는 안좋은 이야기만 잔뜩 적어 놓겠지..

반면에 그 정책을 준비하는 집단은 그걸 함으로써 큰 역사의 부흥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않는가, 시민들에게 필요한가를 판단해서 만들 것이다. 그 또한 기록될 것이다.

 

누가 옳은가는 분명 당대의 시민들도 판단하겠지만, 나중에 역사가들은 전체 역사의 흐름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를 판단하며, 그 정책을 실행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 때 나중에 역사가들이 판단할 때는 정책만든자와 정책반대자의 글을 모두 참고로 할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그들이 적어 놓은 보고서.....이다.

 

이 상황을 조선시대, 고려시대, 남북국시대, 삼국시대로 되돌려 놓아서 생각해 보면

역사의 흐름에 방해가 된 요소와 역사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요소를 찾아 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 역사가는 이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으로 당연히 남겨진 보고서...사료를 참고로 할 것이다.

당연히 남겨진 사료는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사기이다. 고려시대에 쓰여진.......아이러니하게도......당연히 한쪽으로 치우친 자료이고, 초기기사는 부정하는 사람이 만만치 않다.

 

 

반면에 고고학은 옛날 사람이 살고 남겨놓은 흔적이다.

필자가 대학 다닐 90년대 중반만 해도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였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한국에는 지금만큼 발굴이 빈번하지 않아서, 삼국시대 이후 발굴되는 경우가 많치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발굴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발굴을 하는 회사들이 생기게 되었다.(이말은 이때 건설경기가 굉장히 좋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거의 용역발굴이어서, 건축물이나 국가기관 산업물이 생기기 전에 땅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가 발견되면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 되니, 발굴자료가 삼국시대 이후 자료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이다.

필자는 물론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전공이지만,,

고고학에서 또 다른 블루오션은 고려시대 자료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시대도 유물이 많지만,,아직 남들이 많이 하지 않지만...유물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고,

연구가 많이 필요한 시대. 후배들한테도 많이 권해주는데....아직은 그쪽 분야는 무주공산이다.  

 

고고학이 역사학 만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교과서 때문이다.

첫페이지를 열면, 유적만 쫙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간단한 설명.

사실 필자는 영화보다가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교과서 보면 진짜 재미없어 보이는 부분이 삼국시대 이전 내용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그건 인간이 없어서다.

인간은 없고, 유물과 유적만 나열해서이다.

 

이거에 대한 나의 해법은?

 

민족의 형성에 관한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필자는 그 부분은 국경중심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이 없었다. 자연환경에 따라서 인간의 생활권이 있었다.

이 부분이 반드시 교과서에 들어가야 되고,,,,, storytelling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을 비교하다가 딴 소리를 적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다.

그리고 남겨놓은 사람의 감정은 들어가지 않는다.

 

나중에 만약에, 지구에서 핵을 누가 터트려서 사람들이 한동안 우주로 피신해서..지구에서 안살다가,,,,

우주에서 와서 다시 여기에 누가 뭐하고 살았는지 들여다본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그 도자기 쪼가리를 보고 할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만약에 그 때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그들은 무엇을 알아낼까?

위의 예는 매우 극단적이지만.

현재상황에서 역사의 가장 극단적 단절을 예를 든거다.전혀 과거에 대한 information이 부재한 경우를.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옛날에 금관가야사람들이 잘먹고 잘 살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으로  지 마음대로 그 때 상황을 적어서 후대들이 그렇게 믿고 지낼 지는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 처럼. 그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을까?ㅋ 물론 아주 멀 수도 있고,,,후쿠시마를 보면 그렇지 않을 듯도 하고....알 수 없다.)

 

이때 우주에서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사료보다는 남겨진 토기 쪼가리를 모아서 그 때 상황을 유추해 보는게 훨씬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아이러니 하지만 그 상황이 적힌 글이 있다면 그 논리는 더 먹힐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남겨진 것 발굴만 해서도 될일은 아니다. 그걸로 복원을 해야 한다. 과거를.

(중국이 떵떵거리며 소리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역사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왜곡하고 또 왜곡하지만. 유목민이 그 화려한 문화를 두고도 찌그러진 이유는. 글자로 남겨진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또 현대'국가'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빨리 북한이랑 통교되었으면 좋겠다 진심.

 

먼 소리를 썼나 싶은데..z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검색해서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들을 위해서 포스팅 한 장 적다가 갑자기 교과서로....

나도 언젠가는 교과서 한페이지 내 마음대로 적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며

또 한편 적어야 겠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중국에서는 신강의 청동기시대 이전을 「석기시대」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 지역의 세석기문화는 중국 세석기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감숙성과 녕하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토기가 상당히 발달한 문화인데, 만약 신강지역의 세석기가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면, 그 지역 토기양상이 신강지역에서 파악되지 않는 점은 그들 연구의 모순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자국중심의 연구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지역에서 세석기가 늦게까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단순히 석기시대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스티- 나림 유적에서는 160,000여점의 골각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석기시대」로 단순화 할 수 있을까? 중국 신강성과 같은 문화권을 이룬 카자흐스탄, 몽골, 시베리아 학계에서는 신석기시대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 지역은 4500년 전부터 석기양상이나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나 국가 별로로 연구되면서 시대개념에 차이가 있다. 문화권별로 연구되었다면 좀 더 적합한 개념에 접근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가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의 개념을 토기사용이 빈번하지 않는 중앙아시아와 비교하면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및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 등장을 기준으로 한다. 신석기시대는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는 농경을 기본으로 한 ‘신석기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및 극동의 신석기시대를 조사한 오클라드니코프는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이 동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전통적인 신석기시대 개념을 반박하는 주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그림15)등이고,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 개념의 기준이 된 유럽 및 근동 보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빨리 토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그림15).

 

그림15.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재인용)(김재윤 2019)

 

 따라서 토기등장을 기준으로 한 신석기시대 개념은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등과도 다른 동아시아 특유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카자흐스탄 동부, 중국신강, 몽골의 4500년 전 지역은 토기 발생 혹은 토기사용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신강지역이 동북아시아와는 다른 선사문화권임을 증명한다.

우스티-나림유적에서 보이는 유물의 양상은 토기사용이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거나 토기를 대신하는 다른 저장도구 혹은 조리도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선사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시대 및 시기구분, 지역성 등 모든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석기양상이 이 지역의 특징을 대변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본고의 연구대상 시대 이후에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도 주요한 유적의 성격은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례중심의 사회이다. 또한 동아시아보다 일찍 금속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검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세 번에 걸쳐 제국을 형성하지만 근대 중국의 대포에 의해서 제국이 굴복되었다는 점은 곧 무기로 인해서 사회가 변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검은 이 사회를 대변하는 유물 중에 하나는 무기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에서 청동검이 등장하기 이전에 특징적인 유물로서 유목사회의 연속성이 무기에서도 관찰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석검의 분포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연구된 바가 없다. 시베리아의 세로보문화 및 글라스코보문화에서 확인되는 조합식검은 가장 동쪽 분포범위가 요서지역의 소하연문화까지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이 문화의 조합식검도 양면떼기 한 석기를 끼워 넣었다.

 

 따라서 중국 신강의 석기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4500년 전께 동아시아보다는 검의 형태를 갖춘 유물이 일찍 확인되고, 석기와 골각기가 주된 유물이며, 토기가 주요하게 사용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개념과 맞지 않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문화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사회의 개념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재윤(2019)에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홍산문화의 무덤을 필자는 6가지로 구분한다.(앞선 표에서는 숫자로 했으나, 여러생각 끝에 형식명칭을 바꾸었다. 1->가, 2->나, 3->다, 3`->다`, 4->라, 5->마, 6->바).

 

그림.우하량 유적의 무덤형식(김재윤 2019)

 

매장주체부

석관묘의 벽석

석관없음

묘역

형식

그림번호

지상

지하 토광(깊이)

여러 매

한매

토광묘

있음

없음

여러 단

한 단

가로

비스듬

수직

비스듬

 

 

 

 

 

 

 

 

 

1

 

 

 

 

 

 

 

 

 

2,3,4

 

 

 

 

 

 

 

 

 

5,6

 

 

 

 

 

 

 

 

 

7

 

 

 

 

 

 

 

 

 

8

 

 

 

 

 

 

 

9

 

 

 

 

 

 

 

10

표의 그림번호는 그림번호와 일치한다.

 

그 기준은 매장주체부(시신을 안치하는 곳)이 지상인가, 지하인가부터 시작한다

지상(그림1), 지하(그림2~10)를 살피는 경우는 선사시대에는 거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다 지하에 있으니깐.

그러나 우하량 유적에서는 딱 1곳(그림1)이 있다. 그래서 구분한다.

생각해보면, 매장주체부를 지하에 둘 것인거, 지상에 둘 것인가는 엄청난 차이이다.

 

엄청난 차이?

 

1. 축조방법의 차이

무덤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고, 드는 비용도 어마하게 차이가 났을 것이다.

필자는 왜 이런무덤이 한 곳만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매장주체부를 지상에 두는 것과 지하에 두는 것은 차이가 크다. 그래서 당연히 둘은 구분되어야 하고, 무덤의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번 기준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곽대순은 이를 무시하고 ‘중심대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그림 1,2,3,5를 모두 같은 형식(카테고리)안에 묶었다. 이런건 바로 까야 한다.

 

2. 묘광의 단수

매장주체부가 지하로 들어가 있는 건 공통이지만, 한단파는것과 여러 단 파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크다. 역시 노동력과 드는 비용이다.(나는 그런식으로 생각하며, 이런 구분 기준을 마련한다.)

주로 나형식으로 구분된 무덤이 여러 단 판 것이다. 곽대순은 중심대묘라 부르는 것은 그림 3과 같이 양단을 판 것과, 그림 4번과 같이 한쪽 만 판 것을 계단식묘라 하여 구분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카테고리로 보았다. 그림 2는 한쪽만 깊이 팠지만, 곽대순은 중심대묘라고 부르는걸 보아서 본인도 구분 기준이 모호하다.

필자가 그림 3과 그림 2,4를 같이 묶는 이유는 드는비용과 노동력이 한 단파는 것 보단 많이 들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까지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즉 구분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로 잘라서 설명하면 모든 유물과 유구는 그냥 다 다르다고 결론이 난다. 그러면 모든 유물과 유물은 그냥 인간생긴대로 다 다르다는 결론은 좋은 유추법이 아니다.

 

3. 석관의 벽석

무덤을 만들 때 토광을 파고 그 다음은 석관을 넣는다.

석관도 납작한 돌을 쓰는 경우와 덩어리돌을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우하량 유적에서는 보이는 대로 구분은 되지만, 그 구분의 의미가 모호했다. 가령 그림1은 덩어리 돌을 사용했지만, 그림 2, 3과 4는 납작한 돌과 덩어리돌을 섞어서 썼다. 만약에 납작한 돌을 가령 좀 더 노동력이 더 투여된 무덤에서 주로 쓴다면 그림1~4번에 집중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별꺼 없어보이는 그림 8과 같은 무덤에도 납작한 돌은 쓰인다. 또 이차장(뼈만 추려서 넣은 경우)무덤인 그림 7에도 납작한 돌은 사용된다. 그럼 덩어리 돌이 납작한 돌 보다 노동력이 더 투입되는 무덤에서 주로 쓰이는가?도 살펴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그래서 이 유적에서는 납작한돌과 덩어리돌은 그렇게 좋은 구분의 기준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벽석의 구분에는 여러 매를 쓰는 경우와 한 매를 쓰는 경우로 나누었다.

 

4. 석관묘없음

당연히 석관묘 없는 것은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노동력과 석관제작에 드는 비용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유적에서 무덤의 형식이 계급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이 토광묘 때문이다. 토광묘에서도 옥기가 출토되며, 사구통형기라고 했던 그 유물도 출토되기 때문이다. 만약 곽대순이 주장한바 대로 우하량유적에 묻힌 사람들이 홍산문화의 제사장무덤으로서 계급대로 묻혔다면, 토광묘에는 옥기가 없어야 한다. 반대로 석관묘에는 대부분 옥기가 있어야 하지만, 다 형식의 경우는 옥기가 없는 무덤이 허다하다. 가장 큰 그림 1에는 옥기가 하나도 없다.

 

5. 묘역

무덤의 가장자리를 묘역이라고 한다. 이것도 노동력과 축조비용이 듬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묘역도 단순한 석관묘와 토광묘에서 확인된다.

 

6. 일차장과 이차장

만약에 모든 무덤이 신체크기와 비슷한 크기였다면, 이 부분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적에는 이차장 무덤이 몇 기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 부분도 고려되어야 함으로, 일차장과 이차장도 나눌 수 있다.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 석관묘이다. 구체적으로 다형식으로 보이는 석관묘이다. 그래서 다`라고 명명했다. 일차장과 이차장이 아니라면 거의 무덤구조는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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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