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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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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29.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동물투쟁문양은 흑해지역과 알타이 지역 더 넓게는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흑해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것은 포식자(맹수류)가 사슴과 같은 먹이를 뜯어 먹는 구도로 맹수가 뒤에서 공격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다.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이란(앗시리아)에서 수입한 금제 그릇에 염소를 공격하는 사자 혹은 맹수가 찍힌 채 발견된다. 비슷한 문양은 페르세폴리스 벽화 뿐만 아니라 쿨-오바 유적, 표트르 1세의 수집품에서 발견된다. 이 중에서 가장 이른 켈레르메스 유적의 유물이 앗시리아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동물투쟁문양은 이곳에서 발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수집품 동물투쟁문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금제 그릇의 동물투쟁문

 

그런데 표트르 1세의 수집품에는 또 다른 계통의 동물투쟁문양이 있는데 말 그대로 동물이 투쟁하는 문양이다. 포식자와 피포식자를 서로를 물어뜯는 장면이다. 그래서 필자는 두 동물투쟁문양은 서로 다른 생각(관념)을 가진 집단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차이는 표현의 차이로도 나타나는데, 금제 그릇(그림2)에 새겨진 문양은 매우 사실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유물들은 대부분 사실적인 표현이 많다.

 

그림 3. 표트르 1세 수집품 가운데 동물투쟁문 버클장식

 

그림 4. 카탄타 유적의 동물투쟁문

 

두 동물이 투쟁하는 장면은 목제로 된 유물이 알타이 카탄타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동물투쟁문은 몇 개의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 중에서 사슴뿔을 새머리로 장식한 것은 분명히 알타이 계통이라고 생각한다. 파지리크 유적의 미라 문신 가운데 관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의 입에서 다른 동물이 계속 나오는 장면은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 모자에서도 확인된다(그림 6).

 

그림 5.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미라의 문신

 

 

 

그림 6.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의 모자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은 기원전 5세기이고, 켈레르메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이기 때문에 동물투쟁문양은 흑해지역에서 먼저 발생되었고 후에 시베리아에서 생겨났을까?

 

그러기에는 두 동물투쟁문양(그림 2, 그림 3)은 표현의 차이가 크다. 흑해지역의 투쟁문양은 매우 사실적이고 파지리크 유적의 미라 문신, 모자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유기체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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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이제까지 보여드린 스키타이 여신인 거울을 들고 있는 여신인 티파티가 표현된 네모꼴의 장식판은 여성의 베일에 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거울을 들고 있으면서 몸을 돌리고 있는 여성이 있는 긴네모꼴의 장식판은 머리를 장식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착장했을까?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여성장식판은 긴 베일에 장식된 것으로 모두 58기가 출토되었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주요매장자는 여성인데, 그녀는 장식판에 표현된 모습과 흡사하게 치장되어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체르토믈리크 유적(기원전 4세기)에서 나온 장식판

 

그림 2. 무덤에서 나온 장식판, a- 크라스느이 페레콜 22호 쿠르간 2호묘, b-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주요 여성피장자와 출토유물(부분 복원), c-노보셀라흐 쿠르간 4호(기원전 4세기)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여성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고, 베일을 쓰고 있으며 관자놀이에 둥근 장식을 달았고,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을 착장했고 거울도 발견되었다. 베일에 붙은 장식판에 자신과 닮은 여성이 표현된 있었다(그림 1). 앞머리와 베일 사이에는 삼각형 장식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유적에서 출토되기 때문이다(아래포스팅 참고).

 

그림 3.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복원

 

그림 3에서 이용된 머리장식은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카라고데야쉬흐 무덤에서 출토된 장식판 자체가 삼각형이기도 했고, 거기에 표현된 여성도 같은 형식의 머리장식을 하고 있었다.

포스팅(쌍두마차, 1224)

 

그럼 사하노프스키 쿠르간에서 출토된 긴 네모꼴의 장식판(그림 8)은 어떻게 착용한 것일까?

 

미로시나는 이 납작한 장식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미 우리가 본 적이 있는데 아르김파사 가운데 가장 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에서 출토된 여성은 마치 머리를 붕대를 감은 모습처럼 하고 있었다(그림 4). 그리고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출토된 또 다른 장식판에는 베일을 쓴 여성이 있는데, 이 여성의 머리스타일(그림 5)은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의 여성과 거의 비슷하게 끝이 편평하다. 뿐만 아니라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에서 남녀가 등장하는 카펫속에서 여성의 머리장식 모습이 머리끝은 편평하지만 삼각형 장식이 있는 모습이었다(그림 6).

 

그림 4.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의 머리장식(기원전 4세기)

 

 

그림 5. 체르토믈리크 유적(기원전 4세기)에서 출토된 황금장식판

 

그림 6. 알타이 파지리크 5호(기원전 5세기)의 카페트

 

그림 7. 동유럽 스키타이 머리장식 티아라 

 

그림 8. 사흐노프스키 쿠르간(기원전 4세기)

 

그래서 머리끝이 편평하며 모자같이 생긴 장식이 있고 그 아래 이마를 가로질러 띠처럼 두르도록 하는 장식이 필요한데 이때에 사용된 장식판(그림 8) 일 수 있다.

 

그런데 머리끝이 뾰족한 여성모자는 흑해지역에서는 기원전 5~4세기대에 나오지만, 시베리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의 여성에게서 이미 확인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Мирошина 1981 — Мирошина Т.В. Некоторые типы скифских женских головных уборов IV-III веков // СА. №4.(미로시나 1981, 기원전 4~3세기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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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문화의 황금유물 가운데는 금의 중량을 작게 사용한 유물들이 있는데, 문양이 남아 있다. 이는 얇은 금박지를 유기질제로 만들어진 원래 유물의 문양이 눌러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방법은 흑해지역에서는 드물지만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에서는 많이 발견된다. 목제굴레장식에 조각된 문양이 금박에 그대로 찍혀져서 문양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유물은 알타이, 흑해지역 뿐만 아니라 표트르 1세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그림 1). 일부 동물투쟁문양에서 발견된다. 이 유물의 뒷면은 기본틀을 만들고 그 위를 눌러서 만들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표트르 1세 황금유물컬렉션 동물투쟁문양

 

같은 동물투쟁문양 중에서는 뒷면을 무딘 송곳과 같은 도구(체이싱 기법)로 눌러서 앞면을 양각한 유물도 있다(그림2). 이러한 기법은 아무다리야 퇴장유물에서도 확인되는 방법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 황금유물컬렉션 가운데 동물투쟁문양

 

표트르 1세의 황금유물은 루덴코가 분석할 당시(1962)에 거푸집에서 주조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왜냐하면 유물 뒷면에 헝겊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은 주물틀에서 쉽게 꺼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조방법 뿐만 아니라 바스마 기법(러시아말 그대로...바뀔 수 있음(그림 1)과 체이싱 기법(그림 2)이 있다는 사실은 뒤에 밝혀진 것이다.

 

점토로 만든 거푸집에 직물을 깐 흔적이 유물에 남아 있는데, 2 가지 종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림 3, 4). 밀랍으로 물건의 모형을 만들어서 점토거푸집을 만든 후 그 곳에 금속액체를 부어서 주조한 것(그림 4)와 두 방향에서 점토거푸집으로 눌러서 제작한 것이다(그림 3).

점토로 된 거푸집은 남아 있지 않은데, 유물을 만든 후 거푸집을 깨고 유물을 꺼내기 때문이고, 돌로 된 거푸집은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종종발견된다. 더 세밀한 표현은 점토 거푸집이 더 유리하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양면 점토 거푸집에서 제작된 유물

 

그림 4.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밀랍 모형으로 만든 점토 거푸집에서 제작된 유물

 

그림 5 거푸집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 밀랍 모형, 1-첫 번째 밀랍모형, 2- 두 번째 몸을 둥글게 말았음. 3-둥글게 감은 밀랍 모형의 뒷면을 파냄

 

그러나 거푸집을 이용해서 만든 유물이라고 해도 그림 3,4와 같이 모든 유물에 헝겊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참고문헌

 

Р.С. Минасян. Металлообработка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미냐샨. 고대부터 중세까지 금속제작방법)

Руденко С.И. 19621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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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금제 장식은 시베리아(알티이의 파지리크 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보다 훨씬 많은 금을 사용해서 잘남아 있다. 많은 양의 금을 사용해서 동물의 근육을 잘 표현한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장식은 흑해지역 스키타이 황금유물을 잘 표현한 유물로 일컬어진다. 반면에 시베리아 알타이 파지리크 문화의 황금장식판은 금이 주요하지 않고 목제품을 아주 얇은 금박으로 싸서 마무리해서 금제품이 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아르잔-2호의 금제품은 이 편견을 깨는 것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흑해지역 금제품도 매우 얇은 금박지 정도의 금으로 제작된 것이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발견된다. 가이모노바 유적에서 출토된 말의 볼 가리개 장식(그림 1-2)과 비슷한 형태가 볼샤야 침발카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볼사야 침발카 유적(그림 1-1)은 돌고래 형상이지만 비늘이 새의 깃털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서 변형된 돌고래 모양이다. 이 유물과 가이모노바 유적의 유물은 비슷한 형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다르게 제작된 것이다. 침발카 유적의 유물은 금판으로 제작되었고 가이모노보바 유적의 유물은 원판은 유기질제(나무, 뼈로 추정)이고 그 위를 금박(10.37g, 9.62g)으로 눌러서 제작한 것이다. 무게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침발카 유적의 돌고래 표현은 매우 뚜렷한데 그 이유는 볼록하게 융기된 부분과 들어간 음각 부분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인데, 주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돌고래의 눈의 음각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1. 볼사야 침발카 유적과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볼 가리개

 

 

비슷한 방법으로 제작된 유물은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과 체르토믈리크 장식판이다.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은 매우 얇은 금박을 사용해서 둥글게 말 면서 주름이 생겼다(표시된 부분). 그래서 여성의 머리(그림 2-2)와 남성의 머리 부분(그림 2-1)은 체르토믈리크 장식판과 달리 경계선의 표현이 뚜렷하지 않다.

그림 2.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과 체르토믈리크 장식판

 

반면에 금판을 이용한 유물(그림 1-1, 그림 2-1,2)은 금 표면을 따라 무딘 날이 있는 송곳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두드려서 금속을 깍아내는 방법인 체이싱 기법(아래포스팅참고)을 사용해서 문양의 표현이 매우 뚜렷하다.

흑해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경에 목제 조각품을 금박으로 싸는 알타이 제작방법을 이용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흑해지역 및 페르시아 제품으로 생각되는 유물들이 일방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0.12.10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스타일과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으로 파악된다.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사 현미경을 사용해서 분석한 결과이다(Scythians 2017). www.google.com/maps/d/edi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12~319p.

Р.С. Минасян. Металлообработка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미냐샨. 고대부터 중세까지 금속제작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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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 유역의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나온 스키타이 신화 속의 인물인 아르김파사가 골제판에 새겨진 채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사실 매우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아르김파사로 추정되는 인물은 금속제로 만들어지고 실제 사용한 물건(의례용이라고 할 지라도)에 장식되었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은 골제판에 새겨진 것이고 남성형상물과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무덤방 4번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덤방 3번에서 출토된 유물로 아주 소형의 금판으로 제작된 인간형상물은 아르김파사와는 다르다. 접은 날개를 달고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염소 머리를 들고 있는 여성과 한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동물 머리를 쥐고 있으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는 여성이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유물은 가이모노바 유적 외에도 거의 같은 크기와 제작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제브 쿠르간에서 발견되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여성형상물은 제브 쿠르간의 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350~34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유물이 출토된 무덤방 4번도 그 시절에 축조되었거나 혹은 그 이후에 무덤 속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 1번 무덤방은 함께 출토된 그리스 토기의 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365~350년에 만들어진 것에 비하면 무덤방 4번은 늦게 무덤방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층위에서도 확인가능하다.

 

가이모노바 출토의 여성샤먼은 볼샤야 블리즈니차 유적과 쿨 오바 유적의 유물과도 같은 구성이지만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의 유물은 소형이고 세부적인 표현이 다르며, 후자는 한 유물 안에 그려진 사람들로 쉽게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스소노바는 가이모노바 출토 유물은 매우 스키타이 적인 특징으로 만들어져서 완전히 그리스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의 유물은 매우 그리스적이다(아르타모노프 1966). 함께 출토된 남성도 다른 그리스 남성들처럼 거의 전라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칼 춤을 추고 지팡이를 든 여성들은 누구일까?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로 해석하는 연구자와 스키타이 의례로 보는 의견이 있다. 

로스토프체프는 완전히 그리스 적인 해석을 해서 디오니소스 숭배의 한 장면으로 보았다. 랴돌바(1979)는 Bacchanalian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스키타이 인의 운명에 대한 기사(헤로도투스)와 비교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스키타이-그리스 스타일로 보았다.

 

반면에 베스소노바(1983)는 이 여성샤먼들을 다산숭배와 관련된 사람들이라고 추정했다.

라에프스키(1985)는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실제 고고학 자료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Bacchanalian 의식과 연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스키타이 의례로 알려진 '황홀 숭배'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특히 스키타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그리스 신화 인물의 이미지가 스키타이인이 그리스 종교를 차용했다는 증거도 아니고 스키타이 종교를 형성했다는 증거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종교적 압박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전설이나 신화 속의 원본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유적에서 단독으로 발견되는 몇 개의 그리스 유물은 피장자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구입한 우연한 물건일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고 했다.

 쿨 오바 유적의 유물은 외국문화 환경의 영향(네모 틀) 속에서 스키타이 인 수 있다고 보았다. 외형을 갖춘 프레임은 외국문화일 수 있지만 거기에 담긴 컨텐츠는 스키타이 의례 중에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림 1. 쿨 오바 유적의 아이콘

 

참고문헌

Бессонова С. С. Религиозные представления скифов. – К., 1983.(베스소노바 1983, 스키타이의 종교적 믿음)

Раевский Д. С. Модель мира скифской культуры. – М., 2006. (라에프스키 2006 스키타이 문화의 세계, 1985년의 책을 개정한 것임)

Рябова В. А. Женское погребение из кургана Денисова Могила // Памятники древних культур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 К., 1979.(랴도바 1979 데니소바 쿠르간에서 나온 여성 피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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