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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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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12.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다차 유적은 호흘라치 유적과 함께 화려한 유물로 인해서 유명하다. 기원후 1세기경 유적으로 사르마트 문화의 후기에 해당된다. 사실 이 유적의 매장주체부는 발견당시에 이미 도굴당해서 그곳에서는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에 따로 마련된 감실에서 화려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주로 마구와 말 장식과 관련된 유물들이었다.

 

특히 사르마트 문화의 특징적인 기법인 유색돌을 황금으로 된 장식판에 감입해서 만든 것으로 말의 재갈과 팔레라(Phalera)라고 하는 원판형 장식품(그림 1-4, 5, 6)도 여러점 출토되었다. 팔레라는 대부분 말을 장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1. 다차 유적 1호분의 감실 유물 출토

 

팔레라는 사실 스키타이 문화에서부터 출토된다. 기원전 7세기경에는 없었으나,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간간히 보인다. 대부분 금속제로 만들어지다가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다차 유적과 같이 매우 화려하게 변화된다. 다음에 소개할지도 모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팔레라 중에 아주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는 유물도 있다.

 

암튼 팔레라도 다차 유적에서는 팔레라도 여러 점 나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팔찌(그림 1-7)이다. 팔찌는 사슴 4마리로 구성된 것인데, 3부분으로 나누어져서 걸쇠로 연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완전한 형태의 2마리는 마주보고 있도록 만들어졌고, 각각 별도로 만들어졌다. 나머지 한 부분에는 사슴의 머리가 있는 전반부를(몸통의 반통) 반대방향으로 붙여서 만든 것으로 전신으로 만들어진 부분과 걸쇠로 연결되어 있다. 황금으로 제작되었고 터키석과 홍옥수석도 감입되었다.

 

이 팔찌는 그냥 보기에는 잘 만들어진 사르마트 문화의 팔찌이지만 도굴된 무덤에 대한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무덤의 주인공은 최소 여성일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스키타이문화 및 사르마트 문화의 팔찌는 대부분 환상의 동물(그리핀)이 대부분이었으나 사슴을 주요한 주제로 했다는 점은 큰 차이가 있다. 페르시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품(포스팅 참고)을 비교해 볼 수 있다.

 

2020.12.07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기원전 5세기 그리핀 팔찌

 

기원전 5세기 그리핀 팔찌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으로 알려진 유물의 대부분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인간형상물(입체), 팔찌와 목걸이, 반지, 원판형 장식판, 평면금판(인간형상). 토기, 동전 등 1300여점이 알려졌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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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동물장식 팔찌

 

스키타이 동물장식 팔찌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은 현재로는 타지기스탄과 아파카니스탄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강의 우안에 위치해서 타지기스탄 국경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발견된 황금유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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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다차 유적 1호분의 팔찌

 

 

그림 3. 다차 유적 1호분의 팔찌

 

또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왜 감실에서 팔찌가 출토되었을까? 피장자가 착용한 유물은 피장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팔찌와 황금검은 피장자와 떨어진 곳에서 출토되었다. 어쩌면 감실을 만든 이유와도 상통할지 모르겠다.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들이 대거 도굴당하는 것을 사르마트 문화의 시기(기원전 4~기원후1세기)에도 알았다면 전통에 따라서 봉분이 있는 무덤은 만들었지만 뭔가 대책을 세웠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덤에 감실을 만드는 행위가 기원전후에 많이 성행했다. 뭔가 주인공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유물은 별도의 공간에 따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 마지막시기에 나타나고 있었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는 유난히 복잡한 구조로 무덤을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포스팅 참고).

2020.11.08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체르토믈리크 유적] - 흑해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과 그리스

 

흑해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과 그리스

스키타이 문화에서 기원전 4세기는 시베리아 알타이 뿐만 아니라 흑해 지역에서도 자신의 특징이 흐렷해진다. 우랄남부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도 이 유적 보다 늦은 사르마트 문화에서 빈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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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Беспалый 1992 — Беспалый Е.И. Курган I в. н.э. у г. Азова // СА. 1992. №1. С. 103-172.(베스팔르이 1985, 일천년기 아조프해의 쿠르간)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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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서부에 위치한 우랄 남부지역의 탁사이-1 유적의 6호 무덤은 여성이 피장자였다. 남아 있는 인골상태는 좋지 않지만 여성의 모자와 의복에 달렸던 황금 장식 덕분에 여성이 입은 옷을 추정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탁사이1 유적 6호분 여성복원

 

그런데 이 여성의 오른쪽 손목 부위에서는 11개의 주판알 모양의 금구슬과 5개의 펜던트가 발견되었는데, 팔찌로 추정되는 물건이다(그림 2).

펜던트는 고깔모양으로 금판을 돌려 붙이고 동물의 이빨을 끼워서 만든 것이다. 고깔모양의 금판에는 금판을 돌려 붙였으며, 테두리 선을 두르고, 작은 금구슬도 삼각형을 이루며 누금기법으로 붙였다.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팔찌

 

그림 3. 탁사이-1 유적의 팔찌 펜던트

 

그림 4. 탁사이-1 유적의 팔찌 구슬

 

주판알 모양의 금구슬(0.78~0.91cm)은 반구형 2개를 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역시 그 위를 세로 선으로 붙여서 마무리 했다.

 

탁사이-1 유적의 팔찌에는 고깔모자 금판장식에 연결된 늑대송곳니가 포인트다. 팔찌를 착용하면 늑대 송곳니 부분이 눈에 띨 수 밖에 없다. 동물의 이빨을 포인트로 장식하는 유물은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가운데서, 사람이를 매개로 한 귀걸이다.

 

2021.05.0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귀걸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귀걸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세 번에 걸쳐서 차르에게 무덤에서 캐낸 유물을 보냈는데, 2번째 소포에 가장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아주 작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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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이 나온 곳 중에 하나로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아강 사이 지역으로 꼽힌다. 탁사이-1 유적과 멀지 않은 곳(상대적으로)으로, 사람이를 포함한 동물이빨을 금으로 감싸서 장신구로 만드는 전통? 특징?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탁사이-1 유적의 팔찌 펜던트와 표트르 1세의 귀걸이에 ‘이(齒)’가 달린 부분은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보면 주로 반짝이는 보석이 달린다. 금은 이를 뒷받침 하는 역할이다.

 

2400년 전 유물을 보면 우리의 시각은 금으로 된 부분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장신구의 가장 포인트가 되는 부분으로 ‘이’를 이용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유물은 벽사(부적)의 기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 5. 탁사이-1 유적의 6호분 평면도, 1- 무덤의 바닥 평면도, 2-중앙 무덤구덩이 바닥면, 3-6호분 내의 3호 무덤 유물 출토양상(고깔모자 쓴 여성)

 

참고문헌

Лукпанова Я.А. Реконструкция женского костюма из элитного погребения Таксай–1: Взгляд археолога // Поволж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1 (19), 2017. – С. 234–244(룩파노바 2017, 탁사이-1 유적 엘리트 무덤에서 나온 여성의복 복원)

Е.Ф. Королькова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первое российское археологическое собрание. // Основателю Петербурга: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Эрмитаже]. СПб: «Славия». 2003. С. 190-199.(코롤코바 200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러시아의 최초고고학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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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목걸이와 비슷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팔찌는 대부분 흑해지역에선 기원전4~3세기 유물로 알려졌으며 있다. 넓은 판이나, 여러 번 감고 끝에 동물장식을 하는 스타일은 모두 스키타이 시대의 가장 마지막 시기(기원전 3세기) 혹은 그 보다 늦은 시기(늦은 사르마트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다.

 

시르다니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고분은 대부분 20세기 초에 파헤쳐져서 정확하게 연대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뒤에 발굴된 유적과 비교해 볼 때 기원전 5세기 대의 유물 중에서 팔찌들이 발견된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이곳에서 동쪽으로 더 이동하면 현재 카자흐스탄 중부 평원지역에서 발견되는 ‘타스몰린 문화’(기원전 7세기~기원전 3?2?세기의 스키타이 문화권내의 지역문화)에서도 팔찌는 발견된 바 없다.

 

타스몰린 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알타이와 투바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의 유물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여러 나라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아르잔-2호에서 발굴된 유물가운데 유사한 유물이 많다(추구노프 2011). 하지만 타스몰린 문화의 유적에서도 팔찌는 발견되지 않았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중앙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 군은 주로 시르다니야강과 아무다리야 강 사이 지역, 카자흐스탄 중부의 평원, 카자흐스탄 동부 산악지대(산악지대의 북쪽은 알타이와 가까운 쪽, 남쪽은 천산산맥의 일부지역)에 산포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동부 산악지대라고 하지만 비교적 낮은 지역에 무덤이 들어섰다. 모두 평지(혹은 비교적 낮은 구릉)에 높은 봉분이 있어서 눈에 쉽게 뛰었고, 이들의 운명은 흑해지역과 같이 거의 도굴 당했거나, 도굴과 같은 수준으로 조사되었다. >

 

그러나 투바의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5호묘 여성, 13호묘 여성이 팔찌를 차고 매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5호묘 여성은 현대의 체인처럼 금을 꼬아서 만든 팔찌이고 13호묘 여성은 여러 종류의 돌을 구슬로 만들어 만든(그림 2-12~16, 17, 그림 3-8~24) 팔찌이다. 아르잔-2 유적은 기원전 7세기 중반 유적이기 때문에 가장 이른 팔찌라고 볼 수 있다.

 

그림1. 아르잔-2호 5호묘 여성의 팔찌(2)

 

그림 2. 아르잔-2호 13A호묘 여성의 팔찌(12~16), 17 복원품

 

 

그림 2. 아르잔-2호 13B호묘 여성의 팔찌(8~23), 24 복원품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 여성상은 나신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흑해 북안의 남성 석인상은 목걸이와 벨트는 착용했으나 팔찌는 없었다(올호프스키 외 1994). 흑해 지역의 무덤속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에만 팔찌가 나왔다.

 

그래서 스키타이 시대에는 여성만이 팔찌를 착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남성에게 팔찌 착용 전통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청동기시대 문화에서는 청동제 장신구가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남성도 장신구 착용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스키타이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Петренко В.Г. Украшения Скифии VII-III вв. до н.э. М., 1978 // САИ. Вып. Д.4-5. С. 41.(페트렌코 1978,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의 장신구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 Серия: 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т. 10] М.: 1992. 494 с (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스키토-사르마트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내의 아시아 초원지역)

Чугунов, К. В. “Аржан-2: реконструкция этапов функционирования погребально поминального комплекса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его хронологии.” 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ежегодник .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СПб ГУ, 2011, С. 262-335(추구노프 2011, 아르잔-2호: 무덤의 축조과정 복원과 절대연대에 대한 질문)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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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 중 황금으로 된 여성상은 나신임에도 불구하고 팔찌를 착용한 것이 눈에 띄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팔찌는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의 특징적인 유물 중에 하나이다(사르아디니 1983).

표트르 1세의 켈렉션 중에는 목걸이 뿐만 아니라 팔찌도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장소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진 유물 2점은 1909년에 시르다니아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림 1. 1-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1716년 가가린 수집품(루덴코 1962)

 

그림 2.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이는 러시아 최초의 고고학연구기관인 ‘제국고고학위원회’의 활동으로 모은 유물도 있다. 이 기관은 1859년에 공식적으로 창립되었고 1909년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얻은 금제 팔찌 2점을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보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일컬어지는 유물 가운데1716년이 가가린이 모은 수집품, 1734~1735년 밀러가 발굴한 유물 보다 가장 늦게 입수된 유물 중에 하나이다.

 

이 유물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연구소의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시르다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주지사가 보낸 편지(1907년 7월 31일)에 금팔찌와 금으로 된 뱀을 보냈다고 기록되었다. 당시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제국고고학위원회에서는 이 두 유물을 금의 양을 기준으로 150루블을 책정했다. 표트르 1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으나 당시에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을 연구하던 제국고고학 위원회장(스트로가노프 С.Г. Строганов)의 주도로 유물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과 함께 등록되어서 전시되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점은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림 1-1의 ‘팔찌’는 늑대의 머리와 그리핀의 머리가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유물은 팔찌로 보기에는 너무 작지만 팔찌라고 추정하는 이유를 그림 1-2의 유물에서 찾는다. 그림 1-2의 팔찌는 16번 감긴 코일 모양의 팔찌의 가장 끝장식이다(그림 3). 그림 3은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유물로, 16번 감긴 코일에 연결되어 발견되었지만, 보관중에 분리되어 루덴코(1962)(그림 1-2)가 보고한 것이다.

 

그림 3.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1-2와 동일 유물, 동물장식 끝에 땜질한 흔적이 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또 다른 팔찌는 양쪽으로 개페가 가능한 것인데, 경첩으로 연결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호랑이가 장식된 개폐가 가능한 목걸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것인데, 연구자에 따라서 기원전 4세기, 기원전 2세기 등 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미냐예프는 자바이칼 지역(바이칼의 우측)에서 출토되는 흉노 유물(기원전 3세기 이후)과 비교했고, 아르타모노프는 기원전 4세기의 팔찌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시르다니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과 비교하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늑대와 그리핀의 조합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서 벨트 장식(그림 4)에서 발견되는 주제이지만, 그 표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벨트장식과의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이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일천년기 후반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연구(자비투히나 2001)도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곳에서 비철금속이 채굴되었으며 제작장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호랑이와 싸우는 늑대+그리핀)

 

참고문헌

 

М.П.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ые браслеты из местности Дуздак (Туздак) в Средней Азии и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Евразия сквозь века. СПб: 2001. С. 200-203.(자비투히나 200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켈렉션과 중앙아시아 두즈락에서 발견된 황금팔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М.И. Артамонов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1973 // М.: «Искусство». 1973. 280 с (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부)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Сарианиди В.И. : Афганистан: сокровища безымянных царей. М.: ГРВЛ. 1983. (사리아디니 1983, 아프카니스탄 이름없는 차르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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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9. 13:03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은 현재로는 타지기스탄과 아파카니스탄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강의 우안에 위치해서 타지기스탄 국경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발견된 황금유물은 그레코-박트리아, 페르시아, 스키타이 동물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에서는 팔찌가 대량 출토된다. 여러 번 감을 수 있도록 코일모양으로 된 것과 한쪽이 떨어져 있는 스타일이 있는데 모두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것이다.

그 중에서 한쪽이 떨어져 있는 스타일(개방형 팔찌)로 그리핀(사자얼굴+산염소뿔+날개)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페르세폴리스의 스키타이 대표단이 들고 있는 팔찌와 비슷한 유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유물은 개방형 팔찌 중에서도 차이가 있다. 대부분 몸통은 매끈하게 처리하고 끝에만 동물을 장식하는데, 이 유물은 전면에 문양이 표현되었다.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스키타이 팔찌는 2점이 발견되었다. 크기는 동일하지만 무게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 직경 7.9cm, 무게 128. 04g, 무게 129. 34g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스키타이 팔찌, 그림1과 동일

 

 

그림3. 아파다나 궁전에 묘사된 스키타이 대표단

 

팔찌 모양의 거푸집을 이용해서 금속물을 부어 주조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복잡한 눈, 귀과 같은 곳은 먼저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몸통에 미세한 표현을 위해서 표면을 누르는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주조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두 개의 팔찌 크기가 같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무게는 1g 미만으로 차이가 있는데, 주조 한 뒤에 몸통에서 세밀하게 마연하면서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다나 궁전 벽의 스키타이 대표단이 들고 있는 팔찌도 몸통에 음각이 있고 두 동물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아무다리야 퇴장지의 유물을 가장 먼저 연구한 달턴(O.Dalton)(1905)은 이 유물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고 했다. 흑해 쿠반 지역에 있는 카진스코예 유적의 목걸이 장식에서 비슷한 동물장식이 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바르코바(1928)는 이 동물을 곰이라고 해석한 바 있으나, 늑대라는 의견(Scythians 2017)도 있다. 주로 동물의 주둥이가 튀어나온 맹수는 늑대로 보는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을 참고로 한 것 같다.

20세기 초 달턴은 아무다리야 퇴장 유물이 대부분 기원전 4~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타모노프(1973)는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의 코일모양과 개방형 팔찌과 비교해서 기원전 4세기로 생각했다. 2017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스키타이 유물 특별전에서는 기원전 5~4세기 유물로 소개되었다.

 

 

 

<참고문헌>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Objects from Ancient Persia and India Bequeathed to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by Sir Augustus Wollaston Franks. London, 1905.

Borovka G, 1928, Scythian art, London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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