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2021. 10. 5. 09:22 스키타이 동물장식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2호에는 파지리크 유적의 문신에 새겨진 하이브리드 동물 중에서 뿔에 달린 새 장식이 발견되었다. 재갈멈치에는 독수리머리가 변형된 동물장식도 표현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아르잔-2호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도로변에서 무덤이 한 기 더 발견되었다. 이름은 아르잔-타르라그 도로변의 무덤이다. 이미 도굴된 상태였지만 무덤의 구조와 일부 유물은 남아 있었다. 역시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만든 것으로 아르잔-2호의 5호묘와 같은 구조이다(그림 1). 이곳에서는 금박으로 된 얇은 그리핀 장식이 발견되었다. 날개를 펴고 있고 둥근귀가 달렸으며, 눈을 과장되게 표현되었다.

 

그림 1. 아르잔-타르라그 도로 유적의 무덤과 출토된 그리핀, 무덤방의 서쪽에서 도굴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림 2. 아르잔-타르라그 도로 유적 출토 유물

 

아르잔 도로 무덤은 도로 아래에서 발견되었고 출토유물도 거의 변변치 않아서 무덤구조로만 대략적인 연대가 파악가능하다. 무덤을 축조한 방법이 아르잔-5호와 유사하기 때문에 기원전 7세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유적 출토 그리핀도 기원전 7세기 유물(그림 2)이다. 특히 아르잔-2호의 재갈멈치에 표현된 그리핀이 귀가 둥근데 같은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적의 그리핀은 아르잔-2호와 연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기원전 6세기 바샤다르 유적에서 나온 안장장식으로 알려진 그리핀과 관련성이 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그리핀, 금으로 덮여 있었다.

 

시베리아에는 여러 종류의 그리핀이 있는데, 그 중에 독수리가 주인공인 그리핀은 아르잔-2호에서 시작되고 알타이 유적까지도 연결된다.

 

posted by 김재윤23

아르잔-2 유적이 위치한 투바에는 사글리-바쥐, 헴칙-봄 유적을 비롯해서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다. 무덤 수가 1개인 곳부터 20개 이상인 곳 까지 너무 많아서 피곤할 정도이다. 어제 보여드린 골제에 동물장식이 빽빽하게 표현된 유물이 나온 무덤은 사글리-바쥐II유적으로 몽골의 울란곰 유적과 지리적으로 가깝다. 사글리 강의 계곡에서 발견된 스키타이 시대 무덤 유적은 4개(사글리 바쥐 I, II, IV, VI유적)이다.

그 중에서 사글리 바쥐 II유적은 3그룹으로 무덤군이 확인되는데, 알타이 추야강 계곡처럼 한 계곡에 일렬로 무덤이 선 형태가 아니라 몇 개의 무덤이 일렬을 이룬 그룹이 여러 개 존재한다. 울란곰 유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통나무를 결구해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상단을 통나무 덮개로 덮고 무덤구덩이를 흙과 돌로 채웠다. 위로 갈수록 돌이 많아지는데, 지표면에 돌을 두른 경우(그림 3)도 있지만 아닌 경우(그림 1)도 있다. 봉분은 쓰지 않았다. 매장주체부에 사자는 무릎을 굽히고 눞혔고, 머리아래에는 돌베개가 놓여 있었다. 여러 명을 한 무덤 방에 묻었는데, 울란곰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 1. 사글리 바쥐 II유적 13호의 무덤상면

 

그림 2. 사글리 바쥐 II유적 13호의 매장주체부

 

그림 3.사글리 바쥐 II유적 9호의 무덤상면

그림 4. 사글리 바쥐 II유적 9호의 매장주체부

 

기원전 7세기 사글리 바쥐 II유적의 무덤은 아르잔-2호의 5호묘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아르잔-2호는 나무무덤방으로 된 5호묘 외에도 돌널무덤인 무덤과 함께 같은 호석과 봉분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투바의 유적은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타이의 유적과도 차이가 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투바(현재)에 위치한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는 이름하여 ‘왕의 무덤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이름이 아르잔인데, 3000여년 전 무덤이 남아 있는 유적의 이름도 ‘아르잔’이다. 아르잔에는 왕의 무덤이 수십기가 분포한 것으로 그랴즈노프가 보고 했는데, 발굴된 무덤은 2기이다.

 

그림1. 아르잔 1호의 무덤방평면도 

 

아르잔-1호는 전체 평면형태가 원형으로 그 직경은 120m이고, 주변의 호석을 제외하고 무덤방의 너비는 80m가량이다. 모든 무덤방에 사람과 말을 채운 것은 아니다. 특히 말과 인간이 함께 매장된 곳은 중심 매장부를 제외하고 13번, 26a, 26b번방은 확실하다. 31번 방에는 통나무관 2개가 남아 있고, 전체 평면도에는 말이 표시되었지만, 본문에서는 누락되었으나, 청동제 재갈은 출토되었다. 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부의 무덤방에는 사람 10인과 말 6마리가 묻힌 곳이다. 

 

가장 중앙 무덤방에는 주인공을 위한 2차 무덤방이 따로 있고, 그 주변(북, 서, 남)에는 별도의 무덤시설이 따로 있다. 동쪽에는 말이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2차 무덤방(그림 1-1, 그림 2)은 직경 20~25cm의 통나무를 촘촘하게 쌓아올렸는데 높이는 1m 가량이다. 중심 무덤방의 천장은 남아 있지 않았고, 바닥에 직경 20cm의 통나무 17개가 깔려 있었다. 중심 무덤방은 이미 천장이 없어지고, 통나무관의 덮개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도굴 때문에. 매장된 사람의 다리지골 4개만 확인되었는데, 남성은 노인성 뼈 변화가 관찰되었고 여성은 노후의 징후는 없었다.

 

 

 

그림 2. 아르잔 1호의 중심 매장부

 

중심부의 2차 무덤방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차 무덤방 안에는 무덤방 안에 통나무관을 넣은 곳(그림 3-2), 나무방만 있는 곳에도 사람이 묻혔다(그림 3-5). 그 외에 통나무관은 모두 7개이다. 2번 나무방(2.5×1.2m)에는 통나무관(2.2×0.8m)에는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고, 금제행엽, 원통형장식, 터키석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5번 나무방(1×0.5m, 높이 0.35m)(그림 3-5)은 2번 보다 크기가 작다. 나무방에서는 40~60세 남성이 확인되었다.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누운 채였다. (굴신장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통나무관은 대체로 크기가 1~1.4m이다. 4번 통나무관(그림 3-4)에는 18~20세의 남성, 6번(그림 3-6)과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는 60세 가량의 남성, 8번 (그림 3-8)통나무관에서는 40세가 채 안된 남성, 9번(그림 3-9) 통나무관에서도 남성이 묻혔다. 9번 남성은 나이가 기록되지 않았다. 3번 통나무관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 3. 아르잔-1호의 중심 매장부에서 확인된 통나무관, 그림 2의 번호와 일치(필자편집)

 

주인공 2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8인(3번 통나무관을 포함한)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말은 중심 무덤방에서 6마리 분이 출토되었다. 만약에 성별구분이 정확하다면 이 무덤방에는 2차무덤방 내에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3번 통나무관은 확실치 않지만, 주변부가 모두 남성이며, 담비가죽, 청동화살촉 등 다른 통나무관과 같은 유물이 출토됨으로 남성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는 2차 무덤방 안의 여성 1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출토된 유물은 중심 무덤방(그림 2-1)과 이 무덤방 밖의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비가죽과 모직 옷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4번 통나무관에서는 담비가죽과 모직 옷을 제외하고 청동단검, 골제화살촉,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2번 무덤방에서는 금제의 마구장식과 원토형 장식 및 터키석 구슬등이 출토되었다. 중심무덤방에서는 담비가죽, 모직옷조각, 터키석구슬, 마구장식 등이 남아 있었는데, 도굴이 심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통나무관의 크기가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1.4m이다. 5번 무덤방의 길이가 1m가량임으로 비슷한 크기이다. 길이가 1~1.4m정도라면 이곳에 매장된 사람들은 5번 무덤방(그림 3-5)이나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통나무관은 크기가 큰 2번방 안의 통나무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형태이다. 측면의 모양은 사다리꼴을 반대로 해 놓은 모양인데, 지면의 바닥이 통나무관의 입구보다 크다. 관의 머리쪽과 다리쪽 모양이 다르다. 통나무관의 바닥이 둥글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관을 고정하기 위해서 바닥에 지지대를 설치했다. 남아 있는 곳은 6(그림 3-6), 8(그림 3-8), 9번(그림 3-9) 통나무관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스키타이 초기의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우리는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대형의 벽걸이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얼굴이 다른 남녀가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남성의 복장은 알타이 지역의 2500년 전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짧고 달라붙는 상의 자켓과 하의를 착용했지만, 남성이 타고 있는 말은 달랐다. 알타이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흡사한 굴레장식과 고리투스(활과 화살통), 안장 및 덮개 등이 그렇다. 이 벽걸이의 오른쪽 하단에서 확인된 반인반수로 표현된 사람도 얼굴은 말탄 남성과 유사하다. 반인반수, 피닉스, 말탄 남성 뿐만 등은 알타이가 아닌 외부적인 성격으로 생각된다. 의자에 앉은 여성이 들고 있는 꽃 모양 등도 마찬가지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표트르 1세는 17세기 후반부터 스키타이 유물을 수집했고, 황금 유물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흑해북안에서부터 이다. 흑해북안에서 출토된 유물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유물과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켈레르메스 등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다르지만 비슷한 요소’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림 1. 흑해 북안과 쿠반강. 쿠반강은 코카스서 산맥의 북쪽 지역이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필자는 흑해북안의 유물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쿤스트카메라에 같이 소장되기 시작하면서 더 그런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이관하기 이전에는 쿤스트카메라에 소장되었다.

 

지도를 펴서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흑해(현재 우크라이나 남부)는 그리스와 가깝다. 그래서 흑해북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스키타이 민족들이 그리스의 소 도시에서 주문받아서 만들게 되면서 스키타이 요소+그리스 혹은 근동적인 요소가 함께 섞인 유물이 나오게 되었다. 이를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이라고 하는데, 알타이가 발굴되기 이전까지 동물문양장식의 기원을 그리스-이오니아양식에서 찾으려고 했다(파르마콥스키 1914).

 

흑해북쪽과 가까운 곳으로 쿠반강 유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서 이란(페르시아)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의 특징에서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을 찾으려는 연구자도 있었다(로스톱체프 1925). 그는 아주 빈약한 유물로 이란의 청동유물, 쿠반 강, 흑해북안, 중국의 오르도스 지역의 유물을 유사성을 주장했는데, 그가 주장한 바는 20년이 지나서 유물이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1947년 이란의 북쪽 지비예 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이다. 이 유적의 유물은 여러 이란적인 요소+스키타이 동물문양이 묘사되었고, 고다르드는 기원전 9세기 까지 올라간다고 생각되어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과 일정정도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페레보드치코바 1994). 그러나 이 유적은 연대가 지나치게 빠르고 흑해북안의 스키타이문화권 유적인 켈레르메스(기원전 7~6세기)정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대략 기원전 7~6세기대의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남부 투바 아르잔에서 1971~1974년에 걸쳐서 발굴된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옮겨놓게 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9~8세기로 연대가 확정되었고 그 근거는 나무나이테 연대측정법과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것이었다(테르네노시킨 1976, 그랴즈노프 1980). 발굴당시에 연대측정되었고, 2000년대 들어와서 다시 유적들의 연대측정을 실시했으나 같은 결과였다(알렉세프 외 2005). 아르잔 1유적에서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표범장식이 확인되었고, 무덤의 구조물로 쓴 부자재 가운데 사슴이 그려진 돌들이 발견된다. 이름해서 사슴돌이라고 하는데,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의 모습은 알타이 유적의 유물과도 그 모습에서 관련성이 확인된다.

 

 

그림 2. 시베리아 남부, 투바의 아르잔 1, 왼쪽 가장 상단의 그림(1)과 오른쪽 상단(5)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사슴돌이라고 한다.  아르잔 유적의 위치는 포스팅되었다. 사슴돌은 비석과 같은 모습이다. 글자 대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외부와 내부설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스키타이문화권이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에 걸쳐서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었다면, 그 외연인 흑해북안은 그리스와 이란 지역과 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되는 남성의 모습이나 꽃 모양 등이 이유 없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Грязнов М.П. 1980 :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Л.(그랴즈노프 1980, 초기스키타이문화의 차르 무덤, 아르잔)

파르마코프스키 1914, Фармаковский Б.В. 1914, Архаический период в России. — MAP, 1914, №34. (파르마코프스키 1914, 러시아의 고대시대)

로스토프체프, 1925. Ростовцев М.И. Скифия и Боспор. Л., 1925 (로스토프체프 1925, 보스포르 지역의 스키타이)

테레노시키니 1976, Тереножкин. А.И. Киммерийцы. Киев, 1976.(테레노시킨 1976, 킴메리츠 )

알렉세프 외 2005, А.Ю. Алексеев 2005, Евразия в скифскую эпоху: радиоуглеродная и археологическая хронология. СПб: «Теза». 2005(유라시아 스키타이 시대: 탄소연대)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Godard A. Le trésor de Ziwiye (Kurdistan). Haarlem, 195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