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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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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5. 09:22 책소개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권 이전에도 인간형상물은 발견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인 오쿠네보문화에서도 인간형상물이 무덤 속에서 발견된다. 청동기시대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방형 혹은 원형의 호석 안에 석관묘가 여러기 들어가는 무덤이다.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어 발견된다. 골제로 제작되었다.

 

그림 1. 오쿠네보 문화의 인간형상물

 

순동시대의 글라스코보 문화에서도 역시 인간형상물이 발견되는데, 토광묘 속에서 맘모스 상아로 제작된 인간형상물이 토광묘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2. 글라스코보 문화의 인간형상물

 

신석기시대에는 키토이 문화와 세로보 문화에서 각각 발견된다. 토광묘 속에 맘모스 상아로 만든 유물이 발견된다. 인간형상물과 동물이 합체된 모습으로 무덤 속에 부장되었다.

 

그림 3. 세로보 문화의 인간형상물

 

인간형상물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다. 말타와 부레티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맘모스 상아로 제작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구분되었다. 말타 유적은 집자리 15동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의 집에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 원형 주거지의 화덕자리에는 인골과 함께 인간형상물이 발견되어서 집 속의 무덤으로 여겨지며 이곳에서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그림 4. 후기 구석기시대 인간형상물

 

반면에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권의 서부지역에서는 그 이전에 순동시대인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사바티니프카 II유적과 베르나세프카 유적이 있다. 사바티니프카 II유적에서는 주거지 가장 안쪽의 제단 위에서 32점의 토제로 된 여성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베르나세프카 유적에서도 7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고 그 중에 한 곳에서만 소의 두개골과 여성상이 발견되었다. 생활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비트바틴트시유적은 앞의 유적보다는 늦은 연대로 9~10세의 소녀의 무덤이다. 이곳에서 3점의 여성상이 발견되었다.

이 문화에서는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인간형상물의 변화가 보이는데, 전기의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둔부가 강조된 형태에서 서 있는 모습으로 변화된다. 하반신의 여성성이나 이해할 수 없는 얼굴표현은 공통적이다.

 

그림 5.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의 사바티니프카 II 유적의 주거지와 복원도

 

 

그림 6. 사바티니프카 II유적의 인간형상물

 

그림 7. 비트바틴트시 유적의 여성형상물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 이전에는 후기구석기시대 그라베트 문화에서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여러 유적이 있지만 코스텐키 1유적이 가장 대표적인데 주거지 1기에서 43점의 여성형상물이 출토되었다. 모두 여성상이며 맘모스 상아 혹은 이회암으로 제작된다. 눈코입의 표현이 없고 가슴과 엉덩이를 매우 강조한 형태이고, 일부러 신체의 부분을 훼손하는 행위도 있다.

 

그림 8. 후기구석기시대 그라베트 문화의 인간형상물

 

그래서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은 인간형상물을 부장행위는 발견되지만, 부장양상은 다르다. 시베리아에서는 무덤속에서 부장되며 뼈라는 한정적 소재로 여성과 남성 형상물이 발견되지만, 흑해지역에서는 뼈와 돌로 제작되며 특정 집자리에 집중되고, 여성형상물만 제작된다.

 

* 이 내용은 11월 5일 45회 한국고고학대회 발표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www.kras.or.kr

 

참고문헌

 

김재윤, 2021, 「유라시아 초원 선사시대 인간형상물」, 『제 45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문』

김재윤 2021,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교과서 밖의 역사, 진인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에 홍콩에서는 반중국정부에 대한 시위가 한참이다. 거기에서 중국의 신강성에 사는 위구르인들도 함께 동참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위구르인들이 꼭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한다. 그 땅이 중국에 들어간건 청나라 때 건륭제때이다.

 

작년에 중국신강성을 처음 가보았는데, 정말 무시무시한 시골동네였다. 대낮에 장총을 들고다니는 공안들이 거리에 가득차 있었고, 현과 현을 넘어 갈때는 반드시 신분증 검사를 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기사를 보다가 작년에 썼던 아직 공개되지 않는 글이 생각나서 공개하려고 한다.

 

그림 . 신강지역의 신석기유적(1. 삼도령유적, 2. 칠각정유적, 3. 시와보유적, 4.아사탑나유적, 5. 곽가힐나륵유적, 소륵당파아유적)(김재윤 2019)

우연한 기회에 작년에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아이러니 하지만, 그 계기로 필자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흔히들 이야기하는 ‘신석기혁명’에 대한 개념이다.

신석기혁명은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라고 하는 사람의 논의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는 농경의 시작과 토기 발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된 생각이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신석기시대’라는 개념은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했다. 어찌되었던, 두 사람은 유럽과 인접한 근동지역을 근거로 해서 신석기시대 혹은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는 특히 중국동북지방 흔히들 만주, 연해주 및 아무르강, 한반도, 일본에는 ‘토기’를 근거로 신석기시대를 정의한다. 즉 토기가 출토되어야만 신석기시대라고 부를수 있다는 것이다.

 

.  앞서 필자가 학생들에게 신석기혁명에 대한 과제를 내주었다고 했는데(아래 포스팅 참고), 그 그림의 반원모양 지도는 가장 최근의 탄소연대로 살펴본 토기발생지를 묶은 것이다. 유럽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토기는 동북아시아에서 먼저 제작되었다. 그 그림이 실린 논문에는 좀 더 파격적인 제안이 있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 등이고(그림15),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P.Jordan, M. Zvelebil, 2010)

 

2019/06/04 - [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고고학] - 신석기혁명과 과제

 

가장 빠른 토기의 발생지가 어디일지는 시간의 문제이다. 어떻게 되었든 만주지역 혹은 아무르강 하류, 중국 황하강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이점은 시간이 지나야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경은 이미 동아시아에서는 농경을 신석기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즉 신석기시대의 개념으로 토기와 농경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좀 더 이야기 하면 신석기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낼 수 있는 지역이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이다.

 

중국 신강성에서는 형체를 알 수 있는 토기가 확인되는 것이 청동기시대부터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기를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특히 세석인이라고 하는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청동기시대 직전까지 유적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물론 석기시대 내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와 가까운 시기를 구분하기는 하지만 역사서술에서 신석기시대는 없고, 그냥 석기시대라고 한다.

이는 철저하게 동아시아적 관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중국인학자들이 중국 신강성을 바라본 관점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지역의 유물을 인접한 지역과 비교했는데, 단순히 석기시대라는 용어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너무나 편협하게 이 지역이 연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에게도 그들의 신석기시대만의 특징이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신석기시대 개념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신석기시대 특징에는 간석기도 있던데요?, 국사책에요'

하지만 간석기(마제석기)는 이미 오래 전 부터 후기구석기시대에 나오기 시작한다는 걸 다 알고 논문에도 많이 있다.

그 문제는 국사교과서 쓰는 사람의 문제라고 해 두고 싶다. 혹은 틀렸지만 그냥 고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석기시대 개념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참고문헌

 

P.Jordan, M. Zvelebil, 2010, “Ex Oriente Lux: The Prehistory of Hunter-Gather Ceramic Dispersals.” Ceramic before farming: the dispersal of pottery among prehistoric Eurasian hunter-gathers. P.Jordan, M. Zvelebil ed. London: Publications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University College London, pp.31-89.

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블로그를 시작한지도 어느 덧 2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누군가 많이 보지는 않지만

필자의 포스팅에 관심을 가지는 중학생도 있었고,

이미 성년이 된 사람도 있다. 고고학에 관심이 있어 하면서,..여러 가지 필자에게 물어본다.

답이 10일정도 늦어서 많이 미안했다... 네이버 블로그를 안하게 되면서 네이버에 접속조차 잘 안하게 되니 그랬다. 다시 한번 미안하고 그 분이 꼭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한다.

 

지금도 생소한 이 학문을

필자는 예전 포스팅에 적었지만 영화를 보고 알게되었다.

그 떨리던, 함몰되던 기분, 그 짜릿한 기분.

보자마자 내꺼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어린애의 생각은 진짜 비현실적인데..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러시아유학결심할 때랑 꼭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는 그 비현실적인 것이 내꺼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엄마 아빠도 공부잘하는 딸이기를 바랬지만, 내가 무엇할 것인가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고고학과..재밌어보인다. 그런데 가면 꼭 제일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셨다..

내 전공을 두고 크게 다툰적이 없다.나는 늘 커서도 그 점에 감사해한다.

아마 내가 성실하기도 했고, 믿음도 주었을 것이다..꼭 먼가 하겠다 하면 했으니깐.

 

물론 한때 원하던 곳을 못가게 되어서 못 마땅해도 했지만,,,

그때 마침 아빠와 관계도 많이 않좋아서....그게 더 좋게 작용한 것이지

그 때만 해도 지금만큼 취업 운운하던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명박박근혜정부의 교육부를 거친 학생들이다.

그때 특히 교육부는 취업안되는 과는 없애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대학생이 되어도, 생각을 못하는 애들이 많다.

강의 중에 내어준 과제물 피드백을 했는데, 한 학생은 말도 안되게 나의 피드백에 반감을 비친다.. 자기가 최고인데, 니가 먼데 피드백을 하냐는 식의....

걔는 나보다 거의 20살이 어린 학생인데 생각하는 수준은.... 

그 애는 동화책 읽기부터 해야. 글짓기도 안된다.

그러나 그래도 내가 잘못했다고 우기고, 자기는 자기가 받은 피드백이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과제물은 한 장정도만 '자기생각'을 적어오라는 거였다.

난 과제물을 거창한 걸 내지 않고, 자신생각을 적는걸 좋아한다. 거창한 거 내봐야....그냥 결국 남의 연구 편집이 대부분이어서, 시간이 갈수록 필자는 도면 한장 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걸 과제로 준다.

또 그런 과제 보고 탄복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도면 한 장을 보고도 여러 생각이 다르구나 하는...

정말 사람은 다 너무 나 다르구나.

학생에 대한 불평을 적기는 했지만,, 대부분 원만한 사람의 사람머리속은 비슷한데 다 다르다.

민주주의 그 자체다.

그래서 애들을 존중해주려고 하고 그들이 하는 얘기를 맞다고 하고 또 첨삭해준다.

그러나 위에 적은 학생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너무 머릿속에 남는다.스트레스 잘받는 필자에게 학생의 이런 피드백은.....

 

그 과제에 제시된 그림은 아래의 것이다.

아래 그림은 각 지역에서 토기가 발생되는 지역을 최근 자료로 표시한 것이다.

이것과 고든 차일드가 설명한 ‘신석기혁명(1951년)’이라는 개념과 비교해서 자신의 생각을 한 장에 적어오라는 거였다. 물론 한장 보다 많아도 된다. 

신석기혁명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개념이다. 그걸 처음 입에서 말한 사람이 고든차일드라는 고고학자이다.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

참고문헌

P.Jordan, M. Zvelebil. “Ex Oriente Lux: The Prehistory of Hunter-Gather Ceramic Dispersals.” Ceramic before farming: the dispersal of pottery among prehistoric Eurasian hunter-gathers. P.Jordan, M. Zvelebil ed. London: Publications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University College London, 2010. pp.31-8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에는 신석기시대 전 시기를 통틀어 토기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토기는 확인된다.

 

바닥이 뾰족하거나 약간 둥그스럼한 토기가 출토된다.

토기 문양은 망상문(그물문양이라는)이라고 불린다.

망상문이라 불리는 문양이 찍힌 토기는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에 전 시기에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몽골, 카자흐스탄 등지에도 있다.

 

키토이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키토이 유적에서 출토된 사진이다.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그림1). 

  


그림 1. 키토이 유적 출토 토기


그림 2는 샤만카 2 라고 하는 바이칼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다.


그림 2. 샤먄카 2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62호 출토, 

В.И. Базалийский 2012, ПОГРЕБАЛЬНЫЕ КОМПЛЕКСЫ ЭПОХИ ПОЗДНЕГО МЕЗОЛИТА – НЕОЛИТА БАЙКАЛЬСКОЙ СИБИРИ: ТРАДИЦИИ ПОГРЕБЕНИЙ, АБСОЛЮТНЫЙ ВОЗРАСТ

인용)


 역시 망상문이다. 그러나 그물문양을 찍었다기 보다는 나무판에 줄을 감아서 만든 도구로 두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양을 타날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이칼 유역의 망상문은 그냥 그렇게 중앙아시아에도 알려져 있음으로 그 용어를 씌는 것이 혼돈을 막을 수 있다.

 

바이칼 유역에는 토기가 많지 않다. 동아시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토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바이칼 유역 이남, 몽골, 중국신강, 카자흐스탄)과 중간 정도의 특징일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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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코보 문화 1  (0) 2019.05.30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7: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19세기 말에 처음 확인되었고, 19681970, 1978년도에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다. 암각화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의 강가에 세레미체보 마을 보다 약간 하류에 위치한 절벽에 원래 살던 주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개의 지점으로 나누어져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각 지점은 6, 20, 7개의 표현이 그려져 있다. 표현물은 0.3~1cm가량 깊이로 쪼기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몇 개는 음각한 것도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사진1. 우수리강의 세레미체보 유적(위치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의 지도 참고)


세레미체보 유적의 1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2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3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대부분은 사람과 동물과 관련된 주제이다. 가장 많은 것은 얼굴만 표현된 것인데, 단독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쌍을 이루는 것은 1개소(그림 4-5,6) 확인된다.

 

그림 4.  사카치알리안(1~3, 7~9,11,12,14,17~23)과 세레미체보 유적(4~6, 10, 13, 15, 16)의 동심원문눈 얼굴모양


타원형, 달갈형, 하트형, 상단은 타원형, 하단은 사각형이니 것, 원숭이 혹은 거북이 모양의 것도 있다. 눈은 둥글거나 끝이 뾰족한 째진 눈을 표현한 것(그림 5-4,7,8)이 있다


사진2.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 얼굴모양마스크


그림 5.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얼굴모양마스크(1~3, 5,6,9~13: 사카치알리안, 4,7,8-세레미체보 유적)


얼굴내부를 충진했는데, 이마의 주름, 눈 등은 사카치알리안과 유사하다. 일부 표현에서는 얼굴의 외곽선에 방사선의 모양으로 그려놓아서 을 형상화 하였지만(그림 4-4,5), 사카치알리안과 달리 머리 위쪽으로만 표현되었다. 목이 길고 발가락이 세 개 인 것은 백조 혹은 거위인데, 이는 사카치알리안과 다른 시기의 것이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사카치 알리안과 마찬가지로 얼굴형 암각화 중 동심원문(그림 4-4~6, 10, 13, 15,16)을 기반으로 한 것은 6000~5000년 전으로 보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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