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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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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전사들은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비늘’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길이 2~5cm가량의 청동, 철, 뿔 등 다양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특수하게 그을린 소가죽 조끼 위에 작은 ‘비늘’을 붙여서 만드는데, 금속바늘을 이용해서 꿰매서 만들었다. 가죽조끼에 붙는 부분은 편평하고 바깥면은 둥글게 처리된 것이다. 보통 비늘 조각의 2/3정도가 겹쳐지게 꿰맸는데, 3중 혹은 4중으로 겹쳐진 것도 있다.

 

철제로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부터 확인되었고,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수백 개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갑옷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권력자 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활로부터 부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몇 몇 유적에서는 삼익형 화살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갑옷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가슴에 그리스 사람얼굴을 붙이는 것도 유행이었다. 메두사고르곤 이라고 생각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녀와 관련된 신화(상대를 돌로 만드는)를 생각하면, 보호와 관련된 부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갑옷

 

이 유행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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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25. 11:33 스키타이 무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요인인 있었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의 방어무기인 비늘 갑옷으로 말과 기수를 잘 보호했기 때문이라고 아리안(Arrian)이 아나바시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비늘갑옷, 기원전 5~4세기

 

중무장을 한 전사는 말을 타고 다닌 기마병이다. 말은 아마도 유목민들이 이용하는 동물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다목적이었을 것이다. 타고 다니는 용도 뿐만 아니라 우유, 고기, 가죽을 제공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지역에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속도는 농경사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의 기마병과 농경사회의 전사가 싸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에 대한 정보는 다행히 무덤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스키타이(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무덤속에 사람과 말을 함께 부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동물을 숭배했지만(동물장식) 마지막까지도 함께 가는 동물은 말이었다. 아마도 말을 무덤에 넣는 것은 사후세계에도 말이 필요하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장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데, 중요한 발명품이었고,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특히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다양한 안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 2. 기원전 5세기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의 안장과 말

 

 

 

하지만 안장이 없는 말도 무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재갈과 재갈멈치, 굴레장식등은 있지만 안장이 없는 유적도 수를 헤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파지리크 유적과 같이 시신을 미라 처리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이 대표적이다.

 

루덴코는 자신이 발굴한 파지리크 유적의 말도 꼼꼼히 조사했다. 파지리크 유적 아래에는 냉동고와 같은 거대한 얼음층이 형성되어서 말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장이 있는 말들은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루덴코는 기록했다. 안장을 지고 다녔던 말들은 1년 내내 목초지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녔던 말과는 달리 보살핌을 잘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말굽에 기근 고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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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7. 11:05 스키타이 무기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스키타이 궁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궁전의 벽화에 스키타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군인들과 기타 여러민족의 군인들 허리춤에서 발견될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페르시아 궁전의 묘사된 고리투스는 대략 75~100cm 정도로 길지 않다. 흔히들 스키타이 활(the Scythian bow’ 이라고 불리는 활은 나무와 힘줄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 가지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복합 활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에서는 스키티쿠스 아르쿠스(Scythicus arcus)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스키타이 활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고리투스 위로 튀어나온 구부러진 활의 끝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궁전묘사 뿐만 아니라 장식판의 스키타이 궁수들의 활도 끝이 구부러진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1. 페르시아 궁전묘사, 고리투스

 

이 부분은 나무로 된 본체에 힘줄을 묶기 위한 장치인데, 이 부분 때문에 스키타이 활이 위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순한 나무활이나 그냥 나무로 된 활에 힘줄을 뒤로 매단 것과는 달리 스키타이 활은 매우 강력했다. 때문에 스키타이 활을 당기기 위해서는 이 활이 없는 군대와 다른 훈련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비밀이었고, 인접한 지역 지식인들은 이를 적어 놓았다.

 

그림 2. 쿨-오바 유적의 장식판, 스키타이 궁수

 

 

 페르시아 인들이 스키타이 궁수들이 수행한 훈련 때문에 그리스 군대를 막았다는 것을 아르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가 기록한 바 있다. 기원전 401년에 티그리스 강을 건너려는 그리스인들을 막은 것은 페르시아 궁수들이 강 반대편에서 티그리스 강을 향해 활을 쏘면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물자료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15~20개 가량의 화살이 한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 2호에서는 279개의 화살이 한 통에서 발견되었다(루덴코 1953). 바르코바(2013)는 화살 쏘는 실험을 했다. 3분안에 화살 30개를 쏠 수 있고, 15분간 화살을 쏜다면 150개의 화살이 소비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15분간 쏠 수 있는 어깨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스키타이 활은 기원전 4세기 이후 흉노에서 크게 개선되었다. 길이는 1.5m가 조금 넘었고, 당시 사용된 갑옷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나무로 만들던 활을 뼈나 뿔로된 판으로 보강했다. 활의 양쪽 끝에는 2개, 중앙에는 세 개를 덧대었는데, 접착제를 사용하거나 동물의 힘줄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활을 제작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합성 활은 큰 묶음으로 제작되었다(맥윈 1978).

 

활에 이용된 골판은 시베리아 투바의 아물루그 XXXI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기원후 2세기 유적으로 흉노시기의 유적이다.

 

그림 3. 아물루그 XXXI유적의 골판

 

참고문헌

E. McEwen, ‘Nomadic archery: some observations on composite bow design and construction’, Arts of the Eurasian Steppelands, ed. P. Denwood. London, 1978: 18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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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6. 11:15 스키타이 무기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활과 화살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번 포스팅한 바 있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강력한 국가였던 우라루투도 결국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벽에서는 무수히 많은 스키타이 화살이 발견되었다. 앗시리아 및 페르시아에서도 스키타이 고리투스(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복합궁)는 궁전 벽을 장식하는 주요한 주제였다.

 

스키타이 인의 시조인 타르기타우스의 전설에 대해서 헤로도투스가 상기시켰다. 어떤 활이라도 구부릴 수 있고 스스로 띠를 맬 수 있으며, 허리띠를 찰 수 있는 자를 이 땅에 살게 하라는 것이다.

 

페르시아 궁전벽에 남아 있는 스키타이 ‘고리투스’는 헤로도투스가 명명한 용어이지만, 실제로 발견되는 예는 시베리아이다.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무덤인 5호묘에서 남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장식된 활과 화살을 고리투스와 함께 가졌던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시베리아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투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에서는 실제로 발견된 고리투스는 없고, 기원전 4세기 유적인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확인된 고리투스를 감쌌던 껍데기만 남아 있다. 이 유적의 암포라 속에 스키타이 남성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는 장면이 있어 대체적인 모습만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남성들이 고리투스를 찬 장면은 금으로 된 유물 속에서 자주 목격된다. 물론 기원전 7세기경 돌로 된 스키타이 전사들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림 2. 기원전 4세기 체르토므리크 유적 출토 암포라 속 스키타이 남성

 

스키타이 화살촉은 날개가 두 개(양익형) 혹은 세 개(삼익형) 있는 소켓형 화살촉이다.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안쪽으로 있어서 소켓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화살촉은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로부터 흑해지역, 코카서스지역, 그리고 몽골과 더 동쪽에서도 확인된다.

 

러시아연구자들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화살촉은 그 모양과 크기에 따라서 전투 유형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거대한 화살촉은 기병이 사용했다고 보았다. 무거운 화살은 천천히 날라가는데, 말에 타서 쏘게 되면, 화살의 속도를 증가시키고 상대를 더 공격하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또 스키타이 화살촉 가운데는 아름답게 장식된 것들도 시베리아의 아르잔-2호와 파지리크 유적등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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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0.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스키타이 사람들의 복장 가운데 실물자료는 동부지역인 대부분 알타이에서 발견되었고, 서부지역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장식판이나 유물에 남아 있는 그림)로 알 수 있다. 남성들이 매우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 말을 타기 위해서는 튼튼한 바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지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알타이의 남성들은 긴 바지를 입은 채 매장되었지만, 여성들은 긴 치마를 입고 발견되었다. 그럼 여성들은 말을 타지 않았는가?

하지만 형질 인류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른바 '라이더 콤플렉스' 라고 하는 현상이 주로 35세 이상의 남성 골격의 40%, 여성골격의 10%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주로 승마로 인해서 하퇴골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알타이의 스키타이 인골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스테파노바 2015).

  그렇다면 알타이의 여성들도 말을 탔고, 당연히 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또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 여성들은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직접전투에 참가했다.(Herodotus 4.114)  헤로도투스가 살았던 흑해 주변의 유적에서는 그리스 토기나 황금모자에 스키타이 여성이 종종묘사된다. 그들은 짧은 상의를 입고, 바지를 입고 칼과 활을 들고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에서 출토된 칼라프(모자)의 세부

 

 

그림 2. 그리스 토기의 스키타이 궁수(여성이라고 함)

 

아크 알라하-3 유적과 같은 치마가 발견된 중국 신강성의 수바쉬-3 유적에서는 모직으로 된 긴 바지를 여성미라들이 입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아마도 여성들은 TPO에 맞추어서 옷을 입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리크 유적의 2호에서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여성의 모피코트가 있었다(그림 3). 또 아크 알라하-3유적의 여성도 금박지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코트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성미라 주변에 떨어져 있는 금박지가 썩어서 없어진 유기질제 코트의 장식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그림 3.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 여성의 모피코트와 고깔모자

 

파지리크 유적의 2호 모피코트는 이란식 칸디스와 비교된다. 어깨가 매우 좁고 좁은 소매인데, 망토처럼 어깨에 걸쳐서 입는 스타일이다. 화려한 모피코트와 긴 치마는 아마도 생전에 의식용(의례, 축제)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Е.В. Степанова. 2015, Скифские сёдла и последствия верховой езды для лошади и всадника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борник. 40,(스테파노바, 2015. 스키타이 시대 말과 기수를 위한 안장과 그 결과)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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