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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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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1. 17:08 책소개

제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출판되었음을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82





이 책이 올해 2018년 세종도서 학술부문우수도서(구 문화관광부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내용도 포스팅해야 하는데,,,,워낙 전문적인 글이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옮기면, 하나도 모르실 듯해서 그와 관련된 배경의 이야기를 많이 해야 논문이 이해가 될 듯해서요.


그래도 곧 방학이니 힘내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 해안로

앞 서 설명한 고고학 유적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에서 강을 따라서 움직이는 육로와 바다로 가는 해로 즉 2개의 교통로가 있다는 것으로 설명가능하다. 육로를 복원할 수 있는 강은 모두 20개로 남쪽의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700~800km 떨어진 가장 북쪽의 사마르가 강이다. 필자는 지난 35년간 이 지역을 선사시대에서 고대 교통로와 관련된 유적을 연구했다



 

1) 제르칼나야 강 유역


 지형학적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고개를 통하는 것이 편했는데, 이 강은 바다의 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바다와는 직선거리로 약 80km가량이다. 베뉴코바 고개는 청동기시대 남서쪽과 서쪽을 동쪽과 연결하는 길목이었지만 이 시기의 성곽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발해시기에 축조된다. 고개는 아무르 강 유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로서 우수리 강과 지류인 파블로프카(Павловкa, Pavlovka) 강도 이곳과 통한다. 서쪽에서부터 들어오는 도로는 우수리 강 유역의 절벽성인 미스-우보르카(Мыс-Уборка, Mys-Uborka), 시부차르(Сибучар, Sibuchar), 벨쵸프스코예(Бельцовское, Bel'tsovskoye)성곽 등으로 알 수 있다. 이곳은 아무르 강에서 바다로 가는 길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한다.

베뉴코프가 이곳을 잘 이용했다. 그는 길 원주민이 지나다니는 길 뿐만 아니라 중국 사냥꾼 등이 이용하는 길도 잘 알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고개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지점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마을 유적인 오를노예 그네즈도(Орлиное гнездо, Orlinoye gnezdo) 제르칼나야-카리에르(Зеркальная-Карьер, Zerkal'naya-Kar'yer), 우스티노프카(Устиновка, Ustinovka)-4, 수보로보(Суворово, Suvorovo)-3, 4, 6, 8, 퍄느이 클류치(Пьяный Ключ, P'yanyy Klyuch), 우스티-제르칼노예(Усть-Зеркальное, Ust'-Zerkal'noye)-4,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댜코프 1989) 등으로 보아서 선사시대부터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지도.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제르칼나야 강 유역.(4~6: 고르노레첸스코예 1-3성곽, 7, 시바이고우 성곽, 8, 사도브이 클류치, 9-보고폴예, 10제르칼나야 토성, 11 우스티 제르칼나야 , 12-파디 시로카야 성곽)

 좀 더 자세한 지도는 http://2장.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 을 참고. 각 성에 대한 설명도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리고 제르칼나야 도로의 표식이 되는 곳은 절벽산 성인 스칼라 데르수 성곽이다. 이 곳은 청동기시대 부터 마을이 있어왔던 것이고 주변 지역을 감시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적인 입지 탓에 성벽은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제르칼나야 강의 하류는 지류로 인해서 북쪽, 동쪽, 남동쪽으로 나눠진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강의 본류로 동해로 흘러가는데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이 문지 역할을 한다. 남동쪽은 사도비 클류치 강과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와 맞닿아 있다. 아르자마소프카(Арзамасовка, Arzamasovka)강은 동해의 올가(Ольга, Ol'ga) 만으로 흘러간다. 북쪽의 지류는 제르칼나야 강에서 테튜힌(Тетюхин, Tetyukhin)고개로 남아가가서 루드나야 강의 지류인 모나스트르카 강 계곡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도 이용되었던 것인데 지역주민들은 Богопольская тропа(역자 주. 신의 풀밭길)’이라고 명명하였다. 현재는 걸어 다니거나, 수레 , 스키 혹은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이다.

말갈인들의 길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발해와 여진은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수서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7세기 후반의 흑수말갈족에게는 李謹行 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의 아들과 함께 중국과의 물자교류를 위해서 석도(石道)를 만들었는데, 시기는 발해건국이전이라고 되어 있다(보로비요프 1975, 샤프쿠노프 1968). 퉁구스-만주 국가인 발해는 지방 행정구역을 포함해서 자신의 전체 영역에 육로를 만드는 것에 아주 능하였다. 길은 세금을 걷고, 각 지방 간의 상업활동, 국민과 국가의 경계를 통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필요한데 즉 외교적 활동, 정치적 활동, 가까운 국가나 먼 국가 간의 상업 교류나 군사적 목적 등에도 필요하다.

발해의 영역은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2500km로 거의 방형이다. 발해의 북동쪽은 바다, 남동쪽은 통일신라, 서쪽은 거란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역사서에는 발해의 육상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도, 거란도, 영주도, 일본도가 있다고 한다(샤프쿠노프 1968). 


발해~동하국의 제르칼나야 도로는 베뉴코프스코예, 고르노레첸스코예-1~3, 시바이고우, 보고폴, 사도비 클류치, 브루실로프스코예, 제르칼느이 성벽, 파디 시로카야 성벽 등이 관련되었고, 전체가 하나의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다른 지역과 고립되지 않았다. 서쪽과 남서쪽은 우수리 강과 그 지류인 볼샤야 우수르카 강, 파블로프카 강, 쥬라블레프카(Журавлевка, Zhuravlevka)강이 연결되어 베뉴코보 고개를 통과하면 커다란 교통로와 연결된다. 그곳에는 콕샤로프크코예(Кокшаровское, Koksharovskoye)-1~3, 사라토프스코예(Саратовское, Saratovskoye)-1,2, 우보르카-돌린나야(Уборка-долинная, Uborka-dolinnaya), 주라블레프스코예(Журавлевское, Zhuravlevskoye) 오크라인카(Окраинка,Okrainka), 플라호트뉴킨스코예-돌린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Долинное, Plakhotnyukinskoye-Dolin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고르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Горное, Plakhotnyukinskoye-Gornoye)성곽 등이 자리 잡아서 대규모 교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및 동하국과 관련되어 있다.

발해는 대무예(719-737)와 대인수(818-830)가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고 그 곳에 솔빈부를 세웠다. 그런데 각기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 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다른 어떤 장소 보다도 베뉴코보 고개를 통해서 산으로 들어가는 문지 역할을 하는 곳을 통제해야만 했다. 산의 고개마루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성곽이이 들어서게 되었고, 군사적 목적 등 때문에 여러 장소에 성곽 뿐 만 아니라 사원도 축조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아르세네프는 이곳에 사원이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발해시기와 발해 멸망 후 시기에 이 지역에 고르노레첸스코예-1~3, 보고폴예, 사도브이 클류치 성지와 시네고르(Синегорье, Sinegor'ye)-1,2 유적, 우스티노프카 폴랴(Устиновка поля, Ustinovka polya)유적 등 대규모 취락 유적이 존재했다. 보고폴예 성곽에서 출발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테튜힌 고개로 넘어간다. 이 고개를 지나면 루드나야 강 유역의 모나스트르카 강 쪽으로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쪽 방향으로 바다쪽 제르칼나야 항구로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경계벽이 있어서, 이 길을 보호하고 있다.

이 지역이 동하국에 편입되었을 때, 시호테 알린 산맥에서 가장 큰 성지 중에 하나인 시바이고우 성지를 축조되었다. 여진족이 베뉴코보 고개를 넘어서 이곳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길을 만드는데 매우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일종의 아스팔트를 도로에 깔아서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나 바 있다. 이 곳을 여러 해 동안 발굴했는데, 그 곳에서 궁정지 같은 큰 건물과 성벽 사이에 2~3cm 두께로 매우 단단하게 다진 흙을 자갈돌 위에 깐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여진족은 중국과의 전쟁 이후에 북쪽으로 통하는 육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다른 퉁구-만주족(말갈, 만주족, 우데기족, 나나이족)과 마찬가지로 육로를 더 선호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강을 따라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도 아주 능했다. 예를 들면 우데기족은 1950년대 까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발해인들은 육로와 수로 모두를 이용 하였다. 여진족은 여름에는 배를 타고 이동하고, 겨울에는 얼어 붙은 강위를 걸어서 이동하였다. 여진족에게는 두 수로 사이를 마차를 이용해서 육로로 이동하는 방법이 잘 알려 져 있다. 강 상류에서는 말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힘든 곳에서는 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아 있는데 마차 바퀴의 뚜껑 등이 그러하다. 수레 이용에 대한 흔적은 퉁구-만주족의 언어에도 남아 있는데, 몽골어와 여진어의 마차는 거의 유사하다. 두 수로를 이동하는 것은 큰 수레를 이용할 수 있고, 강을 빨리 건널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도로에 25km 사이마다 역참을 둔다. 하지만 동하국의 여진족은 새로운 영역에서 성곽 축조를 서둘러야 해서 이런 중국의 방법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곽 안의 큰 건물에서는 문에 이르기 까지 대로는 반드시 건설했다. 물론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서 문의 위치는 바뀔 수 있는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교통로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다 통하고 있다. 서쪽에서는 베뉴코바 고개를 통해서 우수리강 유역과 통하는 길이고, 북쪽에서는 테튜힌 고개를 통한 길, 남쪽은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를 통하는 것이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항구를 통해서 바다로 가는 곳과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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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유형. 평지성


이 성지는 강 주변에 설치되는데, 그 중에서도 높고 편평한 범람원으로 홍수의 영향이 받지 않는 곳이 선택된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평지성은 모두 12개로 브루실로프스코예, 사도비 클류치, 보고폴예, 에스톤카, 프리스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체렘샤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돌리노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 등이다.

평지성은 농경에도 편한 지역으로 물과 접근성이 좋은 중류역이나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진다. 1) 방형(장방형), 2) 다각형, 3) 궁형(개방형)

 

(1) 1형식. 방형 성지

현존하는 평면형태 방형의 평지성은 브루실로프스코예 http://브루실로프카 성곽 유적 , 사도브이 클류치, 에스톤카http://루드나야 강 유역: 에스톤카 발해성곽, 드지기토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말라야 케마, 체렘샤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지 등 모두 9기이다.



. 평면형태. 단순하고, 내성과 보루가 없다. 예외적으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에는 아주 작은 내성이 있다. 성지의 내부는 아주 편평하고, 장대가 없다. 성내부에서 소토가 확인되는 유적은 브루실로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에스톤카, 체렘샤니 유적 등이다.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이 곳에는 성벽을 축조할 때 사용된 흙을 채취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돌로 만들어진 우물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유적은 에스톤카, 브루실로프스코예 유적 등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생활구역과 생산구역으로 나누어진다.

 

. 성벽의 축조방법. 성벽은 치가 없는 단순구조로, 성의 크기를 계측한 후 모서리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였는데, 성벽의 외벽은 돌을 경사지게 해서 쌓아올렸다. 이렇게 성벽을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것은 성의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 평면특징. 방형의 성에서는 문지가 2~4기 확인되는 것이 보통인데, 드물지만 1개인 것도 있다. 문지는 대개 단순한데, 2~5m의 성벽을 절개해서 만든다. 여기에 다른 기술을 더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의 높이는 산성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높지 않고 1~2~2.5m에서 가량이다.

평면형태 방형의 성지는 성벽 외측에 해자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보로비요프가 언급했듯이 2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성으로부터 물이 빠져나가게 하는 일종의 하수도 역할과 다른 하나는 방어적인 요소이다(보로비요프 1983).

가장 큰 방형 평지성은 디지기토프스코예 성으로 57,600, 다음은 브루실로프스코예 성곽으로 28,900이다. 나머지 성곽의 평면적은 10,000를 넘지 않는다.

 

. 용도. 평지에 위치한 성지는 높지 않은 성벽과, 단순한 성문, 치와 집석 시설의 부재, 화재나 다른 파손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서 평온한 시기에 평지의 방형성지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성들은 사냥, 어업 등 퉁구스-만주족의 생업활동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베뉴코프 1960). 성곽에서 생활구역을 발굴한 결과, 그 곳에서 오랜기간 동안 정주한 흔적이 있다. 이는 방형 성지가 취락을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 문화의 특징과 연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현재는 방형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되는데, 연질토기, 녹로제 토기, 손으로 만든 후 녹로위에서 완성되는 토기로 구분된다. 연질토기는 원래 원주민의 전통으로 모든 유적에서 말갈토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녹로제 토기는 발해형식의 토기로써, 방형 성지가 발해국가와 관계가 많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유적에서 발해토기가 출토하게 된 것은 발해와 말갈 간의 경제교류가 아주 깊었거나 혹은 이 지역에 발해인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녹로제 토기는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필자가 예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발해국의 남쪽인 연해주에서 보이는 이 토기가 아무르강 하류 여진족 문화의 일부와 유사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토기를 녹로에 놓고 성형하는 기술과 기형 등은 중국의 기술이다. 그래서 평지성 중에 방형 성지도 연해주 동북쪽에 위치한 성곽은 말갈문화의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가 발해(698~9226), 여진(115~1234), 동하국(1217~1234)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볼 수 있다. 방형 평지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체적 양상으로 보아서 8~10세기 발해 국가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출토된 말갈토기 옹형 토기의 기형은 9~10세기에 유행한 것이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는 그에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댜코바 1983).

 

. 기원. 방형 평지성은 아주 잘 지어진 방어시설로서 기원전 10세기부터 10세기 까지 이 지역에는 없었던 건축물이다. 방어시설이라도 단순히 곶 위에 짓는 정도이다. 바둑판 같이 반듯한 평지성은 고대부터 중국의 기술로 정확한 계측을 통해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주로 방형성은 궁정 등을 짓는데 이용되었다(이보츠키나 2003). 러시아 극동에서 방형성지는 발해(698~926)이후에야 볼 수 있는 건물지이다. 발해는 연해주로 바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듯이, 중국 당나라의 행정을 모방해서 국가의 기초를 9세기 초반에 만들었고, 방형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오랑캐의 땅인 연해주도 하나의 현으로 들어가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치가 없는 방형의 평지성에서는 확인되는 고고유물 가운데 무기가 지표에서도 수습되지 않고, 토층에서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연해주의 북동 지역에 발해는 처음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점을 반증한다. 성은 그 지역과 주민의 관할하는 하나의 관청으로써 역할이었다. 성의 지위는 그 규모와도 일치하는데,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는 동북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성곽은 인접한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사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문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은 동해까지 이어져서 드지기트 항구까지 다다르는 길을 통제한다. 또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의 위상은 내성의 조재로도 알 수 있다. 고고학유물 중에서 확인되는 말갈토기의 존재는 이 평지성이 지역민인 말갈 군인들이 관장하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데, 아직까지 외래문화(발해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에 발해 토기가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 새로운 고고문화를 규명할 수 있다. 방형의 평지성과 녹로제 토기 등은 중국 전통인데, 중요한 것은 성벽의 축조방법이다. 현재까지 러시아의 연구자들은 판축 기법이 예외적으로 연해주에서는 여진족과 관련된 12~1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평지의 방형성이 발해의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성벽축조에서는 위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말갈족에게는 너무 이른 기술이었는데, 아마도 중국 기술자에 의해서 평지성이 계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간접적으로 발해의 국가 영역에 들어간 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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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소볼레프카 강 유역


소볼레프카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우스티-소볼레프카(Усть-Соболевка )마을 주변의 동해로 떨어진다. 강의 길이는 68km, 지류는 상류에 있는데, 좌안에 레바야 소볼레프카(Левая-Соболевка) 강, 우안에는 수하야-소볼레프카(Сухая- Соболевка) 강이 있으며, 산에서부터 흘러 내린다. 산의 높이는 1000m가량이고, 중류역은 500~700m, 하류역은 최대 400m이다. 해안가와 가까운 곳에는 경사면은 가파르지 않고, 낮은 경사면을 이룬다. 산에서 강과 시내가 많이 흘러서 골짜기가 많이 형성되었다. 이 곳에서는 암벽과 암반이 무너진 곳이 확인된다. 강 유역에는 침엽수가 95%가량으로 덮여 있다. 강의 하류는 2km가량으로 넓고, 농사를 짓기에 알맞다(그림 114).



그림 114. 소볼레프카 강 유역(50, 우스티 소볼레프카 성곽)

 


1) 우스티-소볼레프카 성곽


우스티-소볼레프프카 마을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곳으로 소볼레프카 항구의 북쪽 해안단구에 위치한다(사진 62, 그림 115, 116, 12).

1908~1909년도 아르세네프가 유적의 평면도를 처음 작성하였다(그림 115). 이 성은 해안가의 단구대 위에 축조되었고, 장축 방향은 남북방향으로, 소볼레프스카 강의 지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림 115. 우스티- 소볼레프카 성곽 평면도



성의 서쪽에는 석벽과 해자가 3줄 축조되어 있고, 동쪽에는 1열의 석벽과 바깥쪽으로 깊지 않은 구덩이가 석벽을 따라있다. 석벽의 높이는 1m, 해자의 깊이는 0.5m이다. 시굴 구덩이에서는 깊이 0.5m 지점에서 연질토기와 寛永명 동전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연호로 1624년부터 19세기 까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에 타타르니코바가 이 성곽을 발굴하였다. 말갈토기 가운데서 트로이츠코예 형식의 토기가 확인되었다.

2001년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이 성을 지표조사 하였는데, 개발로 인해서 성은 10~15정도만 남아 있었고 파손이 심각했다(그림 116).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 이 성은 말갈문화 중에서도 트로이츠코예 그룹과 관련되어 있고 10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그림 116. 시굴 구덩이의 토층도

 

*이 성은 평지성으로 평면형태는 개방형으로, 성벽은 부채꼴 모양이다. 내부는 편평하고, 내성과 보루가 없다. 성에는 치와 같은 시설물이 없고, 성벽은 돌로 쌓아졌고, 용도는 취락을 보호하는 것으로 말갈문화의 사람들이 축조한 것으로 10세기 무렵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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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라야 카리마 성곽


암구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6.5km 떨어진 곳으로 동해쪽으로 향하는 절벽 위에 위치한다.

1908~1909년에 아르세네프가 여행기에서 이곳의 성에 대해서 적고 있다. 이 곳의 입지는 암구 마을과 소욘 마을 사이에 위치하는데, 해안과 가까운 곳에 성이 위치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그림 105, 그림 106).

 

그림105. 1908~1909년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말라야 카리마 성곽 평면도


 1992년 크바신은 유적을 조사했는데, 평면형태가 오각형(그림 106)이다. 남쪽 성벽은 돌과 흙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에서는 6m에 달한다. 북쪽 성벽은 2m너비의 절개면에 의해서 2 부분으로 나눠진다. 남쪽 성벽은 4m 너비의 문지로 성벽이 30m20m로 나누어진다. 성벽의 북쪽에는 10m 너비로 절개되었는데, 남은 성벽은 각각 80m75m이다. 북동쪽의 성벽은 토벽으로 문지의 너비는 10m가량이다. 북동쪽 성벽은 흙과 돌로 축조되었는데, 높이는 3m이다. 북서쪽과 남서쪽의 접하는 부분에는 정상부가 편평하게 처리되고 둥글게 튀어 나온 부분이 있다. 성의 평면크기는 1000이다.



 그림 106. 1992년 크바신이 육안으로 작성한 말라야 카리마 성곽 평면도



2001년에 아무르-연해주 고고학 탐사대가 조사하였는데, 말라야 카리마 성곽은 나지막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고, 성벽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성벽은 이 곶의 정상부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서만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석성으로 외벽은 비스듬하게 경사가 있다. 성벽중의 일부 지역에는 성벽과는 다른 돌을 사용했는데, 문지로 추정된다. 성의 안쪽에서 잰 내벽은 0.3m가량이다. 남쪽은 절벽면과 거의 맞닿아 있고, 그 성벽 아래로 도로가 지난다.

성은 전체적으로 자형으로 개방형이다. 2곳에서 3m가량 절개된 문지가 확인된다. 유물은 확인된 바가 없다.

 

* 말라야 카리마 성곽은 산지성으로 평면형태는 자형이고, 성안의 내부는 편평하고, 내성과 보루 등은 없다. 평면적은 소형(1000)이고, 성벽의 축조시설로 치는 확인되지 않고, 문지가 2개 확인된다. 성의 용도는 방어용으로 동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해안가의 도로 등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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