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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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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로 사용되어 온 추야강의 지류인 유스티드 강과 울란디르크 강 유역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추야강의 또 다른 지류인 바르부루가지 강에서도 흥미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I유적에서는 모두 30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된다. 남쪽에는 1~18호, 북쪽에는 21~30호가 있다. 두 그룹 사이로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수로가 지나가는데, 붕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본 무덤과는 약간 다른 구조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25호 무덤에는 남성미라 1구가 발견되었다. 미라로 처리한 부위는 두개골, 손, 발로 피부상태가 좋았다. 그 외의 부위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은 돌판을 무덤으로 쓴 돌널무덤(석관묘)이다. 석관묘의 바닥에는 4개의 나무판을 깔았고 석판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덮었다. 무덤 구덩이는 보통 단을 만들지 않지만 말을 부장하는 구덩이의 북쪽에 단을 만들고 말을 넣어서 석관묘의 높이와 맞추었다. 무덤의 깊이는 120cm, 크기는 290×240×205cm이다. 이 무덤 상부의 돌을 덮은 범위는 (적석) 6m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의 평면도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상부와 단면도

 

 

앞에서 유스티드 XII유적과 울란디르크 I유적에서도 돌널무덤이 있었으나, 무덤바닥에 나무를 깔고 여러 겹으로 덮는 것, 무덤구덩이에 단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미라의 머리 아래에는 돌침(돌베개)가 사용되었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유적은 지난 겨울~봄에 살펴본 아크 알라하-3유적,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파지릭 유적 2호, 5호 등이다. 2600~2500년 전 유적으로 기원전 6~5세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는 2600~2500년 전  미라 처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부장된 유물이나 무덤 등도  차이가 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만들어진 곳으로, 미라가 나온 25호는 기원전 4세기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쿠바레프 1992).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라로 전신의 관절을 끊지 않았고, 그 내부를 풀과 동물의 털로 채워넣었다. 반면에 바르부르가지I유적의 25호 미라는 사실 흉내만 낸 미라이다. 머리, 팔, 다리만 미라가 되도록 했고 몸통은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전성기인 2600~2500년 전 이후의 미라의 존재와 그 상태 등이 늘 궁금했는데,,약간은 해결된 듯 하다.

 

 통나무관에 어린아이를 묻는 장법이나 미라를 만드는 장법 등은 모두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2400년 전 작은 무덤에 묻힌 사람에게도 그런 것을 누군가의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미라를 대신해서 사람을 닮은 인형을 무덤 속에 묻어 두었다. 청동기시대(오쿠네보 문화), 순동시대(글라스코보 문화), 신석기시대(키토이문화, 세로보문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모두 발견된다. 물론 시대별로 생김새와 재질은 차이가 있다. 

 죽은 자와 함께 넣은 미니어쳐 혹은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염원이 담긴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그리며 넣은 ‘재생’, ‘부활’에 가까울 것 같다. 설마 노잣돈의 의미로 넣은 것은 아닐테니...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계곡의 유적과 같이 화려한 무덤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를 담아서 무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바샤다르 무덤 1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구덩이가 깊지 않고 얼음층이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아서 미라가 잘 보존되지 않아서 미라의 피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두개골 뒤를 잘라내고 뇌를 꺼낸 흔적이 남아 있고, 뼈의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일종의 방부제를 주입했을 것으로 본다. 바샤다르 무덤 2호는 여성미라는 도굴꾼이 갈기갈기 찢어서 무덤방 여러 곳곳에 널려 있었고, 남성은 통째로 꺼내간 상황이어서 어떤 미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샤다르 유적 보다도 100년 가량 늦은 파지릭 유적의 2호분과 5호분에서도 통나무관 안에 남녀의 미라가 함께 매장되었다. 파지릭 1호분도 도굴로 인해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말 10마리나 매장된 것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로 파지릭 유적 보다 1000mrfid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도 미라가 발견되었다. 전자는 여성, 후자는 남성이 각각 단독으로 묻혔다.

  아시다시피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현대인들은 얼음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살아서는 샤먼이었다고 생각되는 여성의 무덤이다. 여성단독 무덤이 잘 없는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에서 매우 특이한 혹은 특별한 유적이다.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과 아주 가까운 투엑타 강(현재 카툰 강)의 계곡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 1호분은 직경이 68m인 초대형 무덤이다. 누구의 무덤일까?

 

40~45세의 남성 단독무덤이다. 키가 178cm나 되는데, 미라로 처리되지 않았다(그림 1).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남성 두개골(미라 아님)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북쪽에 붙어 있는 2호분은 35세 가량의 여성 무덤이다. 이 여성은 키가 144cm정도로 작은 키이다. 투엑타 유적의 1호분과 2호분의 두개골로 살펴보면 유로포이드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무덤(파지릭,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에서 인종구분은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이다(1947년, 1950년, 1954년의 발굴해서 1953년과 1960년에 연구결과를 내어놓았다.). 두개골 뿐만 아니라 중요한 판단 기준 중에 하나가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 색이다.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3호분과 5호분 여성, 2호분 여성은 유로포이드의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색이었다. 머리카락은 매우 가늘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어두운 갈색이었다. 그런데 파지릭 2호분과 5호분의 남성은 몽골로이드이다.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몽골로이드와 유로포이드의 혼합 매장은 결혼에 의한 것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 유입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어떤 그룹의 리더가 그들을 도와줄 알타이의 리더를 찾아서 가족 및 친척이 알타이로 숨어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지릭 유적은 현재 살펴보고 있는 투엑타 유적 보다 100년 정도 늦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미라로 시신을 처리했으나 동시대의 투엑타 유적은 미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투엑타 1호분이 가장 알타이 전체에서 가장 큰 무덤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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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는 높은 곳에 깊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말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식이 행해졌다. 2600년 전 이전에도 장례식 이후에 축조된 결과물은 다르지만 성대한 장례식은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파지릭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파지릭문화를 밝혀 낸 루덴코는 자신이 실제로 참석한 카자흐스탄 한 부족의 장례식 기념행사를 적어놓았다. 자신이 발굴한 유적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발트해부터 알타이 북동부 지역까지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을 가능성을 비추었다(루덴코 1960).

 

1927년 루덴코는 카자흐스탄 흑해로 흘러가는 이르티시 강 주변에 있는 한 부족의 장례식을 경험했다. 3월 25일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같은해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30개의 펠트 마차(펠트마차로 번역이 되지만 문맥 상 일종의 텐트와 함께 겸비된 것으로 일종의 캠핑카?정도로 이해가 된다)가 줄을 있었고, 그 중 5개는 죽은 이의 아들을 위한 것이다. 손님을 위한 것도 15개나 준비되었고 그 중에는 여성을 위한 것도 있다. 손님을 위한 음식은 4마리의 말, 6마리의 황소, 25마리의 숫양이 준비되었고, 2~3개의 큰 용기에 쿠미즈(양 지방 유제품)로 가득채워서 준비했다. 쿠미즈는 선반에 담겨서 옮겼는데, 아주 비싼 카펫으로 장식된 낙타가 행렬을 이끌었다. 낙타뒤에는 여자, 그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손님들도 양과 말을 장례를 위해서 가져왔는데 손님들이 가져온 30마리의 숫양 중에 25마리를 죽여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낮에는 차와 쿠미즈가 간식으로 아침과 저녁에는 고기가 손님들에게 제공되었다. 음식은 특별히 지정된 노지(화덕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고기는 신선하게 하기위해서 같은 장소에서 죽이고 같은 장소에서 음식을 했다. 음식은 2~4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실려서 손님이 끌고 온 마차로 배달되었다.

루덴코가 본 장례식에는 부족의 허락이 없어서 말 경주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말 경주대회가 장례식에 있었던 것을 그는 나이만족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1896년에 사망한 나이만족이 경험한 장례식은 매우 성대한 것이었다. 3일 동안 장례식이 치러 졌는데, 아주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모였는데, 심지어 해외에서도 왔다. 손님을 위한 텐트(마차)가 300개나 설치되었고, 손님을 위해서 각 마차에 한 사람, 말 한 마리가 배정되었다. 손님들은 쿠미즈(유제품)와 빵반죽을 직접가져왔다.

말 경주는 장례식 전날부터 첫 번째 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장례식 음식 준비를 위해서 음식하기 위한 구덩이를 판 날이고, 말 경주가 열린다.  말 경주는 첫 번째와 네번 째 날 열렸다.  네 번째 경주는 장례식 마지막 날 열리는 데 25마일을 달리는 것이었다. 최대 250여마리의 말이 참가했고 그 중에 20마리에게 상이 수여되었다. 1등 말은 말2마리, 낙타1마리와 은을 받았고 나머지 말은 말 1마리를 받았다.

세 번째 대회는 낙타경주이다. 50마리의 낙타가 경주해서 10개의 상이 수여되었다.

 

이러한 성대하고 체계적인 음식문화를 동반한 혼잡한 기념은 부자와 귀족 사이에서 가능했다. 다양한 대회와 음식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일수 있었고 거대한 토루 등의 건설은 짧은 기간에 가능했다.

 

비슷한 광경이 19세기말~20세기 초 뿐만 아니라 2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루덴코는 추정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6m의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루덴코가 목격한 장례식에서도 3월에 죽은 이를 9월에 묻었는데, 이는 2600년 전 파지릭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장례식은 봄과 가을에 치러진다고 했다. 20세기 초에는 그 사이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2600년 전에는 죽고 나서 묻기 전의  몇 달동안 시신은 미라로 처리해서 보관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에는 남성시신은 도둑맞았고 여성시신은 훼손이 심해서 죽은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1호분에는 부패가 심해서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미라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남아 있었다. 미라는 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 이 인골은 두개골과 여러 뼈에 미라처리 흔적만이 남아 있다. 두개골에 구멍을 파고 뇌를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1).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미라도 두개골에 그림 1과 같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바샤다르 1호분의 남성미라는 좀 다른데, 경추(그림 2-1), 척추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으로 방부제를 투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12번째 흉추(그림 2-2), 나머지 흉추(그림 2-3,4)에 청공되었다. 요추에도 뚫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멍이 잘 남아 있지 않다. 흉추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복강(배)은 내장을 추출하기 위해서 개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뇌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척추

 

미라처리의 관건은 뇌를 제거하고 피부는 남기고 그 밑의 지방과 근육을 제거하는 것인데, 뼈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근육이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의 남성도 미라이다. 아시다시피,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무덤구덩이가 깊지 않았고, 얼음층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 미라의 피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알타이의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는 남녀가 각각 다른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통나무관 1기는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여성의 관으로 추정된다. 여성미라는 훼손된 상태로 무덤방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이 관에는 앞서 살펴본 남성관과는 달리 동물문양이 거의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통나무관 덮개 조각에 나선문양(그림1)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통나무관 자체에는 동물문양이 장식되지 않았다. 이 통나무관에도 남성통나무관과 마찬가지로 청동못이 박혔던 구멍이 20cm간격으로 있었다. 청동못의 머리는 3cm가량으로 13점이 무덤방 바닥에서 확인되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통나무관(여성)의 덮개장식

 

그런데 동물문양장식이 새겨진 통나무관은 어떻게 남성의 관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무덤방 안에서는 남성시신의 흔적 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통나무관 안에서 남성신발 1짝(그림 2)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이 미라로 처리되었기에 남성도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출토된 남성용 신발

 

신발은 소개해 드린 펠트로 만든 스타킹과는 다르다. 비슷한 유물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나왔는데, 여성의 것이었다. 루덴코(1953)는 파지릭 2호분의 여성이 안에 긴 스타킹(양말이 붙어 있음)을 신고 그 위에 그림 3의 신발을 신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림 2는 일종의 부츠로 발 부분과 다리(부츠레그) 부분의 재질이 다르다. 신발 부위를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고 부츠레그 부위는 모피로 만들었다. 이 부츠는 무릎 약간 위에까지 오는 길이로, 신발과 부츠레그 사이에는 양모끈으로 이음줄이 만들어졌고, 부츠레그는 앞(60cm)이 뒤(43cm) 보다 길다. 부츠레그 부분은 3.5×5cm의 모피조각(갈색과 검은색)을 이어서 바둑판처럼 만들었다. 검은색 모피는 안감이 없고 이 보다 밝은색(갈색)의 모피는 가죽안감을 덧댄 것이다. 사각형 가운데서 4~5개의 같은 재질의 조각을 이어서 큰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신발,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무덤방안에서는 남성용 신발 한 짝이 더 출토되었는데, 부드러운 밑창이 확인되었다. 가죽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었는데, 붉은 색 가죽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신발은 발목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서 먼저 소개한 그림 2의 유물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바사댜르 유적 2호분의 남성과 관련된 유물로 단검의 검집이 출토되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유물이다. 검집(그림 4-2,3)과 함께 펠트로 제작된 벨트(그림 4-1) 일부가 확인되었다. 검집은 검의 날 모양으로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정할 수 있는 검의 길이는 30cm보다 짧지 않다.

 

 

그림 4.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출토된 펠트제 벨트(1)와 가죽검집(2,3)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는 남성 주인공이 착용한 유물은 신발과 검과 관련된 유물(검집과 벨트)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알타이 파지릭 사람들의 의복과 직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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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알타이의 큰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 유적에서 미라가 남아 있는 곳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일명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남녀, 파지릭 5호분의 남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 남성 이다. 현재 소개하고 있는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도 남녀의 미라가 있었을 것이지만 여성은 훼손이 심해서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남성은 통째로 없어졌다.

 

그 중에서 문신이 남아 있는 미라는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60세 남성,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기마전사였다. 즉 미라로 발견되었지만 파지릭 2호분의 여성과 같은 유적 5호분의 남녀에게서는 발굴당시에는 전혀 문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의 문신도 발굴당시에는 아주 밝은색 피부색 위에서 선명하게 들어났지만 공기중에 드러나면서 피부색이 검게 변하면서 문신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특별한 보존처리를 통해서만 드러났다(코젤초프, 로마코프 2000).

 

미라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관하면서 일 년에 2번씩 사진을 찍고 여러 검사를 했으나 아무것도 별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으나 2004년 10월에 파지릭 2호분(여성)과 파지릭 5호분(남성과 여성)의 미라 3구를 적외선 촬영하던 가운데서 문신이 발견되었다. 이 세 구의 미라는 피부가 매우 검게 변해서 육안으로는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간 필자가 앞서 문신이 발견된 미라에 대한 정보는 모두 이 논문( 바르코바, 판코바 2005)이 발표되기 이전의 자료였다. 아크 알라하 3유적(폴로스막 2001), 파지릭 2호분의 남성(루덴코 195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몰로딘 외 2000)은 오늘 소개하는 자료보다 이전 자료를 보고 소개한 것이다.  결국 이 세 구의 미라 외에도 발굴된 파지릭 유적의 모든 미라에 문신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죄송^^)]

 

적외선 촬영을 통해서 미라의 문신을 발견한 것은 문신에 사용된 염료가 그을음이었기 때문이다. 적외선 촬영에서 그을음을 사용해서 그린 문신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피부는 반사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적외선 촬영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문신은 팔과 다리에 그려져 있다. 신체의 볼록한 표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연속촬영을 해야만 하는데, 제한이 있다. 삼각대 위에 고정된 카메라는 수직과 수평 이동만 가능한데, 미라를 여러 위치에서 찍으려면 각도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미라가 나무와 같은 막대기처럼 굳어 있는 상태에서 손과 발 안쪽 표면에 있는 이미지는 비스듬히 찍어야 하지만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신의 세부모양이나 이미지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현 시점(2004년)에 복원된 문신의 이미지는 덜 정확할 수도 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는 이미 문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발견당시에 사자의 몸은 조각난 상태였다는 점을 여러분은 이미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양 어깨 및 팔, 가슴, 등, 오른쪽 무릎아래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포스팅참고). 적외선 촬영한 결과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도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그림 1).

 

2020/03/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알타이의 남성미라

 

2500년 전 알타이의 남성미라

스키타이 문화에는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처리하는 장례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필자가 나름 자세하게 공개했지만, 이미 한국에서도 서울과 부산에 다녀간 적인 있는 시베리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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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손 손가락에 그려진 문신, 수탉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는 함께 매장된 남성과는 달리 문신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왼쪽 어깨, 오른손 손목, 왼손 손목에 문신이 그려진 상태였다. 특히 왼쪽 어깨(그림 2-1), 오른손 어깨아래(그림 2-2)에 그려진 것은 각각 그리핀과 우제류이다. 그리핀은 얼음공주 어깨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비슷하고, 머리없는 우제류는 같은 무덤의 남성 어깨에 그려진 그림과도 매우 유사하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의 문신. 1-왼쪽 어깨문신, 2-오른쪽 어깨 아래(상완), 3- 오른손 손목, 4-적외선촬영

 

파지릭 5호분의 남녀미라는 다행히 훼손당하지 않았으나, 문신을 발견한 것은 2004년이다. 발굴한지 5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이 미라에도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는 마차와 대형 캐노피로 유명한 무덤이었다. 2010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파지릭 5호분만 특별전을 한 적이 있는데, 미라도 그때 전시되었다.

 

2020/04/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남성과 여성미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남성과 여성미라

*사진은 좀 그렇습니다..내용상..... 2500년 전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의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2호분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되었다. 2호분은 40대 가량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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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쪽 어깨문신. 어깨에 걸쳐서 등 뒤에까지 호랑이가 이어져서 그려졌다.

 

 

그림 4.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어깨 아래(상완)문신. 굽이 있는 동물이다.

 

그림 5.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하완에 그려진 문신, 그림4와 이어지는 문양이다. 말과 함께 꼬리가 긴 다른 동물(호랑이 추정)이 그려져 있다.

 

 

파지릭 5호분 남성미라의 뒷면과 엉덩이에도 문신이 그려졌다. 이 부분은 미라에 생긴 주름으로 인해서 사진촬영이 잘 되지 않은 부분이다. 위의 문신은 다리 4개이고 그 아래에는 동물의 다리와 머리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핀의 머리처럼 보인다.

 

그림 6.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허리아래부터 엉덩이에 그려진 문신

 

 

파지릭 5호분의 남성미라는 왼손과 오른손 엄지손가락(그림 7)에 닭 그림을 그려넣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 오른손 엄지(그림1)에도 수탉이 그려져 있었다. 여성에게서는 없는 그림이다.

이 남성은 왼쪽 허벅지(그림 8)과 오른쪽 발목(그림 9)에도 문신이 그려졌는데, 상반신에 그려진 것과는 다른 문양이다. 굽이 있는 동물이지만 상반신의 동물들은 역동적인 자세였다면 하반신에 그려진 동물은 열을 짓고 서 있는 자세이다.

 

 

림 7.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손(1)과 오른손(2)

 

그림 8.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쪽 허벅지

 

그림 9.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발목

 

 

파지릭 유적 5호분의 남성과 함께 같은 무덤방, 같은 통나무관에 매장된 여성도 문신(그림 10~13)이 새겨졌다. 양 손목 위(그림 10, 11, 12)과 양 손의 네 번째 손가락(그림 13), 왼쪽 엄지손가락(그림 11, 13-2의 가장 상단)이다. 특히 오른쪽 손목 위에 새겨진 문신은 손목의 전면과 뒷면 전체에 그려졌다. 상단에는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뜯는 장면, 하단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사슴을 공격하는 투쟁문양이 그려졌다.

두 마리 맹수가 사슴이나 양을 공격하는 장면은 표트르 1세의 황금유물컬렉션 유물에서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10.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손목 위

 

 

그림 11.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왼쪽 손목 위뿐만 아니라 왼쪽 엄지손가락에도 문신이 남아 있다. 새 그림인데, 그림 13의 2에 위에 그려진 새 그림이다.

 

 

 

그림 12.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오른쪽 손목 위

 

 

 

그림 13.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양 손.  1-오른손, 2번의 왼손가락의 네 번째 문신,  새 그림은 엄지손가락에 그려진 것이다.

 

일명 얼음공주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와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는 문신의 그림이나 위치가 매우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파지릭 유적 5호분의 여성미라에는 앞의 두 여성에게는 없던 동물투쟁문양이 그려져 있다. 특히 호랑이는 파지릭 5호분의 남성(왼쪽어깨)와 파지릭 2호분의 남성 왼쪽 등에 그려졌던 문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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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аркова Л.Л., Панкова С.В. 2005 : Татуировки на мумиях из Больших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новые материалы). // АЭАЕ. 2005. №2 (22). С. 48-59.(바르코바, 판코바 2005, 파지릭 대형 고분의 미라에 새겨진 문신(최신자료)//유라시아의 고고학 민족학 인류학)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https://rg.ru/2010/12/09/ermitaj-alt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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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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