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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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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다르 유적은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이른 유적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를 일종의 지역문화로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을 1947년에 발굴해서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매장문화의 특징을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라고 했다. 그런데 1950년에 바샤다르 유적을 발굴해 보니 ‘파지릭문화’의 특징이 이 유적에도 많이 확인되어서 이 유적도 파지릭 문화의 한 유적이 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이 파지릭 유적 보다 이르다고 해서 문화명칭을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 이미 다 잘 알려진 것이 ‘파지릭문화’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 기록한 스키타이 사람들의 문화 중에서 왕의 장례식 치르는 장면에 미라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밌게도 19세기 말부터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혁명 전) 러시아제국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한(연구하기 시작한)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고 믿던 유적에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중에서 내장을 발라내고 피부에 발삼(향료와 오일을 섞은 일종의 연고)처리를 한 미라처리 기법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만 확인된다.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타가르문화에서는 미라 비슷한 기법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알타이 미라와는 다르다. (타가르 문화문화도 동물문양장식, 마구, 무기 등이 확인되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일부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아르잔 유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다.)

 

포스팅(표에서 타가르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

eastsearoad.tistory.com

 

바샤다르 유적의 2호는 직경이 58m 정도 된다. 1호는 직경이 40m이다. 가장 중심부의 높이는 1.85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7m가량이다. 구글 인공위성지도로 봉분이 보일 정도이니 도굴꾼들에겐 ‘어서 잡수셔’하는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도굴당한 흔적(그림 3, 그림 4)이 생생하다. [러시아의 알타이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등 봉분이 있는 큰 무덤은 대부분 도굴꾼 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금딱지 들을 주워가고 다른 것들은 남겨 놓고 가서 그나마 정보가 남아 있다]

그림 1의 봉분 위의 검은 색 표시는 도굴한 흔적은 아니다. 이는 근현대에 들어서 지역주민들이 봉분위에 자신들의 무덤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그 옛날의 무덤 근처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분문에만 흙으로 덮은 흔적이 있어서 알아 보기 쉬웠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로 덮은 부분의 아래에 있는 다른 물질은 땅에서 파낸 흙이다.(위: 평면도; 아래: 단면도)

 

봉분을 덮은 돌을 분해하면서 말의 재갈, 철제도구 및 목제 막대기와 석제로 된 곡물파쇄기(멧돌)?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을 분해하다가 발견된 석제품. 곡물파쇄기로 추정

 

무덤구덩이는 깊이 6.15m, 크기는 5.2× 6.3m이다. 무덤 구덩이는 돌 아래에는 수백개의 통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통나무 아래에는 덤불이 1m정도 눌려져서 확인되었다. 이 덤불은 ‘쿠릴 차’라고 하는 식물이다. 이 덤불은 무덤방 바깥에 매장된 말이 매장된 곳 위에도 16개의 통나무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자작나무 껍질이 덮여 있었고, 역시 말이 매장된 곳에도 말 사이까지 확인되었다.

 

 

 

무덤방의 바닥에는 두께 17~18cm의 나무 4개를 깔고 그 위에서 두께 6cm의 통나무를 세 개씩 세워서 무덤방의 한 벽은 통나무 4개를 세워서 만든 것이다. 무덤방의 덮개는 8개의 통나무로 아주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2.2×4.15m, 높이는 1.3m이다. 무덤구덩이에서 남쪽은 무덤방이 설치되고 북쪽에는 말이 매장되는데 14마리가 확인되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단면도(위: 위도방향(남북), 아래: 자오선방향(동서)

 

 

 

그림 4.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무덤방의 평면도(위: 무덤방의 덮개와 말, 아래: 덮개를 연 후 무덤방의 바닥)

 

바샤다르 2호의 무덤방에는 통나무관이 2개였다. 가장 남쪽에 안치된 것은 남성의 관이고 그 옆에 여성의 관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도굴당하면서 관은 제자리에서 확인되지 않고 엎어져서 확인되었다. 여성의 시신도 미라 처리되었는데, 난도질 당해서 무덤방 여기저기에서 확인되었고, 남성의 시신은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통나무 덮개에는 1.7×3m의 도굴구멍(그림 4)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온 도굴꾼은 높이가 1.3m밖에 되지 않는 무덤방에서 마음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도굴구멍 바로 아래에 위치한 통나무관의 뚜껑을 열고 통나무관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이 관은 여성의 관이었다.

 

남쪽에 있는 두 번째 관은 나무로 된 못으로 고정된 것으로 제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굴꾼은 말을 매장한 곳도 손을 대었는데, 말 무덤 쪽의 북쪽벽에 구멍을 내었다. 말을 통째로 꺼낼 수 없으니, 말을 잘랐는데, 자른 뼈가 무덤방 안에서 확인되었다. 도굴꾼은 말의 굴레장식에서 금박만 벗겨내고 나머지 나무로 된 부분들은 바닥에 남겨 두었다. 청동제품은 그대로 두고 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유물의 위치는 거의 제자리가 아니었고, 말의 장식까지도 거의 많이 흩어진 상태였다. 미라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지 않다. 파지릭 2호분을 도굴한 놈 보다 더 한 놈이 도굴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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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바샤다르 유적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보다 서쪽으로 약 162km(직선거리) 떨어진 알타이 산 위에 위치한다. 해발 1200m가량의 산 위의 분지 지형에서 무덤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57기가 확인되었다(그림 1).

 

봉분(무덤을 덮은 흙)이 있는 시설이라고 한 것은 모든 무덤을 발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알타이 지역에 위치한 기원전 5세기 전후의 문화인 파지릭 문화에서는 큰 무덤 주위에 작은 무덤 시설에서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덤은 카라콜 강의 합류점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강은 서쪽으로 흘러간다. [바샤다르(Башадар, Bashadar)라는 명칭은 ‘머리를 쏘다’라는 뜻인데, 러시아어가 아닌 알타이 민족의 언어이다. 러시아의 지명은 러시아어로 고치지 않고, 지역원주민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아무르 강은 만주어인데, ‘그물을 짜던 곳’이라는 뜻이다. 연해주에도 1970년대까지 한국어지명과 중국식지명을 그대로 쓰다가 이후에 러시아식으로 바꾼 곳이 많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의 무덤군(필자편집)

 

하여간 봉분이 있는 57기의 무덤군은 모두 6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루덴코는 그룹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준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큰 봉분이 있는 무덤 중심으로 비슷한 등고선의 것을 한 그룹으로 보았다. 그림 1은 루덴코가 설명한 것을 필자가 나누어 놓은 것이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의 인공위선 사진. 고분의 봉분이 구글위성사진으로 보인다. 아래 필자가 링크 해 놓은 지도로 들어가시면 된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6그룹으로 나눈 무덤 중에서 가장 큰 무덤 2기를 발굴했는데, 가장 남쪽 그룹의 1호(Б-А-1)와 가장 동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2호(Б-А-2)이다. 두 무덤의 직경은 40m가량이나 되어서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 보다 더 대형의 무덤이다.

 

특히 바샤다르 2호분은 깊은 무덤구덩이(깊이 6m)와 거대한 통나무관(그림 3), 미라 처리된 남녀주인공으로 인해서 유명한 유적이다. 아쉽게도 미라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통나무관

 

유적은 1950년에 발굴되었고, 발굴에 대한 보고서가 단행본으로 나온 해는 1960년이다. 파지릭 유적을 발굴하고 보고한 루덴코가 총 책임자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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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의 기마전사는 20~25세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미라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쪽 어깨에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함께 표현된 문신(그림 1,2)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남서의 문신이 가장 간단한 편이다. 러시아학계에서는 이 세 명을 문신한 타투이스트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이테 연대측정법의 결과 이 세 유적을 매장한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특히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그림 2-1)에 새겨진 문신 가운데 첫 번째 문신인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결합된 그림은 동물의 자세와 구도가 거의 비슷하다.

 

 

얼음공주를 분석한 고병리학자들에 따르면 미라로 제작시 방부처리와 복원하는 부분은 주로 보이는 부분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젊은 전사는 배를 가른 부위를 아주 대충 말총꼬리로 마감했다(그림 3). 이 남성은 아주 큰 모피 코트를 입고 있어서 대부분이 가려져서 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도 미라로 만들어지고 방부처리를 할 당시에 발삼처리를 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남성 전사를 보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미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

 

그림 2.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문신

 

 

그림 2-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 문신

 

그림 3.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복부 기운흔적

 

얼음공주는 옷 밖으로 드러난 머리, 목, 손 부위가 집중 방부처리 대상이 되었고, 가슴도 복원되었다. 반면에 가장 신경을 덜 쓴 부위가 배이다. 얼음공주는 복부를 절단하고 내장과 함께 연골 및 갈비뼈를 제거하고, 가슴과 골반에 식물섬유로 채워넣었다(이 부분은 앞선 포스팅 참고). 하지만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은 식물로 미라를 채우지 않았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와 유사한 유물이 많았다. 청동거울, 주머니, 칼과 투부, 화살, 목걸이, 모자 등이 그러한데, 필자가 찍은 사진도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의 것이지만 필자가 헤깔린 것도 있을 정도이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왼쪽)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오른쪽).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면 아크 아라하 1유적의 어린아이는 성인의 무기를 어린아이 사이즈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림 4에서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는 모피코트를 입은 모습이지만, 벨트는 무문양이었는데, 호랑이 문양 장식이 그려져 있다. 그림5는 모피코트를 벗고 기마 탄 모습이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무 덤에서 하의는 출토되었지만, 모피만 입고 있었고, 그 안에 상의는 실제로 입고 있지 않았다. 남성의 상의가 발견된 경우는 파지릭 2호분인데 이를 참고로 복원한 것이다. 이 남성의 무덤에서 발견된 남성의 타이즈 끝에 가죽으로 덧댄 것을 참고로 해서 셔츠의 어깨도 복원한 것이다.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 복원도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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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우코크 고원의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3호분에 뭍인 남성미라는 살아생전에 직업군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거는 고리트(화살과 활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식 활통)라고 가 출토되기 때문이다. 러시아학계에서는 고리트는 기마전사의 복식으로 생각한다.

 

시위, 화살, 고리트 등은 모든 남성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울란드릭 유적에서는 42기의 고분에서 7기에서만 위의 무기가 출토되었고, 유스티드 유적에서는 44기의 고분에서 6기에서만 확인되었다. 아르잔-2 유적에서도 활과 화살, 투부, 검과 칼 등 무기가 완전히 출토된 것도 주인공 무덤 외에 2기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남성미라도 화살, 고리트, 투부 등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서 그는 기마전사였다. 앞에서 이 남성의 무덤 속에서 각 유물의 위치를 설명했다. 그 중에서 26, 27번은 머리장식일부라고 적혀있었으나, 사실은 26번은 고리트의 덮개(그림 1)이다. 고리트의 덮개가 고깔처럼 생겨서 그렇게 적었고(필자는 그대로 번역함),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고깔모자가 아닌 고리트의 덮개이다. 펠트로 만들어진 고리트 덮개에는 양털을 꼬아서 만든 끈이 6줄 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방울모양이 달려 있었다. 비슷한 끈이 확인된 유적은 바샤다르 2호분(루덴코 1960)에서도 확인되었고,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도 매듭이 출토되었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과 같은 고리트 덮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고리트(활통) 덮개, 펠트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고리트(활통) 아래부위, 모피+펠트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기마전사는 고리트의 덮개 뿐만 아니라 고리트의 아래 부위도 나왔다. 모피로 만들어진 것으로 왼쪽 허리부근(유물배치도 27)에 놓여 있던 유물이다. 이 모피 부분안쪽에서 활의 부속품(그림 3)이 출토되어서 고리트의 일부라고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물의 아래쪽에는 화살이 5점 놓여 있었다. 모피의 끝에는 펠트조각이 붙어 있는데, 고리트 덮개와 연결부위이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 기마전사 활의 부속품, 1,4,5-나무, 2,3-뿔

 

이 유물은 전체길이가 85cm가량으로 고리트가 덮어지는 것까지 계산하면 전체 활의 길이는 110.6cm가량이다. 출토된 화살은 79cm가량으로, 화살촉의 단면은 삼각형이다.

 

 

그림 4.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의 남성 기마전사의 화살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의 남성 기마전사의 고리트 복원도

 

*위의 그림은 아래 참고문헌에 수록된 것이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с.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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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에서는 2500년 전 무덤 속에 나무 무덤방이 설치된 유적들이 발견된다. 일부 유적에서는 ‘미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알타이에서 발견된 문화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스키타이 문화는 동물문양장식, 무기, 마구를 문화의 아이덴티티로 사용했는데, 스키타이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 지역은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몽골 및 만주지역의 내몽골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 파지릭문화는 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가장 중심에 분포했던 알타이에서 위치한다.

 

이 시절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무덤에서는 여러 경우가 있지만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 무덤방 안에는 그릇을 놓아 둔다는 점이다. 토제, 목제, 뿔로 만든 그릇이다. 토기는 액체용기를 담기 위해서 항아리(호형)가 있고, 뿔로 만든 용기도 확인된다. 목제로 된 그릇은 두 종류의 그릇 중 쟁반 위에는 고기와 철제 칼이 놓여 있다. 양의 엉덩이 뼈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서 꼬리 부위를 잘라서 두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얼음공주 미라가 발견된 아크 알라하-3유적, 남성 전사 2인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1 유적 등에서도 모두 시신이 안치된 곳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확인되었다. 주로 시신이 보는 방향에 목제 쟁반이 놓인다.

 남성미라의 무덤인 베르흐 칼쥔-2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제 쟁반 위(그림 1)에 고기 덩어리와 철제 칼(그림 3-2)이 확인되었다. 다리가 낮은 쟁반으로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다. 목제 쟁반의 한쪽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한쪽에는 구멍이 두 개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 출토 목제 쟁반(필자촬영)

 

파지릭 유적에서도 다리가 높은 목제 쟁반(그림 2)이 확인되었다.  다리에는 여러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도굴로 이미 무덤 속이 흐틀어졌으나, 비슷한 장례의식 가운데서 목제 쟁반 위에 고기 덩어리를 놓고 의식을 치뤘을 것이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목제 쟁반 혹은 목제 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에서 확인된 철제 칼은 손잡이가 둥글고 날이 한 쪽 방향으로 있는 것으로 얼음공주 무덤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도면(그림 3)이 부실해서 안타깝다. 필자가 찍은 사진에도 없었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 출토 3호분 목제 쟁반(1:그림 1과 동일)과 칼(2)

 

목제로 된 또 하나의 그릇은 잔이다. 손잡이가 한쪽에만 붙어 있는 잔으로 손잡이는 둥글다. 손잡이가 한쪽에만 붙어 있는 잔은 2700년 전 유적인 아르잔-2호에서부터 출토되었다. 물론 손잡이 모양은 다르지만, 목기의 몸통이 ‘잔’인 점은 공통적이다.

아르잔-2호와 이 유적의 연대차이가 200년 이상 있지만 손잡이의 모양이 그대로 이어진 유물도 있고, 변화가 생긴 유물도 있다. 목제 잔을 사용하는 전통은 계속 이어진 것 같다.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목제 잔(그림 4)와 유사한 잔은 파지릭 유적의 2호분(그림 5)에서 출토된다.베르흐 칼쥔 II유적 남성의 잔은 손잡이가 심플한 둥근 것(그림 6)이다. 얼음공주의 잔(그림 7)은 손잡이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마주보게 장식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둥근 손잡이를 응용한 것이다.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펠트제 받침대(그림 5-2)는 남성미라(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와 여성미라(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출토된 유물이다.

쟁반이 아닌 목제용기는 유제품을 위한 그릇이다.

 

그림 4. 아르잔-2호분 무덤방 5호분의 목제 그릇(2700년 전)

 

그림 5.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목제 잔(2500년 전)

 

 

그림 5-2. 그림 5와 세트, 펠트제 받침대

 

 

그림 6.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 출토(2500년 전), 남성미라의 목제 잔과 받침대(필자촬영)

 

그림 7. 아크 알라하 3유적, 얼음공주 미라의 목제 잔(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쟁반에는 모두 상단에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죽음을 위해서 만든 부장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했던 용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포스팅 한 바 있지만 미라 혹은 사자 들이 입고 있는 옷도 전부 수선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사용했던 의복이었다. 죽음을 위해서 만들어 둔 것이 아니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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