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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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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지류인 헴칙 강 변에는 기원전 7~6세기 무덤이 확인되었다. 1965년에 발견되었는데, 항공사진이 촬영 가능할 만큼 눈에 띄는 무덤이다(그림 1).

 

헴칙-봄 이라고 명명된 이 유적은 지점에 따라서 헴칙-봄 I~III유적(그림1) 이 있고, 헴칙-봄 V유적까지 있는 것으로 보고서에 적혀 있다.

 

그림 1. 헴칙-봄 I~III유적의 항공사진 (1: 헴칙-봄 I유적, 2: 헴칙-봄 II유적, 3:헴칙-봄 III유적), 구글지도에는 헴칙 강의 위치 표시, 유적의 정확한 지점은 찾지 못함.

 

 

그 중에서 헴첵-봄 III유적에서는 쿠르간 2기가 발견되었다. 1호에는 한 봉분 아래에 12기의 무덤이 있고, 2호에는 2기가 있었다. 2호 쿠르간 아래에서 1호 쿠르간이 발견되었다(그림 2). 2호 쿠르간은 9~10세기 투르크 시대의 것으로 역시 돌널무덤을 썼다.

 

그림 2. 헴칙-봄 III유적 1호, 2호 쿠르간

 

1호 쿠르간은 기원전 7~6세기 무덤으로 쿠이루그-헴 I유적과 같은 시대이다. 하지만 지상위를 덮은 돌의 평면형태는 네모꼴에 가깝고 12기나 무덤이 만들어져서 구조상에 차이가 있다. 예니세이 강변의 같은 지류이면서 동시대이지만 무덤 구조가 다르다.

 

이상한 점은 같은 봉분 아래에 무덤이지만 돌을 쓴 무덤과 나무로 관(8호묘, 10호묘, 11호묘)을 만든 차이점 이 있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사람들의 평범한 장법인 굴신장(무릎을 굽힌 채 묻는 법)과 2차장(뼈만 추려서 묻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나무를 무덤방으로 만들었지만 사글리 바쥐 II유적, III유적과 같이 2인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넉넉하게 묻힐 정도의 크기가 아닌 1명이 꼭 맞게 들어갈 정도로 돌널무덤과 같은 크기이다(그림 3).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그림 3.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8호묘

 

10호묘에서는 나무판을 사용한 것인데 인골이 북쪽으로만 몰려서 확인되었다. 11호묘는 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통나무를 이용했다(그림 4)

 

그림 4.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1-10호묘 , 2-11호묘, 3-12호묘

 

그림 5. 헴칙-봄 III유적 1,2호 쿠르간의 9호묘

 

한 봉분 아래에 여러 기의 무덤을 함께 묻는 다는 점에서 우육분지의 아르잔-2호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헴칙-봄 III유적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하다. 위치나 무덤의 재료 등으로 보아서 8호묘로 생각되지만 유물은 9호묘(그림 5)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잔-2호묘 뿐만 아니라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등에서 비교적 중요한 인물들은 대부분 부부합장무덤인데, 이 유적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투바의 우육분지 아르잔-2호가 축조되면서 한 봉분 아래에 여러 기의 무덤을 만드는 방법이 여러 곳으로 전해졌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 하나가 헴칙-봄 III유적일 수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쿠이루그-헴 I유적의 7호 쿠르간 아래에서도 3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연방의 시베리아에는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한 곳인 투바공화국에는 대단한 무덤군이 발견되어서 고고학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곳이다. 필자가 러시아를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의 성향은 소수민족 그대로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해지는 지명을 그대로 둔다. 우리에게 알려진 아무르 강의 ‘아무르’도 만주어로 그물을 짜던 곳이라는 뜻이다. 극동의 지명은 1960~70년대까지 지역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 중국어 발음 그대로를 러시아어로 음차해서 쓰던 곳이 많다. 예를 들면 ‘coca- cola’를 ‘코카콜라’로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래서 1950년대 극동고고탐사단이 발굴하던 자료와 현재의 유적명은 대부분 다르다. 60년대 이후로 극동에서 중국과 국경마찰이 심해지고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러시아어로 바꾸게 되었다. 필자가 공부 한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연구소에서 지명을 바꾸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러시아어 지명 대신 지역민들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쿠이루그-헴’, ‘울루그-후루움’ 등 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쿠이루그-헴 I 유적에서 발굴된 16호, 17호, 18호 중에서 17호에는 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어제 17호를 토광묘라 했는데, 어쩌면 나무시설이 있었을 수 있다. 인골이 흩어지긴 했지만 무덤구덩이 안쪽으로 라인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나무시설이 있었을 수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청동검(그림 1-1)과 청동 그리핀(그림 1-2)은 16호와 18호에 없는 유물이다. 게다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은 16호와 18호 사람은 무시하고 그 위에 17호를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공간도 많은데... 아마 17호의 인물이 가정도 잘 만들었고, 직업으로도 훌륭하지 않았을까? 말탄 전사와 같은...

 

그림 1. 쿠이루그-헴 I 유적 1,2-17호, 3,4-22호의 1호묘, 5-7호의1호묘, 6-7호의 2호묘. 3, 5,6 유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쿠이루그-헴 I유적에는 무덤의 봉분과 지하구조물이 너무 다른 무덤이 여러 기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7호와 8호이다. 8호를 무시하고 7호가 들어선 모습이다. 7호 쿠르간 아래에는 무덤이 3기가 들어 있었다.

 

그림 2. 쿠이루그-헴 I유적, 7호와 8호의 상부, 좌-돌을 드러내기 전, 우-7호만 돌을 드러낸 모습. 돌널무덤은 7호의 2호묘와 1호묘

그라치의 본문과 그림은 일치하지 않는다. 검토 결과 7호와 8호를 그림에 바꾸어 적었다. ‘7호 아래에 8호가 놓여있었으며, 7호에는 무덤 3기가 발견되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림 설명과는 다르다. 특히 단면도는 같은 높이에서 7호 위를 덮은 적석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7호 아래에 8호가 놓여 있었다는 본문이 정확하다.

 

 

7호와 8호가 앞에서 설명한 16호, 17호, 18호와는 무덤에 돌을 쌓는 상태가 다르다. 전자는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린 돌(호석)과 그 안을 채운 돌이 달라서 그림 2-오른쪽과 같이 돌을 벗긴 것이다. 후자는 그냥 비슷한 돌로 무덤을 둥글게 만들었다.

 

7호의 1호는 중앙에 위치한 무덤으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고 청동칼(그림 2-5)만 발견되었다. 1호는 굴신장일 수 있다. 2호 역시 청동칼(그림 2-6)만 발견되었는데, 자루를 끼우기 위해서 구멍이 난 것이고, 두개골이 산산히 부서진 상태였는데, 처음부터 그 상태로 매장되었을 수 있다.

 

쿠이루그-헴 I유적 7호에서 발견된 사람과 함께 매장된 청동칼은 아르잔-2호의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칼과 같다. 본 유적의 유물은 끝이 무디지만 같은 형식의 검이다.

이 유적도 기원전 7세기이고, 아르잔-2호도 기원전 7세기 중반으로 약간 늦지만 오차를 감안하면 비슷한 시대의 인물일 수 있다. 아르잔-2호에서 주인공과 함께 매장된 돌널무덤의 사람과 우육분지에서 벗어났지만 외곽에서 단독 봉분 아래에 묻힌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했을까?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투바에서 이상하게 만들어진 무덤은 기원전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다. 아르잔-1호도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그런 무덤이다. 따지고 들면 의례행위 자체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기원전 일천년기에 유라시아 초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덤 만드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은 것 같다.

 

이상하게 만들어진 무덤은 투바 일대 수많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울루그-호르움’이라고 불리는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태양사원도 마찬가지이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쿠이루그-헴 I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도 지상에 넓게 돌로 덮은 무덤들이 발견되는데, 정작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은 간단하다.

쿠이루그-헴 I유적(우측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에는 5개의 쿠르간이 겹쳐진 유구가 발견된다. 12호, 16호, 17호, 18호, 19호가 겹쳐진 것이다. 돌널무덤과 토광묘(돌 없는 무덤구덩이만 있는 무덤)의 상면을 화산암으로 덮은 것이다.

 

그림 1. 쿠이루그-헴 I유적, 12, 16~19호의 가장 윗면

 

 

그림 2. 쿠이루그-헴 I유적, 1-12호, 2-17호, 3-18호, 4-19호

 

그림 3. 쿠이루그-헴 I유적, 헬리곱터에서 찍은 사진 찍은 사진

 

 

 

16호와 17호(그림 2-2)는 무덤구덩이만 있는 토광묘이다. 16호에는 인골상태가 좋지 않은데, 발 부근에서 말뼈가 함께 발견되었다. 청동화살촉, 골제화살촉, 금제 구슬등이 함께 부장되었다. 17호는 이미 고대에 파손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인골도 거의 흐틀어진 상태이다. 머리아래에는 돌베개를 놓았던 흔적은 발견되었다. 청동화살촉, 그리핀 머리 장식, 골제 화살촉, 금제 구슬, 사향노루 송곳이빨로 만든 부적, 청동단검 등이 발견되었다.

18호(그림 2-3)에는 3기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 아래에 설치되었다. 그 중에 2호와 3호는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3기 모두 납작한 석판을 한판씩 세워 무덤의 구조물로 이용했다.

같은 돌을 이용한 무덤이지만 12호와 19호는 납작한 돌을 여러겹 둘러서 만든 돌널무덤이다.

 

16호,17호,18호(그림 1의 단면도)중에서 아래에 있는 16호와 18호가 가장 이르고, 17호는 가장 나중에 16호와 18호를 무시하고 만든 것이다. 18호 축조 당시 몰랐을 리가 없다. 봉분이 저렇게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같은 가족관계이거나 했을 것 같다. 이 유적은 기원전 7~6세기라고 알려져 있다.

 

지상 위에 봉분을 축조하는 방법은 투바의 아르잔-1에서 시작되지만,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만드는 행위는 2000년대 들어서서 발굴된 아르잔-2호에서 나중에 발견되기 전까지 투바의 우육분지 외곽 유적에서 관찰된 것이다. 투바에서 우육분지를 벗어난 곳에서 발견된 무덤은 지상위의 드러난 돌을 크게 만들고 지하의 매장주체부는 신경을 안쓰는 특징이 있다. 그 시대에 무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5세기 시베리아 투바의 사글리 바쥐 VI유적에서는 특이한 거울 한 점이 발견되었다. 청동제거울로 경면의 반대면에 음각으로 그림이 표현된 것이다. 2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곳에는 5명의 성인과 10대 아이 1명이 매장되었는데, 성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 1.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 유물

 

청동거울을 가진 이는 2호 인골이다. 청동 거울(그림 2-11)과 함께 철제 검(그림 2-10), 눈모양의 그림이 있는 구슬(그림 1212), 철제 막대으로 금이 붙어 있는(그림 2-13) 유물, 골제 버클장식(그림 2-15)등이 이 사람의 물건이다. 누구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3호 인골 사이에서도 유물이 꽤 나왔는데 새의 머리뼈(그림 2-8), 동물의 머리 장식(그림 2-16), 멧돼지 머리장식(그림 2-17), 눈 모양의 그림이 들어 있는 구슬(그림 2-18), 구슬(그림 2-19~21, 27), 청동단추(그림 2-22), 철제품(그림 2-23), 골각제품, 곰의 송곳니로 만든 부적(그림 2-24~26), 고동(그림 2-28), 뿔제품(그림 2-29)이다.

 

그림 2.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 무덤 바닥

 

그 외에도 4호 인골은 토기, 5호 인골은 골제(그림 2-36~41)와 청동제 화살촉(그림 2-32~35)이 함께 나왔다. 6호 인골은 뿔로 만든 단추모양(그림 2-42)만 가지고 있었다.

 

사글리 바쥐 VI유적 2호 청동거울은 경면의 반대면에 문양이 있긴 하지만 이제 까지 보아왔던 문양은 주물틀의 틈으로 금속물이 들어가게 부어서 거울에는 양적인 동물문양이 장식되었다. 하지만 이 거울은 완전히 다르다. 주물틀이 아닌 완성된 거울에 예리한 도구로 음각한 것이다. 혹은 주물틀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동물문양도 완전히 다른데 맹수와 사슴처럼 보인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이 시기의 거울은 뒷면에 꼭지가 달리는데 그렇지 않다. 비슷한 형식의 거울이 여러 점 발견된다면 이 유적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 점 뿐이라서 그렇게 하기도 힘들다. 이 유적을 기점으로 다른 유적에서 같은 형식의 거울이 계속 발견된다면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또 위세품인가 싶지만, 이 유적에는 이것 말고 고고학자들이 생각하는 위세는 따로 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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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투바의 사글리 바쥐 II 유적에서는 유적 전체 평면도가 없어서 답답했다. 평면도가 있는 유일한 유적이 있는데 사글리 바쥐 VI유적(그림 1)이다. 지표상에 드러난 유구는 모두 27개이며 그 중에서 발굴된 무덤은 3기, 그 외에도 특이한 유구가 3개 발견되었다.

 

 

그림 1.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유적 평면도

 

발굴된 무덤 가운데 도면이 남아 있는 곳은 2호이고, 1호와 4호는 남아 있지 않다. 사글리바쥐 II유적과 다른 점은 가장 상면 무덤의 가장자리에 호석을 돌렸고, 높지는 않지만 봉분을 약간 쌓았다.

 

1호 무덤은 지표상에 돌무더기는 원형에 가까운데 서쪽에 좀 더 돌무더기가 잘 남아 있다. 가장 바깥쪽에 고리 모양으로 돌이 돌아가고 중앙에 돌을 쌓았다. 가장 중앙 바닥에 통나무 나무방이 썩으면서 상부의 돌이 함몰되었다. 무덤의 서쪽에는 둥근 돌 고리 유구가 확인되었다.

 

상부의 돌을 제거하고 나자 검은색 흙위에 황토를 덮은 흔적이 나타났다. 무덤구덩이 바닥에는 통나무로 만든 나무무덤방이 있었다. 나무무덤방 위에는 빙토층이 발견되었다.

나무무덤방은 역시 3층의 나무판자를 쌓아서 만든 것이다. 남북방향으로 긴 통나무를 쌓았고 가장 바닥에는 동서방향으로 나무를 놓았다. 이곳에는 4기의 인골이 나왔는데, 3기는 심하게 흐틀어진 상태였고, 1기는 완전했다.

4호는 어떤 일이지 모르지만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2호 무덤은 1호와 외관상 거의 비슷하지만 무덤방의 상태는 좋지 않다. 무덤에는 5명의 성인과 1명의 십대 아이가 발견되었다.

 

그림 2.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분

 

그림 3.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2호분

 

유적에서는 사슴돌도 발견되었는데 그림 1-8,9가 사슴돌의 위치이고, 그 중에 한 점은 그림 4이다.

 

그림 4. 사글리 바쥐 VI유적의 사슴돌

 

사글리 바쥐 VI유적에는 둥근 집석 유구, 울루그-호루움, 돌 고리 유구, 석주 등이 발견되었다. 그림 1의 하단에 표시를 번역해 두었다. 유적은 사글리강의 좌인 지류인 시느 강의 우측강변에 위치한다. 사그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곳인데, 정확한 지점은 찾지 못했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1980(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