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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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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북안으로 흘러가는 드네프르강 하류에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올비야 라고 하는 그리스 도시가 들어섰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자신의 나라를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흑해 북안에서는 드네프르강 하류의 부그만에 위치한 베레잔 섬에서 흔적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5세기경에는 올비야에서 그들의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스의 도시인 테메노스와 아고라가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아고라의 주변에는 테메노스(사원지)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는 고대 그리스의 재판소인 디카스테리아와 김나지움, 뿐만 아니라 시장도 건물로 자리잡았다.

 

아고라는 테메노스 보다 늦은 시기에 설치되었는데 기원전 3세기경 헬레니즘 시대로 일컬어질 때 부터이다. 흑해북안에서는 사르마트 문화가 번성하고 있을 때이다.

 

그림 1. 올비야의 아고라, 1: 헬레니즘 시기의 올비야 평면도, 2: 기원전 3~2세기 동쪽 교역용 건물터(시장), 3: 기원전 3세기 디카스테리아(재판소), 4: 기원전 3세기 김나지움

 

교역용건물터에서는 대량의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6~5세기 동전은 각인한 것이 아닌 주조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동전은 새가 돌고래를 공격하는 것이다. 올비야에서는 수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히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흑해지역 뿐만 아니라 아랄해 부근 지역까지도 발견된다.

 

그림 2. 올비야의 동전, 5~10: 기원전 6~5세기, 11,12: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에서 손잡이가 달린 거울(그림 3)이 나오는데, 특히 손잡이 끝에 표범장식이 달린 거울은 스키타이 귀족이 주문해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림 3. 스타르폴 출토 청동거울, 그레코-스키타이 양식

 

참고문헌

 

Антич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 Отв.ред. Г.А. Кошеленко, И.Т. Кругликова, В.С. Долгоруков; авт. Е.М. Алексеева, А.К. Амброз, Т.М. Арсеньева и др. М.: Наука, 1984. 392 с.(코세렌코 편집, 1984, 흑해북안의 그리스 상고기 유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강 하류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 도시가 세워졌는데, 올비야라고 불린다. 이곳에는 강과 가까운 곳에는 항구와 주거용 집들이 설치되었고, 이 보다 높은 지대에는 테메노스와 아고라라고 불리는 그리스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테메노스에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아폴론의 신전이 발견되었다(그림 1-2,3). 아폴론의 신전은 기원전 4세기경에 개축을 했고 공간을 분할 했다(그림 1-4). 이 건물은 기원전 3세기 경까지 아폴론의 신전으로 이용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 제단은 돌로 만들어졌지만(그림 1-5), 기원후 1세기에는 목제로 건설되었다(그림 1-6). 제우스의 제단은 기원전 3세기경에 지어졌다(그림 1-7). 아폴론의 신전은 북쪽에 위치한 정원(혹은 숲) 사이에서 발견되었다(그림 2-4).

 

그림 1. 테메노스의 복원도. 1: 기원전 5세기 아폴론 신전 앞의 테메노스 풍경, 2,3: 기원전 5세기 아폴론의 신전 평면도와 입구, 4: 기원전 4세기 아폴론의 신전, 5: 기원전 5세기 제단의 모습, 6: 기원후 1세기 목제 제단, 7: 기원전 3세기 제우스 신전의 평면도

 

 

 

그림 2. 기원전 4~3세기 테메노스의 평면도, 1: 정사각형 건물, 2: 제단, 4: 아폴론의 신전, 5: 제우스 신전, 6: 큰 신전, 6a: 1기와 2기의 신전, 7: 저장고, 8: 동상 제작소

 

저장고에서는 그리스 신상들이 발견되었다. 흙으로 만든 것으 구운 것이다. 키벨레(그림 3-1), 아프로디테(그림 3-2), 데메테르(그림 3-3), 기원전 3세기의 아폴론(그림 3-4), 제우스(그림 3-5), 사티로스(그림 3-6), 메두사(그림 3-7), 날개달린 지니어스(그림 3-8), 아프로디테와 포세이돈이 있는 제단의 일부(그림 3-9), 갑옷의 일부(그림 3-10), 황소의 머리뼈(그림 3-11)가 발견되었다.

 

그림 3. 기원전 3세기경의 테라코타, 저장고(그림 2-7)에서 출토됨.

 

참고문헌

Антич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 Отв.ред. Г.А. Кошеленко, И.Т. Кругликова, В.С. Долгоруков; авт. Е.М. Алексеева, А.К. Амброз, Т.М. Арсеньева и др. М.: Наука, 1984. 392 с.(코세렌코 편집, 1984, 흑해북안의 그리스 상고기 유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동유럽 가이모노바 쿠르간은 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으로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인 말이 매장된 곳은 2번 무덤방으로 피장자가 안치된 곳의 입구와 가까운 곳에 매장되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무덤 평면도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과 말 무덤

 

말은 2필 매장되었는데 말 옆에는 굴레장식과 재갈과 재갈멈치 등의 마구가 발견되었다(그림 2,3). 그 중에 굴레장식은 원판형과 동물장식이 표현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원판과 동물장식은 제작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원판은 두터운 금판으로 제작된 것이고 동물장식판(그림 5)은 얇은 금판을 이용한 것이다. 원래는 목제로 제작된 기초부분이 있었고 그 위를 금판으로 감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 굴레장식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무덤에서 나온 굴레장식, 4.0~5.4×9.9cm

 

솔로하 유적에서도 목제판을 감싼 굴레장식이 출토되었다고 베셀로프스키도 이 점을 지적했다. 만세비치(1987)는 솔로하 유적의 굴레장식의 기초가 된 유기물질을 나무 혹은 천, 가죽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굴레 장식의 금판은 얇아서 목제조각의 흔적이 그대로 찍혀서 문양으로 남은 것인데, 이러한 기법은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트를 제작할 때도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제로 조각을 한 굴레장식을 금박으로 감싼 것은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 특징이다.

동유럽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금으로 굴레장식을 제작할 경우 주로 중량감이 있는 금판으로 제작되어서 목제굴레장식판은 알타이의 특징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흑해지역에서도 이런 특징이 발견된다. 물론 많은 유적은 아니지만 일부 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굴레장식판은 전체 모양은 나뭇잎 모양이지만 세부표현은 물고기 장식이다. 나뭇잎 모양의 굴레장식은 볼쇼야 침발카 유적, 노사키 유적, 츠미레바 유적 등에서 출토되어 기원전 4세기 흑해지역 굴레장식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Манцевич А. П. Курган Солоха: Публикация одной коллекции. – Л., 1987.

(만체비치 1987, 솔로하 쿠르간)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가이모노바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문양은 간두령, 머리장식에도 사용되었고 각배라고 불리는 뿔잔에서도 장식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2점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뿔이나 금속제로 제작된 스키타이 각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적은 가이모노바 유적의 큰 각배와 이 외에도 세미브라트니예 유적의 4호와 타라예프스키 유적에서 알 수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는 큰 유물과 작은 각배가 있는데 그 중에서 작은 각배(전체 길이 27cm, 구부러진 부분은 6.2×6.9cm, 끝 부분의 길이는 4.9cm, 양 머리 길이는 2.1cm)는 양머리가 장식된 가장 끝 부분과 그 반대의 가장자리가 남아 있었다(1/3가량). 은제품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1번 무덤방 출토 작은 각배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1번 무덤방 출토 1: 큰 각배와 작은 각배, 2: 큰 각배의 금판 문양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의 큰 각배의 세부

 

 

큰 유물( 전체길이 41.8cm, 금판 길이 15.5cm, 은판길이 21cm, 입구길이 6cm) 세 부분으로 나눠져서 만들어진 것인데 가장 큰 부분은 금판, 중간부분은 은판이고 중간에 두 부분을 연결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 이 중에서 금판에는 동물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남성, 새, 나무가 수평적으로 3개 물체가 층위를 이루며 그려져 있다. 비드질랴는 이 유물이 당연히 스키타이 장인이 제작했는데, 다만 덩굴문양인 팔메토는 그리스 문양으로 이를 혼합해서 제작한 것으로 보았다.

 

각배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흑해 및 카프카스 북안(흑해 좌안), 트라키아 지역에서만 제작되었고 동쪽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유물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말 그래도 뿔로 제작되었고 ‘뿔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주로 흑해지역에서만 확인된다(막시모바 1956).

 각배는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기원전 7세기 부터 발견되지만 실제로 유물은 드물지만 전사가 그려진 석인상에서 볼 수 있다.  

 석인상 137점 가운데 40여점에서 각배가 조각된채 발견되어서  매우 애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석인상도 있지만 기원전 5세기 유물이 대부분이다.  기원전 4~3세기가 되면서 크림지역에서도 유행하게 되고,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크림 반도 북쪽)에서는 크림반도나 코카서스 지역보다는 실제 각배 보다는 석인상에서 많이 발견되고(올호프스키 2005) 금속제가 이 시점에생기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이모노바 유적(드네프르강 유역, 흑해북안 초원지역)에서 발견된 특히 스키타이 장인이 제작한 각배는 실제로 남아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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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아에서 유행한 각배는 가장 빠른 것이 기원전 5~4세기 전반이고 늦은 유물은 기원전 4세기도 있다. 하지만 트라키아에서 발견되는 각배는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문헌

Ольховский В. С. Монументальная скульптура населения западной части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эпохи раннего железа. – М., 2005. (올호프스키 2005, 유라시아 초원 철기시대 서부지역의 기념 석인상)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가장 큰 무덤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하나의 봉분 아래에 4개의 무덤방이 설치된 것이다. 1번과 2번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설치한 것이고 3번과 4번은 무덤봉분을 파서 만든 무덤이다.

 

특히 2번 무덤방은 땅을 가장 깊게 파고 설치한 곳이다. 무덤평면도에서 2번 무덤방을 중심으로 생토층이 표시되어 있는데, 인간이 손대지 않은 땅을 표시한 것이다(그림 1). 2번 무덤방의 깊이는 7m 정도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평면도

 

2번 무덤방의 중심무덤방은 매우 특이한데 입구는 돌로 막았으며 수직으로 파고들어간 무덤방 아래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고 다시 옆으로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든 구조이다(그림 2-라). 무덤방 입구아래에 무덤을 설치하지 않고 굴을 파서 만든 구조는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무덤방의 평면 모습은 다르지만 입구 아래에 바로 무덤방을 만들지 않은 것은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무덤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2번 무덤방 평면도(가)와 단면도(나~다)(필자편집), 나: 평면도의 I단면, 다: 평면도 II단면, 라: 평면도의 III단면

 

2번 무덤방 입구의 서쪽에는 가짜 입구와 말무덤이 설치되어 있다. 말 무덤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한쪽에 돌로 채운 구조인데(그림 2-나) 2번 무덤방 입구 만큼 깊지 않다. 말 무덤 아래로 도굴괭이 다달았다. 도굴괭은 중심무덤방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말 무덤 아래까지만 있었다. 그리고 중심무덤방은 말 무덤, 입구, 도굴괭 보다 가장 깊었기 때문에(그림 3) 2번 무덤방까지 손대지 못하고 말 무덤에서 방향을 틀어서 1번 무덤방의 입구인 2번 무덤방 입구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그림 1).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2번 무덤방의 단면도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은 매우 특이한 것이 크게 만들면서도 어느 정도 도굴을 방지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가이모노바 유적에서도 무덤입구 아래에 바로 매장주체부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방을 여러 개 만들었다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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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봉분을 크게 만들면 후대에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통? 혹은 규칙?의 예절?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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