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로마제품은 사르마트 문화의 사람들이 애용했다. 로마에서 주로 수출하던 물건은 토제 암포라(손잡이 두 개 달린 항아리)와 유리제품과 붉은색 옻칠을 한 그릇이다. 주로 로마 구경 근처와 흑해 북안의 도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지에 산지해 있다. 또 러시아의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림 1. 사드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의 은제 그릇의 내부,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켄타우로스
그림 2. 1세기, 유라시아의 제국
그런데 로마의 유물로 생각되는 은제 그릇은 그 출토범위가 다르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러시아 국경 안인 볼가와 쿠반(코카서스 북부)지역과 그리고 돈 강 유역에서 비교적 발견되는 편이다(클레인 2016).
아이러니 하다. 로마의 유리를 사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부자들은 로마의 은제 식기는 사지 못했을까? 로마의 아름다운 예술적인 식기를 1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사르마트 사람들은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 취급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돈강 서쪽의 사르마트 사람들과 흑해북부의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매장방법 즉 전통이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1~2세기 돈강 서쪽에는 매우 많은 유물을 부장하는 전통이 있었고 사르마트 고유한 그릇이 부장되었다. 예를 들면 사도브이 유적(은제 쟁반 8점 나옴)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흘라치 무덤의 동물장식이 있는 청동솥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은제 식기는 무역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도브이 무덤의 주인공은 그것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그럼 전쟁에서 이긴 획득물일까?
전쟁에서 이긴 물건이라면 패자들에게 약탈을 하던지, 조공품이었던지, 배상금이었던지 물건을 선별적으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은제품은 선별적이었다. 그리고 사르마트 귀족들이 주문제작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했던 동물문양으로 장식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완전히 로마 자신들의 스타일이었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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