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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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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18.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돈강 유역부터 흑해 북안을 차지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에서는 그 이전 스키타이 문화와 구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지만 1세기경이 되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로마제품은 사르마트 문화의 사람들이 애용했다. 로마에서 주로 수출하던 물건은 토제 암포라(손잡이 두 개 달린 항아리)와 유리제품과 붉은색 옻칠을 한 그릇이다. 주로 로마 구경 근처와 흑해 북안의 도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지에 산지해 있다. 또 러시아의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림 1. 사드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로마의 은제 그릇의 내부,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켄타우로스

 

 

 

그림 2. 1세기, 유라시아의 제국

 

그런데 로마의 유물로 생각되는 은제 그릇은 그 출토범위가 다르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러시아 국경 안인 볼가와 쿠반(코카서스 북부)지역과 그리고 돈 강 유역에서 비교적 발견되는 편이다(클레인 2016).

 

아이러니 하다. 로마의 유리를 사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부자들은 로마의 은제 식기는 사지 못했을까? 로마의 아름다운 예술적인 식기를 1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사르마트 사람들은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 취급했을까? 아니면 그들에게는 너무 비싼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돈강 서쪽의 사르마트 사람들과 흑해북부의 우크라이나 사람들과는 매장방법 즉 전통이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1~2세기 돈강 서쪽에는 매우 많은 유물을 부장하는 전통이 있었고 사르마트 고유한 그릇이 부장되었다. 예를 들면 사도브이 유적(은제 쟁반 8점 나옴)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흘라치 무덤의 동물장식이 있는 청동솥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은제 식기는 무역품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사도브이 무덤의 주인공은 그것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그럼 전쟁에서 이긴 획득물일까?

전쟁에서 이긴 물건이라면 패자들에게 약탈을 하던지, 조공품이었던지, 배상금이었던지 물건을 선별적으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은제품은 선별적이었다. 그리고 사르마트 귀족들이 주문제작한 것이라면 그들이 좋아했던 동물문양으로 장식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완전히 로마 자신들의 스타일이었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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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7.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늦은 시기인 1세기경에는 로마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마치 그 이전 기원전 4세기 이전에 그리스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과 같다.

 

돈강 하류의 유적인 사도브이 유적에서는 8점의 은제 쟁반이 발견되었다. 쟁반의 가장 중앙은 둥근 원판 안에 그리스로마신화가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라고 퉁쳤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제는 4개이다. 네레이스(바다의 님프)와 관련된 것 3점, 네레이스와 바다 켄타우로스와 관련된 장면 2점, 큐피드와 프시케 2점, 포도따기와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것 1점이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로마신화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르다(클레인 2016).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쟁반

 

그리고 은제 쟁반은 그 주변을 깃털모양을 편 것처럼 음각 처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깃털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 주물로 제작된 이 유물은 당연히 중앙의 원판과 주변은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고 이를 테두리가 감싸고 있다. 하지만 은 자체는 완벽하게 동일한 제품이다. 그래서 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2007)은 유물들이 세트로 제작되지 않았고 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특히 중앙의 원판은 그릇의 중앙 크기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아서 테두리로 이를 연결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그릇 1개 혹은 짝을 만드는데는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8개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지 않던 사람이 주문자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모르드빈체바 외 2007).

 

그런데 이 유물이 로마제품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왜 은제 그릇이 사르마트 사람의 무덤 속에서 발견되었는가?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Мордвинцева В. И. и Трейстер М. Ю. 2007.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ревтики и ювелирного искусства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II в. до н. э. — II в. н. э.). Симферополь — Бонн, Универсум — Тарпан.(모르드빈체바, 트리이스트르 2007, 흑해북안에서 발견되는 명작 예술품의 제작방법)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6.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에서는 외부지역에서 온 유물이 출토된다. 로마(다차 유적, 노보-알렉산드로프카 I유적) 에서 은제 그릇들도 있지만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유물도 발견되었다.

비소치노 유적은 수십개의 쿠르간이 열을 지어서 발견된 유적이다. 그곳에서 비소치노 VII유적에서는 파르티아에서 제작된 주전자가 발견되었다. 은으로 제작된 후 문양에 금박으로 입힌 것인데, 매우 눈길을 끄는 유물이다.

 

쿱신(액체를 담는 용기)는 의례용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그 문양이 더 의미심장하다. 쿱신의 동체부는 상단과 하단이 나눠져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단에는 새와 맹수가 하단에는 물고기와 인간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하단에는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장면과 물고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유적을 발굴한 루카센코는 이 유물이 의미하는 바를 아베스타에서 말하는 우주관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낚시하는 장면을 재생, 부활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 이란의 의례행위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행위가 목욕인데, 재생을 의미한다. 물고기를 타고 오는 장면 자체가 물 속에 있는 장면을 의미하며, 재생을 비유한 장면이고, 낚시는 재생을 위한 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림 1. 비소치노 II유적의 은제 쿱신

 

 

그림2. 그림 1의 상세

 

루카센코가 이 문양을 해석하려고 한 이유는 쿱신의 용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무덤속의 액체음료를 담아 두는 행위는 사카 문화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사르마트 문화나 스키타이 문화에서 그릇에 동물을 장식하는 것은 주로 손잡이에만 장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용기의 몸통에 동물문양을 장식하는 것은 사르마트 문화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기원후 1세기의 유라시아 동쪽에는 사르마트 문화 이남에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이 강성했을 때이다(그림 3, 클레인). 그래서 사르마트 문화 후기에는 아조프해연안에서 로마제국의 유물이 많다(클레인).

 

그림 3. 기원후 1세기 사르마트 문화와 그 외부 지역 (클레인 2016)

 

 

참고문헌

Беспалый Е. И., Головкова H. H., Ларенок П. А. Поминальные памятники IV в. до н. э. — III в. н. э. Доно-Каргальницкого водораздела//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1989 №03(베스팔르이 1993, 기원전 4~기원후3세기 돈강 유역의 유적)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С.И. Лукьяшко. Древнеиранский космологический сюжет на серебряном кувшине из сарматского погребения у г. Азова.//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루카센코, 2008, 아조프 해연안의 사르마트 문화 무덤에서 발견된 은제 쿱신에 새겨진 고대 이란의 우주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4.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다차 유적과 함께 화려한 황금유물로 유명한 호흘라치 유적은 노보체르카스크 시에 위치한다. 이곳은 돈강 유역의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사르마트 문화의 또 하나 쿠르간이 잘 알려져 있다. 사도브이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분의 높이는 2.2m, 직경은 44~48m가량이다. 중앙에 무덤방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은제 쟁반과 청동제 솥과 금을 도금한 청동제 쟁반, 펠레라, 토기, 철제투구 등은 무덤의 경계 안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다차 유적처럼 유물을 숨겨두는 별도의 공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봉분의 경계 안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사도브이 유적의 평면도, 기원후 1세기

 

유물 중에 일부는 의례행위때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물을 한 곳에 모아두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해서 이곳저곳 매장하는 방법도 일종의 도굴방지에 대한 대책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니면 매장된 주인공의 성격이 사르마트 문화 보다는 다른 문화에 더 가깝다는 추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은제 쟁반은 모두 8점(그림2)으로 바닥 중앙에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그림 3)와 관련된 형상이 주조된 것이었다. 신화와 관련된 유물 가운데는 포도원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장면도 남아 있다(그림 4). 그런데 이 유적의 이름은 ‘사드브이(정원 주로 과수가 있는 정원을 의미)’이고, 유적이 발견될 당시에 포도재배연구소의 연구부지 내에서 발견되어서 상당히 상징적이다. 금도금한 청동쟁반(그림 2)은 뒤집어졌고 그 아래에서 은제 쟁반 8점이 발견되었다.

 

은제 쟁반 외에도 그리스의 특징적인 암포라(그림 5)도 출토되었다.

 

그림 2. 사도브이 유적의 금도금 청동쟁반(가장 큰 것)과 은제 쟁반

 

그림 3.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세부

 

그림 4. 사도브이 유적의 은제 쟁반 세부

 

그림 5. 사도브이 유적 그리스 토기

 

 

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사르마트 문화의 청동솥과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팔레라도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6. 사도브이 유적의 팔레라

 

그림 7. 사도브이 유적의 청동솥

 

무덤방은 텅비어 있었기 때문에 피장자(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출토된유물이나 부장방법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그 어느 중간 쯤에 있는 무덤이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7. 13. 09:22 사르마트 문화

 

돈 강 유역에 위치한 다차 유적은 매우 화려한 사르마트 문화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주목받았다. 화려한 유물은 주로 마구와 말을 장식하던 도구와 피장자의 검과 팔찌였다.

말을 치장하는 도구는 재갈멈치나 덮개 외에도 둥근 원판형으로 팔레라(Phalera) 라고 불리는 유물이 있다.

 

사실 팔레라는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늦은 기원전 4세기 유적에서도 나오는데, 사르마트 문화와는 그 모습이 다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금속제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인물들이 표현되었다. 하지만 사르마트 문화의 팔레라는 황금과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다차 유적의 팔레라는 여러 유색 돌을 감입해서 만들었다. 팔레라는 크기와 모양에 따라서 여러 점이 부장되었는데 그 중에는 쌍으로 발견된 것이 있다. 중앙에는 마노가 박혀 있고 그 가장자리는 황금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상단을 여러 유색보석으로 감입한 것이다.

마노를 둘러싼 부분에는 사자 3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자 3마리의 사이에는 4개의 붉은색 타원형 석류석에는 여성을 새겨 넣었다.

 

 

그림 1. 다차 유적에서 출토된 팔레라, 직경 13.5cm, 마노의 직경 8cm

 

그림2. 그림 1과 동일 유물

 

그림 3. 그림 1의 세부

 

그림 4. 팔레라의 사용 예(클레인 2016)

 

팔레라 라고 불리는 유물은 흑해 주변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재질에 국한되지 않는다면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이미 기원전 5세기경 유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는 굴레에 나무로 된 여러 장식들을 달았다. 사람얼굴, 동물장식, 원판형 장식 등이 있었다.

 

 

그림 5.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마구세트

 

다차 유적은 1세기로 알타이의 유적과 비교하면 500년 이상 후의 유물이기 때문에 재질과 만드는 방법과 형태 등은 변화가 심하다. 하지만 말에게 화려한 장신구를 달아서 치장시키는 그 행위는 오랫동안 남아 있다. 어쩌면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참고문헌

Клейн Л.С. Первый век.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ских курганов, СПб.: Евразия, 2016. (클레인, 2016, 1세기, 사르마트 문화 쿠르간의 보물)

Беспалый 1992 — Беспалый Е.И. Курган I в. н.э. у г. Азова // СА. 1992. №1. С. 103-172.(베스팔르이 1985, 일천년기 아조프해의 쿠르간)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Азовский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ий музей-заповедник. // СПб; Азов: Изд-во Азовского историко-археологического и палеонтологического музея-заповедника. 2008(사르마트 인들의 富, 200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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