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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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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에 해당되는 글 27

  1. 2020.01.14 2500년 전, 시베리아샤먼 ? 얼음공주? 부장품의 의미
  2. 2020.01.13 2500년 전, 시베리아 무덤을 만든 나무와 설화
  3. 2020.01.12 2500년 전, 시베리아 여성샤먼의 무덤방과 관
  4. 2020.01.11 2500년 전, 시베리아 여성샤먼 무덤 속
  5. 2020.01.10 2500년 전, 시베리아 여성 샤먼의 죽음과 얼음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는 무덤방 안과 관속에서 유물이 확인되었다.

관의 뚜껑을 열자 얼음속에서 가장 머저 드러난 것은 머리부분이다(그림1). 이 여성은 오른쪽으로 누웠으며, 무릎은 살짝 굽히고, 손가락은 팔꿈치 쪽으로 굽혀서 배쪽으로 손을 모은 채 누워있었다(그림 2,3).

 

그림1. 관의 뚜껑을 열고 내부를 정리하는 장면

 

그림 2. 관 속

 

그림 3. 주인공의 손 모습과 전체 모습, 목걸이

 

통나무관의 바닥과 시신의 바닥에는 펠트제 깔개가 깔려 있었다. 펠트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은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상반부와 통나무관의 상부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이 입고 있는 실크로 만든 여밈없는 긴 블라우스와 긴 치마(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타이즈도 신고 있었다. 펠트, 옷과 타이즈 등은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의 대퇴부 부근에는 펠트로 만든 주머니 속에서 청동거울이 있었다. 나무틀 안에 보는 경면이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나무 손잡이의 끝에는 구멍이 남아 있었다. 손잡이 부근에는 다양한 색깔의 구슬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어금니도 있었다.

 

그림 4. 청동거울, 구슬과 화장품 출토장면
그림 5. 청동거울의 뒷면

 

목에는 목걸이(그림 3)가 있었는데, 표범장식(그림 6)이 붙어 있었다. 이 장식은 표범의 머리부분이 살짝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는데, 나무판으로 제작한 후, 금박으로 장식되었다. 금박은 얼음이 녹으면서 찢겨 나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6. 목걸이의 가장 중앙장식
그림 7. 아크-알라하 3유적 1호분 여성 주인공의 목걸이, 필자촬영

이 여성의 머리에는 높이 61cm의 말총가발이 있었고, 가발은 고깔모자(그림 9)가 씌어져 있었다. 모자에는 15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장식(그림 10)이 붙어 있었다. 가발에는 금박을 입힌 배지처럼 앉아서 상체를 돌린 모습의 사슴모양 목제 장식을 붙였다. 머리의 정수리에는 머리를 모아서 꼬아 올려, 붉은 주머니로 쌓고 그 끝에는 사슴모양 장식이 붙어 있었다(그림 11). 나무로 다리를 굽힌 동물모양(그림 11의 가장 왼쪽)을 원형장식위에 올린 것이다. 금박되었다. 귀걸이도 착용했는데, 둥근 고리모양이다. 그 부근에 석제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탄화된 고수의 씨앗(그림 8)이 있었다.

 

 

 

 

그림 8. 석제 그릇
그림 9. 꼬깔모자
그림 10. 꼬깔모자 장식, 목제, 새

그림 11. 가발을 여성 복원도, 가장 왼쪽이 정수리를 장식한 사슴장식이다. 다리를 굽히고 있다. 오른쪽은 미라의 머리를 근접해서 찍었는데, 미라제작은 따로 설명할 예정이다.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 중 아크 알라하 3유적이라고 하는 유적의 1호분의 주인공인 이 여성은 일반인들에게는 얼음공주라고 알려졌고, 좀 더 자세하게는 샤먼의 지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샤먼인지, 가장 최상급의 신분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는 부장품 때문이다. 현재 가장 최상급 무덤은 알타이 산맥에서는 또 다른 유적인 파지릭 고분이 최상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 무덤의 크기 뿐만 아니라 부장품의 양과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파지릭 무덤에서는 마차가 통째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번달의 주인공인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의 부장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림은 7번을 빼고 아래 책을 참고했다.

 

참고문헌

https://scfh.ru/papers/put-k-nebesnym-pastbishcham/

https://scfh.ru/papers/dvadtsat-let-spustya/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문화는 유라시아 전역에 넓게 퍼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알타이 산맥의 고분문화를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아크-알라하 3유적도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이다. 이 파지릭문화에서 목곽과 목관을 만든 것은 모두 낙엽송이다. 수레, 집도 낙엽송을 하용했다. 큰 나무는 통나무관을 만드는데 썼다.

 

아크-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쓰인 목곽에는 집의 일부를 그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현대의 알타이 주민의 집인 아일라처럼 생긴 다각형 집의 일부를 나무방인 목관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아크-알라하 유적 뒤에 갑자기 왜 번호가 달라질까? 러시아 유적명칭은 앞은 행정구역 혹은 가장 가까운 마을이름 이고, 뒤의 번호는 유적을 찾은 순으로 학자들이 우리로 치면 문화재청과 같은 곳에 등록을 한다. oo1, oo2, 003......등 그래서 아크-알라하 1유적과 아크-알라하 3유적은 그 성격이 다르다. 앞으로 계속 설명해드리겠지만, 파지릭문화의 사람들은 한 계곡에 한 가족의 무덤을 썼다. 열을 지어서...)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낙엽송을 ‘밝은 나무’라고 생각한다. 니브히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고, 셀쿠프 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다. 만시의 신화에는 신성한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지릭유적의 4호분과 5호분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판 낙엽송 통나무 토막이 발견된 바 있다. 길이가 3.17m인 통나무에는 9개, 4.13m의 나무에는 8개의 홈이 파여져 있었다. 일정한 사다리였던 것으로 본다(루덴코 1953).

쿠로키친은 의례에 사용된 사다리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1994). 셀쿠프족은 하늘의 신께 가는 사다리라고 부르거나 나무에 올라가기 위한 것으로 부른다. 그리고 샤먼이 이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프로코피예바 1977).

 

 

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사다리 중의 일부 (루덴코 1953)

 

 

 

파지릭문화에서 통나무관을 쓰는 것은 파지릭유적의 왕족급 고분 및 쿠투르군타스 1유적 1호분의 전사무덤,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샤먼 무덤, 아이무덤에도 사용되었다. 통나무관은 모든 무덤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일부 무덤에서만 사용되었다.

러시아학자들은 통나무관을 쓴 주인공은 일정한 계급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통나무관을 쓰고, 귀때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으며, 인생을 상징하고 가족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돌려보낸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는 연기를 들어마시는 훈증법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고 주변을 정화시키는 의식으로 생각한다. 헤로도투스도 스키타인이 대해서 남긴 기록에 정화의식에서 대마를 사용한 기록이 나온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이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동복, 6개의 나무막대로 이루어진 뼈대, 천막을 친 가죽덮개, 동복속의 돌, 대마씻앗이 그대로 담겨서 출토된 바 있다.

 

파지릭유적 설명할 때 사진을 공개하겠다.

파지릭문화의 사람들, 아크-알라하 3유적에서 발견된 여성을 포함한 사람들의 무덤은 사실 전부 나무와 풀로 덮혀 있다. 나무방과 목관, 미라 속을 채운 식물, 가발, 장신구등도 전부 나무로 제작되었다. 알타이 고원에서 확인되는 황금장식은 목제에 금박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무덤에서는 얼음이 녹으면서 금박이 찢겨나가서 금박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 이 문화의 유물을 볼때는 번쩍거리는 것만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 다시 보니깐,,,아크-알라하 3유적은 나무로 뒤덮혀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유적이 그런건 아니다. 이 문화는 황금유물로 유명해졌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에서 말했듯이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은 주인공의 무덤방 천장 위에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이 하나 더 얻혀있었다. 이 무덤을 걷어내자, 그 아래에는 통나무 11개로 제작된 나무방(목곽)의 천장(2.3×3.6m)이 드러났다.

 

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은 통나무를 집처럼 설계해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관이 있었다. 이 무덤방의 천장을 드러내자 그 내부는 얼음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무덤방과 관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유물이 50점 가량 확인되었다. 앞서서 포스팅한 비디오에서 나무로 만든 잔과 뿔로 만들어진 잔 등, 목제 쟁반 등이 드러난 곳도 그곳인데, 이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설명드리겠다.

 

 

아쉽게도 이 글을 참고하고 있는 책에는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무덤방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다.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서 안쪽을 편평하게 다듬은 나무를 사용했다. 사진으로 확인가능한 것은 무덤방의 짧은 길이에 4개의 나무판을 사용했고 다 같은 높이 인점을 본다면 대략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림1).

 

 

얼음이 녹자 통나무관의 뚜껑이 드러났다. 통나무관(그림 245)은 통나무 안을 파서 만든 것이다. 끝에 귀때기가 붙은 것이다(그림 2~54). 이 부분은 못을 밖기 위한 것인데, 이 유적에서는 청동 못 2개가 밖혀 있었다. 다른 유적에는 나무정이 밖히기도 한다. 길이가 2.73m, 내부의 깊이는 0.3m, 밖에서 본 높이는 0.68m이다.

 

 

그림 2~4 아크-알라하 3유적 1호분, 2008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에서 촬영. 현재는 고르노 알타이시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음. 

 

얼음이 녹자 관의 뚜껑이 드러났고, 그 뒤에 관을 장식하던 길이가 38cm가량인 가죽으로 만들어진 사슴모양 아플리케가 보였다(그림 5). 아플리케 장식은 조각난 상태였고, 6~7개 개체로 생각된다(그림6 ). 아플리케는 유치원에서 하던 종이를 접어서 가위로 오려 문양을 만드는 것이다. 참고문헌에는 이 사슴모양 아플리케 그림이 없어서, 알타이 고원의 또 다른 무덤 유적인 파지릭무덤의 1,2호분 자료로 보여드린다. 1호는 수탁 모양(그림 7), 2호(그림8)는 사슴모양의 아플리케이다. 이 유적도 앞으로 설명드릴 여정이다.

 

그림 5. 얼음이 녹자 드러난 관의 장식, 가죽, 사슴모양의 아플리케
그림 6, 2008년 필자 촬영,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그림 7. 파지릭고분1호
그림 8. 파지릭고분 2호

요즘은 샤먼 혹은 무속인들은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해발 2500m의 우코크 고원에서 장례는 엄청나게 오랫동안 계획되었고, 기획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알타이 고원에 살던 2500년 전 여성의 수명은 29.6세, 남자는 38.5세였다. 그리고 나무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채벌기간은 3.5년에서 8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대부분 39년 이내에 준비되었다. 사람이 죽기 전부터 이미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알탕타이 고원의 스키타이 시기 민족의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얼음이 녹자 드러난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샤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덤을 발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아크-알라하 3 유적은 3m(지표에 드러난 돌에서부터)로 네모 구덩이(3.6×4,4m)를 파고 가장 바닥에 나무로 무덤방(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관(목관)을 넣었다. 그리고 구덩이는 돌로 채워 넣었다. 구덩이 뿐만 아니라 지상에도 직경 10m 범위로 높이 50cm가량으로 둥글게 돌을 쌓았다.

 

 

 

 

 

무덤의 단면도(그림 2)에도 표시가 나지만 목곽의 주변에는 지표와 가까운 곳 보다 큰돌과 작은 돌을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섞었으며, 지표와 가까운 쪽은 작은 자갈을 채웠다. 지표의 흙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가장 상층 중앙부를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다(그림 3). 왜 일까? 무슨 흔적일까?(답은 조금 있다가...)

 

그림 3. 

 

이 중앙의 돌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경계로 볼 수 있는 호석이 드러났다.(그림4) 호석의 직경이 10m였다. 

 

그림 4. 무덤의 둘레를 표시하는 돌(호석), 그림1의 사진을 조감도로 그려놓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돌을 드러내자 바닥에서 깊이 1m 가량에서 무덤구덩이의 동쪽에서 말 3필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말 2마리는 두향이 동쪽이었고, 완전히 옆으로 뉘웠으며, 말 한 마리는 이 말의 다리 부위에서 확인되었다. 이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확인되었다(그림 5) 3필을 드러내자 그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그림 6). 이 무덤은 뭘까? 여성샤먼은 그 보다 아래에 있다.

그림 5.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가장 상층 말 3필

그림 6. 말 3필을 드러내자 확인된 카라-코바문화의 추가장(b,c). b-추가장의 덮개돌, c-추가장의 덮개돌을 드러낸 목관, d-추가장의 덮개돌을 들어낸 모습, 가장 아래쪽의 나무는 주인공 무덤의 천장이다.

 

말을 드러내자 이 무덤의 덮개인 납작한 판돌이 확인되었고(그림 6-b), 나무판자로 제작된 목관(2.2×1m)(그림 6-c)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의 덮개돌과 목관은 원래 무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성샤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무덤은 알타이 고원의 살던 카라-코바 문화의 것으로 밝혀졌다. 추가장의 흔적이다. 알타이에서 종종 확인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에서는 시신이 흩어진채 확인되었고, 유물자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그림 6-c).

왜? 그 당시에 이미 도굴되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시신의 살이 붙어 있을 때 이미 도굴되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추가장의 무덤이 목관이 네모반 듯 하지 않고, 마름모꼴에 가까우며, 인골의 뼈가 흩어진 흔적들은 무덤이 얼어 붙기전에 도굴되었을 꺼라고 생각한다.

 

카라-코바의 무덤 때문인지, 카라-코바의 무덤을 도굴할 때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표토를 벗겨내자 무덤의 경계선(호석)안을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던 이유( 그림 3)도 그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여성샤먼, 주인공의 무덤은 전혀 도굴당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1.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 무덤에서 미라를 들어올리는 장면.

 

그림 2.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 샤먼 관 속 얼음

 

그림 3. 아크-알라하 3유적의 무덤방 속에서 들어난 목제 쟁반과 그 위의 동물뼈(고기덩어리)였음.

그림 4. 아크-알라하 3유적의 관에서 미라를 꺼낸 직후

 

*위의 사진은 우코크 고원의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주인공이 다시 땅위로 올라오는 장면부터 거꾸로 편집해 보았다. 그녀는 무덤속에 들어갈때 이와는 반대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참고문헌에서 발췌된 것이다. 

 

스키타이문화의 미라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얼음공주라고 처음에는 제목을 붙이고, 어제는 여성 샤먼이라고 했다. 사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은 무덤 속에서 얼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춥다’라는 이미지와 신비로움, 대중성 때문에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였다. 그러나 정작 발굴한 사람들은 가장 최상위 계급은 아니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그녀는 살아서 샤먼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보다 더 화려한 부장품이 들어간 무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아니면 보이는 거와는 달리 일반인들은 못살았는지 모르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말 6필을 무덤 속에 그녀와 함께 묻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설명할 때 학생들에게 벤츠 최상급 기종 6대를 무덤에 밀어넣은 거랑 같은 거라고 설명한다. 애들도 꺄르르 웃는다.

어느 문화에서나 장례식은 살아있는 자들의 잔치다. 보이기 위한. 레닌을 미라로 만든 이유도 스탈린의 권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레닌 무덤을 만들고 보관하던 기술은 이 미라의 복원과 보관을 위해서 활용되었다. 또 김일성도...

 

스키타이 문화는 놀랍게도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누구일까? 어느 책일까?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책은 기원전 450년에 쓴 책인데, 이 책의 4장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스키타이 원정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때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스키타이 민족의 강역, 주변민족, 기원과 생활풍습, 전쟁풍슴, 종교 등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논란이 있는 부분은 여러 곳이 있겠지만, 특히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 어느 지역 사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문화는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는 주장과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스키타이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문화는 흑해북안부터 시베리아, 동쪽의 끝은 중국 오르도스 지역까지 그 분포범위가 광대하다. 헤로도투스가 시베리아까지 와서 스키타이족을 보았다는 설은 헤로도투스가 설명한 내용이 실제로 그대로 발굴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설명드리기로 하고 여성 샤먼을 주변으로 해서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 인들이 왕의 장례 치르는 모습을 다음과 설명했다.

‘왕이 죽으면 그 곳 땅에 큰 사각형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가 완성되면 전신에 발삼처리를 하고 마차에 시신을 싣는다. 그 전에 시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전부 꺼낸 다음 그 안에 생강, 향료, 파슬리씨, 아니스를 넣고 다시 봉합한다. 그런 후에 시신을 마차에 실고 다른 부족에게 간다’

 

헤로도투스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도 죽은 후 곧바로 매장하지 않았다. 최소 3개월이 지나서 매장되었다는 분석에서 보듯이 그들의 장례 치르는 기간은 매우 길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같이 매장된 말이 먹은 건초가 6월 중순 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꽃가루분석결과도 이 시기로 판명되었다.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땅에 묻히자 말자 냉동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무덤은 관과 곽(관을 넣은 무덤방을 곽이라고 한다)이 얼음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도굴이 불가능했다.(알타이 산맥의 여러 유적 고분은 쉽게 도굴당했다. 아이러니하게 무덤을 상징하는 봉분이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알타이라고 해도 무덤 내부가 완전히 냉동되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깊이 3m의 토광을 파자마자 지하수가 차올랐고 그대로 냉동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더운 여름이라도 3m정도를 파면 그곳은 얼음 덩어리처럼 단단하게 얼었다. 미라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특수한 처리 때문 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얼음 때문에, 영구동토대였기 때문이다. 우코크 지역에 살던 2500년 전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를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정한 계급이상의 사람이 죽으면 미라 처리를 하고 땅이 바로 얼 수 있는 기간 까지 기다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죽은 지 3~6개월이 지나서 주로 봄과 가을에 매장했다(폴로스막 2001).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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