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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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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포스팅은 흑해 지역의 철기 제작소를 찾아서 헤매어 다닌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빠짐 없이 출토되는 것은 화살촉이다.

 

그런데 활과 관련된 스키타이 신화가 있다.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특유의 화살통)를 늘 차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타르기타우스와 관련된 것이다. 타르기타우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신화 속의 인물로 스키타이 땅에 최초로 태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그에게 3아들이 있었는데, 활을 당기고 허리띠를 맬 수 있는 아들을 드네프르강의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이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 3째 아들(schytes)로 타르기타우스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신화와 관련된 유물이 차스티예 쿠르간(기원전 4세기)에서 발견되었다(그림 1~4). 은 항아리인데, 타르기타우스는 고리트를 차고 있고(그림 2의 우측, 그림 3-2), 그가 활을 건너는 인물이 3째 아들이다(그림 3). 첫 번째 아들은 전투용 도끼를 들고 있었으며(그림 2) 두 번째 아들은 창과 방패(그림 4)를 들고 있다.

 

스키타이 신화는 헤로도투스가 적은 역사의 4권에 스키타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 중에 한 부분이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신화, 강역, 주변 민족, 기원과 생활풍습, 전쟁풍습, 종교, 왕이 장례치르던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기원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자신들의 신화와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스키타이 신화는 약간 다르다.

 

 

그림 1. 차스티예 쿠르간 출토 은 항아리

 

그림 2.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우측)와 큰 아들(좌측)

 

그림 3.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와 셋째 아들(1)

 

그림 4.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둘 째 아들

 

한편, 비슷하게 생긴 항아리가 쿨-오바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위에서 전한 신화 속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그림 5).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5. 쿨-오바 유적 출토 금 항아리

 

신화와 고고유물을 비교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사실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은 유물에 대한 스토리를 넣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기왕에 있는 신화로 그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재미있다.

 

분명한 사실은 활과 화살을 넣는 고리트는 스키타이 유물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는 점이다.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동과 서쪽 지역의 대부분 연구자(알렉세예프, 쿠바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들이  화살촉을 연대 판단의 근거로 삼는 다는 점이다.(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살촉은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예가 왕왕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타르기타우스가 고리트를 차고 다녔다는 문구는 스키타이 사람들을 상징하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1989)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도네츠 강 유역에 위치한 루보틴 성곽 유적은 환호와 성벽으로 사용된 목조구조물, 집의 구조물 들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집도 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제작하던 공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청동과 철을 제작했던 장소(발굴범위 13구역내에서 확인, 평면도 참고)는 철제작 노와 그 옆에 있는 구덩이(103번)와 로 확인된다. 구덩이는 입구(1.6×1.5m) 보다 바닥이 더 넓은 형태(2.1m)로 바닥면이 편평하지는 않고 북쪽면에서 점차 내려간다(깊이 1.6m). 그 동쪽벽에는 점토로 만든 페치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쪽이 먼저 생겼는데, 바닥에는 황토가 20cm정도 두께가 남아 있다. 바닥에 남아 있는 구멍은 페치카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생겼을 수 있다. 위의 페치카가 허물어진 뒤에 아래 구덩이(103번 구덩이)로 점토가 흘러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동물뼈나 그릇 등 전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철제를 다듬는 곳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매우 잘 단조된 철제품이 300개 이상 나왔기 때문이다.(그래서 시람코는 이 곳을 '금고'라고 표현했다)

123번 구덩이는 철 제작 노가 생기기 전에 이미 생겼던 곳인데, 노를 만들던 새람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설명되었 있는데, 필자도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작 노(爐)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송풍관(토제품)

 

단조를 위해서는 1000도 가까이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송풍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유적에서는 송풍관으로 추측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그림 2).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는 오랫동안 불에 노출된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의 용도로 추측된다.

 

단조된 철제품으로 보아서 노가 운영되던 시기는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이 성곽이 기원전 7세기 말이라고 했던 것은 이 노에서 나온 유물 보다 더 이른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루보틴 성곽에서는 어떤 집이 있을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와 반지하식 건물지가 있다. 지상식 건물지에는 노지가 남아 있고, 목조 구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지상식 목조집의 벽은 장대와 막대로 만들고 진흙을 덮어서 마무리했으며,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점토로 덮인 나뭇가지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

지상식 목조집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점토 범위 중앙에 기둥구멍(직경 40~45cm, 깊이 95~100cm)이 3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점토를 바른 목체만 발견되었다. 이 점토 범위에는 곡물보관 장소로 보이는 구덩이(28번 구덩이, 깊이 1.25m, 입구 90cm, 바닥 1.3m)와 점토로 만든 일종의 난로 혹은 페키차를 위한 구덩이(29번 구덩이, 95×70cm, 깊이 25cm) 가 발견되었다.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구덩이(20번 구덩이, 입구1.25, 바닥1.5m, 깊이 1.45m)도 발견되었는데 곡물보관장소이다. 발굴범위 6에서 발견된 집이다.

페치카는 국내에서 러시아의 벽난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러시아 일반 사람들에게 페치카는 난방 기능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오븐기능도 있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지상식 집의 복원도(2)와 점토범위(1), 10×12.5m

 

 

반 지하식은 타원형(2.6×3.3m, 깊이 1.35~1.48m)으로 구덩이를 바닥에 팠지만 집은 지상위에 있다. 바닥의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고, 동북쪽에 문이 설치되었다. 17호 집에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지하식집에 화덕자리가 있는 집도 있다. 발굴범위 9지역에서 이 집은 위치한다.

 

그림 2. 루보틴 유적의 17호 주거지의 구덩이와 그 복원도

 

성채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25동 정도 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의 크기 및 바닥에 구덩이를 판 것과 파지 않은 것 등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것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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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만 보다가 집을 보니 너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괴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다. 자료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가 너무 낯설다.

스키타이 성곽은 주로 생산 시설이 있는 경우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모형 집들도 발견된다. 무덤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하는 것은 구글맵으로 성곽 유적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주로 연해주 지역의 성곽을 많이 아니깐(번역한 적도 있음) 살펴본다. 그런 재미를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럴 시간이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림 1. 구글 위성으로 찾은 루보틴 성곽, 그림 2와 비교해 보시기를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사실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은 대부분 좋은 유물(보기 좋거나 학술적 가치가 큰)이 나오는 것은 무덤이기 때문에 성곽은 잘 살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계기가 되어서 이 자료 저 자료를 찾아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성곽 유적이 많다. 특히 루보틴 성곽은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좀 흥미로울 수 있다.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평면도, 숫자는 발굴된 범위이다.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유적으로 도네츠 강의 북부에 위치하는데, 우디강과 루보틴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다. 1961~1964년까지 발굴되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곳은 발굴범위 3으로 적힌 곳이다. 왜냐하면 성벽조사이기 때문이다. 성곽 유적은 오랫동안 사용되어서 축조된 연대를 특정하기 힘들다. 제일 윗 층에 남은 것은 그 유적의 가장 마지막 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축연대(처음 축조된 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성벽 절개면 조사를 해야 한다.

루보틴 유적에서는 성벽 절개조사를 했고 그 결과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성벽의 외곽으로는 환호가 돌아가고 그 안에도 벽(그림 3-2)을 세웠고, 환호 안쪽으로는 훨씬 단단한 성벽을 세웠다. 성벽은 두 개의 통나무 벽을 세우고 그 사이 공간은 흙, 모래, 점토 등으로 채워서 만들어진 것이다(그림 3-3). 목제 성벽의 높이는 2.7m이상, 너비는 1.8m이고, 환호바닥에서부터 수직으로 했을 때 성벽의 높이는 10m정도로 추정된다.

 

발굴범위 5는 서문이 있던 곳인데, 이를 복원하면 그림 3-4이다. 이 유적에는 남쪽에도 문이 있다. 성 안에는 직선적인 구획 계획은 확인되지 않지만, 서쪽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길 주변에는 건물지가 없었다. 이 도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와 교차된다.

 

그림 3. 루보틴 성곽의 환호의 바닥 평면도 (1)와 성벽의 단면도(2), 성벽의 위에서 본 모습(3),  문 복원도(4)

 

성벽이 남겨진 성곽은 루보틴 유적만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돈 강 유역의 스키타이 성곽이라고 알려진 하지만 남겨진 건축물은 그리스식 건물지 밖에 없는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은 어떻게 스키타이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윗층에 남은 그리스 건축물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에 해당되며, 그 곳에는 그리스식 토기(그림 1)들이 발견된다. 그리스식 집과 토기는 이 성곽에서 가장 마지막 시기에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찌되었던 스키타이 인의 입장에서는 불리하다.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기원전 3세기 그리스 토기

 

스키타이 문화에서 연대측정의 근거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화살촉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화살의 중요성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에도 스키타이 사람들은 고리트를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헤로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 신화에서 타르기타우스(그림 7) 라고 하는 사람이 스키타이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인물인데, 늘 고리투스를 착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남겨놓았다. 화살촉과 아키나크라고 불리는 단검 및 청동창이다. 단검과 청동창은 사실 스키타이 연대를 세밀하게 알지 못한다. 기원전 7~4세기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단검은 길어지며, 손잡이 끝장식은 동물의 뿔을 형상화 한 형태(그림 2-5~7)가 아니라 T혹은 역 V자(그림 2-37, 51~54,) 로 바뀌게 된다.

 

그림 2.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무기변화, 상단: 기원전 4~2세기, 하단: 기원전 7~4세기, 1~15: 검, 16: 투부(전투용도끼), 17~21: 청동창, 22: 찰갑(미늘 갑옷), 23-26: 갈고리

 

그림 3.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검

 

그림 4.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창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청동검(그림 3)에도 뿔 모양처럼 생긴 손잡이 끝장식이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적의 청동창(그림 4)의 모습도 기원전 7~4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살촉이다. 화살촉을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유럽 스키타이 문화나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시대별로 변화에 비교적 민감하게 변화되고, 지역성(지역)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5.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청동화살촉

 

그림 6. 유럽 스키타이 문화의 화살촉 변화, 2,4-볼가~돈강 유역, 3,5-우랄 남부

 

화살촉은 신부(몸통)의 단면과 자루를 끼우는 부분, 평면형태 등이 중요하다. 유물에 따라서 다른 부수적인 부분들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 대체로 유럽스키타이 유물들도 세 가지 기준으로 구분했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단면)양쪽으로 날이 있는 형태(양익형, 兩翼)이고, 기원전 6세기 이후가 되면 삼익형이 된다. 혹은 간혹 그냥 삼각형도 있는데, 외면에 홈이 없는 경우라서 그렇다. 삼익형의 단면은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대부분 삼각형으로 변화되고, 자루 끼우는 부분도 몸통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원전 7세기와 기원전 6세기는 신부(화살촉의 몸통)형태도 변화가 된다. 기원전 7세기 유물은 평면형태가 마름모에 가깝고 앞 부분만 날이 있는 형태이지만, 기원전 6세기 이후 삼각형에 가까우며 신부 전체가 날이 선 형태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태들이 발견된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의 화살촉은 이 점은 비슷하지만 화살의 동체부에 홈의 깊이 정도가 다르다.

기원전 5~4세기 유물은 단면과 자루끼우는 부분은 직전 시대와 유사하지만 화살촉의 앞 부분이 길어진다. 뿐만 아니라 화살촉 신부의 날이 좀 더 커지는 경향도 있다. 돈강 유역과 우랄 남부지역은 약간 다른 경향이 있는데, 우랄 남부지역(그림 6-)5에 단면이 양익형인 것이 생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와는 달리 자루끼우는 부분이 신부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이후는 훈-사르마트 문화 시기에 해당하는데 화살촉의 앞 부분이 더 길어지고 자루끼우는 부분이 바깥으로 나와 있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엘리자베틴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화살촉(그림 5)은 기원전 6세기 유물 혹은 기원전 5세기 유물과 유사하다. 그리스인이 집을 짓은 것은 기원전 3세기 1/4분기라고 하니, 이전에 이미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를 찾다가 스키타이 성곽이 생각보다 많이 발견되며, 훨씬 오래된 유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림 7. 차스티예 고분에서 발견된 은제 항아리 속의 타르기타우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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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은 무덤이다. 드물지만 흑해 주변의 드네프르 강 유역과 돈 강 유역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성곽 유적이 존재한다. 주로 강의 어귀에서 교통로에 위치한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위치한 스키타이 성곽이다. 기원전 4세기경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성 내부에는 아크로폴(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의 정착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구역은 매우 일부이고, 성곽지의 대부분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해서 돈 강 유역에 위치한 엘리자베인스코예 성곽을 살펴보도록 하자.

유적은 아조프해에 가깝게 위치하기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성은 좀 더 깊어 보인다.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은 두 줄로 된 성곽 안(성의 면적은 40~55헥타르, 평면형태 사다리꼴)에 마을 유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집의 건축물은 그리스 기술로 지어진 것이다. 지하에 땅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서 그 사이를 벽돌로 채우는 방법이다(그림 2,3). 지붕은 지표면 높이로 만들어졌다(그림 4)

성곽의 가장 중앙 내부에 아크로폴리스 라고 불리는 구역 안에는 그리스식 집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식 건물지가 들어선 것은 기원전 3세기의 1/4분기에 세워진 것이고, 그 구역은 12헥타르 정도이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1.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의 평면도(위: 1928년 작성, 아래: 1972년 작성),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24년이고, 1964년 이후로 매년 발굴을 했다.

 

 

그림 2.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내의 그리스 식 집

 

그림 3. 엘리자베트포스코예 성곽 집의 벽 구조

 

그림 4. 복원도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6~5세기 경이고, 이미 그 전부터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으며, 카멘스코예 성곽처럼 아주 적은 공간을 차지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집자리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계절에 따른 유목민이 머물던 장소로 겨울 도로가 남아 있다.

 

이 유적은 교통로에 위치하는데, 바로 인접한 돈강의 항구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엘리자베토프스코예 성곽이 스키타이 유적이라는 강력한 증거 중에 하나는 마을 앞에 위치한 스키타이 쿠르간 때문이다.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그림 5)이라고 불리는 쿠르간인데, 5기의 고분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다.

 

그림 5. 퍄티 브라체프 쿠르간

 

유적이 사용되는 동안 마지막에 남은 건물구조가 그리스식이어서 아크로폴리스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지만, 유적은 그리스가 세력을 팽창하기 이전인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고, 스키타이 철제 무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물론 그리스식 토기도 마찬가지로 많이 출토된다.

 

참고문헌

Марченко К. К., Житников В. Г., Копылов В. П. Елизаветов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ону. М., 2000(마르첸코, 지트니코프, 코피로프, 2000,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트토프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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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드네프르 강 유역의 카멘스코예 성곽은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이다. 유적에서는 청동과 철을 생산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도가니(그림 1), 화덕자리 및 그 과정에서 사용된 철 생산하던 끌과 망치(그림 2)와 같은 역할을 도구도 발견되었다.

 

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도가니편

 

그림 2. 카멘스코예 성곽, 철 끌과 망치

 

유물 가운데는 선철을 가공해서 1차로 만든 철 소재가 발견되었다(그림 3-1~4). 뿐만 아니라 청동 화살촉(그림 3-5)과 청동 솥의 용범(거푸집)(그림 3-6)도 발견되었다. 유적에서는 당연히 청동과 철로 된 화살촉(그림 4)이 있다.

 

 

그림 3. 카멘스코예 성곽, 1~4: 1차 철 소재, 5-청동화살의 거푸집(편), 6-청동솥의 거푸집(편)

 

그림 4. 카멘스코예 성곽, 화살촉, 1-12: 청동, 13~15: 철제품.

 

청동으로 된 화살촉은 1점을 제외하고는 청동화살촉의 형태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단면이 삼각형이며,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그림 4-2~7, 9, 12)과 약간 바깥으로 돌출한 화살촉이다(그림 4-8, 10). [물론 이외에도 화살촉 신부(몸체)에는 홈이 있지만 이는 부차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화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루와 결합되는 부분이다]

자루 끼우는 부분이 외부로 길게 튀어나온 청동화살촉 1점(그림 4-1)은 가지가 붙었는데,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형태이다.

 

철제 화살촉(그림 4-13~15)은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청동에 비해서 길다. 아마 소재에 의한 차이로 인해서 생겼을 것 같다.

 

카멘스코예 유적에서도 동물장식은 발견되는데 독수리 머리(그림 5-2), 사자머리(그림 5-3) 등이 발견되었다. 사자머리는 청동팔찌의 끝에 붙은 것이고, 독수리 머리는 정확하게 어디를 장식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은제품이다. 재갈멈치를 장식했던 발톱(그림 5-1)도 순동제 유물도 발견되었다. 사자다리 모양의 청동도장(그림 5-5)도 발견되었는데, 금제 장식판을 만들 때 사용된 것이다.독수리 눈모양이 달린 철제 장식품(그림 5-6)도 있다.

 

그림 5. 카멘스코예 성곽의 동물장식

 

카멘스코예 성곽에서 출토된 유물은 철기와 청동을 가공하기 위한 유물 외에는 동시기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동물장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과 청동을 실제로 생산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청동생산 가운데 화살촉을 제외하고는 다른 청동무기 제작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장신구와 솥 등을 생산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이전과 청동을 사용하는 범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접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Граков Б. Н. 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непре // Материалы и исследования по археологии СССР. М., 1954. № 36(그라코프 954, 드네프르 강의 카멘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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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의 주거 유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기원전 4세기 카멘스코예 성곽(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Kamenskoye settlement)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카멘’은 러시아어로 돌이라는 뜻]

 

발견당시 19세기는 러시아제국이었으나, 현재는 우크라이나 국경 속에 있다. 처음 유적의 평면도가 그려진 것은 1899년으로 이때에 발굴이 시작되었다(그림 1).

주로 발굴은 1938년부터 1950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1980년대에도 성벽조사가 이루어졌다(그림 2).

 

그림 1. 19세기에 작성된 유적의 지형도와 평면도

 

그림 2. 1938~1950년도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의 평면도와 발굴위치

 

 

그림 3. 1950년도 발굴범위 9에서 확인된 지상식 주거지

 

 

그림 4. 1950년도 발굴범위 9의 3번 주거지의 화덕자리 평면도와 단면도

 

이곳에서는 주거지가 수혈식 집도 있지만 대부분 지상식 주거지이고, 집 내부에 화덕자리가 있는 모습이다.

필자가 이 자료를 찾은 이유는 ‘아크로폴’ 때문이다. 아크로폴이라고 한 것이 필자가 알고 있는 ‘내성’의 의미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카멘스코예 성곽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성벽을 양쪽 끝에 쌓았다. 지형상 좁은 곳에만 성벽을 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크로폴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그리스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그리스식으로 공간을 나눈 구획은 확인되지만 사실 스키타이 사람들이 살았던 구역과 구분되었다. 한 공간에 거주한 것은 맞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좁은 공간에서 살았다.

 

생각보다 금속을 생산한 장소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굴범위 바깥에서도 여러 곳에서 금속기 생산하는 층이 발견되었다(그림 2). 이는 발굴 전에 그 층이 많이 노출되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그라코프는 이 유적이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Граков Б. Н. Каменское городище на Днепре // Материалы и исследования по археологии СССР. М., 1954. № 36(그라코프 954, 드네프르 강의 카멘스코예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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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시대의 사르마트 문화(스키토-사르마트문화)는 볼가 강~돈강 유역과 우랄 강 하류에 주로 분포한다. 유럽쪽에 더 가까운 볼가~돈강 유역과 아시아쪽에 더 가까운 우랄 강유역의 무덤은 구조차이가 있다. 이를 기준으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같은 문화이지만 지역유형으로 구분한다.

 

볼가~돈강 유역의 무덤은 봉분을 만들기는 하지만 무덤구덩이를 파고 그 위를 나무덮개 혹은 덤불 등으로 덮고 봉분을 쌓는 구조가 기원전 6세기부터 발견된다. 목조구조물 혹은 나무방 등을 무덤구조물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블류멘펜드 유적(기원전 5세기)(그림 1-2)과 레닌스크 유적 등이 있다.

 

반면에 우랄강 유역의 무덤은 일정하지는 않지만 무덤구조에 나무로 된 방을 만든다. 이미 포스팅한 파트프마리 I유적 뿐만 아니라 타라-부탁(그림 1-1a,1b) 유적이 있다. 두 유적은 같은 시기(기원전 6세기)의 유적이지만 무덤 구조는 비슷한 듯 다르다. 바닥을 파는 방법이 다른 것인데, 파트프마리I유적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공간만 팠고, 타라-부탁 유적에는 바닥 전면을 파고 목조구조물을 여러 겹 둘렀다.

 

우랄 강 유역의 기원전 5세기에는 좀 더 복잡한 구조가 등장한다. 메제트-사이 유적인데, 무덤 안에 3개의 구조가 다른 무덤이 동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의 무덤은 나무를 사용한 나무방(3d)이 가장 아래에 있고 그 위를 카타콤이라고 부르는 무덤(3f)이 무덤방 덮개를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카타콤 무덤은 목조구조물의 서쪽(3b,c)에도 자리잡았다. 그 끝에는 또 다른 무덤구조가 있다. 한쪽 벽면을 계단처럼 판 것이다(3e).

스미르노프는 메체트-사이 유적의 II호 쿠르간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우랄강 유역의 무덤은 어떤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무덤구조가 발견된다고 했는데, 메체트-사이 유적은 그런 유적의 총합처럼 보인다. 필리포프카 유적 1호에서도 같은 봉분 아래에 구조가 다른 지상식 매장주체부(목조구조물)과 지하식(연도가 달린 토광묘)가 함께 발견된 적이 있다. 메체트-사이 유적과 같이 한 봉분 아래 여러 무덤구조가 함께 존재하는 예로 볼 수  있다.

 

스미르노프는 볼가-돈강 유역은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무덤구조에 스키타이(흑해유역)문화의 영향으로 봉분과 목제덮개를 사용하는 구조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림 1-2의 블류멘펠드 유적의 무덤 구조를 알 수 있는 단면도는 구할 수 없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은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를 일반화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림 1. 기원전 6~5세기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 1-타라-부락 유적(기원전 5세기), 2-블류멘펠드 유적(기원전6세기), 3-메체트-사이 유적(기원전 5세기)

 

참고문헌

 

Смирнов К. Ф., Петренко В. Г. 1963, Савроматы Поволжья и Южного Приуралья. М., 1963(스미르노프, 페트렌코, 1963, 우랄남부와 볼가 강 의 사우로마트)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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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가장 많이 포스팅한 시베리아와 흑해를 잇는 지역은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이었고, 주로 카자흐스탄의 동부와 서부에 유적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카자흐스탄 서부는 우랄강 유역의 유적으로 볼가 강 하류~돈강 유역의 쿠르간을 묶어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라고 한다. 여기에 필리포프카 유적, 탁사이 1 유적, 베소바 유적 등이 속한다.

기원전 5~4세기 필리포프카 유적과 베소바 유적 등에서는 낙타 동물장식(그림 1-37)등이 나오는데, 과연 스키타이 문화권에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문화권)의 3요소 중 가장 핵심으로 일컬어 지는 것은 동물장식이며, 동물장식 가운데 원형맹수장식이다. 시베리아의 아르잔-1호에서 출토되어 그 이후로도 카자흐스탄(테미르-고라, 칠릭타, 우이가락), 쿠반강 유역(세미브라티예, 켈레르메스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의 중요한 지역에서 출토되면서 당시에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 1기에서도 원형 맹수장식이 출토된다. 볼가하류~돈강 유역의 트리 브라타(그림 1-3)(3형제라는 뜻)이라고 하는 유적에서 주둥이가 매우 길게 표현된 맹수장식이 발견되며, 우랄 남부의 퍄노프카 라고 하는 유적(그림 1-7)에서도 원형맹수장식이 발견되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우랄 남부지역과 볼가하류~돈강 유역의 특징이 구분된다.

맹수장식 가운데 다리를 아래로굽히고 있는 장식판(그림 1-2)은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의 표범장식과 비교된다. 다리를 굽히고 있는 점은 차이가 있지만 귀, 눈, 코 등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유물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블류멘펠드 유적(그림 1-25)에서 출토된 재갈멈치는 가장자리 끝에 이빨을 드러낸 맹수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원행 맹수장식이 새겨진 것이다. 투엑타 유적(그림 2)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할 수 있다. 바르나 유적(그림 1-48) 재갈멈치가 출토되었다.

 

그림 1.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와 훈-사르마트 문화의 동물장식

 

 

그림 2. 알타이 투엑타 유적의 재갈멈치

 

물론 세부적으로 다를 수는 있지만, 구부러진 재갈멈치 끝에 이빨을 드러낸 맹수를 장식했다는 기본 개념은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동물장식이 공통성을 이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흑해 및 시베리아와 다른 유물은 이 외에도 많이 관찰되며, 지역적으로 가까운 카자흐스탄 중부지역과 더 유사한 동물장식도 발견되는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일 것이다. '예쁜' 그리핀도 없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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