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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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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은 1664년에 러시아에서 근무한 니콜라스 비트젠의 저서(1785)에 나오는 유물과 유사한 것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유물은 그가 러시아를 떠난 후에 러시아 특파원을 통해서 수집한 유물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경매에서 팔렸다는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유물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늑대와 뱀이 뒤엉켜 있는 버클 장식이 표트르 1세의 수집품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버클장식은 왼편과 오른편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의 같은 모습이어도 비트젠의 책에 나오는 유물과 표트르 1세의 유물은 방향이 달라서 같은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각각 다른 경로로 전해졌을 수 있다. 비트젠의 유물과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 같은 무덤에서 나왔지만 각각 다른 경로로 존재했을 수 있다.

 

2021.05.03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컬렉션 중에서..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컬렉션 중에서..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문양장식은 청동으로 주로 제작되었고 주로 어떤 유물의 부속품인데, 무기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는 청동거울과 버클 장식 등도 있다. 버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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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트젠의 그림에 나오는 유물 중에 복잡하게 만들어진 목걸이(그림1의 가장 상단)는 표트르 1세의 유물에도 유사품이 발견된다. 비크젠의 수집품에 목걸이는 안이 빈 금 파이프를 쌓고 가장 상단에 동물장식을 붙인 것이다. 토크 혹은 토크 스타일일 수 있는데,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는 표트르 1세의 유물에서 여러 점 발견된다(그림 2). 그 중 호랑이상(그림 3)이 달린 목걸이는 가가린의 물품 목록에는 없었고,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루덴코 1962). 

 

그림 1. 비트젠(1785)이 수집한 시베리아 유물

 

 

 

그림 2. 표트르 1세의 수집품 중 금 파이프를 쌓아서 만든 목걸이

 

목걸이(그림 2-8, 그림 3)는 크기가 다른 앞 판과 뒷 판이 일종의 경첩으로 연결되어 개폐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목걸이는 파이프 모양의 금관 3줄이 돌을 끼울 수 있는 갑입부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돌을 끼우는 부분은 원형과 마름모가 교차되게 디자인되어 있고, 전부 돌을 끼웠을 가능성이 있는데 남아 있는 부분에는 터키석과 산호가 남아 있다. 가장 상단에는 호랑이상 4마리가 좌우로 나뉘어서 목걸이 테이 고정되어 있다. 호랑이의 늑골과 날카로운 발톱의 표현, 호랑이 꼬리에 달린 그리핀 머리가 특징적이다. 꼬리 끝에 체인이 달려 있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그림 2-8과 동일유물

 

표트르 1세 수집품 가운데는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림 2)유니크한 유물은 아니고 일반적인 목걸이 스타일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호랑이 상이 목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동물장식이 없는 유물 보다는 특별해 보인다. 아크 알라하-3 유적, 파지리크 유적의 2호분 여성 목걸이가 표범 혹은 맹수의 전신상을 6점 이상씩 붙여서 목을 두르도록 디자인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스타일로 볼 수 있다. 소재와 목을 두텁게 덥도록 만든 차이가 있다. 알타이의 유물은 목제로 제작된 뒤에 얇은 금종이로 마감되었다는 점에서 착용하면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단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유물은 매우 불편해 보인다(직경 14.3cm, 높이 5.3cm).

 

호랑이와 꼬리에 달린 그리핀의 모습은 표트르 1세의 버클 장식 가운데 동물투쟁문의 동물과 유사하다. 늑골이 드러나도록 마른 호랑이의 모습과 부리가 과장되고 눈이 큰 그리핀(그림 4)이 그러하다.

 

그림 4.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버클장식 목걸이에 부착된 호랑이의 모습과 표현법이 유사하다. 드러난 늑골, 발톱 뿐만 아니라 굽동물의 갈기에 붙은 그리핀의 머리가 목걸이의 호랑이 꼬리에 달려 있다. 

 

 

그림 3의 목걸이는 기원전 5~4세기라고 편년된 바 있는데(Piotrovsky B.), 이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감입을 하는 제작방법이나 납템질하는 방법 등은 이 시기에 있었던 방법이지만 목걸이 스타일은 기원전 5~4세기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그릇 외에도 금속제 그릇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청동솥 외에도 금제와 은제 그릇 등이 발견되는데, 흑해와 볼가강 유역 등 서부지역에서 종종발견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에서도 금속제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스키타이 시대와 동 시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벽화에 남아 있다. 이들 유물은 이르티스강과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에서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18세기에 채취된 것이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켈렉션 중에서. 페르세폴리스의 아케메니드 궁전에 그려진 금속그릇과 비슷한 형상, 기원전 5~3세기 유물로 추정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은 시베리아 총독 이었던 가가린이 보낸 선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 번에 걸쳐서 보냈는데 차르의 명명에 따라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보내졌다. 가가린은 토볼스크에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는 이르티시 강 상류와 오비강의 합류점 및 알타이 부근으로 알려졌다(그림 2).

표트르 1세에게 무덤에서 캐낸 금제품(표트르 1세의 유물 컬력션)을 보내기 전(1715년)에 1712년에 가가린은 금, 은, 구리 및 기타 등등을 모았다. 주자시의 임부는 금생산에 관련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문서는 거의 없는데, 아마 큰 비밀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의 발견과 모든 금과 관련된 정보는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8년 2월 13일 차르는 ‘오래되고, 비범한 것을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보상을 약속했다. 1721년에 가가린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림 2. 18세기 황금 유물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

 

죽기 전에 가가린은 3번에 걸쳐서 표트르 1세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1번째는 10점(1715년), 2번째는 122개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2번째 소포는 1716년 12월 토볼스크에서 가가린이 표트르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으나, 소포가 도착할 무렵에 차르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없어서 모시코프(П. И. Мошков, P. I. Moshkov)가 소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편지에는 각 물건의 무게를 표시해 두어서 식별이 가능하다. 2번째 소포중에서 20점은 표트르 1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에게도 같은 유물이 보내진 것으로 편지에 적혀있었으나, 행방은 묘연하다. 세 번째 소포는 1717년 10월에 60개의 금제품과 2개의 은제품을 보냈다고 알려졌다. 세 번째 소포에 들어간 유물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으나 최근 튜멘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 존재가 확실해 진 듯하다. 이 문서에는 가가린이 보낸 소포에서 보낸 유물과 동일한 물건의 유물 무게가 일치하는 품목이 적힌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시베리아의 금제품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동전으로 제작되는 일이 흔했는데, 표트르는 칙령 1718년으로 이를 막았고, 러시아에서 일종의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재윤 2018) .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Федоровна K.E. 2006, Золото кочевников. О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НАУКА из первых рук(표드로브나 2006, 유목민의 황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 대해서)

김재윤 2018, 러시아의 발굴 -연해주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의 바라바시 3유적을 중심으로-, 야외고고학,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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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20. 13:06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에는 전차모형이 1점 더 발견되었다. 어제 보여드린 전차와 유사한 형태로 뒤가 개방된 형태이다. 보시다시피 말과 바퀴가 보존되지 못했다. 그리고 고깔모자 쓴 라이더는 운전대에 앉아 있으며, 얼굴에는 눈코입이 없어서 표정을 알 수 없다. 머리가 없는 한명이 더 있는데 오른손은 구부려서 창을 쥐고 있고있다. 이 유물 역시 속이 비어 있다. 마차에는 양쪽에 바퀴달 렸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륜의 전차였을 것이다.

 

그림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전차

 

2인이 타고 있는 전차에서 라이더는 정면을 바라보고 말을 몰고 있지만, 앉아서 전차를 모는 이의 좌석은 전면을 바라보도록 고안된게 아니라 전차의 측면을 보도록 되어 있다. 제이말과 달턴 등 아무다리야 유적의 유물을 연구한 사람들은 앉아서 전차를 모는 사람들이 사람이 더 놓은 계급일 것으로 보았다.

 

초창기 연구에서 2인이 타고 있는 전차와 함께 이 전차는 아케메니드 왕조의 전차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동전 및 여러 기념물에 유사한 전차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Boardman 1970, 제이말 1979). 전차가 앗시리아에서 기원했을 것이라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전차의 기원은 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2000년 경 안드로노보 문화에서 기원했고, 주변 국가(앗시리아 포함)로 영향을 미쳤다는 쿠즈미나의 연구(1994)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와 관련한 후속연구(데이비드 앤서니 2015, 쿠즈미나 외 2014)가 잇따르고 있다. 시베리아 안드로노보 문화의 전차가 중국동북지방의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에도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최근의 연구(강인욱 2020)도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전차도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다. 필자가 최근에 파지리크 유적의 유물을 다시 살펴보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한 점 발견했는데, 연꽃모양으로 자른 가죽으로 된 조각 이다. 물론 파지리크 유적에서 캐노피 장식으로 연꽃이 표현된 펠트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 아플리케 장식은 아무다리야 퇴장지 속의 평판속 남성들이 들고 있던 꽃과 매우 유사하다.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 연꽃 모양 가죽 아플리케

파지리크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도 연꽃은 페르시아 지역에서 들어온 문양이라고 생각했다. 시베리아와 페르시아가 관련은 파지리크 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9세기의 아르잔-1호 속에서 주인공 무덤 속에서 나온 실크 조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 무덤은 통으로 도굴당해서 조각만 남아 있었다.

 

시베리아의 문화는 이웃한 지역으로도 전해졌을 것이고, 페르시아 문화도 시베리아로 전해졌을 것이지만 의문점이 많이 남는다.

 

참고문헌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Кузьмина Е.Е. 1994 : Откуда пришли индоарии? Материальная культура племён андроновской общности и происхождение индоиранцев. М.: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94. 464 с.(쿠즈미나 1994, 인도아리아인은 어디서 왔는가?)

Е. Е. Кузьмина, В. А. Новоженов, А. В. Епимахов,, К. Алтынбеко, А. Р. Хазбулатов, К. М. Линдафф, И. Н. Швец, Э. Р. Усманова , И. В. Чечушков, А. Б. Ипполитова). Таинство этн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древнейших номадов степной Евразии, – Алматы: Остров Крым, 2014.  454c.(쿠즈미나 외 2014, 유라시아 초원의 고대 유목민 역사의 비밀)

https://www.hermitagemuseum.org/wps/portal/hermitage/digital-collection/25.+archaeological+artifacts/3510475

강인욱 2020, 전차의 확산으로 본 청동기시대 고대 북방 유라시아와 동북아시아의 네트워크와 그 영향, 동양학연구원 제50회 국제학술회의, 단국대학교

데이비드 W. 앤서니(저), 2015, 󰡔말, 바퀴, 언어: 유라시아 초원의청동기 기마인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형성했나󰡕, 에코리브르

 

쿠즈미나에 대한 설명.

ru.wikipedia.org/wiki/%D0%9A%D1%83%D0%B7%D1%8C%D0%BC%D0%B8%D0%BD%D0%B0,_%D0%95%D0%BB%D0%B5%D0%BD%D0%B0_%D0%95%D1%84%D0%B8%D0%BC%D0%BE%D0%B2%D0%BD%D0%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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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12. 13:36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은 타지기스탄과 아프카니스탄 국경지역에 위치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랄해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는 전후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그리스인, 스키타이인, 페르시아 인들이 서로 만난 흔적이 남아 있다. 유적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마도 상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도굴되어서, 정확하게 유적의 성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페르시아 아파다나 궁전의 벽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은데, 그리핀이 달려 있는 오메가 모양의 개방형 팔찌도 그 중 한 유물이다. 이 유물을 들고 있는 대표단은 시리아(Schmidt E. 1953) 혹은 리디아Barnett R. 1968 대표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팔찌 앞에 들고 가는 사람은 손잡이가 없는 그릇을 나르고 있다. 손잡이 없는 그릇으로 흔히들 bowl이라고 하는 기형이다.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3점이 발견되었는데, 금제품 2점과 은제품 1점이다.

금제품 중 1점은 매우 낮은 기형인데, 크기가 12.1cm밖에 되지 않는다. 바닥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중앙에는 원형 그 가장자리로는 6개의 물방울? 혹은 아몬드 모양으로 도드라지도록 눌러서 표현했다. 원형과 6개의 아몬드는 태양을 닮았다. 그 가장자리에는 좀 더 큰 아몬드 6개가 방향을 달리해서 양각되었고 그 사이에는 12개의 반인반수가 표현되었다. 뒷다리 2개로 서 있는데, 앞다리 중 오른쪽 앞발은 위로, 왼쪽은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2마리는 꼬리를 맞대고 있다. 얼굴은 인간인데, 몸통은 사자와 날개가 달려 있다.

반인반수는 앗시리아부터 전해진 문양으로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한 유물로 생각된다. 기원전 4세기의 유물이다(달턴 1905).

 

그림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금제 그릇의 바닥

 

은제 볼도 페르시아의 제품으로 생각된다. 바닥의 중앙에는 로제트 장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가장자리로도 꽃 잎장식이 49개가 채워져 있다.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은제 그릇의 바닥, 직경 14.5cm

이 유물은 아무다리야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5세기라고 생각한다.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그릇문양이다. 이 문양이 표현된 그릇은 벽화 속의 그림과 같이 동체부가 한번 꺽어져서 구연부가 벌어지는 기형이다.그래서 그림 2의 그릇도 벽화와 같은 모양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금제 볼은 아무 장식이 없는 그릇이다.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가장 앞의 금제 그릇,  직경 9.9cm

 

그런데 반인반수가 있는 금제 그릇(그림 1)과 꽃 잎이 표현된 은제 그릇(그림 2)은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그릇과 비슷한 문양이다. 두 그릇은 금제 그릇이었는데, 아몬드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 그릇의 표면이 양각으로 표현된 유물 1점과 그릇의 바닥에 꽃 문양이 음각된 그릇이다. 이 두 그릇은 앗시리아에서 제작되어 스키타이 유적에 남게 된 것이다.

 

2020/08/0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스키타이 왕의 무덤에 들어간 앗시리아의 황금 잔

 

스키타이 왕의 무덤에 들어간 앗시리아의 황금 잔

흑해 인근의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것 중에 하나는 켈레르메스 고분이다. 기원전 7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903년과 1904년에 독일인 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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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혹은 리디아 대표단이 들고 있는 그릇은 바닥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형(그릇의 형태)은 그림1, 그림2와 비슷하다. 그림 3의 기형은 구연부(입술)로 갈수록 벌어지는 형태로, 벽화에 묘사된 그릇과는 형태가 달라서 대표단이 들고 있는 그릇과는 다르다. 그림1과 그림2를 벽화 속의 그릇으로 생각해 본다면 페르시아 그릇이라고 생각했던 그릇을 시리아 혹은 리디아 대표단이 들고 페르시아 왕에게 선물 주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외국 왕에게 주는 선물을 그 나라의 물건으로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결국 로제트 문양의 실버 그릇, 반인반수와 아몬드 문양의 금제 그릇 모두 이미 소속감이 불명확해진다.

 

스마트폰이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삼성스마트폰은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안다. K-POP을 팝 음악의 본고장인 미국 혹은 영국 음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원전 7세기에 스키타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앗시리아 유물은 수입품이었지만 이미 기원전 5~4세기에 스키타이 유물과 함께 발견되는 문양을 페르시아 문양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참고문헌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Schmidt E. 193, Persepolis. Vol. 1.1: Structures, Reliefs, Inscriptions, Chicago vol.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Objects from Ancient Persia and India Bequeathed to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by Sir Augustus Wollaston Franks. London, 1905.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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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0. 7. 17. 12:15 세계의 박물관

 

유라시아 암각화 주제로 가장 많이 애용된 것은 사슴과 같이 뿔이 있고 굽달린 동물이다. 필자가 앞서 소개한 키르기스스탄의 촐폰아타(Чолпон-Ата, Cholpon-Ata 유적에서 사슴도 그려지지만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은 산염소(코젤, kozel)(그림1)으로 629개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총 그림의 숫자는 93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림 1. 촐폰아타 암각화의 산염소 1(필자촬영)

 

그림 2. 촐폰아타 암각화, 그림 1의 왼쪽 위, 사냥하는 장면

 

그림 3. 촐폰아타 암각화의 산염소 2(필자촬영)

 

 

 

산염소는 뒤로 휘어진 뿔, 측면 몸통, 다리, 짧은 꼬리가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다. 산양표현은 시간에 따라서 좀 더 통통하게 그려지거나 추상화되고 단순하게 선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다리가 네 개 또는 두 개, 뿔도 한 개에서 두 개로 바뀐다. 산양은 무리를 이루거나 맹수와 마주보는 장면, 사냥에서 쫒기는 장면, 서 있는 모습 등 다양한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림 1과 그림 3은 모두 코젤(산염소)를 그린 것이지만 표현법이 다르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차이가 있다.

 

 

산염소 다음으로 많이 그려지는 것은 사슴(이전 포스팅 그림)이다. 산염소와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뿔이 차이가 있는데, 가지가 여러 개 그려진다. 주로 나무 모양과 가깝다.

 

 

암각화는 이식 쿨(Иссык-Куль, Issyk-Kul)호수 부근에 위치하는데, 쿠네이 알라-투(Кунгей Ала-Тоо, Kungei Ala-Too) 산의 남쪽 기슭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이 산의 협곡에서 흘러나온 화산암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흩어져 있는데 이 곳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그 구역은 서쪽으로는 4km, 폭은 0.6~2km에 달한다.

 

그림 3. 촐폰아타 유적의 범위(유적의 위치는 이전 포스팅 참고)

 

 

 

그림 4. 이식-쿨 호수(이곳은 소비에트 시절부터 유명한 관광지 중에 한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넓게 보면 천산산맥에 입지한 국가로 이식 쿨 분지의 암각화(촐폰아타)와 알타이의 암각화는 자연환경에서 차이가 있음으로 사는 식생도 차이가 있다.

 

촐폰아타 암각화의 주제는 산염소, 사슴, 황소, 말, 개, 늑대 등 동물만 그려진 것과 사람이 동물을 공격하는 장면, 말을 탄 무사와 낙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돌 하나에는 2~3개부터 가장 많은 것은 20개의 주제까지 그려진다.

 

암각화의 모든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림의 제작연대이다. 이 유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동물문양은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천산산맥 주변의 문화였던 사카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 연대는 암각화가 주로 그려졌던 시점이고, 그 이전인 청동기시대부터 기원후 까지(기원전 2천년기~기원후 8세기) 그림은 계속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는 모든 영역에서 소비에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역사 고고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촐폰아타, 이식-쿨, 쿠네이 알라-투 등 지명은 키르기스스어이고 음차해서 러시아어로 쓴 것이다]

 

 

촐폰아타 암각화박물관은 야외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 잘 없는 야외박물관...) 촐폰아타가 이식 쿨 호수와 인접하고 있어서 관공도시로 이 유적도 관광지이다. 그래서 그 주변에서는 가기가 쉬운 박물관이다. 한국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직항은 없지만, 카자흐스탄의 구수도인 알마티로는 가면 이곳으로 갈 수 있다. 한마디로 가기 힘들다.ㅋ...그래도 꿋꿋한 한국인들은 탐방기를 남긴다..

 

 

 

참고문헌

 

Миклашевич Е.А. 1995 : Петроглифы Чолпон-Аты (Киргизия). // Древнее искусство Азии. Петроглифы. Кемерово: 1995. С. 63-68(미크라세비치 1995, 촐폰아타 암각화(키르기스스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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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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