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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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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 루보틴 성곽에서는 어떤 집이 있을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지상식 건물지와 반지하식 건물지가 있다. 지상식 건물지에는 노지가 남아 있고, 목조 구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지상식 목조집의 벽은 장대와 막대로 만들고 진흙을 덮어서 마무리했으며,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점토로 덮인 나뭇가지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으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

지상식 목조집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점토 범위 중앙에 기둥구멍(직경 40~45cm, 깊이 95~100cm)이 3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점토를 바른 목체만 발견되었다. 이 점토 범위에는 곡물보관 장소로 보이는 구덩이(28번 구덩이, 깊이 1.25m, 입구 90cm, 바닥 1.3m)와 점토로 만든 일종의 난로 혹은 페키차를 위한 구덩이(29번 구덩이, 95×70cm, 깊이 25cm) 가 발견되었다.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구덩이(20번 구덩이, 입구1.25, 바닥1.5m, 깊이 1.45m)도 발견되었는데 곡물보관장소이다. 발굴범위 6에서 발견된 집이다.

페치카는 국내에서 러시아의 벽난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러시아 일반 사람들에게 페치카는 난방 기능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오븐기능도 있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지상식 집의 복원도(2)와 점토범위(1), 10×12.5m

 

 

반 지하식은 타원형(2.6×3.3m, 깊이 1.35~1.48m)으로 구덩이를 바닥에 팠지만 집은 지상위에 있다. 바닥의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고, 동북쪽에 문이 설치되었다. 17호 집에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지하식집에 화덕자리가 있는 집도 있다. 발굴범위 9지역에서 이 집은 위치한다.

 

그림 2. 루보틴 유적의 17호 주거지의 구덩이와 그 복원도

 

성채 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25동 정도 집이 발견되었는데, 집의 크기 및 바닥에 구덩이를 판 것과 파지 않은 것 등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집을 만든 것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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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만 보다가 집을 보니 너무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괴리감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겠다. 자료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가 너무 낯설다.

스키타이 성곽은 주로 생산 시설이 있는 경우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모형 집들도 발견된다. 무덤의 빈도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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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시대의 사르마트 문화(스키토-사르마트문화)는 볼가 강~돈강 유역과 우랄 강 하류에 주로 분포한다. 유럽쪽에 더 가까운 볼가~돈강 유역과 아시아쪽에 더 가까운 우랄 강유역의 무덤은 구조차이가 있다. 이를 기준으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같은 문화이지만 지역유형으로 구분한다.

 

볼가~돈강 유역의 무덤은 봉분을 만들기는 하지만 무덤구덩이를 파고 그 위를 나무덮개 혹은 덤불 등으로 덮고 봉분을 쌓는 구조가 기원전 6세기부터 발견된다. 목조구조물 혹은 나무방 등을 무덤구조물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블류멘펜드 유적(기원전 5세기)(그림 1-2)과 레닌스크 유적 등이 있다.

 

반면에 우랄강 유역의 무덤은 일정하지는 않지만 무덤구조에 나무로 된 방을 만든다. 이미 포스팅한 파트프마리 I유적 뿐만 아니라 타라-부탁(그림 1-1a,1b) 유적이 있다. 두 유적은 같은 시기(기원전 6세기)의 유적이지만 무덤 구조는 비슷한 듯 다르다. 바닥을 파는 방법이 다른 것인데, 파트프마리I유적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공간만 팠고, 타라-부탁 유적에는 바닥 전면을 파고 목조구조물을 여러 겹 둘렀다.

 

우랄 강 유역의 기원전 5세기에는 좀 더 복잡한 구조가 등장한다. 메제트-사이 유적인데, 무덤 안에 3개의 구조가 다른 무덤이 동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앙의 무덤은 나무를 사용한 나무방(3d)이 가장 아래에 있고 그 위를 카타콤이라고 부르는 무덤(3f)이 무덤방 덮개를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카타콤 무덤은 목조구조물의 서쪽(3b,c)에도 자리잡았다. 그 끝에는 또 다른 무덤구조가 있다. 한쪽 벽면을 계단처럼 판 것이다(3e).

스미르노프는 메체트-사이 유적의 II호 쿠르간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우랄강 유역의 무덤은 어떤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무덤구조가 발견된다고 했는데, 메체트-사이 유적은 그런 유적의 총합처럼 보인다. 필리포프카 유적 1호에서도 같은 봉분 아래에 구조가 다른 지상식 매장주체부(목조구조물)과 지하식(연도가 달린 토광묘)가 함께 발견된 적이 있다. 메체트-사이 유적과 같이 한 봉분 아래 여러 무덤구조가 함께 존재하는 예로 볼 수  있다.

 

스미르노프는 볼가-돈강 유역은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무덤구조에 스키타이(흑해유역)문화의 영향으로 봉분과 목제덮개를 사용하는 구조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림 1-2의 블류멘펠드 유적의 무덤 구조를 알 수 있는 단면도는 구할 수 없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무덤은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를 일반화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림 1. 기원전 6~5세기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쿠르간, 1-타라-부락 유적(기원전 5세기), 2-블류멘펠드 유적(기원전6세기), 3-메체트-사이 유적(기원전 5세기)

 

참고문헌

 

Смирнов К. Ф., Петренко В. Г. 1963, Савроматы Поволжья и Южного Приуралья. М., 1963(스미르노프, 페트렌코, 1963, 우랄남부와 볼가 강 의 사우로마트)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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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가장 많이 포스팅한 시베리아와 흑해를 잇는 지역은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이었고, 주로 카자흐스탄의 동부와 서부에 유적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카자흐스탄 서부는 우랄강 유역의 유적으로 볼가 강 하류~돈강 유역의 쿠르간을 묶어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라고 한다. 여기에 필리포프카 유적, 탁사이 1 유적, 베소바 유적 등이 속한다.

기원전 5~4세기 필리포프카 유적과 베소바 유적 등에서는 낙타 동물장식(그림 1-37)등이 나오는데, 과연 스키타이 문화권에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문화권)의 3요소 중 가장 핵심으로 일컬어 지는 것은 동물장식이며, 동물장식 가운데 원형맹수장식이다. 시베리아의 아르잔-1호에서 출토되어 그 이후로도 카자흐스탄(테미르-고라, 칠릭타, 우이가락), 쿠반강 유역(세미브라티예, 켈레르메스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의 중요한 지역에서 출토되면서 당시에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 1기에서도 원형 맹수장식이 출토된다. 볼가하류~돈강 유역의 트리 브라타(그림 1-3)(3형제라는 뜻)이라고 하는 유적에서 주둥이가 매우 길게 표현된 맹수장식이 발견되며, 우랄 남부의 퍄노프카 라고 하는 유적(그림 1-7)에서도 원형맹수장식이 발견되었다.

스키토-사르마트 문화는 우랄 남부지역과 볼가하류~돈강 유역의 특징이 구분된다.

맹수장식 가운데 다리를 아래로굽히고 있는 장식판(그림 1-2)은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의 표범장식과 비교된다. 다리를 굽히고 있는 점은 차이가 있지만 귀, 눈, 코 등은 켈레르메스 유적의 유물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블류멘펠드 유적(그림 1-25)에서 출토된 재갈멈치는 가장자리 끝에 이빨을 드러낸 맹수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원행 맹수장식이 새겨진 것이다. 투엑타 유적(그림 2)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할 수 있다. 바르나 유적(그림 1-48) 재갈멈치가 출토되었다.

 

그림 1.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와 훈-사르마트 문화의 동물장식

 

 

그림 2. 알타이 투엑타 유적의 재갈멈치

 

물론 세부적으로 다를 수는 있지만, 구부러진 재갈멈치 끝에 이빨을 드러낸 맹수를 장식했다는 기본 개념은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키토-사르마트 문화의 동물장식이 공통성을 이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흑해 및 시베리아와 다른 유물은 이 외에도 많이 관찰되며, 지역적으로 가까운 카자흐스탄 중부지역과 더 유사한 동물장식도 발견되는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일 것이다. '예쁜' 그리핀도 없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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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집'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다. 그리스 역사가(헤로도투스) 들이 남긴 기록에는 스키타이 사람들은 방어된 마을과 집이 없이 바퀴달린 집(4륜마차)을 타고 광대한 스텝지역을 옮겨다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꽤 오래 지속된 것 같은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입성(1812년)시 대화재를 두고 스키타이 인과 비교한 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구자들은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카멘스코예 성곽(돌 성이라는 뜻) 유적으로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으로 1200헥타르가 넘는데, 이곳에는 금속제품의 생산흔적(도가니, 주몰용 국자, 노지)이 엄청남게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철제품을 생산해서 다른 스키타이 사람들에게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에는 2 줄의 성벽이 있는데(그림 1-19), 스키타이 연구자들은 안쪽의 환호를 ‘아크로폴’이라고 부른다. 그리스 도시와 같이 구획(그림 1-18)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크로폴에서는 스키타이 귀족들이 살았던 석조구조물 흔적이 조사된 적이 있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 뿐만 아니라 돈 강 유역의 엘리자베토프 성도 알려져 있다. 대부분 지상식(그림 1-10, 14)이지만, 땅을 파서 만든 반움집(지하식)(그림 1-11,12,13,17)도 있다.

초원 스키타이는 아니지만 삼림지대의 스키타이 문화를 공유했던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목조로 된 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1.02.22 - [볼가 중류: 아나닌스카야 문화의 동물장식] -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타이가 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무덤 옆에 집

유라시아 초원 북쪽의 타이가 지대의 초기철기시대문화인 아나닌스카야 문화에서는 동물장식이 스키타이 문화의 것과 유사해서 초원지대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유물 가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1. 카멘스코예 성곽과 엘리자베트프 성곽 유적, 10~17: 엘리제베트프 성곽(16: 전체 성곽 평면도, 10, 14-지상식 집, 11, 13, 17-지하식 집, 12-지하집복원), 18, 19-카멘스코예 성곽(18: 아크로폴 내부의 집의 구획도, 19: 성의 평면도)

 

두 유적은 기원전 5세기 유적이다. 흑해 부근에서 스키타이 쿠르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 까지 올려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들은 집이 없었을까?

 

러시아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생업경제가 유목적 목축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위해서 목지를 계속 교체 할 수 밖에 없었고, 주거지도 단기간만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이 주요한 철기 공방이었다고 한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 역할로서 성곽 유적이 존재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원전 7세기에도 스키타이 철제품은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이를 생산하던 유적이 존재했을 텐데, 발견되지 않았다. 집은 있었지만 남겨 놓지 않았던가, 아니면 너무 쿠르간 조사에만 목을 매었을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이 없다고 한 것은 비아냥 거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최적화 된 상태로 생업에 맞게 가성비 좋은 집을 가지고 다닌 것이고, 필요하다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제 일론머스크가 조립식 집을 스페이스 X근처에 만들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고 한참 웃었다.

 

참고문헌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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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에서 흑해 북안과 카자흐스탄의 사이에 있는 지역은 우랄~볼가 및 돈 강 유역이다. 이곳에는 기원전 6세기 경 사우로마트 문화가 존재했는데,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 내에 속하며 우랄-볼가 강 유역의 지역문화이다.

 

이 지역의 문화는 우랄 강 유역과 볼가-돈강 유역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대형 무덤구조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키리크-오바 II유저과 비슷한 무덤구조가 우랄 강 유역의 퍄트프마리( Пятпмары, Pyatpmary) I유적에서 있지만, 같은 시기의 볼가-돈강 유역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덤 양상에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원전 6세기 퍄트프마리 I유적의 8호 쿠르간(직경 29m, 높이 3m)의 봉분 내부에는 지상식의 목조구조물을 만들었다. 바닥에 구덩이를 파기는 했으나 전면을 판 것은 아니고 피장자를 안치하기 위한 공간만을 팠고(그림 1-2) 그 위에 목조구조물을 설치했다. 목조구조물의 남쪽에 말을 5마리 매장한 후에 점토와 풀을 섞은 봉토벽을 쌓았다. 무덤의 북쪽은 이 부분이 결실되었다.

 

그림 1. 파트프마리 I유적 8호 쿠르간 평면과 단면(2,3)

 

보고된 바에 따르면 목조구조물을 덮은 층은 점토와 풀을 섞은 것으로 목조구조물의 전면을 덮었다. 키리크 오바II유적에서는 목조구조물의 주변을 둘러쌓은 것으로만 보고되었는데, 그 보고가 맞다면 점토벽의 구성물과 목조구조물을 지지하는 방법 등 축조방법의 차이가 있다. 이는 시간에 따른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쿠르간’은 일부 유적이고 무덤구덩이에 사람과 무기만 매장하는 경우도 있다. 봉분은 높이 쌓지 않았다. 사우로마트 문화(스키토-사르마트 문화 1기)에서는 특히 무덤에 무기가 많이 발견된다. 무덤구조는 흑해연안의 유적과 차이가 있지만 무기는 유사했고, 역시 동물문양장식이 많이 발견된다.

 

참고문헌

Смирнов К. Ф., Петренко В. Г. 1963, Савроматы Поволжья и Южного Приуралья. М., 1963(스미르노프, 페트렌코, 1963, 우랄남부와 볼가 강 의 사우로마트)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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