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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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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는 인간형상물은 양손을 밖으로 벌이고 두 마리 동물을 잡고 있는데 스키타이 신화 속의 여성신으로 생각되었다. 주로 금속으로 제작되었고 기원전 7세기에는 의례품에 표현되었고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귀걸이, 장식품 등에 나타나면서 부적과 같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골제에도 비슷한 형상의 여성이 발견되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4번 무덤방 입구에서 반원형(너비 10.1cm, 높이 4.3cm) 골판 위에 그려진 것이다. 골판은 상아색으로 앞면은 매끄럽게 마연되었지만 뒷 면은 울퉁불퉁한 면이다.

 

그림은 오른쪽 하단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남아 있는 상태이다. 중앙에는 매우 큰 날개를 달고 있고 신부는 거의 표현되지 않고 다리가 꼬인 문양으로 표현되었다. 유적을 발굴한 보고자들은 이 여성을 ‘뱀다리’여신이라고 했다. 여신의 머리에는 칼라프 라는 일종의 모자장식이 놓여져 있다. 다리 역할을 하는 부분의 끝에는 화초가 표현되어 있다. 반원형 원판의 가장자리에는 금박으로 감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여성형상물

 

4번방 무덤 입구에서 같은 구덩이에서는 남성이 있는 골제판이 함께 출토되었다. 여성형상물이 그려진 골판과 같은 재질과 크기이고 9개의 작은 조각으로 발견되었다.

 

두 명의 스키타이 전사가 거대한 동물과 싸우는 장면인데, 가장 왼쪽에 있는 남성은 창을 들고 있었고 무릎을 구부린 자세이다. 창의 길이는 신체의 비율로 보아서 1.5m가 넘는 큰 창이다. 동물과 첫 번째 전사 사이에 있는 남성은 이미 땅에 거의 누워 있는 상태로 동물에게 당한 장면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눈은 크게 뜨고 눈썹은 치켜 올라 있고 입을 벌이고 있다. 얼굴은 면도하지 않았고 카프탄 이라고 하는 복장을 두 명다 입고 있었다.

오른쪽의 동물은 비늘이 있는 것으로 보고자들은 ‘해마’라고 했다. 그러나 동물은 매우 큰 동물로 단순히 해마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해마는 기원전 5세기 이후 스키타이 문화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동물로 그리스 동물장식이라고 알려졌고 대부분 소형이다.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의 남성전사

 

보고자는 이 유물의 아이덴티티 보다는 작은 골제판 위에 생생하게 표현된 그림의 예술성에 경의를 표했다.

 

한 구덩이 속에서 나온 유물에서 여성은 신격화되어서 표현되었고 남성은 거대한 동물에게 당하고 있어서 상당히 대조적이다. 동물에게 당하고 있는 전사와 신격화된 여성이 함께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유물과는 많이 다르다.

 

젠더간의 갈등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이 유적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소개한 유물은 ‘가이모노바 항아리’라고 불리는 은제 항아리였다. 스키타이 신화 속의 인물을 연상하는 듯한 고리트와 아키나케스 검을 들고 있는 두 남성은 비스듬하게 누어서 표현되었고 1번 무덤방에서 출토되었다.

 

2021.09.0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가이모노바 유적] - 드네프르 강 하류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성배

 

드네프르 강 하류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성배

이제까지 규모가 큰 성곽 유적만 보니 재미가 없어서, 무덤 유적 하나를 파고자 한다. ‘가이마노바 무덤 유적이다(지도에 이미 표시되어 있음). 흑해 주변의 유적에서는 워낙 흥미로운 유물들

eastsearoad.tistory.com

 

골판 위에서 기절하기 직전의 남성 2인으로만 당시의 남성상을 그려낼 수 없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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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 유역의 거대 무덤 중에 하나인 가이모노바 유적은 직경이 70m 정도이다. 그 안에는 4개의 무덤방이 있는데 1번과 2번 무덤방은 바닥을 파고 만든 것이다. 그런데 3번과 4번은 남쪽에 위치하며 규모도 작다. 3번 무덤방은 2번 무덤방을 중심으로 생토바닥까지 판 경계선의 가장 끝에 위치한다. 봉분의 가장자리에 돌을 쌓았는데 그 부분을 파고 들어가서 무덤방을 만들 것이다.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무덤의 평면도

 

그림 2. 가이모노바 유적 무덤의 단면도

 

그림 3. 가이모노바 유적 무덤의 단면도(평면도의 3번 단면도) 1: 봉분의 첫 번째(I층) 흙, 2: 첫 번째 흙을 덮은 돌층, 3: 두 번째 덮은 흙, 4: 3번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청동, 5: 봉분의 I,II,III층 시작점, 6: 3번 무덤방의 입구를 막은 흙, 7: 4번 무덤방의 단면도, 8: 검은 흙(체르노젬)9: 무덤 생토층

 

가이모노바 유적은 봉분을 흙을 채운 후 돌로 덮은 층이 모두 4개로 이루어져 있다(그림 3). 그림 3은 3번 무덤방과 4번 무덤방의 봉분에서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른 단면도(3번)로 이 곳에서는 가장 최상위는 보이지 않는다. 무덤의 바닥은 검은 흙을 깔고 그 위에 흙과 돌을 4번 번갈아서 봉분을 축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4. 가이모노바 유적의 3번 무덤방

 

3번 무덤방 역시 수직으로 파고 내려간 무덤바닥아래에서 바로 무덤방이 있지 않고 연도를 통해서 횡으로 들어간 곳에 무덤방이 만들어졌다(그림 4). 바닥에는 나무가 깔렸었다. 4번 무덤방 역시 입구--> 복도-->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이다. 4번 무덤방의 복도 바닥에는 매납구덩이가 발견되었고 3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그림 5).

 

그림 5. 가이모노바 유적의 4번 무덤방(김재윤 편집)

 

1~4번 무덤방은 모두 입구 바로 아래에 무덤방이 있지 않고 복도를 통해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4번 무덤방은 입구가 상당히 크고 방형이라는 점, 무덤방입구에 별다른 시설 없이 노출했다는 점에서 약간은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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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츠 강은 돈 강의 지류로 세베르스키도네츠 강이 공식적인 명칭이다. [세베르스키는 북쪽이라는 러시아어가 뒤에 도네츠 라는 명사가 오면서 형용사로 바뀐 것이다.]

도네츠 강 유역에는 현존하는 스키타이 성곽 중에 가장 오래된 루보틴 성곽이 있다. 성의 평면형태를 특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부정형에 가까운) 사면이 있고, 서와 남쪽에 문이 있으며, 성벽은 목재와 점토로 만들어졌고, 성벽 앞에는 환호(해자)시설이 있는 구조이다. 유적에는 목조 구조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성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안을 점토로 채워서 만들었다.

 

유적에는 문으로부터 뻗어나온 도로가 있었다는 것을 발굴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적 내의 공간분할은 일정정도 규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은 땅을 파지 않은 것과 땅을 파서 지하 공간을 만든 집이 있다. 집 자체는 둘 다 지상위에 있기 때문에 구덩이를 파고 벽을 지하에 세우는 구조와는 다르다.

루보틴 유적이 기원전 7세기 말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 유적에서 발견된 집은 그 시대의 스키타이 집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을 보면 같은 시대여도 무덤 구조가 다른 특징이 있는데, 집의 건축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장담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남아 있는 유적이 루보틴 성곽 밖에 없음으로 그 외는 좀 상상하기 힘들다.

 

스키타이 집의 모습을 시대로 국한 하지 않고 전 시기를 통틀어서 살펴본다면 다양한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말 루보틴 성곽 유적 외에도 기원전 4세기 카멘스코예 성곽에도 남아 있었다. 유적에는 집 자리의 평면과 점토내에 짚을 섞은 건축자제가 유적에서 발견되어서 점토벽을 세운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브릴류크(1989)가 뒤에 복원한 모습이 있다(그림 1-4).

 

두 유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리사야 고라 유적에서는 집에 구덩이를 파고 2칸이 붙은 도 있다(그림 1-3).

 

이 외에도 바이슈테인 유적에서는 집의 모형이 달린 마차모양의 모형(그림 1-1,2)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집의 구조는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 기원전 7~5세기 사이에 아주 널리 퍼져 있던 집의 모양이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다양한 집 모습, 1,2-바인슈테인 유적 출토, 3-리사야 고라 유적, 4~6: 카멘스코예 성곽 유적(4: 복원도, 5,6-집의 평면도)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집 없이 마차를 집을 삼아서 초원을 누비고 다녔다고 했다.

그가 기록을 남길 때 모든 사실을 보고 직접확인한 것은 아니었지 않을까?

아마 그는 집을 실고 다니는 마차 일종의 캠핑카는 보았으나, 스키타이 사람들의 성곽과 집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Гаврилюк Н.А. 1989, Домашнее производство и быт степных скифо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89. — 112 с (가브릴류크 1989, 초원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내공업과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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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포스팅은 흑해 지역의 철기 제작소를 찾아서 헤매어 다닌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빠짐 없이 출토되는 것은 화살촉이다.

 

그런데 활과 관련된 스키타이 신화가 있다.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특유의 화살통)를 늘 차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타르기타우스와 관련된 것이다. 타르기타우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신화 속의 인물로 스키타이 땅에 최초로 태어난 인물로 알려졌다. 그에게 3아들이 있었는데, 활을 당기고 허리띠를 맬 수 있는 아들을 드네프르강의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이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 3째 아들(schytes)로 타르기타우스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신화와 관련된 유물이 차스티예 쿠르간(기원전 4세기)에서 발견되었다(그림 1~4). 은 항아리인데, 타르기타우스는 고리트를 차고 있고(그림 2의 우측, 그림 3-2), 그가 활을 건너는 인물이 3째 아들이다(그림 3). 첫 번째 아들은 전투용 도끼를 들고 있었으며(그림 2) 두 번째 아들은 창과 방패(그림 4)를 들고 있다.

 

스키타이 신화는 헤로도투스가 적은 역사의 4권에 스키타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 중에 한 부분이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신화, 강역, 주변 민족, 기원과 생활풍습, 전쟁풍습, 종교, 왕이 장례치르던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기원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스키타이 사람들이 믿는 자신들의 신화와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스키타이 신화는 약간 다르다.

 

 

그림 1. 차스티예 쿠르간 출토 은 항아리

 

그림 2.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우측)와 큰 아들(좌측)

 

그림 3.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타르기타우스와 셋째 아들(1)

 

그림 4. 차스티예 쿠르간, 은 항아리, 둘 째 아들

 

한편, 비슷하게 생긴 항아리가 쿨-오바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위에서 전한 신화 속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그림 5).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5. 쿨-오바 유적 출토 금 항아리

 

신화와 고고유물을 비교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사실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은 유물에 대한 스토리를 넣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기왕에 있는 신화로 그 의미를 새겨보는 것도 재미있다.

 

분명한 사실은 활과 화살을 넣는 고리트는 스키타이 유물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는 점이다.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동과 서쪽 지역의 대부분 연구자(알렉세예프, 쿠바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들이  화살촉을 연대 판단의 근거로 삼는 다는 점이다.(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살촉은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는 예가 왕왕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타르기타우스가 고리트를 차고 다녔다는 문구는 스키타이 사람들을 상징하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Степи европей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 М.//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1989. 46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89, 소비에트 연방 유럽 내의 스키타이-사르마트 시기, 소비에트 고고학 시리즈 1989)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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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츠 강 유역에 위치한 루보틴 성곽 유적은 환호와 성벽으로 사용된 목조구조물, 집의 구조물 들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말~기원전 6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다. 집도 집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동과 철을 제작하던 공간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청동과 철을 제작했던 장소(발굴범위 13구역내에서 확인, 평면도 참고)는 철제작 노와 그 옆에 있는 구덩이(103번)와 로 확인된다. 구덩이는 입구(1.6×1.5m) 보다 바닥이 더 넓은 형태(2.1m)로 바닥면이 편평하지는 않고 북쪽면에서 점차 내려간다(깊이 1.6m). 그 동쪽벽에는 점토로 만든 페치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쪽이 먼저 생겼는데, 바닥에는 황토가 20cm정도 두께가 남아 있다. 바닥에 남아 있는 구멍은 페치카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생겼을 수 있다. 위의 페치카가 허물어진 뒤에 아래 구덩이(103번 구덩이)로 점토가 흘러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동물뼈나 그릇 등 전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철제를 다듬는 곳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매우 잘 단조된 철제품이 300개 이상 나왔기 때문이다.(그래서 시람코는 이 곳을 '금고'라고 표현했다)

123번 구덩이는 철 제작 노가 생기기 전에 이미 생겼던 곳인데, 노를 만들던 새람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설명되었 있는데, 필자도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림 1. 루보틴 성곽의 철제작 노(爐)

 

그림 2. 루보틴 성곽의 송풍관(토제품)

 

단조를 위해서는 1000도 가까이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송풍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유적에서는 송풍관으로 추측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그림 2).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는 오랫동안 불에 노출된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도가니의 용도로 추측된다.

 

단조된 철제품으로 보아서 노가 운영되던 시기는 기원전 6세기 말~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이 성곽이 기원전 7세기 말이라고 했던 것은 이 노에서 나온 유물 보다 더 이른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Шрамко Б.А., Любот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Харьков: Регион-Информ, 1998. - 184 с (시람코, 1998, 류보틴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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