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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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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만-2 유적에서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2점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되었는데, 단독으로 뭍인 경우도 있고, 집단으로 매장된 경우도 있다.

(그림1. 보이스만 문화의 집단매장묘)

주로 양 다리와 양 발을 모두 굽히거나 혹은 다리만 굽힌 경우도 있으며, 옆으로 뉘운 자세인데, 측와굴신장(側臥屈身)(그림2)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죽으면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굴신장은 의도적으로 묶어서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으로 판명된 인골 옆에는 토기를 두고, 남성 인골 옆에는 활자루와 작살을 둔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2. 여성인골)

(그림3. 보이스만 문화의 남성인골)

앞서 무덤을 살펴보면, 무덤을 판 흔적이 없다. 무덤의 깊이가 아주 얇았거나 거의 파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보이스만 문화에는 두개골을 변형시킨 인골도 확인되었다. 이른바 편두(偏頭)의 습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4. 보이스만2 유적 출토, 변형된 두개골)

(그림5. 극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편두)

신석기문화에서는 장신구가 많이 확인되는데, 편두도 일종의 성형이라는 점에서 신석기인들이 미를 추구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의 의미는 사회적 위치이다. 

 편두 된 두개골의 모양은 정수리가 상당히 올라가게 변형되어 있다(그림 4). 두개골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머리변형으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모자를 쓴 효과를 내는 것처럼... 이것은 두개골의 정수리 부가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내린 추측이다.


주지하다시피 편두는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가야인의 편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실제로 김해예안리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기도 했다. 가야의 편두 습속이 일종의 DNA처럼 전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이스만 문화의 편두와 가야의 편두를 연결시킬 고리는 충분하지 않다. 한반도 남부지방 신석기 유적에서 혹시 편두가 나온다면 또 모를까.....애매한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료는 역사서 처럼 미주알고주알 적어 놓지 않아서 상상을 자극하기 좋다. 그러나 상상과 팩트의 경계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스만-2 유적은 패총 위에 무덤이 형성되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보이스만 2유적의 전경, 지도상으로는 유적은 바다와 인접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떨어져 있다)


연해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무덤과 패총이 확인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루드나야 문화와는 다른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어서 다른 문화로 구분되었다. 이 문화의 이름은 보이스만 문화이다.

 보이스만-2유적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 까지 6개의 층으로 문화가 변화해 온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 고고학 변화는 토기에서 관찰되는 것이 기본이다.
 
보이스만-2 유적은 연해주에서도 핫산지구 즉 제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두만강 유역과의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유적은 패총위에 형성된 무덤 유적이다. 현재의 위치는 앞의 지도와 같다. 패총은 주로 바다와 접한 곳에 생기는데, 현재의 위치는 바다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패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동해의 기온이 계속 올라가서 유적이 바다와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바다와 가까운 시점이 6000년 전이다(그림 1,2,3,4).

그림 2. 6000년 전 보이스만 만의 해수면(코로트키 외 1996)(그림은 현재 극동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사진찍은 것임)(64번이 보이스만 2 유적)

(그림 3. 현재의 해수면, (코로트키 외 1996)(그림은 현재 극동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사진찍은 것임)(64번이 보이스만 2 유적)

그림 4. 동해의 기온변화(코르트키 1996, 김재윤 2017 재편집


패총유적이어서 뼈로 만든 골각기가 특히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연해주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토양에 산성성분이 많아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유적에 화재가 나거나, 패총 위에 유적이 형성될 경우는 뼈와 가죽과 같은 유기물질이 남아 있게 된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이 문화의 토기와 유물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의 장신구, 완벽한 옥기는 아닌 옥석, 사진외에도 장신구는 여러 점 출토되었음)

지난 포스팅에서 루드나야 문화의 박편석기 중 끝이 뾰족한 도구가 장신구(그림1)의 구멍을 뚫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뚫었을까?


러시아에서 60년대부터 소비에트 시절부터 고고학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많이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세르게이 세묘노프이다. 그 가 연구한 것은 현미경을 이용해서 석기의 날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사용흔적을 찾아내고, 그 대상물을 찾는 것이다. 미세사용흔적분석이라고 한다(세묘노프 1968). 이 방법은 미국에서 더 발전된 듯 보인다((T. 더글라스 프라이스, 2013).


 그 사람은 바이칼 유역의 베르흐냐 부레티 유적에서 출토된 부채꼴 모양으로 구부러진 골각기의 1/3지점에 세석인을 끼워 넣은 유물에 주목하였다(그림2). 이것이 일종의 콤파스로 보았고 옥에 구멍을 뚫는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세묘노프 1968, 그림2). 이 세석인은 끝이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유적에서는 함께 둥근 옥제품이 출토되었다. 옥제품은 완벽하게  둥글게 잘려진 것이 아니라 조잡해 보인다.

(그림 2. 1~3: 베르흐냐 부레티 출토, 4~5: 시묘노프 제시(시묘노프 1968)

그림 3. 1·5: 글라스코보,2·3: 렌코바 1호, 4: 포노마레보, 6~8: 남보력고토 유적출토


 루드나야 문화의 장신구에 뚫려진 구멍도 완벽하게 둥글지는 않다(그림1). 특히 옥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둥근 디스크 모양의 옥기는 옥귀걸이보다 만드는 방법이 어렵다. 원판으로 잘라내고 가운데만 동그랗게 잘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장신구는 완벽한 옥은 아님,)
 완벽하게 둥글게 잘라낸 옥기는 홍산문화에서 확인되는 옥제품으로 제작방법이 전혀 다르다.


필자는 루드나야 문화의 세석기는 석촉이 아니라 장신구 제작도구일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석촉은 이미 타제 및 마제석촉이 유적에서도 확인됨으로 구지 세석인을 석촉으로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루드나야 문화의 유적인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에서는 화재난 주거지여서 골각기가 많이 확인되지만 베르흐냐 부레티 유적과 같이 골제 콤파스가 출토되지는 않아서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런데, 루드나야 문화의 세석인 용도를 밝히는 것은 어떤 역사적 해석인가?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세묘노프 1968, С. А. Семенов,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 НАУКА Ленинградскре отделение, Ленинград

T. 더글라스 프라이스(이희준 옮김), 2013, 고고학의 방법과 실제, 사회평론


posted by 김재윤23

그림1,2은 루드나야 문화에서 사용되던 석기이다.

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박편석기로 제작된 도구(1/4)(김재윤 2016)


그림 1은 약간 석기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이게 왜? 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림 1은 박편석기(박편석기는 작은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 몸돌에서 떼어낸 석기를 말한다)를 다듬어서 만든 석기이다. 후기구석기시대 유물 아닌가?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사용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석기가 신석기시대에도 계속 사용되는 지역이 있다.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에서도 계속 사용된다.

 그러나 후기구석기시대의 석촉인 슴베찌르게는 없다. 그림 1-1,2,7~12는 형태는 슴베찌르게처럼 생겼지만 용도는 슴베찌르게와 다르다. 제작방법도 뾰족한 끝부분과 자루에 연결되는 부분을 간접떼기로 가공하였는데, 필자는 이를 일종의 뚜르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유물은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장신구(사진1)가 다른 유적에 비해서 많이 출토되었다. 장신구는 사람을 치장하는 것으로 구멍을 내어야 하는데 구멍을 낼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김재윤 2016).




 왜냐하면 이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게의 역할을 한 석촉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 석촉은 일반적인 신석기시대 석촉과 유사하다. 재질에 따라서 마제(갈아서 만든 것)(그림 2-1~8)와 타제(때려서 만든 것)(그림 2-12~18) 두 개로 나눠진다. 


그림 2. 루드나야 문화의 각종석기(1/4)


 즉 세석인으로 제작된 것들은 장신구 가공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외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에서 확인되는 마제나 타제의 석기는 수렵채집용 혹은 목제가공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 장신구의 구멍은 어떻게 뚫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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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1. 토기 입술부위가 약간 벌어지며 토기의 몸이 둥글어 졌다. 입술주위에 점토를 붙인 문양이 있는데 이는 '융기문'이라고 한다. 쵸르토브이 보로타 출토)

(사진2. 사진1과 같은 집터에서 출토되었다. 문양은 마름모 모양의 문양새기는 도구를 찍어서 생긴 것이다. 쵸르토브이 보로타 출토.)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루드나야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세르게예프카 유형이다.


이것은 토기 특징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문화로 구분하지 않은 이유는 공통적인 토기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구연부에만 문양이 시문되며, 삼각형이나 능형 등의 문양을 새길 수 있는 문양 새기는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차이점이 더 크다면 다른 문화로 구분이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하나의 문화 내부에 서로 다른 유형으로만 구분하고 있다.

루드나야 문화의 루드나야 유형 토기 모습은 앞서 설명하였다.

루드나야 문화의 세르게예프카 유형(사진 1, 사진2, 그림 1-12~34)은 루드나야 문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동체부가 둥그스럼해지면서 입술부위가 외반한다. 문양도 다양해지는데, 찍는 문양과 함께 점토띠를 붙이는 것들이 생기게 때문이다.

(그림1. 루드나야 문화의 루드나야 유형(1~11)과 세르게예프카 유형(12~34) 토기(김재윤 2014)


이 유형에는 유명한 유적이 있는데 쵸르토브이 보로타(Чёртовы варота, 악마의 문이라는 의미)의 동굴유적이다. 유적은 화재 난 집터 였는데, 인골도 확인되어 흥미로운 곳이다.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http://(http://eastsearoad.tistory.com/20?category=713320)

이 유형의 시기는 루드나야 유형 보다는 다소 느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체적으로 7000년 전 ~6000 년 전에 유적이 많이 확인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