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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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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두만강 북쪽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1860년)을 기점으로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을 할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와 청은 자기네 국경 관리를 시작하였다. 흑룡강의 좌안은 러시아령, 우수리강의 서쪽은 청, 동쪽은 러시아와 청이 공동관리 한다는 다소 애매한 조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림1. 베이징 조약 당시 러시아 총독으로 참가한 이그나티예프의 초상화와 오른쪽은 베이징 조약 당시를 그린 것이다)


(그림 2. 베이징 조약 이후 극동의 총독이었던 푸탸틴과 러시아의 극동지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러시아 연해주의 고고학 조사는 19세기 후반 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얀콥스키가 해안가의 패총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1880년이다. 그 후에도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모스크바에서 파견나온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르세네프가 연해주의 지질조사를 하면서 발견된 성을 기록에 남겨 놓았다. 이것이 연해주 고고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얀콥스키의 패총발굴이야기와 아르세네프가 남긴 연해주의 발해와 여진 성 이야기는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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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 1. 고성 문암리 출토, 오산리식토기)

오산리식토기는 한반도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 최초로 출토되어서 명명되었다.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입술주의)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다.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주로 시문구(문양을 그리는 도구)로 ‘찍는 방법’이다. 시문구의 찍히는 모양이 원형, 삼각형(사진 1) 등인데, 간단하게 비유하면 도장같이 생각하면 된다. 문양이 다른 도구로 찍은 것(사진 2)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문양 찍는 도구 중에서는 빗처럼 생긴 다치구를 위에서 설명한 도장시문구와 함께 시문한 것(사진 3)도 포함된다.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 주변에만 문양을 찍어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2. 고성문암리 출토, 오산리식 토기)

(그림 3. 양양 오산리 유적의 C지구 출토, 오산리식 토기)

오산리식 토기는 동해안에서 융기문토기(http://eastsearoad.tistory.com/97)와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오산리 유적의 c지구의 예로 보면 융기문토기보다 이르지만.

오산리식 토기는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융기문토기와 함께 한반도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식민주의사관을 깨는 확정적인 물증자료이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토기로 생각된 바닥이 뾰족한 토기 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당시에 크게 바닥이 편평하지 않은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남부와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북부가 있었다. 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지역이 강원도 고성, 양양 정도이고, 좀 더 내려온 죽변부터 남해안과 훨씬 밀접하게 이어질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강원도의 영향도 있다.
 물론 고고학개설서에는 5개의 지역구분이라지만, 1980년대 주장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이유는...알지만 밝히지 못하겠다. 한국 모든 학문의 근본적 병폐정도로 밝힐 수 있다). 어디서부터 굴비를 다시 엮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논문이 필요할지...

그리고 한반도 남부 중에서도 남해안에서 유적도 많이 확인되며, 밀집되어 있고, 연대도 이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융기문(隆起文)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확인된다.

융기문이라고 다소 생소한 단어를 쓰고 있지만, 국사책에는 덧무늬토기, 영어로 하면  Bowl with Raised Pattern 이다. 당연히 한국어나 영어가 훨씬 더 일반인에게 익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한자어가 많은 고고학용어도 고고학이 대중화되지 못한데 큰 몫을 한다. 일본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필자도 고고학땅꼬마 시절에는 박물관에서 한자어로 적힌 유물이름이해가 안가면 오히려 영어캡션이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그렇게 한자에 문외한은 아니다.....

융기문토기, 덧무늬토기는 말 그대로 토기의 벽면에 점토띠를 붙여서 장식을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토기 문양이 시간이 뒤로 갈수록 여러 방법으로 음각(negative)을 한데 비해서, 비교적 이른 신석기시대에는 문양을 긋거나 찍거나 하는 방법이 아닌 양각(possitive)효과를 낸 점토띠를 덧붙여서 문양효과를 내었다.(*하지만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네가티브 효과를 낸 토기가 제주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바닥이 둥근 토기(그림1)가 주로 나오고, 동해안에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그림 2)에 덧띠가 부착된다.

(그림 1. 남해안의 융기문토기)

(그림 2. 동해안의 융기문토기)

이 토기는 주로 남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900~5800 년 전(기원전 6000~4500)에 확인되고, 동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00~5700 년 전(기원전 5000~4100)에 출토된되는데 이 보다 더 오래된 융기문토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동해안보다 북쪽인 동해안북부, 연해주에서도 출토된다. 그 연대는 한반도 보다 약간 이르다.
한때는 이 융기문토기가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토기 였지만,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고토기가 출토되었다. 고토기(古土器)는 다음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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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7. 10. 19. 10:43 책소개

첫 번역서가 나왔습니다.

원전의 내용이 100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제가 셀렉했다면 좀 더 낳은 걸 골랐을 수도 있겠죠.

암튼 처음이라서 애뜻한 마음입니다.



옮긴이의 글
 
본서는 러시아극동의 선사시대 고고자료에 관한 논문집이다. 연해주부터 아무르강 하류 및 사할린, 추코트카 반도까지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우리에겐 극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만, 러시아에서 극동은 러시아 영역의 가장 동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201311월에 개최된 학술대회의 자료를 논문집으로 2015년에 정식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그 사이에 하바로프스 시의 셰프코무드 박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2015615일에 바실리예바 안드레예바 박사가 작고하셨다.
안드레예바 박사님은 자이사노프카-1 유적을 발굴한 안드레예프 박사의 아내이다. 그리고 기념학술대회와 이 책을 주도적으로 집성한 클류예프 박사의 선생님이고, 역자의 박사논문에도 여러 조언을 하였고, 평가서를 써 준 인연이 있다.


안드레예프와 안드레예바 선생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각 1954년과 1955년부터 연해주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안드레예프 박사는 1970년에 갑자기 돌아가셨고, 안드레예바 박사는 1987년 까지 계속 연해주를 조사하였고 국가박사까지 취득하였다. 많은 저작물을 남겼는데, 지역학계 연구자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 자이사노프카-1 유적이 많이 알려져서 안드레예프 박사 이름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실상 안드레예바 박사가 오랫동안 연구했고 제작들을 많이 두었기 때문에 학계에서 미치는 영향은 아주 컸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두 안드레예바 박사의 제자이다.
여담이지만, 두 분의 성이 비슷한 이유는 러시아에서도 결혼을 하면 남편을 따라서 여자는 성을 바꾸게 되는데, 러시아어의 어법에 따라서 여자는 ‘a’를 부치게 된다. 최근에는 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데 특히 연구자들은 결혼 전부터 써온 논문과 헷갈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많이 하지 않는 다고도 한다.


본서는 자신이 실제 발굴한 내용을 토대로 분석한 것이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발굴이 학술발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대부분의 조사가 자신의 연구분야와 관련된 학술조사이며, 연구비로 이는 충당되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분야를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그 연구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유적의 전면발굴은 많지 않다. 더욱이 손으로 발굴을 한다는 점은 더 그러하다. 물론 최근에는 여러 가지 국가경제개발정책으로 송유관이나 가스관 사업으로 생기는 용역발굴도 있다. 본고의 야스노예-8 유적도 그런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학술발굴은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된 유적을 찾는 것이 급선무인데 지표조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형적인 성격을 고려해서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찾는데 강과 해안의 단구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수목이 아직 울창해 지기 전에 유구나 유물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봄과 가을에 중점적으로 이루어진다.
지표조사에서 고려되는 것은 유적의 입지로서 가능한가 여부와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되는 지를 살핀다. 두 요소가 모두 충족이 되 던가 그렇지 않고 한 가지만이라도 충족이 되면 1×1m로 시굴괭을 파고 문화층의 여부를 조사한다.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되면 유적범위도 추정하게 되고 수혈의 개수도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낯 선 개념인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된다는 것은 수혈이 폐기된 후에 흙으로 채워진 면이 현재의 지표면과 높이 차이를 보이면서, 수혈의 흔적이 발굴하지 않고도 눈으로 관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연해주, 아무르강 하류, 삼강평원, 사할린, 홋카이도에도 관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홋카이도는 직접 역자가 관찰하지 못했으나 다른 지역은 직접 지표조사나 답사를 통해서 보았다.
이런 점이 가능한 이유는 부식토층이 얇다는 물리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러시아가 광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만큼 문화재를 손대지 않은 채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역자는 본고를 번역하면서 가장 주안에 둔 점은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저자들의 러시아식 표현들도 그대로 손대지 않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지그재그 문양 같은 것인데,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이미 역자가 자신의 논문에서는 어골문으로 논지를 전개하였지만 본고에서는 역자의 소임대로 있는 그대로 번역하였다. 진주알 문양토기, 우아한 토기 등등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역자의 주로 보충설명도 달아두었다.
또한 러시아논문에는 학위논문이 아니면 대부분의 논문에는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는다. 본고에서도 최대한 그대로 번역하였는데, 일부 글은 도저히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역자가 약간 장과 절을 구분한 부분도 있다.


러시아어는 문체가 연구자 마다 다르다. 유려한 미사여구를 활용하는 사람, 딱딱한 용어를 선호 하는 사람, 문장의 순서를 뒤집어서 역설적인 표현을 즐기는 사람, 비꼬는 말을 우습게 쓰는 사람들 자칫 하면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는 초창기에는 오히려 신문처럼 일반화 되고 표준적으로 쓰는 글들이 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논문은 필자들 마다 문체가 다르다. 본고도 논문이 15개인 만큼 각양각색이었고 논문도 차이 있다.


역자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린샤의 논문인데, 극동 고고학자 대부분을 비판한 내용이지만, 아주 열혈 고고학자라는 것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몇 몇 글은 도면이 부족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또 추코트카 같은 곳에도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중국에 비해 비교적 이른 철기시대는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일수록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서 글은 아주 간단하지만 도면이 많은 논문은 시도렌코의 논문이다. 아주 많고 오랫동안 연구된 내용을 축약해서 적어서 약간 안타까움도 있지만 도면이 많아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할 부분도 분명이 있었다.
러시아에도 융합이라는 주제가 뜨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논문도 있는데, 사실 이는 소베에트 시절인 1960년대부터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고고학에 많이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세르게이 세묘노프인데, 현미경을 이용해서 석기의 날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사용흔적의 대상물을 찾아내는 것으로 미세사용흔적분석이라고 하며(세묘노프 1968), 미국에서 더 발전시켰다(T. 더글라스 프라이스, 2013).

그리고 현재 역자가 가장 쓰고 싶은 내용과 관련된 것은 바타르세프의 공동논문이다. 역자가 학위과정 중에도 마르가리토프카 문화는 청동기시대라고 생각했으나 박사학위 주제에는 넣지 않았다. 2013년에 흥성 유적의 토기를 관찰한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와 비교해서 적색마연토기와 돌대문토기에 관한 논문을 적고 싶었으나 아직까지 미진하다.
 
역자는 본고가 한국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도 있을 것이고, 생경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유롭게 독자의 몫으로 돌려두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자에게는 첫 번째로 나오게 될 역서인데, 이를 권유하고 지원해주신 한강문화재연구원 신숙정 원장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묘노프 1968, С. А. Семенов,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 НАУКА Ленинградскре отделение, Ленинград
T. 더글라스 프라이스(이희준 옮김), 2013, 고고학의 방법과 실제, 사회평론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역사고고민속학 연구소 편(김재윤 역) 2017, 러시아 연해주와 극동의 선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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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5. 15:39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도 복천박물관에서 특강한 것입니다.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은 태화강의 상류에 위치하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암각화가 유라시아에 비해서 적은편이지만 바위그림 가운데 가장 사실적으로 고래, 인간, , 어로도구, 사슴, 호랑이, 멧돼지, , 토끼, 여우 등 300여점의 도상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어서 흥미로운 점이  많다. 한국의 바위그림은 가운데서 가장 사실적인 표현으로 다른 바위그림이 기하학적인 문양이 주를 이루는 것과 차별된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만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울산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울산대학교 박물관 2000)에 따르면 그림 중에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동물상(65.2%)이고, 확인되지 않는 미상의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인물상(4.7%) 등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동물상 중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고래(30%)이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사슴(29.5%)도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래는 무리를 지어서 그려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등 그림의 관점도 다양하며, 표현된 고래도 물을 뿜는 고래의 모습(그림 1-A), 새끼를 업고 이동하는 모습, 작살이 몸속에 박힌 고래 등 여러 모습을 그렸다(그림 1). 고래는 주로 쪼기 기법으로 면을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다(김호석 2008, 이상목 2011).

사슴은 쪼아서 전면을 음각한 것(그림 2-A)과 외곽을 선 새김 한 후 내면에도 모양(그림 9-B)을 그려 넣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가 우세하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 사슴 뿐만 아니라 멧돼지(그림 3-C), 호랑이(그림 3-A·B) 등 여러 동물을 그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고래는 무리를 지어서 그려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등 그림의 관점도 다양하며, 표현된 고래도 물을 뿜는 고래의 모습(그림 1-A), 새끼를 업고 이동하는 모습, 작살이 몸속에 박힌 고래 등 여러 모습을 그렸다(그림 1). 고래는 주로 쪼기 기법으로 면을 음각으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다(김호석 2008, 이상목 2011). 


사슴은 쪼아서 전면을 음각한 것(그림 2-A)과 외곽을 선 새김 한 후 내면에도 모양(그림 2-B)을 그려 넣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가 우세하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으로 그려진 것이 사슴 뿐만 아니라 멧돼지(그림 3-C), 호랑이(그림 3-A·B) 등 여러 동물을 그리는 데 이용되고 있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인간 그림이 모두 14점 있는데, 그 중 12점은 전신상이며 2점인 인면문이다. 그 중 전신상(그림 1-B)을 샤먼으로 본 견해(장석호 2007, 이필영 1988)와 샤냥꾼(정동찬 1988)으로 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샤먼으로 본 견해는 남성의 상징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은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일치하지 않으며, 샤먼의 특수한 무복이라고 보거나, 바다사냥 중 물을 담은 물통이거나 비상식량주머니를 허리에 찬 모습으로 고래사냥하는 샤먼이라는 것(이필영 1988)이다. 반면에 이를 완전 배제하고 허리에 튀어나온 부분이 성기가 아닌 사냥꾼의 활과 같은 도구를 허리에 찬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박정근 2001).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호주 등 전 세계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의 주요 주제는 성(), 식량, 영토이며(엠마누엘 아나티 2003), 알타이, 카자흐스탄, 몽골 등지에서 확인되는 바위그림에도 남자와 여자의 성기, 성교장면 등은 늘 등장하는 주제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다른 바위그림 등과 마찬가지로 제작 연대의 문제, 제작 집단 등 여러 가지 논쟁이 되는 것이 많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제작 연대는 신석기시대 설과 청동기시대 설이 있는데, 주변에서 이를 증명할 만한 유적이 없는 점이 안타깝다. 러시아의 바위그림은 주변에서 바위그림과 관련된 유적 등이 확인되어서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가장 주요한 소재는 고래와 사슴인데, 앞서 살펴본 페그티멜 바위그림과 사카치 알리안 바위그림에서도 본 듯 하지 않은가?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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