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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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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가운데서 가장 늦은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에서는 막대기 끝 장식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아르김파사가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발굴품은 아니고 유적에서 우연히 무덤의 봉분이 무너져서 노출된 것이다. 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 가운데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여신이 있다.

 

기본판은 철로 만들어지고, 금판(얼굴이 있는 면)(그림 1-1)과 은판(뒷면)(그림 1-2)을 덮어서 만든 것이다. 이 여신은 날개가 있고 양손에 동물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는 동심원문양, 하단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양 날개와 이마, 손에 쥐고 있는 동물, 다리와 다리 아래의 알 수 없는 장치에는 구멍을 뚫고 은못으로 금판을 붙인 흔적이 남아 있다. 뒷면에도 남아 있다(그림 1-2).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유물이다.

 

 비슷한 유물이 한 점(그림 1-3,4) 더 출토되었는데, 거의 같은 모습이고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었지만 여성의 표현으로 보아서, 쌍(pair)은 아니다. 날개의 표현이 다르고, 여성의 하반부 옷자락 표현, 못의 위치에도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쌍으로 만들었지만, 현재 유물의 상태가 별로인게 아니다. 처음부터 그림 1의 여성과 비슷하게 만들었으나 더 잘 못 만들어졌다.

 

 

그림1. 알렉산드로프스키폴 유적출토, 1851년 발견품, 철제(기본판)+은판+금판, 1: 10×12cm, 3: 11.6×12.8cm

 

 

헤로도투스(I권 105)에 따르면 스키타이 인들은 근동에서 숭배하던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숭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스키타이 인들은 시리아의 도시 아스칼론에 있는 아프로디테 우리니아 신전을 훔쳤고, 여신은 ‘여성질병’으로 그들을 처벌했다고 한다.

IV권(67)에서 이 여신을 숭배하는 스키타이 사제는 내시로 이른바 에나레이라고 하는 설명이 있다.

 

2020/08/1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여신] - 흑해의 여신과 헤로도투스의 메세지

 

흑해의 여신과 헤로도투스의 메세지

스키타이 신화는 헤로도투스의 역사 IV권, 59에서 전해진다. ‘헤스티아는 모든 신들보다 높고, 그 다음은 제우스와 땅, 그 다음은 아폴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헤라클레스, 아레스이다. 이 신��

eastsearoad.tistory.com

 

 

처음에 아르타모노프는 날개 달리고 양 손에 동물을 쥔 여성을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스키타이 신 중 타비티, 아피, 아르김파사 중에 한 명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신앙은 그리스 신화 뿐 만 아니라 중동에서 믿는 아타르가티스(그리스명: 데르케토, 반은 여자, 반은 물고기로 시리아의 아스칼론 신전에 새겨져 있다.), 키벨레(땅, 물, 동물의 여신)와 같다. 그래서 스키타이 여성 형상물을 신화속의 인물과 비교해서 찾는 것은 신뢰할 수 없다(알렉세예프 2012).

 

헤로두투스도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신앙이 I권에서는 시리아의 도시에서 숭배되는 것으로 했다가 나중에 IV권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비교했다.

 

신화 속의 인물을 찾는 것은 분명히 흥미로운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신화가 어떤 특정 민족의 것이나 나라의 것이 아닐 수 있다. 누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인간 보편의 생각과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신앙 혹은 신화, 역사는 깡그리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대충만들고, 수입해서 쓰고.....

상투적이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이런 말이 생각난다.

 

참고문헌

 

Полин С.В., Алексеев А.Ю. 2018 :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Александропольский курган IV в. до н.э. в Нижнем Поднепровье. Киев, Берлин: «Видавець Олег Філюк». 2018. 930 с. («Курганы Украины». Т. 6)(폴린, 알렉세예프 2018, 드레프르강 하류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알렉산드로프스키폴 무덤)

Артамонов М.И. 1961 : Антропоморфные божества в религии скифов. // АСГЭ. [Вып.] 2. Л.: 1961. С. 57-87.(아르타모프 1961, 스키타이 의례 속의 의인화된 신)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헤로도투스의 역사 제4권 70장에는 스키타이 인들이 맹약을 하는 장면이 소개되었다.

 

‘스키타이족은 누구와 맹약을 하든 다음과 같이 한다. 큼직한 토기 항아리에 술을 붙고 거기에 계약 당사자들의 피를 섞는다. 그들은 송곳으로 몸을 찌르거나 칼로 몸을 조금 베거나 하여 피를 뽑느다. 그리고 칼, 화살, 투부, 창을 항아리에 담그며 길게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계약 당사자들과 그들의 수행원들 가운데 요인들이 술과 피가 섞인 것을 마신다(헤로도투스 2009)’

번역서에 따라서 술은 포도주로도 해석되었다.

 

 

러시아학자들은 헤로도투스가 설명한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물을 솔로하유적에서 출토된 가로 세로 2.5cm의 황금제 치레걸이로 예를 든다. 솔로하 유적에서는 300여개의 작은 장식판이 출토되었는데, 피장자의 옷에 부착되었다고 본다(그림1).

황금치레걸이의 두 남성이 들고 있는 것은 뿔잔 1개이고, 술 혹은 어떤 음료일 것이다. 왼쪽남성이 차고 있는 것은 칼이 있지만, 주변에 다른 전쟁용 도구는 있지 않다. 두 사람은 머리스타일과 옷이 다르기 때문에 스키타이족과 다른 종족일 가능성이 많은데 먼가 협약이나 맹약을 하는 장면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장면에서 이야기한 토기는 솔로하 유적 출토품에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어떤 맹세를 위한 장면임은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무기들을 담근 채 기도 한 후, 술과 피를 섞어서 마신다는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다.

 

틀리기도 하지만, 맞는 것도 있다. 읽다가 보면,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림1. 솔로하 유적 출토, 1913년 베셀로프스키 발굴, 에르미타주 소장

 

 

 

참고문헌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200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금번 답사에서 유적 위에 지어진 유적박물관을 소개하는 중인데,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을 끝으로 마지막으로 하고자 한다.

답사의 더 심도깊은 내용은 논문으로 쓸 것이고, 완성되면 소개할 예정이다.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은 이도정자라고 하는 유적(그림1)을 발굴한 채로 두고 덮은 박물관이다. 앞서 소개한 박물관과는 달리 유물전시관을 따로 짖지 않았고, 유적박물관의 가장자리에 유물을 약간 전시해 둔 정도이다.

 

그림 1. 중국에는 유적에는 꼭 비석을 세워둔다.. 찾기 쉽다..
그림 2. 이도정자유적박물관 입구

 

그림 3. 이도정자유적박물관 입구

 

그림 4. 이도정자 유적 박물관 내부

 

이도정자 유적은 적봉(赤峰)시(그림 5)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그림 6). 적봉시는 한자 그대로, 적봉시에 위치한 봉우리가 붉은 색이었고, 그 곳에서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홍산유적이 발굴되었다. 홍산유적보다 더 먼저 알려진 것은 홍산후라고 하는 유적인데, 그건 일인학자들이 발굴한 것으로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그림 5. 치펑이라고 적힌 곳이 적봉시이다. 라오닝이라고 적힌 곳은 요녕.
그림 6. 이도정자 유적의 위치
그림 7. 2011년에 찍은 적봉시의 홍산
그림 8. 홍산에서 내려 다 본 적봉시(2011년 촬영)
그림 9. 홍산유적지가 있는 산림공원. 위의 두 사진은 이 공원 안에서 찍었다. 암튼 적봉시는 그런 연유가 있는 도시이다. 이번이 세 번째 인데, 숙소를 두고 묶은 것은 처음이었다.

 

필자는 이 유적을 사실 2011년에 가 본 적이 있다. 도로를 내기 위해서 발굴하다가,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컨테이너로 보존했을 때 가 보았다(그림 10~12). 그 때도 장관이었다.

 

그림 10. 2011년에 찍은 이도정자 유적과 도로. 그림 6에서 알수 있지만 도로와 유적의 위치가 일치한다.
그림 11. 이도정자 유적을 덮은 모습(2011년)
그림 12. 이도정자 유적의 컨테이너 시설 내부 모습. 2011년 필자 촬영

이 유적은 중국 요서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이후에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의 마을유적이다. 한국과는 달리 토벽이나 석벽을 쌓아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잘 남아 있다(그림 4, 그림 12, 그림 13).

물론 하가점하층문화에서는 구덩이를 파서 만드는 움집이 있는 유적도 있고, 이런 지상식 구조물이 남아 있는 마을 유적도 있다.

하가점하층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은 차차 소개하기로 한다.

 

그림 13. 2019년 현재 이도정자유적박물과 내부
그림 14. 이도정자 유적의 발굴당시 항공사진.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의 패널을 필자가 찍음.

 

암튼 중국의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공작하는 중이니,,, 그 우연한 파생물인 유적박물관은 아이러니하게도 고고학도인 나에게는 무지 탐나는 아이템이다.

 

우리도 좀 괜찮은 유적은 신라, 가야 이런 역사시대 것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유적도 좀 보존했으면 좋겠다..물론 그런 유적이 발굴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의 중국 박물관은 유적과 유물을 함께 전시하도록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적은 유구의 상태를 되도록 살리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도 함께 전시한다.

그래서 유지(유적)박물관과 유물전시관을 세트로 지어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

금번에 돌아본 박물관은 총6개인데, 3개는 요령성박물관, 적봉박물관, 내몽고박물관으로 각 성의 중요한 박물관이고, 나머지 3개는 유적에 박물관이 있어서 도시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선 홍산문화의 유적으로 유명한 우하량유적은 이름 하여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전시관이 지어져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개관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양에서 우하량유적으로 가는 ktx가 있다. 우하량유적은 물론 역에서 대략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시관은 총 4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중국고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병기의 일생에 대한 전시관이다. 특정한 인물에 대한 전시관을 지었을 정도로 그는 중국고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홍산문화의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제2전시관은 유물전시관인데, 지난달에도 개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듯이 아직 빈 전시장도 있었다. 제3전시관은 우하량 1지점인 일명 여신묘가 있는 곳을 덮어서 유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제4전시관은 우하량 2지점에서 발굴된 무덤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사실 홍산문화의 유물은 우하량유적전시관에는 복제품이 많고, 중국국가박물관(베이징), 적봉박물관, 내몽골박물관, 요령성박물관 등에서 나눠져서 전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중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우하량 유적 전시관이 있는 우하량촌은 정말 작은 소재지이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하량역과도 접근성이 전혀 좋지 않았지만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유적 전시관이 있었고, 4개의 전시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맞이 하기 위한 것처럼....

워낙 중국내에서도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지 유물은 대부분 복제품이 많았다.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2019년 6월 개관)

 

두 번째로 간 유적 박물관은 합민망합이라고 하는 유적의 박물관이다. 통요시에서 60km떨어진 곳에 유지전시관과 유물전시관이 두 개가 각각 지어져 있었다. 이 유적은 마을 유적이고, 집 내부에 화재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는 집, 무덤으로 이용된 집 등 상당히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필자는 이 유적의 출토 토기와 조합식석인검이 홍산문화의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홍산문화의 유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 유적의 유물을 보는 것이 금번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합민망합사전취락유지 2016년 개관

통요시에서 60km떨어짐

 

세 번째로 간 유적은 적봉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도정자유지박물관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가 아닌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인데, 도로공사를 위해서 우연히 발견해서 발굴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사실 유적이 발굴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1년에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가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때 정말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였다.

한국과는 다른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과 유적 때문에 도로의 방향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에 본 박물관은 모두 동북3성 중에서 가장 발달이 덜 된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난 중국이 주도적으로 독재체재를 완성하기 위한 교육장으로 박물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유적박물관은 매우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사랑? 역사관심? 역사투자?에도 매우 편식이 심하다. 고구려나 발해, 신라 등 국가 단게의 유적은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사시대 유적에는 그렇지 못하다. 정말 한심하게 어떻게 선사시대 없이 갑자기 고구려 발해역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우라나라에서 학술발굴이 매우 드물고 대부분 건물이나 도로를 짓기 위해서 시작한 곳에서 발굴된 용역발굴이 많기 때문에 건물지을 때 그런 곳이 나오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특히 중요한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

사적으로 지정된다 해도 유적을 발굴한 채로 그대로 살려서 유적을 알리는 경우도 드물다. 강원도 중도에도 청동기시대 마을과 무덤이 꽤 발굴되었으나,,,무슨 놀이 공원으로 꾸민다 만다 논란이 많다.

물론 발굴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많은 것은 더 이야기 하지 않겠다.

 

 

도시와 그렇게 떨어진 곳에서 누가 갈까 싶기는 하지만, 유적과 유물을 그대로 살린 박물관은 너무 부러웠다....물론 우하량유적은 문제가 있었지만.

 

중국은 역사를 선사시대 것부터 정쟁화하고, 우리는 편식이 심하고, 역사를 돌보지 않는다.

 

장춘가는 기차안에서...

사진은 다음포스팅에서...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오늘 수업은 매우 힘들었다. 아침부터 세월호가 '의도적' 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갑자기 든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도, 구출하지 않은 것도, 오늘의 막말도.

 

수업하다가 문득 한달 전 본 영화생각이 나서 애들한테 해줬다.

 

‘나는 부정한다’라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유대인이며 미국대학의 여성교수인데, 히틀러 학살을 연구하는 현대사전공자이다. 영화는 이 여성학자가 히틀러가 학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늙은 학자와 벌이는 재판과정을 그렸다.

히틀러가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2차대전이후 이제 70년을 넘었지만,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일제 한테 당한 것을 정리못하고 흐릿해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명백하게 정리되고 세상이 다 아는 히틀러 학살이지만.

그래도 그런 말도 안되는 사건이 있고, 영화화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해주고, 한번 볼 것을 권유했다. 취향에 따라서 재미없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역사는 교육되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잘못이 인간세상에 없기 위해서.

 

곧 잊혀지고, 흐려진 기억에 의해서

혹은 의도된 계획에 의해 날조되어

마치 그것이 진실 인 것 처럼 떠돌아다닐것이기 때문에.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호도 이렇게 날조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월호의 진위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고, 더 이상 늦기 전에 일제식민청산도 반드시 해야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나 많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날조되었을까?

 

역사교육은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야 한다.

................

 

김 재 윤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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