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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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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0. 09:22 책소개

필자의 책이 출간되었다. 좀 늦게 블로그에 공개하게 되었다.

 

필자가 박사졸업 후 10년간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와 관련해서 쓴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서로,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각 시대별로 고고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환동해문화권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지만 본고에서는 구석기시대도 포함된다. 연해주의 구석기시대는 후기구석기시대 자료로 세석인 석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있는데, 시베리아와 같은 성격이다. 환동해문화권으로 따로 분리할 만큼 근거가 없으며 연구도 매우 부실한 편인데, 시베리아와는 대조적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환동해문화권은 남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자료의 단순한 기원지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이다. 다만 전 기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시대별로 시간적인 추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두대간 북쪽으로 연결되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를 공유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생업형태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많이 위치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환동해문화권은 남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자료의 단순한 기원지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이다. 다만 전 기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시대별로 시간적인 추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두대간 북쪽으로 연결되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를 공유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생업형태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많이 위치한다.

  반면에 청동기시대는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가 남한에서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일대에서 발견되고 특히 남강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연해주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생업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인 농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시작은 신석기시대 후기인 자이사노프카 문화부터이다. 각종 석기 및 곡물자료를 근거로 한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인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물질 자료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심지어 남강의 충적대지에서도 발견된다. 남강 대평유적의 곡옥형 청동기는 비파형동검 이전의 자료로 최초로 발견된 청동유물이지만 출토당시에는 의심스러운 자료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청동기시대 조기인 정선의 아우라지 유적에서 청동유물이 발견되면서, 비파형동검 보다 이른 단계에 청동유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남강 대평의 곡옥형 청동기와 유사한 유물이 환동해문화권 북부의 시니가이 문화에서 유사한 유물이 발견된다.

  따라서 필자는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남강 유역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와 토기 중에 일부는 시니가이 문화 및 흥성문화의 물질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한의 청동기시대 형성과정 중에는 많은 요소가 있었을 것이며,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 때문에 한강 이남지역에서 농경문화가 주요하게 자리잡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동해문화권의 철기시대는 얀콥스키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폴체문화가 알려졌는데 폴체문화는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이미 단결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III기(기원전 1~기원후 1세기)에 ‘옥저’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이를 뒤이은 폴체문화는 이미 역사시대로 진입해서 철기시대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동해문화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별로 권역의 차이가 있다. 주로 연해주 및 인접한 두만강과 목단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이고, 우리나라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비롯한 중부지역은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이다. 시간에 따라서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에는 아무르강 하류도 포함된다.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연해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시베리아 카라숙문화의 청동유물과 같은 성분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에서는 카라숙 문화 및 타가르 문화의 동검을 모방한 석검 등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 문화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서도 간접적인 시베리아 문화의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매우 일부이며, 연해주만이 주요한 길목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연구에 많은 한계가 있다.

 

‘기원 찾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역범위에 대한 별 다른 고민 없이 현대의 『국경』을 전제로 해서, 국경에 속하지 않으면 전부 외부로만 인식해서 생겨났다. 문화의 원류, 기원, 계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 문화의 지역적 위치가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닌 『선사인의 생활권역』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필자가 연구했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의 요소를 확인했던 과정은 기원찾기가 아니라 문화권역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가 남부지역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기후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동해안의 기온이 상승하던 기간에 일어난 현상으로 신석기시대인 6500~6000B.P.과 청동기시대인 3400~2900 B.P.에 일어났다. 각각 루드나야 문화와 시니가이 문화 및 흥성문화로 기온 상승기에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기온하강기에 등장한 여러 문화는 그 지역에 머물렀다는데, 기온 하강기에 등장하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문화는 철기시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인데, 쪽구들(온돌)을 만들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책의 표지: 사카치 알리안과 키야 유적의 암각화 편집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진인진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의 중국 박물관은 유적과 유물을 함께 전시하도록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적은 유구의 상태를 되도록 살리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도 함께 전시한다.

그래서 유지(유적)박물관과 유물전시관을 세트로 지어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

금번에 돌아본 박물관은 총6개인데, 3개는 요령성박물관, 적봉박물관, 내몽고박물관으로 각 성의 중요한 박물관이고, 나머지 3개는 유적에 박물관이 있어서 도시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선 홍산문화의 유적으로 유명한 우하량유적은 이름 하여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전시관이 지어져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개관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양에서 우하량유적으로 가는 ktx가 있다. 우하량유적은 물론 역에서 대략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시관은 총 4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중국고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병기의 일생에 대한 전시관이다. 특정한 인물에 대한 전시관을 지었을 정도로 그는 중국고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홍산문화의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제2전시관은 유물전시관인데, 지난달에도 개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듯이 아직 빈 전시장도 있었다. 제3전시관은 우하량 1지점인 일명 여신묘가 있는 곳을 덮어서 유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제4전시관은 우하량 2지점에서 발굴된 무덤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사실 홍산문화의 유물은 우하량유적전시관에는 복제품이 많고, 중국국가박물관(베이징), 적봉박물관, 내몽골박물관, 요령성박물관 등에서 나눠져서 전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중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우하량 유적 전시관이 있는 우하량촌은 정말 작은 소재지이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하량역과도 접근성이 전혀 좋지 않았지만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유적 전시관이 있었고, 4개의 전시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맞이 하기 위한 것처럼....

워낙 중국내에서도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지 유물은 대부분 복제품이 많았다.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2019년 6월 개관)

 

두 번째로 간 유적 박물관은 합민망합이라고 하는 유적의 박물관이다. 통요시에서 60km떨어진 곳에 유지전시관과 유물전시관이 두 개가 각각 지어져 있었다. 이 유적은 마을 유적이고, 집 내부에 화재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는 집, 무덤으로 이용된 집 등 상당히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필자는 이 유적의 출토 토기와 조합식석인검이 홍산문화의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홍산문화의 유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 유적의 유물을 보는 것이 금번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합민망합사전취락유지 2016년 개관

통요시에서 60km떨어짐

 

세 번째로 간 유적은 적봉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도정자유지박물관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가 아닌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인데, 도로공사를 위해서 우연히 발견해서 발굴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사실 유적이 발굴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1년에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가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때 정말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였다.

한국과는 다른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과 유적 때문에 도로의 방향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에 본 박물관은 모두 동북3성 중에서 가장 발달이 덜 된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난 중국이 주도적으로 독재체재를 완성하기 위한 교육장으로 박물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유적박물관은 매우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사랑? 역사관심? 역사투자?에도 매우 편식이 심하다. 고구려나 발해, 신라 등 국가 단게의 유적은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사시대 유적에는 그렇지 못하다. 정말 한심하게 어떻게 선사시대 없이 갑자기 고구려 발해역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우라나라에서 학술발굴이 매우 드물고 대부분 건물이나 도로를 짓기 위해서 시작한 곳에서 발굴된 용역발굴이 많기 때문에 건물지을 때 그런 곳이 나오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특히 중요한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

사적으로 지정된다 해도 유적을 발굴한 채로 그대로 살려서 유적을 알리는 경우도 드물다. 강원도 중도에도 청동기시대 마을과 무덤이 꽤 발굴되었으나,,,무슨 놀이 공원으로 꾸민다 만다 논란이 많다.

물론 발굴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많은 것은 더 이야기 하지 않겠다.

 

 

도시와 그렇게 떨어진 곳에서 누가 갈까 싶기는 하지만, 유적과 유물을 그대로 살린 박물관은 너무 부러웠다....물론 우하량유적은 문제가 있었지만.

 

중국은 역사를 선사시대 것부터 정쟁화하고, 우리는 편식이 심하고, 역사를 돌보지 않는다.

 

장춘가는 기차안에서...

사진은 다음포스팅에서...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연해주 고고학에 대해서 글을 여러번 올렸다.

철기시대에 대한 마무리가 올해 끝나면 마저올리겠다.

몇 개의 문화에 대해서 정리할 것이 있는데,,,,이번 방학에는 손이 안가지만. 그래도 올해 마무리하고,,,,연해주고고학개론서를 끝내고 싶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연해주를 벗어난 지역을 강의하고 있다.

유라시아 중에서 시베리아중심이다.

생각해 보면 연해주연구한 것도 시베리아와 한국의 연결고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기회가 생겨서 시베리아 남쪽에 있는 지역도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동아시아를 벗어나니, 새로운 시각도 생기고, 또 동아시아를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이 지역은 무척 재밌는 지역이다. 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한데...

결국 몇 개의 주제를 필자가 선택하겠지만,, 머릿속에 뱅뱅 돌고 있는 무수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할지 나도 내가 궁금하다.

 

신석기시대...지금까지 해 온 시대구분으로는 두 번째 시대이다.

그런데,,,,지금까지 해온 세계적인 연구자들의 연구가 점점 희미해진다.

흔히들 알던 신석기시대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너무 확연하게 들어난다.

작년에 발표한 내용도 그런 주제였다.

 

결국, 인간은 아마 구석기시대에 만들 수 있는 건 이미 다 만들었던 것 같다.

신석기시대 라고 생각했던 것, 토기, 마제석기, 무기 등.

올해부터는 유라시아고고학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강의를 하다가 생긴 궁금증 혹은 의심을 풀기 위한 연구이다.

그래서 유라시아고고학 중에 일부 지역인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포스팅할 계획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남부의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소백산맥이동의 영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그림1). 동심원문 및 동심원문과 유사하게 원을 여러 겹처서 시문한 암각화가 있고, 변형 사다리꼴(검파형) 혹은 석검이 그려진 암각화와 함께 시문된 것이 있다(그림 7,8). 그런데 고령의 인화리 암각화에는 동심원문 위에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져서 두 문양이 시기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8-6). 또한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서는 SW2면에서는 검파형 문양에서 뻗어나온 방사선의 위쪽에 동심원문이 그려졌는데(그림8-1), 동심원문이 먼저 그려진 것이다. 즉 동심원문과 검파형암각화는 그려진 시간차가 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한반도 동심원문 암각화는 무산 지초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석묘와 관련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동해문화권과 비교하면 연대는 다르다.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유적의 성격에 따른 연대추정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수 있다.


 또한 사카치알리안에서 얼굴모양 마스크 이외에 전신상이 출토된 예가 있다(그림9-1,2). 머리는 원형이고, 몸통은 삼각형으로 표현되고 두팔이 표현되었다. 유사한 예가 포항 대련리에서도 확인되었는데(그림 9-3,4),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동심원문 암각화와 얼굴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세레미체보 유적(그림 3-8)에서 동심원문과 약간 다른 회오리문양이 확인되는데 양전동(그림 8-4)에서도 확인된다. 즉 동심원문, 전신상암각화, 회오리 문양 등은 소백산맥 이동의 영남에서 확인되며 환동해문화권이 관련성이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림 9. 전신상인면문(1,2: 사카치알리안, 3,4: 포항 대련리)




 백성 쌍탑 1기와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의 예로 보아서 동심원문양은 이미 신석기시대 9000년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두만강 유역도 세레미체보 유적이 위치한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다. 그러나 두만강 유역에는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된 바 없고, 한반도 남부의 소백산맥 이동의 남부지역 신석기시대 유적도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현재까지는 없다(2,3). 또한 연해주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인 5000B.P.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는 첨저토기가 출토됨으로 이 시간대는 환동해문화권이 축소되었다고 강원도는 문화권에 포함되지 않는다(3, 김재윤 2017).

  

 따라서 현재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동심원문 암각화는 아무르강 하류~우수리강 일대 및 송눈평원 일대에서 많이 확인되던 문양이고, 얼굴모양으로 활용되어 그려져서 9000년 전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리강과 가까운 두만강 유역에도 확인되는데, 같은 문화지역임으로 유사하거나 약간 느린 시점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동심원문 암각화도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 이동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이는 두만강유역에서도 확인됨으로 환동해문화권과 교류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좀 더 뚜렷한 것은 토기 및 석기 등으로 연구된 아무르강 및 연해주와 교류가 있었던 6500년 전 이후부터 일 수 있고, 연해주와 동해안의 관련성이 6000~5800년 전임으로 이 기간과 관련성이 높다(김재윤 2015, 2017, 3).

  하지만 암각화의 제작연대와 이기간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정신적인 행위를 토기와 석기 등 일상적인 유물과 같은 시간적인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환동해문화권과 영남의 신석기시대사람들이 교류했다고 해도 동심원문암각화를 그린 주체는 영남의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내륙에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유적이 생기는 시점은 대부분 5000년 전 이후이며, 동심원문 암각화도 이 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그림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그림3)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그림 7,8)


*본문에 제시된 표 2와 3은 다음포스팅에 올리겠습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9. 12: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에서는 토기문양에 동심원문양이 새겨진 것이 확인되었다. 백성 쌍탑 1기의 토기가운데, 융기문 및 구순각목문, 승선문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강 중류의 신석기시대 노보페트로프카문화(그림 6-16~19)와 관련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편과, 융기문양으로 얼굴이 표현된 것도 있다(그림 6-10,11,14). 백성 쌍탑 1기의 절대연대가 9550±45, 10162±630, 9445±710, 10400±600, 10202±1000, 9679±750B.P.로 알려졌다(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모양 마스크는 얼굴형을 기준으로 분류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그런데 필자는 사카치알리안의 여러 지점들에 2, 3중 등 동심원문양이 남아 있고, 코와 입까지 그려진 암각화(그림 3-1~4)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얼굴을 그릴 때 눈을 먼저 그리고 얼굴형을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눈의 모양에 따라서 얼굴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데 크게 동심원의 눈(그림4)과 타원형으로 찢어진 눈’(그림5)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심원의 눈이 있는 얼굴은 이마, , , 얼굴형 등에 따라서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눈에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렸고, 얼굴형은 타원형, 원형, 하트형, 등이 있다.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려지며 이마의 표현도 3줄 이상의 호선을 두 번 연달아 표현했고, 코는 삼각형, 입은 장타원형 혹은 원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원형 가운데는 얼굴에서 방사선 선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원형과는 차이가 있다(그림 4-7~16).

동심원문이 2개 그려지며 이마 주름이 1~2개 그려진 것은 표주박형 얼굴 혹은 하트형 얼굴이 그려졌는데, 코는 원 두 개로 표현되었고, 입은 타원형 2개를 겹치거나 원형으로 그려졌다(그림4-1~6). 그 외 동심원으로 눈을 표현하고 하트형 얼굴이 있고(그림 4-21~23), 원 세 개로 표현된 것(그림 4-17~20)도 있다.


세레미체보의 얼굴모양 암각화 역시 눈이 동심원문인 것(그림 4-4~6, 10,13,15,16)과 장타원형인 것(그림 5-4,7,8)으로 구분된다. 동심원으로 그려진 얼굴형은 원형인 것과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이 있다. 눈이 2~3중 동심원문으로 표현된 것은 이마에 주름이 3줄 표현된 것은 얼굴형은 원형 혹은 타원형에 가깝다. 코는 삼각형, 입은 타원형으로 표현된 것(그림 4-10), 코까지만 그려진 미완성형(그림 6-10,11)도 남아 있다. 또한 이와는 달리 눈, , 입은 유사하지만 얼굴에 채워진 문양이 세로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그림 4-13,15). 2중 동심원문이며, 얼굴형이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 중에 1점은 머리위로 짧은 직선이 12줄 그려져 있다(그림 4-13, 15). 이는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형 가운데 방사선이 있는 것(그림5-9,10)과는 방향과 길이 등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얼굴은 코가 2개의 원, 장타원형 입이 그려졌다.


이중에서 백성 쌍탑1(그림 6-10,11)와 유사한 것은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에서 확인된 3중 동심원 눈, 이마표현 등도 유사하다(그림 4-9~11,16).


사카치알리안은 오시포프카 문화 단계부터 그려졌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백성 쌍탑1기와 비교한다면 9000년 전 정도이다. 특히 오시포프카 문화 늦은 단계에 속하는 8820~9810B.P 야미흐타 유적의 토기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의 관련성이 제기된 바 있다(셰프코무드·후쿠다 외 2017). 이 시점에 아무르강 하류와 중류의 교류가 있었고, 눈강 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사카치알리안의 암각화와 세레미체보 암각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동심원문을 사람얼굴표현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심원문 및 그와 유사한 회오리 문양, 동심원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 및 동심원문 암각화도 9000년 전 정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점은 오클라드니코프가 타래문토기와 비교한 6000~5000년 전, 하트형 얼굴모양과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토기와의 비교한 연대(1)보다 올라간다.


따라서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이 여러 시기에 걸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중에 9000년 전께 동심원문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과 여러 동심원문이 그려졌다.


*그림 4~6, 표1은 링크 참고하세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표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5(그림 4,5)

https://eastsearoad.tistory.com/276(그림 6)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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