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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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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19. 10:43 책소개

첫 번역서가 나왔습니다.

원전의 내용이 100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제가 셀렉했다면 좀 더 낳은 걸 골랐을 수도 있겠죠.

암튼 처음이라서 애뜻한 마음입니다.



옮긴이의 글
 
본서는 러시아극동의 선사시대 고고자료에 관한 논문집이다. 연해주부터 아무르강 하류 및 사할린, 추코트카 반도까지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우리에겐 극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만, 러시아에서 극동은 러시아 영역의 가장 동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201311월에 개최된 학술대회의 자료를 논문집으로 2015년에 정식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그 사이에 하바로프스 시의 셰프코무드 박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2015615일에 바실리예바 안드레예바 박사가 작고하셨다.
안드레예바 박사님은 자이사노프카-1 유적을 발굴한 안드레예프 박사의 아내이다. 그리고 기념학술대회와 이 책을 주도적으로 집성한 클류예프 박사의 선생님이고, 역자의 박사논문에도 여러 조언을 하였고, 평가서를 써 준 인연이 있다.


안드레예프와 안드레예바 선생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각 각 1954년과 1955년부터 연해주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안드레예프 박사는 1970년에 갑자기 돌아가셨고, 안드레예바 박사는 1987년 까지 계속 연해주를 조사하였고 국가박사까지 취득하였다. 많은 저작물을 남겼는데, 지역학계 연구자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에 자이사노프카-1 유적이 많이 알려져서 안드레예프 박사 이름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실상 안드레예바 박사가 오랫동안 연구했고 제작들을 많이 두었기 때문에 학계에서 미치는 영향은 아주 컸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두 안드레예바 박사의 제자이다.
여담이지만, 두 분의 성이 비슷한 이유는 러시아에서도 결혼을 하면 남편을 따라서 여자는 성을 바꾸게 되는데, 러시아어의 어법에 따라서 여자는 ‘a’를 부치게 된다. 최근에는 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데 특히 연구자들은 결혼 전부터 써온 논문과 헷갈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많이 하지 않는 다고도 한다.


본서는 자신이 실제 발굴한 내용을 토대로 분석한 것이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발굴이 학술발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대부분의 조사가 자신의 연구분야와 관련된 학술조사이며, 연구비로 이는 충당되기 때문에 자신의 연구분야를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그 연구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유적의 전면발굴은 많지 않다. 더욱이 손으로 발굴을 한다는 점은 더 그러하다. 물론 최근에는 여러 가지 국가경제개발정책으로 송유관이나 가스관 사업으로 생기는 용역발굴도 있다. 본고의 야스노예-8 유적도 그런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학술발굴은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된 유적을 찾는 것이 급선무인데 지표조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형적인 성격을 고려해서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찾는데 강과 해안의 단구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수목이 아직 울창해 지기 전에 유구나 유물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봄과 가을에 중점적으로 이루어진다.
지표조사에서 고려되는 것은 유적의 입지로서 가능한가 여부와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되는 지를 살핀다. 두 요소가 모두 충족이 되 던가 그렇지 않고 한 가지만이라도 충족이 되면 1×1m로 시굴괭을 파고 문화층의 여부를 조사한다.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되면 유적범위도 추정하게 되고 수혈의 개수도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낯 선 개념인 육안으로 수혈이 관찰된다는 것은 수혈이 폐기된 후에 흙으로 채워진 면이 현재의 지표면과 높이 차이를 보이면서, 수혈의 흔적이 발굴하지 않고도 눈으로 관찰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연해주, 아무르강 하류, 삼강평원, 사할린, 홋카이도에도 관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홋카이도는 직접 역자가 관찰하지 못했으나 다른 지역은 직접 지표조사나 답사를 통해서 보았다.
이런 점이 가능한 이유는 부식토층이 얇다는 물리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러시아가 광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만큼 문화재를 손대지 않은 채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역자는 본고를 번역하면서 가장 주안에 둔 점은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저자들의 러시아식 표현들도 그대로 손대지 않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지그재그 문양 같은 것인데,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이미 역자가 자신의 논문에서는 어골문으로 논지를 전개하였지만 본고에서는 역자의 소임대로 있는 그대로 번역하였다. 진주알 문양토기, 우아한 토기 등등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역자의 주로 보충설명도 달아두었다.
또한 러시아논문에는 학위논문이 아니면 대부분의 논문에는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는다. 본고에서도 최대한 그대로 번역하였는데, 일부 글은 도저히 한국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역자가 약간 장과 절을 구분한 부분도 있다.


러시아어는 문체가 연구자 마다 다르다. 유려한 미사여구를 활용하는 사람, 딱딱한 용어를 선호 하는 사람, 문장의 순서를 뒤집어서 역설적인 표현을 즐기는 사람, 비꼬는 말을 우습게 쓰는 사람들 자칫 하면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는 초창기에는 오히려 신문처럼 일반화 되고 표준적으로 쓰는 글들이 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논문은 필자들 마다 문체가 다르다. 본고도 논문이 15개인 만큼 각양각색이었고 논문도 차이 있다.


역자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린샤의 논문인데, 극동 고고학자 대부분을 비판한 내용이지만, 아주 열혈 고고학자라는 것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몇 몇 글은 도면이 부족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또 추코트카 같은 곳에도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중국에 비해 비교적 이른 철기시대는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일수록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서 글은 아주 간단하지만 도면이 많은 논문은 시도렌코의 논문이다. 아주 많고 오랫동안 연구된 내용을 축약해서 적어서 약간 안타까움도 있지만 도면이 많아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할 부분도 분명이 있었다.
러시아에도 융합이라는 주제가 뜨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논문도 있는데, 사실 이는 소베에트 시절인 1960년대부터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고고학에 많이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세르게이 세묘노프인데, 현미경을 이용해서 석기의 날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사용흔적의 대상물을 찾아내는 것으로 미세사용흔적분석이라고 하며(세묘노프 1968), 미국에서 더 발전시켰다(T. 더글라스 프라이스, 2013).

그리고 현재 역자가 가장 쓰고 싶은 내용과 관련된 것은 바타르세프의 공동논문이다. 역자가 학위과정 중에도 마르가리토프카 문화는 청동기시대라고 생각했으나 박사학위 주제에는 넣지 않았다. 2013년에 흥성 유적의 토기를 관찰한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와 비교해서 적색마연토기와 돌대문토기에 관한 논문을 적고 싶었으나 아직까지 미진하다.
 
역자는 본고가 한국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도 있을 것이고, 생경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유롭게 독자의 몫으로 돌려두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자에게는 첫 번째로 나오게 될 역서인데, 이를 권유하고 지원해주신 한강문화재연구원 신숙정 원장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묘노프 1968, С. А. Семенов,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 НАУКА Ленинградскре отделение, Ленинград
T. 더글라스 프라이스(이희준 옮김), 2013, 고고학의 방법과 실제, 사회평론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역사고고민속학 연구소 편(김재윤 역) 2017, 러시아 연해주와 극동의 선사시대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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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4. 19:45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도 복천동박물관 특강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2. 사카치 알리안 바위그림


사카치 알리안 유적은 아무르강 하류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매우 잘 알려진 곳이다. 사카치 알리안 마을에서부터 상류쪽으로 말리셰보 마을까지 아무르 강가의 5km 범위 내에 화산암 바위 위에 그림이 남겨져 있다. 페그티멜 유적과 반구대가 절벽위에 그려져 있다면, 사카치 알리안은 강가에 바로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성은 좋지만 유적파괴도 극심하다. 이곳은 아무르 강 하류에서 500 km 떨어진 곳으로 바다보다는 훨씬 내만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바위그림은 인간의 얼굴 혹은 마스크를 쓴 얼굴, , 사람, , 사슴-, 사공이 탄 배, , 원심원 및 동심원 문양 등 기하적인 것도 백 여점 이상으로 그려져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원심문양이나 동심원문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인간의 얼굴모양(그림 2)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설이 크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메드베제프 2005) 또한 태양 주술과 관련되었다는 형상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인면문은 다양한데, 얼굴만 그린 것과 몸통까지 다 표현한 것이 있다. 얼굴형만 그린 것은 얼굴의 기본형태가 타원형, 하트형, 역삼각형, 그 내부를 눈, 입만 표현한 것, ··입 다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얼굴에 마스크를 쓴 얼굴을 표한한 것도 있는데, 마스크의 표현방법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공이 탄 배도 사람의 수가 4~9명 등 다양해서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차키 알리안 암각화의 사슴은 외곽의 선 새김을 내면에도 선을 새겨서 내면에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사카치 알리안 암각화에는 맹수도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로 추정된다(그림 3-3). 호랑이는긴 꼬리를 치켜들고 있고, 앞 다리를 들고 있으며, 귀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몸통에는 격자문양이 시문되어는 모습이다.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 동물 역시 격자문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고, 다리는 4개이다(그림 3-2). 




이곳의 바위그림은 인간의 얼굴 혹은 마스크를 쓴 얼굴, , 사람, , 사슴-, 사공이 탄 배, , 원심원 및 동심원 문양 등 기하적인 것도 백 여점 이상으로 그려져 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원심문양이나 동심원문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인간의 얼굴모양(그림 2)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설이 크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메드베제프 2005) 또한 태양 주술과 관련되었다는 형상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인면문은 다양한데, 얼굴만 그린 것과 몸통까지 다 표현한 것이 있다. 얼굴형만 그린 것은 얼굴의 기본형태가 타원형, 하트형, 역삼각형, 그 내부를 눈, 입만 표현한 것, ··입 다 표현한 것이 있다. 또한 얼굴에 마스크를 쓴 얼굴을 표한한 것도 있는데, 마스크의 표현방법도 단순한 것은 아니다.


공이 탄 배도 사람의 수가 4~9명 등 다양해서 선사시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사차키 알리안 암각화의 사슴은 외곽의 선 새김을 내면에도 선을 새겨서 내면에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또한 사카치 알리안 암각화에는 맹수도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로 추정된다(그림 3-3). 호랑이는긴 꼬리를 치켜들고 있고, 앞 다리를 들고 있으며, 귀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몸통에는 격자문양이 시문되어는 모습이다. 호랑이와 함께 그려진 동물 역시 격자문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고, 다리는 4개이다(그림 3-2). 





posted by 김재윤23
2017. 8. 22. 13:31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이 내용은 2017년 5월에 있었던 부산 복천동박물관 특강의 내용입니다.

예술은 러시아어로는 исскуство라고 하며, 이의 형용사형은 исскуственны 라고 하는데, 그 뜻에 인공적인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같은 의미로 영어의 ’artificial’이 있는데 ‘art(예술)’라는 용어가 들어 있다. 즉 인공적인 것은 모두 예술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예술은 시작되었을까?
유럽이나 동아시아에서 모두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 자취가 보인다. 유럽은 가장 오래된 동굴에 벽화 그림이 남겨진 유적은 프랑스의 쇼베-퐁다르크 동굴(사진 1, 2)인데, 36천년 전으로 평가된다. 이 동굴 벽화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951월인데, 2 만년 전에 암벽이 붕괴되면서 동굴전체가 진공포장된 것처럼 발견되기 전(1994)까지 보존되었다.



동아시아의 알타이 지역의 우코크 고원에서는 칼구타 유적에서 말을 그린 벽화(사진 3)가 확인되었다. 쇼베 퐁다르크 동굴의 그림은 화려한 채색화(암채화)이지만, 칼구타의 그림은 동굴 벽을 쪼아서 표현한 바위그림라는 차이점이 있다.


현재 고고자료로 보아서 예술품 혹은 예술로서 부를 수 있는 것은 동서 공히 후기 구석기시대 부터로 생각된다. 현생 인류는 왜 이런 것을 남기게 되었는가? 남겨진 자료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이런 그림벽화 뿐만 아니라 모든 고고자료를 보고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지만 답은 간단하지 않다.
여러 학자들의 의견에 의해면 예술은 종교 혹은 자신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다. 구지 선사시대가 아니라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은 학술적 자료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상징 혹은 의례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해서 예술품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생활에는 종교와 관련 없는 예술품도 많다. 따라서 적어도 예술의 시작에 있어서는 믿음, 주술, 샤머니즘 혹은 종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시대의 유물가운데는 이미 유적에서 토제로 만들어진 토우가 제작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비너스 상인데 우크라이나의 후기구석기시대 가가리노 유적(사진 4)에서 발견되었다. 인간이 토제로 만든 최초의 물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정상적으로 부풀리게 표현된 가슴과 배 등은 풍요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즉 토제나 석제 혹은 골제로 만들어진 형상물 등은 일반적인 움집에서 출토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물건으로 제의성이 담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 강좌에서는 극동의 선사시대 예술을 인류 보편적으로 남겨진 고고유적 가운데서 바위그림(암각화)과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에서 바위그림과 토우가 널리 퍼져 있지만 태평양을 매게로 하고 백두대간으로부터 시호테 알린 산맥까지 이어 지는 대 산맥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 극동은 선사시대부터 발해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관련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본고에서도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을 중심으로 바위그림과 토우를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예술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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