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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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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 강 유역의 가이모노바 유적은 직경 70m가 넘는 쿠르간으로 은으로 된 항아리가 잘 알려져 있다. 가이모노바 항아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신화 속의 인물로 혹은 스키타이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표현되었다. 이 쿠르간에는 4개의 무덤방이 있는데 그 중에 1번 무덤방에서 은제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반원형의 골제판에 그려진 여성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오기 시작한 아르김파사 혹은 아프로디테로 여겨진다. 뱀다리 여성이라고 보고되었으나 필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무덤방 4번에서 출토되었다.

 

무덤방 3번에서도 소형의 황금판으로 제작된 인간형상물이 출토되었다. 춤추는 모습으로 생각되는 이 여성형상물은 리아보바는 스키타이-그리스의 다산숭배를 위한 여사제일 것이라고 보았다. 2점은 지팡이를 잡고 있고 다른 손에는 염소머리를 들고 있으며 날개를 달고 있다. 염소는 초목의 신이며, 목축민들의 공양에 널리 사용되었다. 또 다른 한 점은 칼과 동물머리를 들고 있으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는 여성이다.

 

이 여성형상물은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을까?

 

그림 1 가이모노바 유적의 여성샤먼 4.8× 3.3cm, 4.8-4.95×3.4~3.6cm, 4.7×3.6cm

 

비슷한 형상물은 쿨-오바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는데, 망토를 두르고 있고 완전히 그리스 스타일인 것으로 보았다(라에프스키 1985 ).

 

그림 2. 쿨 오바 유적의 여성샤먼

 

그러나 이 보다 더 비슷한 유물은 제브 쿠르간, 볼쇼야 블리즈니차 쿠르간에서도 발견되었다. 날개를 달고 있으며 지팡이를 잡고 있는 샤먼과 칼 춤을 추고 있는 샤먼이 세트를 이루고 있는데 제브 쿠르간의 유물은 머리를 장식했던 것이다. 머리두건에 달았던 장식판이다(그림 3)

 

그림 3 제브 쿠르간

 

그림 4. 볼쇼야 블리즈니차 쿠르간, 3.4 x 3.8 cm

 

그림 5. 볼쇼야 블리즈니차 쿠르간, 3.4 x 3.8 cm

 

볼쇼야 블리즈니차 쿠르간(그림 4,5)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일 장면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이지만 제브 쿠르간, 가이모노바 유적보다는 크기가 작고 근육의 표현 등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유물은 4.8× 3.3cm, 4.8-4.95×3.4~3.6cm, 4.7×3.6cm 크기인데, 제브 쿠르간의 각 형상물도 높이가 일치한다. 그래서 제브 쿠르간과 가이모노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기가 일치하며 제작 방법은 일치한다(피알코 2004).

 

그렇다면 가이모노바 유적과 제브 쿠르간의 여성형상물은 동일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제브 쿠르간은 기원전 350~345년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어, 가이모노바 유적도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피알코는 심지어 같은 대장장이가 만들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가이모노바 유적은 4개의 무덤방이 있어서 이 여성형상물의 연대가 유적 전체로 보기에는 힘들다. 가이모노바 유적의 1번 무덤방은 가이모노바 항아리와 함께 나온 그리스 암포라 토기의 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365~3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가이모노바 유적의 무덤방 4번은 1번 보다 늦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1번과 2번 무덤방은 땅을 파고 만들었고 3번과 4번 무덤방은 봉분을 파고 만들어서 만들어진 시점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있지만 부족한 근거이다. 그러나 출토 유물의 시간차이가 있다면 확실하다.

 

또 춤추는 여성형상물로 알 수 있는 점은 이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참고문헌

Фиалко Е. Е. Золотые бляшки из кургана Огуз // РА. – 2003. – № 1(피알코 2003, 오구즈 쿠르간에서 출토된 황금장식판)

Раевский Д. С. Модель мира скифской культуры. 1985 (라에프스키 1985, 스키타이 문화의 세상)

Бидзиля В. И., Полин С. В.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Гайманова могила. — К.: «Скиф», 2012. — 752 с. (비드질라, 폴린 2012, 스키타이 차르의 쿠르간 가이마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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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권의 각 지역에서 남성들은 검을 착용하고 매장되는 경우가 많다. 철제 검, 청동검도 있으며 목제 검도 있으며 칼과 함께 세트로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여성들도 검을 착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르잔-2호의 5호묘 여성은 철제 검과 칼을 세트로 착용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칼 혹은 검을 착용하는 경우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여성들만 그랬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견되는 예가 많지 않아서 일반화 하기는 어렵다.

탁사이-1 유적의 6호분 여성도 어떤 무기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탁사이-1 유적의 6호분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 유적 내에서 발견되었다. 무덤 구덩이 주변으로 금속제품을 녹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탁사이-1 유적은 무덤 6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6호 무덤은 가장 규모가 크고(직경 41m, 높이1m). 화려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 유적으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목조구조물을 만들고 그 상부를 돌로 여러 층으로 덮은 구조이다. 중앙의 매장주체부 가장자리를 따라서 붉은색을 띠고 있는 퇴적물들이 고리를 이루며 확인되었다. 이 외곽에 황색을 띠는 퇴적물도 고리를 띠며 2기가 확인되었다(그림 1-1). 매장주체부에서는 포플러 나무로 만든 무덤의 덮개가 발견되었다(그림 1-1).

매장주체부외에도 무덤이 2기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북서쪽 붉은색 고리와 황색 고리 사이에서 1기(6호의 1호묘)가 확인되었고, 다른 1기(6호의 2호묘)는 가장 외곽이 황색고리 아래에서 출토되었다(그림 1-1). 1호묘와 2호묘 모두 여성이었는데, 목이 잘린 채 상태였다.

 

그림 1. 탁사이-1 유적

 

무덤구덩이의 깊이는 3.5m이고 바닥면의 너비는 5.7×5.4m인데, 그 주변으로 금속품들이 녹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곳의 흙을 분석한 결과 열로 인해 산화되어 철 성분의 함량이 높았다.

6호분 주인공(3호묘)은 중앙구덩이의 동쪽벽 부근에서(그림 1-3) 화려하게 장식된 채 매장되었다. 발견된 뼈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여성의 옷에 달던 치레걸이, 고깔모자 장식, 관자놀이 장식, 토르크, 팔찌가 출토되었다. 오른손 부근에는 거울, 왼손 부근에는 소형의 유리병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기둥 부근(그림 1-2)에서는 나무그릇을 장식하던 금판이 발견되었고, 그 옆에서는 청동솥이 발견되었다.

 

그림 2. 탁사이-1 유적의 3호묘 출토양상

 

매장주체부 주변에 금속을 녹인 흔적이 있고, 그 주변에 붉은색과 황색의 퇴적물도 역시 강하게 불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무덤 속에서 오랫동안 불을 피워서 제사를 지내던 행위는 스키타이 문화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초원의 신석기시대에도 관찰되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보기 드문행위이다. 다른 유적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알타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은 흙의 특성상 유기물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목조 구조물이 탄소화되면서 발굴당시까지 남아 있었을 수 있다. 금속을 녹일 정도였다면 불을 오랫동안 태웠을 텐데, 많은 의문점이 남는 유적이다. 카자흐스탄 연구자들은 탁사이-1 유적의 6호는 ‘여사제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참고문헌

 

Лукпанова Я.А. Реконструкция женского костюма из элитного погребения Таксай–1: Взгляд археолога // Поволж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1 (19), 2017. – С. 234–244(룩파노바 2017, 탁사이-1 유적 엘리트 무덤에서 나온 여성의복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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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울란곰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1건을 제외하고 대부분 손잡이가 붙은 형식인데, 역시 기원전 4세기 가량에 나타나는 유물이다. 그 1건은 꼭지가 달린 거울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은 이른 형식이라는 것은 알았고 대략적으로 연대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르잔-2호(어제 포스팅 참고).에서 꼭지가 붙은 청동검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기원전 7세기부터 이렇게 생긴 유물이 존재했다는 점이 분명해 진 것이다

 

 

그림 1. 사슴이 그려진 청동거울, 알타이 발견품

 

그런데 꼭지가 붙은 청동거울이 가장 마지막 나타나는 시기는 특정하기 힘들지만 손잡이 붙은 거울이 나타나면서 점차 사라진다. 울란곰 유적에서 꼭지가 달린 거울(그림 2-13)은 아마도 이 문화에서는 거의 마지막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

 

 

그림 2. 울란곰 유적의 청동거울

 

그래서 필자는 유사한 형식의 청동거울이 오랫동안 사용되는 것은 의례용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세대 이전부터 전해오던 그런 물건. 생활용품보다는 의례용품일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의 수 때문에 거울도 정확하게 편년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당대에 제작된 유물과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유물간의 연대 차이는 알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청동거울이 계급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5세기 이후일 것이다.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 무덤인 5호묘나 여성전사로 생각되는 22호묘나 거울의 생김새가 같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사슴돌과 암각화 연구도 했지만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동검의 대표적인 연구자이다. 울란곰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동검과 다른 동검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그림 3-1,9). 손잡이 끝이 납작한 것과 검신에 결입이 있는 동검(그림 3-1)과 버섯형 모자 끝장식이 있는 동검(그림 3-9)이다.

전자(37호)는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의 대표적인 동검이며, 후자(43호)는 카라숙 문화 혹은 미누신스크 분지의 스키타이 문화인 타가르 문화의 것이다. 43호에서는 칼을 제외한 다른 유물은 울란곰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반적인 것으로 기원전 5~3세기 유물이다. 즉 이런 유물은 전해지는 기간이 매우 오랫동안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검

 

검을 통한 의례행위? 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예전에 필자가 대학졸업후 진주박물관에서 열심히 남강유적에서 출토된 돌과 토기를 그리던 시절에 만신 김금화를 본 적이 있다. 박물관에서 하는 행사에 초대되신 것인데,...그 때는 몰랐지만 알고보니 엄청 유명하신 샤먼이었다. 검 들고 굿 하는 장면은 유투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봤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드셔서 젊을 때 찍으신 영상들에서 받은 느낌과는 달랐지만.

 

오랫동안 전해진 청동검을 보면서.. 괜히 검을 들고 의식을 치르는 영상이 떠올랐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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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는 무덤방 안과 관속에서 유물이 확인되었다.

관의 뚜껑을 열자 얼음속에서 가장 머저 드러난 것은 머리부분이다(그림1). 이 여성은 오른쪽으로 누웠으며, 무릎은 살짝 굽히고, 손가락은 팔꿈치 쪽으로 굽혀서 배쪽으로 손을 모은 채 누워있었다(그림 2,3).

 

그림1. 관의 뚜껑을 열고 내부를 정리하는 장면

 

그림 2. 관 속

 

그림 3. 주인공의 손 모습과 전체 모습, 목걸이

 

통나무관의 바닥과 시신의 바닥에는 펠트제 깔개가 깔려 있었다. 펠트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은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상반부와 통나무관의 상부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이 입고 있는 실크로 만든 여밈없는 긴 블라우스와 긴 치마(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타이즈도 신고 있었다. 펠트, 옷과 타이즈 등은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의 대퇴부 부근에는 펠트로 만든 주머니 속에서 청동거울이 있었다. 나무틀 안에 보는 경면이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나무 손잡이의 끝에는 구멍이 남아 있었다. 손잡이 부근에는 다양한 색깔의 구슬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어금니도 있었다.

 

그림 4. 청동거울, 구슬과 화장품 출토장면
그림 5. 청동거울의 뒷면

 

목에는 목걸이(그림 3)가 있었는데, 표범장식(그림 6)이 붙어 있었다. 이 장식은 표범의 머리부분이 살짝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는데, 나무판으로 제작한 후, 금박으로 장식되었다. 금박은 얼음이 녹으면서 찢겨 나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6. 목걸이의 가장 중앙장식
그림 7. 아크-알라하 3유적 1호분 여성 주인공의 목걸이, 필자촬영

이 여성의 머리에는 높이 61cm의 말총가발이 있었고, 가발은 고깔모자(그림 9)가 씌어져 있었다. 모자에는 15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장식(그림 10)이 붙어 있었다. 가발에는 금박을 입힌 배지처럼 앉아서 상체를 돌린 모습의 사슴모양 목제 장식을 붙였다. 머리의 정수리에는 머리를 모아서 꼬아 올려, 붉은 주머니로 쌓고 그 끝에는 사슴모양 장식이 붙어 있었다(그림 11). 나무로 다리를 굽힌 동물모양(그림 11의 가장 왼쪽)을 원형장식위에 올린 것이다. 금박되었다. 귀걸이도 착용했는데, 둥근 고리모양이다. 그 부근에 석제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탄화된 고수의 씨앗(그림 8)이 있었다.

 

 

 

 

그림 8. 석제 그릇
그림 9. 꼬깔모자
그림 10. 꼬깔모자 장식, 목제, 새

그림 11. 가발을 여성 복원도, 가장 왼쪽이 정수리를 장식한 사슴장식이다. 다리를 굽히고 있다. 오른쪽은 미라의 머리를 근접해서 찍었는데, 미라제작은 따로 설명할 예정이다.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 중 아크 알라하 3유적이라고 하는 유적의 1호분의 주인공인 이 여성은 일반인들에게는 얼음공주라고 알려졌고, 좀 더 자세하게는 샤먼의 지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샤먼인지, 가장 최상급의 신분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는 부장품 때문이다. 현재 가장 최상급 무덤은 알타이 산맥에서는 또 다른 유적인 파지릭 고분이 최상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 무덤의 크기 뿐만 아니라 부장품의 양과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파지릭 무덤에서는 마차가 통째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번달의 주인공인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의 부장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림은 7번을 빼고 아래 책을 참고했다.

 

참고문헌

https://scfh.ru/papers/put-k-nebesnym-pastbishcham/

https://scfh.ru/papers/dvadtsat-let-spustya/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갑자기 어제 오늘 이 키워드로 많이 찾아오셔서 ....

시베리아 카테고리의 신석기시대, 순동시대, 청동기시대가 다 채워져야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포스팅 할 예정인데, 머 하나씩 해 두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시베리아의 철기시대문화에서는 미라가 확인된다.

필자가 대학교 입학하던 해인 1995년에 한국에 알타이 미라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에서도 순환전시를 한 적이 있다. 너무 전시가 어둡고 유물전시물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 놓아서 미라의 얼굴은 생각이 안난다. 내가 그때는 러시아 유학갈꺼라고 생각도 안했다. 여담이지만.

 

먼저 알타이 미라의 복원문제를 접근 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알타이 미라를 복원했는데, 유럽인이라더라...아니다 등....

(역사와 정치의 문제이다)

 

알타이는 산맥의 이름이다. 알타이의 굽이굽이 산맥은 사람이 안 살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 즉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산 위가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 유적이 위치한다. 이런 지형을 러시아어로는 돌리나долина라고 하고, 우리나라 말로는 계곡이 가장 적당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계곡이라고 번역하면 그 뉘앙스가 아주 좁은 계곡에 물이 흘러내리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알타이의 그 산 사이의 그 분지 같은 계곡을 단순히 계곡이라고 번역하기 힘들다.(초창기에는 그렇게 번역을 많이 했다.)

 

하여간 산과 산사이의 평탄지, 낮은 곳으로 완전한 분지는 아니지만 아늑한 곳에 유적이 많다. 알타이 산맥 사이에서는 특히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는 돌리나 곳이 ‘우코크’이다.

 

https://www.google.co.kr/maps/place/Ploskogor'ye+Ukok/@47.2032452,86.9194223,5.46z/data=!4m5!3m4!1s0x42b77554a0669b95:0x2fcb81f24cd72647!8m2!3d49.3333333!4d87.5?hl=ko

 

Google 지도

Google 지도에서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지도를 살펴보거나 운전경로 정보를 검색합니다.

www.google.co.kr

이 우코크(Укок, Ukok)고원의 무덤에서는 여성미라가 출토되었다. 우코크 고원의 무덤에 관해서는 너무 많은 내용이라서 올해 차차 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필자는 신석기시대부터 차례대로 하고 싶은데,)

 

그런데 이 여성은 살아서도 매우 인기가 많았겠지만, 죽어서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여성이 발견된 무덤이 있는 유적의 이름은 아크 알라하-3(Ак-Алаха-3,Ak-Alakh-3) 유적이다. 1993년 폴로시막(Наталья Викторовна Полосьмак)이라는 여성 고고학자가 책임을 맏아서 발굴을 하였다. 이 유적은 기원전 5~3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필자가 앞에서 포스팅한 사진은 직접 찍었는데, 그때가 2008년인가 였다. 이 미라는 그 때까지 폴로시막 박사가 연구하는 연구소의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12년에 알타이공화국의 고르노-알타이 시(г. Горно-Алтайск, Gorno-Altaysk)의 아노히나 박물관(музея имени Анохина, Anokhin National Museum)으로 옮겼다.

 

즉 필자가 사진을 찍은 연구소박물관은 노보시베리스크 시의 연구소 박물관에서 찍은 것이고 2012년은 알타이공화국의 박물관으로 옮겼다. 미라 입장에서는 알타이에 쭉 매장되었다가 연구소에서 발굴해서 노보시베리스크로 갔다가 다시 알타이로 돌아온 곳이다.

 

2018/05/02 - [북방항로 따라 역사기행] - 무덤과 집

 

무덤과 집

앞에서 과거의 무덤은 살아 생전의 집을 옮긴 것에 대해서 신석기시대의 사례를 예로 들고 살펴보았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2?category=714181 그런데 또 필자가 알고 있는 그런 사례를 설명하고자..

eastsearoad.tistory.com

 

알타이공화국은 중국으로 치면 소수민족자치구이다. 러시아는 소수민족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각 지역에 공화국을 인정한다. 러시아연방소속이지만 자기네들의 자치법도 있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타이 사람들 신화에는 땅 밑에 있는 공주를 건드리면 재앙이 닦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년간 알수 없는 지진과 홍수 등이 모두 알타이 미라를 꺼내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서, 알타이로 다시 돌아온 공주를 땅속에 뭍기로 결정했다.

알타이의 영적 센터에서 회장은 샤먼인데, 이 분과  몇몇 사람이 알타이 법원에 박물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 했으나 졌으나, 국제법으로 소송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상한건 예전에 필자가 본 미라의 얼굴복원 모습은 유럽인도 아니고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사람들은 인도-유럽인종이라는 생각 혹은 연구가 팽배했었다. 그런데 위의 일이 있은 이후로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모든 알타이 미라의 복원된 얼굴은 유럽인에 가까웠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몰로딘 박사는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의 미라는 공주도 아니고, 중간계급정도이고 어쨌든 이제 알타이에 있다......그리고 알타이의 모든 자연재해가 이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 미라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 알타이의 다른 유적인 파지릭 무덤에서 미라가 발굴이 첫 번째이고, 그가 계급적으로도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적이 있다'.(«Эксперт Сибирь» №19(161)

https://web.archive.org/web/20070525114358/http://www.expert.ru/printissues/siberia/2007/19/interview_arheolog_molodin/

 

*참고로 인터뷰한 몰로딘 박사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대표적인 책임수석연구원의 자격으로 인터뷰 했지만 사실은 우코크 고원 발굴책임자인 폴로시막 박사의 남편이다^^

 

미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계속 포스팅 해 드리겠다. 최근에 떠 돌아다니는 여성미라의 얼굴복원에 관한 내용도 정보를 좀 더 수집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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