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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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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시호테 알린산맥 중부 영동지역의 교통로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선사시대 및 고대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교통로는 중국 사서에 언급되어 있고, 키차노프(1966), 보로비요프(1975), 타스킨(1968), 샤프쿠노프(1968) 등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만주와 한국과 관련된 것이 더 많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까지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러시아 극동에 대한 여러 가지 도로망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인으로 처음 이주한 러시아인이자 군인장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아무르 강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베뉴코프에 의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었다(베뉴코프 1970).

가장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아르세네프의 연구이다.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여러번 조사했는데, 이를 토대로 기록하였다. 퉁구 만주족과 고아시아족의 길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중세시대의 보존된 도로에 관한 것이 망라되어 정리되었다. 그는 고개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 성곽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많은 조사 및 경험을 통해서 기록을 남겼다(아르세네프 1950, 베뉴코프 1970). 그의 연구 및 기록은 100년이 지난 1970년대 소로비예프가 『Китайские отхотники и их географические названия в Примпрье(연해주의 중국 사냥꾼과 그 지형적 명칭)에서 사냥꾼 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교통로(그림 134) 등으로 아르세네프가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고 발견한 성곽을 소개하고 있다(솔로비예프 1973).



그림 134. 1914년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중국인의 겨울 무역로

 


1. 고고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통로

 

선사시대 및 발해~여진 시기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은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교통로는 가족, 종족, 국가 등 각기 다른 인간의 요소 등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가족혈통 시스템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행정, 군사, 생계경제 등 어떠한 목적이라도 그 영역은 길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에는 도로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위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도로의 역참이나 중요한 곳에 건물을 짓는 등이 표시가 된다. 도로 보통 마을 가까이 설치되고, 도시 및 상업의 중심지등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도로위에는 그들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 도로 자체에는 흔적이 남게 되는데, 돌로 세운 표시나 표식, 터널 등이 있다. 간접적으로는 수레의 부속품-마차 바퀴의 마개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또는 같은 혹은 다른 종족의 기마병 존재나 수입된 상품 등을 통해서도 길의 존재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판단가능하다.

  모두 선사시대 및 고대의 도로를 복원할 수 있는 흔적으로 도로와 관련된 고고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망은 그 지역의 지형학적 특징과 관련이 많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 중 곶 성은 부채꼴 모양의 궁형성, ㄷ자형, 부정형으로 구분된다. 



(3) 폐쇄형 성곽

성벽이 사방으로 다 돌아가는 형태인데 고르노레첸스코예-3, 우스티-일모, 소욘스코예 성지등이 해당된다. 이 성지의 평면형태는 2개로 다시 나눌 수 있는데, 방형과 다각형 평면형태이다.

 

A. 방형 성곽

사각형 평면형태는 우스티-일모, 소욘스코예, 성곽이 해당되는데, 평면크기는 소형으로 단구대나 혹은 언덕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대체적으로 성벽의 모서리가 4개인 사각형 평면형태다

(우스티 일모 성곽의 평면도 모습은 이미 포스팅 한 바 있다. http://케마 강 유역의 성곽 1)

평면형태는 단순하고, 내성, 보루와 장대 등이 없다. 성벽에는 치가 없으며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는 좀 더 방어가 필요한 곳에는 부가성과 해자를 설치하였는데, 문지에는 특히 적대를 설치하였다. 토석 혼축성벽으로 부분적으로에는 돌을 비스듬하게 쌓았다. 취락을 방어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지표조사된 유물로 판단컨대 폐쇄형 방형 성곽은 발해의 늦은 시기로 9세기를 올라가지 못하며, 발해이후의 가능성도 있다.

기원. 평지의 방형성을 새로운 입지조건 위에서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B. 다각형 성곽.

고르노레첸스코예-3 성지로 문지가 없다.(http://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 고르노레첸스크-3 유적)

평면형태는 단순한데, 육안으로는 어떤 시설물도 확인되지 않는다. 평면형태는 오각형이다.

성벽의 축조방법. 치가 없는 석성으로 높이는 0.5m정도이다. 용도는 제르칼나야 강 유역을 통제하는 보호 감시용이다. 문화의 특징과 연대는 유물이 부재하기 때문에 평면형태로 밖에 판단할 수 없는데 발해의 평지성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곶 성은 모두 세 개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궁형 성, ‘자형 성곽, 폐쇄형 성곽 등이다. 연해주 북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은 궁형성이다. 이곳에는 처음으로 기원전 10세기 쯤에 청동기시대의 리도프카 문화인이 살았는데, 그들을 원주민으로 부를 수 있다. 거의 변화하지 않은 형태로 중세시대 초기의 퉁구-만주족(말갈)도 유사한 성곽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곶 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발달시킨 것은 동하국의 여진족인데, 험준한 곳을 그대로 이용하는 입지선정에 중국 건축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곶 성 성곽의 형식에서 새로운 것으로 따로 분리했, 평지성이나 산지성과는 다른 입지에 세워진 성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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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 중 곶 성은 부채꼴 모양의 궁형성, ㄷ자형, 부정형으로 구분된다.



(2) ‘자형 성곽


자형 성곽은 방어시스템으로 축조되었는데, 현재는 모노마호프스코예 성지 하나만이 해당된다. 이 유적의 평면적은 7000이다.(http://루드나야 강 유역: 모노마호보스코예 성곽)

. 평면형태. 단순한데, 내성과 보루, 장대시설 등이 없다. 성안에서는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 성벽의 축조방법. 치가 없는 성벽으로 지형적인 영향으로 성벽의 평면형태는 매우 복잡하다. 한쪽은 편평하고 다른 쪽은 지형에 따라서 울룩불룩하다. 절벽과 맞닿은 부분에는 성벽이 없다. 성벽에서 위험한 부분에는 부가성벽과 해자를 설치하였다. 성의 높이는 부분마다 다른데 최대 높이는 1.5m이다.

성지의 문은 적대시설이 있고 길로 바로 통하게 되어 있다.

성벽은 돌과 흙을 혼합해서 축조했는데, 어떤 부분에는 돌을 경사지게 쌓은 부분도 있는데, 특히 모서리가 그렇다.

. 연대. 모노마소프스코예 성지를 연속발굴 결과 이 유적이 발해문화의 마지막 시기로 9~10세기에 해당하거나 혹은 더 발해 이후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 기원. 성곽은 성은 곶 위에 위치하고 부가성과 그 곳에 문이 설치된 자형 평면형태 방어시스템으로 보아서 그 기원은 혼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평지의 방형성은 말갈인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자연적인 방어기능을 갖는 곶에 성을 축조한 입지로 선정 한 것은 원주민의 전통이다. 그러나 성벽의 모서리를 직각으로 설정하는 것,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 돌을 경사지게 쌓는 것, 문지에 적대(적대)를 설치하는 것은 발해 전통으로 이 지역에 새롭게 들어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성지가 들어설 때는 국가가 평온하지 못하고 전운이 감 돌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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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3) 곶 성



설상으로 뻗은 곶 위에 위치하는데, 청동기시대(리도프카 문화와 다른 문화) 20곳과 말갈과 발해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평면형태에 따라서 궁형성, ‘자형 성, 부정형 폐쇄형 성곽으로 구분된다.

  

그림. 우스티-벨렘베 3중 토석성(곶 성중 궁형성에 해당된다)



(1) 궁형 성

이 형식의 성지는 자연의 입지에 따라서 성벽의 평면형태가 궁형모양이다.

이 형식은 곶 성 가운데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모두 16개의 성지가 해당된다. 고르노레첸스코예-1, 고르노레첸스코예-2,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미스 테플리이, 쿠즈네프스코예, 오아시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페야, 에딘킨스코예, 우스티-벨렘베 성곽 등이다.

. 평면형태. 성은 장대, 보루와 내성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이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와 같이 자연적 단구대 위에 취락을 경계 짓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성의 평면형태는 개방형으로 궁형인데 모두 가 다르다. 성지 가운데 가장 큰 곳은 미스 스트라시느이(28,000)이고 가장 작은 곳은 우스티 제르칼노예(15,000) 유적이다.

. 성벽의 축조방법. 이 형식의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벽은 다음과 같이 축조된다.


토성벽(쿠즈네쵸프스코예 성벽)

토석혼축벽(미스 스트라시느이, 미스 테플리이, 쿠댜, 우툐스노예, 케므코예-스칼리스토예,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돌로 비스듬히 쌓고 흙으로 채우는 성벽(고르노레첸스코예-1)

토석 혼축벽이 기본이고, 돌을 깔아 놓은 곳이 있는 성(우스티-벨림베)

석성(데두스킨 클류치)

성벽의 높이는 0.3~1.5~2m가량이다.

성벽에는 해자가 있는데, 성벽을 쌓을 때 이 해자로부터 흙을 퍼 올렸다. 해자의 깊이는 1m를 넘지 않는다.

 

곶 성의 문지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순 절개면(미스 스트라시노예)

부가성에 설치된 문지(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문지가 없는 것

 

. 용도. 모든 성은 취락용이고 취락을 경계하며 방어하는 역할이다.

. 특징과 연대. 평면형태 궁형의 곶 성은 최소한 세 개의 고고문화와 관련이 있고 청동기시대 및 중세시대와 관련이 있다.

A. 청동기시대의 성. 모두 9개가 해당된다(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스트라시노예, 우스티-벨렘베 등이다).

강의 하류와 해안가에 위치한다. 시굴이나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고고유물은 대부분 리도프카 문화의 것으로 생각되며, 탄소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후반으로 생각된다(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쿠댜, 우스티-벨림베 유적).

우툐스노예 성터에서는

지두문이 찍힌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 강 하류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인 우릴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었다. 리도프카 인은 내륙이 주요 거주지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강 하류와 바다의 항구 등에 성곽을 지은 것은 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해안가에 살던 사람은 얀콥스키 인인데, 많은 리도프카 문화에서 그들의 흔적이 확인된다(블라가다트노예-3,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의 5~7번 유형 등)

또한 아무르강 하류의 우릴문화가 확인되는 것은 이 지역까지 아무르 내륙인이 왔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이주민들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그들의 고향인들은 짓지 않았던 성지를 축조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아무르강에서 우릴문화의 성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B. 중세시대의 성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곶 성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말갈과 발해문화의 것이 있다.

말갈문화의 성곽 평면형태 궁형으로 강과 바다의 곶에 설치되는 된다(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오아시스, 에딘킨스코예 성지).

유적의 입지는 강의 중류(쿠즈네쵸프스코예), 해안가 단구대(미스 테플리이, 오아시스, 예딘킨스코예 성지)인데, 이 곳은 방어나 보호가 필요한 교통로의 문지역할을 하던 곳이다.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말갈성곽으로 확인되었고, 성벽은 다른 어떤 돌을 섞지 않은 순수한 토성(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과 이러한 성벽에 문지를 설치하는 성(미스 테프리이 미스, 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이 있다.

성 내부에서 시굴조사 되거나 지표조사 된 말갈유물은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중국 동북지방에서 확인되는 말갈문화의 것과 같다. 그 중에는 북한의 동북지역에서 확인되는 것도 있고 사할린과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도 있다. 발해는 말갈족을 밑바탕으로 세운 국가로 9세기 까지 오랭캐를 현과 주로 편입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이러한 발해의 정치는 말갈족과 고아시아족 등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스 테플르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블라고스로베노예-2(Благословенное-2, Blagoslovennoye-2), 쿠르쿠니하(Куркуниха, Kurkuniha), 툰젠(Тунжэнь,Tunjeni) 등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슷하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 4~5세기에 해당된다. 이는 말갈문화의 것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은 말갈인과 고아시아인 모두 이 유적을 이용했던 미스 테플리이 유적만이 유일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고르노레첸스코예-1과 고르노레첸스코예-2 유적은 발해시기의 곶 성에 해당된다. 고르노첸스코예-2 유적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에서 연속발굴을 하고 있고, 발해의 것으로 규명하였다. 이 두 성지는 소형(25004000)이고 장대, 보루와 내성 등이 없는 성지로 취락용으로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곶 성은 원주민(말갈인)의 축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말갈 성지의 존재는 그들이 9세기 어느 때 쯤 발해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판명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이러한 성곽은 축조시 지역 기술자나 혹은 군인 들이 지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주민 집단 마을이나 성을 주 혹은 현으로 불렀을 것이다(보로비요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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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벽 산성



이 형식에 해당되는 산성은 스칼라 데르수(사진), 달네고르스코예 성곽이다.

자연성지로 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하는데, 관찰과 방어를 위해서 축조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 스칼라 데르수의 전경


. 평면형태-자연면을 그대로 이용해서 단순하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주거지가 위치한다.

. 방어시설-자연방어시설이기 때문에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 연대-출토된 토기로 보아서 발해문화의 것으로 생각되고 8세기 보다 이르지 않다.

. 용도-루드나야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지점이다.

. 기원-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으로 생각된다. 퉁구-만주족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인접한 지역에 거주했다. 중국 사서에 남아 있는 대로, 우호적인 관계만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과 같이 대체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고구려에만 적대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그러한 경향이 있다. 7세기 고구려의 멸망이후 고구려의 유민이 넘어와서 발해로 넘어와서, 말갈과 함께 구성원이 되었고, 그 때 함께 산에 석성 짓는 기법도 넘어 왔을 것으로 판단된다. 흙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돌만을 사용하는 축성 기법은 한국과 중국에서 지금까지도 사용되지만, 중국사람 연구자들도 이는 고구려의 기술이라는데 동의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곳에 떨어진 구릉 위에 성벽을 모두 둘린 석성은 고구려 전통의 것이다.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은 평면형태가 궁형으로 고구려의 축성기법과 입지는 말갈인 들이 주로 세우던 곶 위에 세워진 두 가지 전통이 혼합되었다. 성내에서 말갈토기가 확인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해주의 석성은 7세기부터 확인되는데, 발해의 건국시점보다는 올라가지 않는다. 절벽성의 하부형식 궁형의 석성은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8~9세기정도이다. 고구려-말갈 혼합형 성이라고도 분류할 수 있다.

산성은 4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릉 산성, 고개산성, 봉우리 산성, 절벽 산성 등이며 그 기원은 각기 다르다. 구릉 산성은 여진성으로써 동하국(1217~1234)의 군사 행정관청의역할을 담당하던 곳이다(댜코바·사크마로프 2002c). 고개성은 중국 축조기법에 발해의 산성 특징인 고개에 축조된다는 점에서 두 가지가 혼합되는데, 이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하던 기능을 한다. 이러한 고개는 현재까지도 도로망으로 이용되고 있다. 봉우리 산성은 고구려의 축성기술에 원 지역민(말갈족)들이 산지를 지키던 곳에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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