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알타이의 유스티드 XII유적에서 한 공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묻힌 곳은 성인 3인과 말 3마리가 있는 곳으로 21호와 22호가 연결된 23호이다.

 

남녀가 함께 매장된 20호(134×165cm)와 비교해 볼 때 그렇게 크지 않은 무덤방(131×193cm) 속에는 남성 2인과 여성 1명으로 꽉 차 있다.

다른 무덤과 비교해 보면, 죽은 사람이지만 공간이 부족해서, 이 사람들의 영혼이 있다면 아마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해서, 널찍하게 안묻어 주는가...이러면서..

 

무덤 속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보이는 나무껍질이 바닥과 무덤의 서쪽벽 위에 놓여 있다. 무덤방을 자작너무 껍질로 덮었고, 그 흔적이 서쪽벽 위에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에서 나무껍질이 놓인 경우는 대부분 말의 다리 부근이었는데, 이 무덤에서만 유일하게 무덤방 바닥에도 깔고, 무덤방을 덮었다.

물론 무덤덮개는 다른 무덤에는 남아 있지 않아서 확인이 안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덤바닥의 자작나무껍질은 다른 무덤방에는 깔지 않았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는 자작나무 껍질은 가을에는 두터워지고 넓어지면서 벗겨지지 않고, 봄 여름에 벗길 수 있으며, 무덤(파지릭 2호)은 늦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루덴코 1953).

이 유적의 무덤방의 바닥은 21호를 제외하고 모두 북쪽에는 나무를 깔지 않고 이 공간에는 토기를 둔다. 그런데 이 무덤에도 나무를 깔지 않은 곳에 남성 1인을 더 묻었다. 혹시 이 남성은 원래 이 무덤에 계획된 사람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죽어서 그냥 함께 묻었을까?

 

그림1.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호와 출토유물 1-철제 재갈, 2-목제 굴레장식, 3-뿔제 버클 장식, 4-6: 원판형 안장 장식, 7-9: 토제 그릇, 10-사슴모양 장식, 11-산양화된 사슴장식, 12-14: 말 장식, 15-사슴이 서로 맞댄 모양의 황금 이마장식, 16-18, 20-24: 각종 모자장식 19-목제 말 장식에 붙어 있던 산양 뿔 장식, 25,26-청동거울, 27-거울 주머니를 장식한 가죽 아플리케, 28-고리모양의 은제 귀걸이, 29:잣 껍질로 만든 구슬, 30-유르제 구슬, 31:말사슴의 송곳니로 만든 펜던트 조각, 뿌리부분, 32:유리제 비드(구슬보다 작은 장식), 33,35:청동검, 34, 37:목제 검집, 36:검집 반대편에 붙인 가죽, 38:멧돼지 송곳니 이미테이션, 목제품, 39, 40-목제 자루가 끼워진 전투용 도끼, 41-납작한 판의 막대기, 42.43-뿔제 화살대, 44-50:목제 장식판, 51-원판형 단추장식, 고리트 장식, 52, 53-목제 장식판, 54-양의 이빨 펜던트 55-58: 복합궁의 부속품, 59-활의 끝 부분, 60-목제 낚시 바늘, 61-철제 칼, 62-컵모양 토기

 

그림2.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 출토유물, 그림 1과 번호 일치

 

그림3.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의 23호 출토유물, 그림 1과 번호 일치

 

부장품은 세 명 모두 다르다. 중앙에 있는 여성은 성별 차이라고 해도 양쪽 가장자리의 남성은 각자의 소유물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오른쪽 남자는 전투용 도끼가 2자루이며, 화살통까지 들고 있지만 가장 왼쪽의 남성은 청동검(그림 1-35~37, 그림 2-33~37)만 가지고 있다. 다른 한 자루의 청동검은 여성의 검(그림 2-33, 34)이다.

 

21호, 22호, 23호는 무덤의 상부가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21호와 23호 구덩이를 먼저 파고 갑자기 22호 아이가 죽어서 21호 옆 혹은 22호 옆에 구덩이를 팠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22호 무덤을 먼저 만들고 그 옆에 21호와 23호가 들어섰을 수도 있다. 이미 포스팅한 이 무덤의 단면도를 자세히 보면 21호를 덮은 상부 흙과 돌, 22호와 23호를 덮은 상부 흙과 돌이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필자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것이라면 21~23호는 한 가족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는 또 다른 한 가족 구성원은 25~27호이다. 25호 남자 성인, 26호는 아이, 27호는 여자성인이다. 25호는 24호와 다른 무덤 보다 거리를 두어 축조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성과 아이가 함께 묻힌 4호와 8호도 마찬가지이다.

 

26기의 무덤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뚜렷한 유물도 추출하기 쉽지 않고, 아이라는 변수 뿐만 아니라 무기와 거울도 제각각이다. 고구마 100개 먹은 느낌이다. 유스티드 계곡에 무덤이 5000기가 넘개 있었다는데, 속이 시원해지도록 발굴하면 좋겠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계곡 중에 한 곳인 ‘유스티드’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뜻은 백개의 낙엽송이고, 발음은 ‘우스 티트’라고 한다고 백년전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는 ‘우스’는 고대몽골어로 물이라는 뜻이고, ‘티트’는 알타이어로 ‘낙엽송’이라는 뜻이다(쿠바레프 1991).

1930년대 처음에 러시아인 탐험가이자 지질학자가 방문했을 때 말 그대로 추야 강과 그 지류인 유스티드 강의 계곡에는 낙엽송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때 타샨타 마을이 처음 만들어졌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 아주 특이하게 21~23호의 상부를 덮은 돌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어제 포스팅 참고). 21호는 무덤방 안에 따로 무덤방을 썼다. 22호도 비슷한 무덤구조이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는 이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림 1. 유스티드 XII유적의 22호 무덤, 그림의 번호는 그림 2에서 확인

 

그림 2. 유스티드 XII유적의 22호 무덤 출토유물, 1- 청동재갈, 2-목제 재갈멈치(그리핀 얼굴이 달림),3-동물문양장식 펠트조각으로 모자장식의 일부, 4-목제 동물문양장식, 5-8: 목제 말과 사슴모양의 동물문양장식, 9-머리띠 장식, 붉은색 물감, 10-목제 화살촉, 11-목제 화살대, 12-목제 고리트 고정판, 13-청동투부, 14-청동 단검, 15-칼, 16-검은색 염색한 가죽 주머니, 17-청동단추, 18,19-허리띠 버클, 20~22: 허리띠 장식판, 23-옷의 상부장식, 24-토제 항아리, 25, 26-원판형 장식, 27-목제쟁반, 28-철제 칼, 29-무덤 시상대

 

이 무덤은 앞에서 본 무덤의 출토품과 다르다. 그냥 단순히 21번 무덤과 비교해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이 유적의 재갈멈치는 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대부분 21번 무덤과 같이 재갈멈치의 끝이 구형 장식이다. 그러나 22호에는 그리핀 장식이다. 무엇보다도 이 무덤의 말은 청동재갈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단검, 단추는 다른 무덤에 없었다. 

 

유물로 보아서 21호와 22호는 동 시대의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무덤을 덮은 것은 같은 시간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는 말이 2마리 이상 부장된 곳은 2호, 10호, 13호, 16호, 23호가 있다. 그곳에서 16호는 남성 2인이 말 3마리와 함께 매장되었고, 23호는 남성2인과 여성1명이 매장되었다. 23호는 21,22호와 무덤 상부의 돌이 함께 덮여서 16호와는 다른 정황이다.

 

그림 1. 유스티드 XII유적의 16호 무덤, 1,2-재갈, 3-재갈멈치, 4-굴레장식, 5,6-항아리, 7,8-칼 편, 9-전투용도끼의 손잡이, 붉은색 색칠, 10-검, 11-여성의 땋은 머리카락 조각, 12-장식조각, 13-V자모양의 사슴조각, 14-모자장식(aigrette), 15~19: 금판으로 만든장식, 20-산양몬양의 사슴, 21~22: 맹수끝장식이 달린 목걸이, 23:나팔모양 목걸이 편, 24-말 모양 조각, 25-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이 표현된 원판모양, 거울장식, 25~27: 거울, 28,29-십자형 장식판, 30,31-구멍둘린 원판모양, 32,33-고리모양 귀걸이, 34-막대기, 35-검은색 물감의 흔적, 36-고리트 안의 활과 시위, 철제(1,2,7,8), 나무(3,4,13,20-22,24,28-31), 토제(5,6), 청동+나무(10,23), 청동(25-27),11(펠트), 금박(15-19), 가죽(14), 주물로 제작된 금(32,33)

 

그림 2, 유스티드 XII유적의 16호 무덤, 그림 5와 유물번호 일치

 

그림 3. 유스티드 XII유적의 16호 무덤, 그림 5와 유물번호 일치. 제외 26

 

16호에는 무덤구덩이(270×250cm)를 파고 무덤방(200×131cm)은 설치하는 점은 같으나 무덤바닥이 다른 2인장 무덤과는 차이가 있다. 20호에는 무덤바닥에 시신이 안치된 곳만 나무를 깔고 무덤방의 북쪽은 나무를 깔지 않았으나, 16호에는 전면에 깔고 두 명은 약간 떨어진 채 묻혔다. 이 점은 별로 의미 없을 수는 있지만 이 유적에서 나무 무덤방을 쓴 경우는 전부 북쪽에 그릇 두는 부분은 나무를 깔지 않았으나 16호에만 전면에 나무를 깔았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유일하게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이 확인되었다(그림 3-26, 그림 1-25). 맹수 안에는 사슴 혹은 산양이 한 마리 더 표현되었고, 거울에는 손잡이 부분이 떨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몸을 말고 있는 맹수는 몸통에 날개표현이 되어 있다. 이는 울란드리크, 파지릭 유적 등에서 S자형 날개표현이 있는 맹수 즉 그리핀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우측 피장자의 것인지 좌측 피장자의 것인지 애매하다. 왜냐하면 그림 1의 캡션 설명에는 25번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 3에는 26번(우측인골)으로 되어 있다. 맹수장식은 거울의 이면에 붙인 장식판이다.

남성 2인이라고 알려졌으나 이 무덤의 좌측에 위치한 인골은 4호 여성과 비슷한 모자장식(그림 3-14), 19호 여성과 비슷한 모자장식(그림 3-13), 꼬은 머리채(그림 3-11) 등으로 보아서 이 피장자가 남성인지 의심스럽다. 상대편에 있는 남성은 전투용도끼와 고리트(화살통) 등이 있어서 두 명은 부장품에 차이가 있다. 이 유적에서 남성 2인이 매장된 17호(추가장 제외)에는 유물이 없어서 비교 불가능하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두 사람의 부장품에는 차이가 있고, 이 유적에서도 여성과 남성무덤에서는 부장품의 차이가 있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무덤에도 성별이 다른 2인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유스티드 계곡 가운데 유스티드 XII라고 명명된 유적에는 무덤 26기가 일열로 배치되었다. 열을 벗어난 2기는 유스티드 I유적의 예로 보아서 기원전 3~2세기 가량의 흉노시대 혹은 그 이후 초기 투르크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흉노와 초기 투르크시대 무덤은 꼭 열을 이루고 있는 스키타이 무덤 옆에서 확인된다.

 

이 유적에서 유일하게 부부로 추정되는 남녀가 함께 매장된 무덤은 20호 였다. 나무로 된 무덤방 안에 남녀가 무릎을 굽인채 묻혔다.

그런데 무덤과 유사한 예가 이미 소개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알타이의 ‘왕’급인 바샤다르, 투엑타, 파지릭 유적과 샤먼이라고 추정되는 아크 알라하-3유적에서는 통나무관을 나무방안에 안치해서 썼기 때문에 이 유적의 20호와는 다르다.

 

알타이에서 벗어난 투바지역의 아르잔-2호의 주인공 무덤이었던 5호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부부가 나무방에 매장된 경우는 없었다. 나무를 쓴 몇 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돌판으로 무덤을 만들었고, 같은 성이 함께 매장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슷한 무덤이 17호이다. 말이 부장되지 않았고, 무덤안에는 유물이 없었으며 남성 2인만 매장되었다. 돌상자는 납작한 석판 1매 및 그 보다 작은 여러 매의 석판으로 덮었다. 인골의 두향은 동향으로 다른 무덤과 일치한다(그림 1).

 

그림 1. 유스티드 XII유적의 17호

 

그런데 이 무덤은 17호의 돌상자 무덤을 쓰고 난 후에 2번에 걸쳐서 무덤이 열렸던 정황이 있다. 덮개돌 위에 돌상자의 인골 발쪽에서 인골 1구가 확인되었고(그림2), 그 위에는 또 인골 1구가 확인되었다(그림 3).

17호-2번 인골은 무덤시설은 별도로 없었고, 돌 상자 위에 놓인 상태였는데, 두향은 서향이다. 17호-1번 인골은 무릎이 완전히 접힌 것으로 거의 접은 듯하게 매장되었다. 17-2호를 묻은 후 덮고 난 뒤에 구덩이를 다시 파서 묻었던 것이다. 이 인골도 서향이다.

 

그림 2. 유스티드 XII유적의 17호-2번 인골과 그의 유물, 1-토기항아리, 2-철제 장식판(?). 3-철제 칼, 4-6: 뼈제품, 7-?, 8-골제품, 용도는 알 수 없음, 9,10-뿔제 허리띠의 버클, 11-13: 뿔제 허리띠 장식판, 14-11번 장식판 뒷면에 그려진 사슴그림

 

그림 3. 유스티드 XII유적의 17호-1번 인골과 그의 유물, 1: 토기, 2: 깨진 청동원판, 3,4: 청동고리, 5: 뼈, 돌, 청동거울 조각으로 만든 구슬이 달린 방울, 6: 철제품, 원형 고리가 달린 철막대기, 7,8: 청동 귀걸이, 9: 17-2호 인골(두번째 추가장의 인골), 10: 숯; 11-목제 막대기

 

 

17호도 무덤의 생김새와 소재, 유물과 말이 없는 점 등은 이 유적의 다른 무덤과 전혀 다르다. 인접한 울란디릭 I 유적에서도 돌상자 혹은 돌널무덤, 투바 아르잔-2호에서도 확인되는 무덤스타일이다. 울란디릭 I유적은 유스티드 XII유적과 비슷한 시점에 생겼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유적에서 가장 먼저 생긴 무덤은 17호와 20호일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17호 위에 설치된 2개의 추가장은 스키타이 문화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이 유적의 인골 모두가 동향을 향하는데 서향은 그 뒤에 생긴 관습이다.

 

이제까지 이 유적의 포스팅을 유심히 보시면 알겠지만 17호의 추가장은 앞서 살펴본 무덤의 유물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허리띠에 달던 장식의 소재와 형식은 모두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파지릭문화) 이후의 것이다. 그래도 한정 없이 늦지는 않고, 기원전 1000년 기(기원전 1000~기원전 1년) 대의 유적일 것이라고 약간은 무책임하기도 하고 약간은 자기방어적인 편년관을 쿠바레프(1991)는 내었다. 물론 아마 지금이라면 좀 더 구체적인 시기를 특정했을 것이다.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파지릭 문화)가 끝나는 것은 기원전 3세기 가량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는  2인 이상이 묻힌 무덤이 4,8,11,16,17,20,23호가 있다. 그 가운데서 여성 2인이 묻힌 곳은 4, 8, 11호인데, 4호와 8호는 성인 여성과 아이가 매장된 곳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성 아이만 2명이 묻힌 곳이 11호이다. 말은 매장되지 않았다.

 

무덤방의 크기는 매우 작으며(137×107cm), 출토유물도 소략하다(그림 1). 뿐만 아니라 무덤상부의 봉분크기도 작았다(그림 4).

이 유적에서는 여성아이 1명이 묻힌 무덤도 있는데, 특이하게 통나무를 파서 말 구유모양으로 만든 통나무관(길이 160cm, 너비50cm)에 묻힌 아이(6호묘)도 있다(그림 2). 유스티드 계곡 전체에서 통나무관이 이용된 경우는 유스티드 XII유적 6호를 포함해서 3곳 뿐이다. 이 유적에는 통나무관의 뚜껑이 없지만 뚜껑이 있는 어린아이의 통나무관이 유스티드 유적 I호 7호분에서 발견되었다.  6호(그림 2)의 여자아이는 모자를 쓰고 항아리와 철제 칼 1점과 함께 나무속에 부장되었다. 이 유적에는 나무 무덤방에 묻힌 여성아이(7호,9호)도 있다. 7호무덤의 방 크기(100×80cm)는 길이가 1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그림4).

 

 

 

그림 1. 유스티드 XII 유적 11호 무덤, 1-토기, 2,3-철제 칼, 4,5-목제 사슴머리장식, 6-목제 말 장식, 7-목제 머리장식, 8-말사슴의 송곳니, 9-목제 잔의 손잡이, 10-황토흔적105

 

 

그림 2. 유스티드 XII 유적 6호 무덤

 

그림 3. 유스티드 XII 유적 7호 무덤

 

그림 4. 유스티드 XII유적 무덤 배치도

 

그런데 아르잔-2호 유적에서도 통나무관을 쓴 경우도 어린 아이의 무덤이었다. 그렇다면 통나무관에 사람을 매장하는 관습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되어서 계속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 194 с(쿠바레프 1991, 유스티드 쿠르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