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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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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발견된 남성상은 공통점이 있는데 한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벨트 장식 속의 남성만 말을 타고 있지 않다(그림 1).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1859년 밀러의 발굴품으로 알려진 말탄 전사(그림 2)도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으로 등록된 유물이다. 그 외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벨트 장식에 여러 명의 남성이 나오는데 모두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밀러의 발굴품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5. a,b-그림 3, c,d-4의 말탄 활을 쏘는 전사

 

남성들은 1명을 제외하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장발의 남성이다. 휴식을 하고 있는 남성이든, 멧돼지를 사냥하는 남성이든지 남성은 장발이고 코에 수염을 달고 있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을 연구한 자비투히나는 이 남성들의 얼굴이 유럽인도 아니고 완전한 몽골로이드도 아닌 혼합된 얼굴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벨트를 만든 장인은 확실히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종을 구분해서 만들었다. 이것은 나무아래 쉬고 있는 3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여성은 둥근얼굴과 상대적으로 적은 찢어진 눈 덕분에 동양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여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파지리크 유적 2호분에서 그대로 확인되었고, 2호분의 여성미라는 몽골로이드, 남성미라는 유로포이드로 이미 밝혀진 바 있다(루덴코 1953).

 

자히투히나는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진 벨트의 연대를 기원전 5~4세기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남성들의 얼굴모습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발견된 벽걸이 캐노피에서 본 남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노피 속의 남성(그림 6-?)은 상대적으로 높은 코, 수염 등은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모습은 아니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무기 특히 고리트(화살통)과 말의 마구 등은 스키타이 문화의 것이었다. 이는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벨트장식의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고리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캐노피의 남성(그림 6-2)과 일맥상통한다.

 

그림 6.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캐노피

 

파지리크 유적에서 남성은 매우 화려한 모자를 썼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든지, 캐노피의 남성이든지 동양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남성(혼혈 혹은 유럽피언)은 1명을 제외하고는(그림 4-b,그림 3) 모자를 쓰지 않았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방형의 통에 그려진 전사 5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1716년 가가린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나무(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인터넷사이트)

 

참고문헌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발굴품)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https://www.hermitagemuseum.org/

 

Hermitage

 

www.hermitage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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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보낸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서 황금여성상은 보기드문존재이다. 소형 여성상이 주로 만들어지는 시기는 시베리아의 후기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가운데 오쿠네보 문화이고 모두 골제로 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에도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성을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 여성상은 나신으로 여성성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금으로 제작되었다.

 

스키타이 문화권의 흑해 북부, 크림반도, 코카서스 산맥 부근의 유적에서는 돌로 제작된 남성상들이 확인된다. 이 남성상은 기원전 7~3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시간에 따라서 손에 들고 있는 각배, 허리띠, 무기, 장신구(목걸이), 헬멧, 손모양 등에 따라서 연대가 구분된다. 간혹 여성상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대부분 남성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인 표트르1세의 황금여성상은 나신으로 착용하고 있는 것은 팔찌뿐이고, 머리에는 모자? 와 같은 것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의 손 모양은 왼손이 위, 오른손이 아래이며 나란히 가슴 바로 아래 전면의 정중앙에 두고 있다.

 

2021.05.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황금 여성상은 어디서?

 

황금 여성상은 어디서?

18세기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1716년 12월 12일 표트르 1세에게 두 번째 소포를 보낸다. 그때 황제는 외국에 출장중이었고, 모스코프가 소포를 대신받았다. 이 사실은 표트르 1세와 함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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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남성석인상도 흑해북안과 카프카스 산맥부근에서 이런 손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기원전 7~6세기의 유적(그림 1,2)에서 발견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유적 이후의 석인상은 각배(그림 3)를 들고 있다. 석인상의 손 모양은 손을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것, 마주하고 팔꿈치를 굽힌 것, 양손을 아래로 내려 놓은 것, 손 한쪽은 위+ 다른 손은 아래로 한 것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서 손모양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특징을 황금 여성상에 대입한다면 이 유물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몸을 말고 있는 맹수상과 같이 매우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남성상(입상),기원전 7~6세기, 살라뱐카 유적

 

그림 2.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남성상(좌상),기원전 7~6세기, 상단-비노그라도프카 유적

 

그림 3.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석인 석인상(입상), 기원전 5세기, 테레노프카 유적

 

하지만 이 여성상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발견된 여성의 모습은 대부분 어떤 유물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예를 들면 거울) 옷을 입고 있다. 옷을 거의 벗거나 얇은 옷을 입혀서 신체를 드러낸 여성상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추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물에서 발견된다.

2020.11.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체르토믈리크 유적] -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톰리크 무덤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중심무덤방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방 옆에 또 다른 방 들이 만들어진 구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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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성성을 드러낸 청동기시대 유물도 대부분 옷을 입은 것으로,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흥미롭게도 머리카락 표현으로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다. 후기구석기시대 이후로 나신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극히 드물다.

 

그림 4.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의 여성상(4~7), 남성상(8~10)

 

그래서 이 표트르 1세의 황금여성상은 손 모양은 스키타이 지역의 유물이지만, 나신이라는 점에서  불확실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ая статуэтка из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оллекции.// СГЭ. [ Вып. ] XXXVIII. Л.: 1974. С. 41-44(자비투히나 197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중에서 황금상에 대해서)

김재윤 2021,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 골제 인간형상물에 대한 검토」, 『영남고고학』,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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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목걸이와 팔찌이다.

흑해지역의 기원전 4세기 유적 이후에서는 매우 많이 출토되고, 스키타이 문화 이후의 사르마트 시대에도 많이 출토된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가운데 목걸이를 코롤로바는 크게 3가지로 구분했다. 양 끝이 약간 열려 있으면서 동물장식이 붙은 것(그림 2), 후프가 나선형으로 돌아가도록 세팅 된 것(후프가 2~3번 감긴 것)(그림 5-2~4), 나선형(그림1)으로 꼬인 것이다.

 

그림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나선형

 

그림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양 끝이 열려 있으면서 동물장식이 붙은 것

 

그러나 이 분류법에서는 여러 층을 쌓아서 올린 목걸이 안이 빈 후프는 분류법에 빠져 있는데, 이 유물은 위에서 말한 유물과 제작방법이 전혀 다르다. 코롤로바가 분류한 목걸이의 후프는 금 테를 꼬아서 만든 것으로 내부가 꽉 찬 것이지만, 여러 층을 쌓아서 올린 목걸이의 후프는 속이 빈 형태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 유물들은 시베리아 황금 유물의 연대, 제작지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는 유물 중에 하나이다.

 

흑해 북안과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원전 7~6세기 전사의 석인상들은 대부분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데, 앞이 열리도록 디자인된 목걸이, 완전히 막힌 목걸이 등 다양한 형식의 목걸이를 착용한 것이 발견되어서 이미 흑해 북안과 코카서스 북부의 스키타이 인들은 목걸이를 착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동물장식이 끝에 달린 목걸이다. 기원전 7~6세기 유럽의 스키타이 영토에서는 이러한 디자인의 목걸이와 팔찌 모두 확인되지 않는다.

 

1960년대에는 목걸이는 아니지만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유물로 알려진 팔찌가 아케메니드 궁전벽화에서 그대로 발견되면서 표트르 1세의 유물 중에 동물장식이 끝에 달린 목걸이도 비슷하게만 여겨졌고, 기원전 5~4세기로 보았다.

 

자료가 늘어가면서 동물 끝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출토되는 지역은 점 점 늘어났는데 우랄 남부지역, 흑해지역, 알타이, 카자흐스탄의 동부산악지역 등이다.

흑해를 제외하고는 18세기 당시에는 모두 시베리아로 지칭되었던 지역이다. 자료가 늘어가면서 표트르 1세의 유물은 점차 오리무중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ㅋ

비슷하게 보이지만 동물의 표현도 다르고, 지역마다 제작한 소재도 차이가 있다.

 

그림 3. 우랄 남부, 스타로폴 퇴장지 출토품

 

그림 4.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 추야 강 계곡 유적에서 나온 목걸이 끝장식

 

그림 5. 카자흐스탄 이식(1) 유적, 2~5, 표트르 1세의 유물, 6-알타이 바르부르가지 I유적 26호 출토품

 

그림 6. 흑해지역에서 나온 목걸이 끝장식

 

 

스키타이 시대로 한정하지 않고 남성전사가 장신구를 착용하는 예는 좀 더 올라갈 수 있는데 시베리아 청동기시대인 안드로노보문화에서부터 청동으로 만든 장신구가 대량으로 출토된다. 흑해의 청동기문화인 코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Петренко В.Г. Украшения Скифии VII-III вв. до н.э. М., 1978 // САИ. Вып. Д.4-5. С. 41.(페트렌코 1978, 기원전 7-3세기 스키타이의 장신구

Ольховский В.С., Евдокимов Г.Л. Скифские изваяния VII-III вв. до н.э. М., 1994(올호프스키, 에브도키모프 1994, 기우너전 7~3세기 스키타이 석인상)

Королькова Звериный стиль в оформлении гривен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й эпохи.

// Ювелирное искусство и материальная культур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01. С. 68-95. (코롤코바 2001, 스키토-시베리아의 목걸이의 형성과 동물장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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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나무방무덤과 돌널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 규모가 달랐을 것으로 구분했다. 나무방은 대가족이고 2세대가 함께 묻힌 것이고, 돌널무덤은 2인 혹은 1인이 묻혀서 소가족으로 분석했다.

 

아직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방에 묻힌 사람은 총 116명이다. 최소 2명부터 최대 9명까지 나무방에 매장되었다. 여러 명(?, 기준이 정확하지 않음)이 매장되었을 때 2세대가 매장되었다. 마모노바(형질 인류학자, 뼈를 분석)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 속의 뼈에서 유전병의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 친족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3호 무덤의 인골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굽히고 매장되었다. 11호, 23호, 31호에서는 한 그룹은 오른편, 다른 그룹은 왼편으로 누었다.

돌널 무덤에서는 혼자 묻힌 남성은 5인, 여성은 3인, 남녀와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는 2번 확인된다.

결혼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두 세 개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 모두가 대가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노보고르도바는 보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두 세대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노보고르도바는 비슷한 가족관계가 확인되는 울란곰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투바(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해서 울란곰 유적에서도 추가 매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타가르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고분은 살브익 유적인데, 그 곳에서도 복도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포스팅 참고)

 

2020.12.03 - [교과서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문화] -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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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글리-바쥐 II유적 층위조사에서 집단매장된 가족묘에서 무덤구덩이로 들어가는 곳에 추가매장을 위한 갱도, 일종의 복도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통로에는 나무를 깔아서 만든 것이고, 무덤 방의 덮개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그라치 1980).

이런 무덤구조라면 울란곰 유적에서도 두 세대가 묻힌 무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무무덤방에는 2세대가 묻힐 수 있었고, 돌널무덤은 단인장 혹은 최소단위의 가족이 매장되었을 수 있다.

 

앞서 보여드린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덮개의 중앙이 파손된 경우가 많았는데, 도굴의 흔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설명에는 없었지만, 노보고르도바가 자신의 저서에서 ‘도굴되지 않은’사글리 –바쥐 II유적이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이 발굴한 유적은 도굴 당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 울란곰 유적은 이미 채석으로 인해서 인접한 도시에서 건축할 때 봉분의 대부분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그 가능성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남성 두개골, 투부, 철검 등에 맞은 흔적

 

울란곰 유적에서는 죽음을 강제로 당한 여성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개골에 창상이 있는 인골은 남성들이며, 한번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자연사하거나 혹은 창상이 있는 남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단기간(전투)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매장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모노바도 고분축조가 매우 빠르게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무방 무덤 가운데 6기에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분석된 같은 시대의 무덤에서 어린아이의 비율은 31.6~61.4%에 달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현저히 낮기(21.2%) 때문이다.

 즉 다른 무덤 유적은 자연 스럽게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에 죽은 아이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무덤에서는 아이의 비율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낮은 점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큰 변이가 있었다고 판단가능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이 시기의 다른 고분에 묻힌 어린아이의 비율 총계로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했는데 평균 6명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매장되었다(마모노바 1978).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년과 장년의 남성이 많이 매장되었고, 남성노인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데, 나이들도록 살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노인들은 남성노인에 비해서 비율이 높다.

노보고르도바는 여성을 강제로 죽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죽었을 때 여성을 함께 죽이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대규모 집단 매장은 추가장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1980 :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Мамонова Н. Н. Демография Улангомского могильника (Саяно-Тувинская

культура V—III вв. до н. э.).— Археология и этнография Монголии. Новосибирск, 1978 (마모노바 1978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의 인구통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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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지역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 스키타이 남성이 유물속에 등장하는 일은 많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그래도 등장하지만 그 이전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의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은제 거울 속에는 스키타이 여신과 그 반대편에 남성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한다(그림 1-5). 두 남성의 온몸은 털로 덮힌 것처럼 표현 되었는데,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이다. 두 남성은 그리핀을 맨손으로 잡는 모습이다. 물론 이 거울 속에는 반인반수(그림 1-7, 그림 2-3)도 존재하지만 이들을 인간으로 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은제거울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은제거울

 

전체 거울의 그림 구도에서 여신과 남성만 제외하고는 거울의 각 칸에는 동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동물이 또 표현되어 있다. 반인반수(그림 1-7,그림 2-3) 아래에도 각각 그리핀과 표범이 그려져 있다.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는 날개를 펴고 양 손에 맹수를 잡고 있는데, 그 하단에는 별도로 동물은 그려지지 않았다. 반대편의 남성 2인 아래에는 동물 대신해서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있다. 제작자가 그림 1-5를 반인반수라고 생각했다면 그 아래에 동물을 표현했을 것이다.

거울의 5번 칸의 남성과 그리핀이 싸우는 장면과 기하학적 문양 사이에는 선을 깊게 새겼다. 이 선은 양 옆의 동물의 발 아래에도 그려져 있는데, 거울의 다른 칸에는 확인되지 않는 선이다. 이로 보아서 거울의 세 칸은 한 장면일 수 있다.

 

이제까지 간과했는데, 이 거울의 여성만 주목했는데, 스키타이 남성도 거울속에 분명히 표현되었다. 스키타이 남성신이 가장 먼저 나타난 유물은 켈레르메스 거울일 수 있다. 이 유물은 그리스나 우라르트에서 제작했지만 스키타이 여신이 등장하고, 동물문양가운데 표범(3번 칸)(그림 2-3)등은 스키타이 전통을 따르고 있어서, 스키타이 인들이 주문제작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모든 연구자들이 거울속의 날개 달린 여성을 여신이라고 하니, 거울속의 남성은 스키타이 일반 남성이라고 볼 수는 없고, 스키타이 남성신 가운데 한명이었을 수 있다.

 

누구였을까? 만든이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만든이가 스키타이 귀족의 주문을 충실히 따랐을까?

 

참고문헌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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