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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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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원래 석사 때 전공이 청동기시대였다. 남한 청동기시대 기원문제를 다루었었는데, 박사과정 중과 최근 까지는 계속 신석기시대로 글을 적었다. 물론 올해도 적고 있다. 그런데 딱 10년 만에 다시 청동기시대에 대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진주의 평거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토기와 석기 가운데서 연해주와 관련된 유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평거동에는 압록강 유역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그 쪽의 것이 아닌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관련 자료가 많다. 바로 연해주의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와 시니가이 문화이다.



  연해주의 청동기시대 시작 문제는 토기와 석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려는 시각과 청동유물에  방점을 두는 시각으로 나눠진다. 그 대상은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이다. 원래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와 다른 토기와 마제석기를 기반으로 해서 청동기시대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청동기를 모방한 석검과 청동유물이 없고, 마제석기가 주요하지 않으며, 농경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들로 인해서 신석기시대로 보고자 하는 논의도 생겨났다. 하지만 최근 신석기시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토기와 재배된 곡물 존재로 인해서 청동기시대로 보고자 하는 의견도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특히 마제석기보다 타제석기가 많은 점은 마제가 타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청동기가 부재하는 것은 청동기 제작 집단과 접촉이 없었을 가능성도 존재함으로 토기와 석기가 시대 구분의 특징으로 삼아야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특히 올가-10 유적에서는 조와 기장 등 재배된 곡식이 출토됨으로 굴지구류가 없어서 농경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마르가리토프카 문화는 학자에 따라서는 프후순 유형이라고도 한다. 모나스트르카-3, 바다라즈젤나야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칭한다. 연구자마다 따로 분석하였지만 모두 마연된 돌대각목문토기(그림1~5)를 특징으로 한다. 타제석기가 주요하며 마제석기는 원판형 석기, 석창, 석부가 있다.


그림 1.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1

그림 2.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2


그림 3.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3


그림 4.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4


그림 5. 프레오브라제니예-1 돌대문토기 5


그림 6. 프레오브라제니예-1 석촉


그림 7. 프레오브라제니예-1 원판형 석기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이것은 진주 대평에서 출토된 곡옥형 청동유물(그림 1)이다.

 


그림 1. 대평출토 곡옥형 청동기(선문대학교 2001)


얼마전 까지만 해도 대평출토 유물은 한국비파형동검(기원전 10~8세기)출토시기 이전 이라는 것에 논란이 있었다.


그 논란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설과 청동기시대이며, 비파형 동검 이전에 시기의 청동유물로 남한이 비파형동검 이전에 청동기시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설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출토정황이 명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정선 아우라지에서 남한 청동기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와 청동기가 공반되어 출토되면서, 남한도 비파형 동검 이전에 이미 청동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대평출토 곡옥형 청동기도 우연히 출토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럼 이 유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단 남한에서 청동기시대 비파형 동검 이전에 청동 유물이 제작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외부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유물은 연해주의 청동기시대 시니가이 문화(그림 2)에서 출토된다.



그림 2. 시니가이 청동유물(필자좔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토기, 석기, 집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4?category=732912

http://eastsearoad.tistory.com/125?category=732912

http://eastsearoad.tistory.com/126?category=732912


이 문화는 한반도 두만강 유역의 서포항 유적에서 확인된다.
필자가 이를 서포항 상층문화로 논한바 있다(김재윤 2009).


연해주의 자이사노프카 문화는 두만강 유역, 연해주 내륙, 목단강 유역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림1. 동해안북부문화권(5000~3800B.P.)


그림 2. 동해안북부문화권에서 출토된 토기


이를 필자는 ‘동북한문화권’이라고 논한 적이 있다(김재윤 2009). 그러나 동북한이라는 말은 국경이 포함된 내용으로 국경이 없었던 선사시대와는 대치된다. 그래서 ‘동해안북부문화권(김재윤 2017)’으로 정정한 바 있다.




그림3. 러시아,중국,북한의 접경지역. 다리로 이어진 곳이 러시아와 북한이고, 사진을 서서 찍은 곳이 중국이다

(http://eastsearoad.tistory.com/99?category=714181)


*이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국경 수립전과 후로 나누어서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으니....현실은 그리 녹녹해 보이지 않는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자이사노프카 문화에서는 연해주 신석기시대 최초로 갈판과 갈돌(그림 1)이 출토되었다. 갈판과 갈돌은 과거에는 농경의 직접적인 증거물로 생각되었으나 최근에는 반드시 그렇다는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더 많다. 예를 들면 도토리를 가는 경우와 같이 농경과 관련되지 않은 식물이용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갈판과 갈돌

하지만 확실히 앞선 루드나야 문화, 보이스만 문화와는 다른 문화 양상이 보인다. 특히 땅을 파는 굴지구(그림 2,3) 류가 많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도구는 땅을 파는 도구로서 농경의 간접적인 증거로 많이 논하기도 한다.

물론, 땅을 파는 이유가 반드시 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팔 때도 필요하고 등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는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 부터도 필요 했는데, 이 자이사노프카 문화에서 집중적으로 대형 괭이가 발견되는 것은 앞선 시기와 문화양상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자이사노프카 문화에서는 일부 주거지에서 농경의 직접증거로 볼 수 있는 곡물이 발견되어서, 이 시기 부터 연해주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림 2.자이사노프카 문화의 굴지구

그림 3.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굴지구

그림 4. 굴지구류의 자루착장방법

그림 5. 현대의 괭이(굴지구)

목제가공구류와 생각되는 석부와 석착(그림 6, 7) 등도 확인된다.

그림 6,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석부와 석착


그림 7. 다양한 석부의 착장방법

재밌는 유물은 그림 8,9이다. 한반도에서는 달도끼 혹은 원형 석부라고 불리는 유물이다. 달도끼는 정확한 용도를 몰라서 부르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곤봉대가리’라고도 하는데, 막대기에 끼워서 사용하는 것으로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물을 석월이라고 하며, 역시 신분이 높은 사람이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구멍을 뚫기 위한 도구로 보고 있다.

그림 8.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투공구 1

그림 9.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투공구 2


유사하게 생긴 유물을 두고 각 국가 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기도 하고, 석기의 용도는 정말 알기 힘들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5000년 전 부터는 신석기시대 마지막 문화로 보이는 자이사노프카 문화가 시작된다.
자이사노프카 문화의 집터는 주로 수혈(구덩이)식으로 움집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집자리의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방형(네모)에 가깝다(그림1). 시간에 따라서 장방형(직사각형) 집터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림1. 크로우노프카-1 유적의 자이사노프카 문화 주거지(김재윤 2010)


그런데 땅을 파는 움집이 아는 다른 스타일도 확인된다.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은 곳에 그보즈제보-4유적에서는 집터를 판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기둥구멍자리만 남아 있었다. 지상식(그림 3) 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림 2. 그보즈제보-4유적의 주거지(김재윤 2010)

그림 3. 나나이족의 집

또 아누치노-29유적은 한쪽 벽면만 높이 남아 있고 그 곳에서만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복원하면 그림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거지 내에서도 토기 등 유물은 나왔다.
그러나 안정적인 형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 4. 아누치노-29유적의 주거지(김재윤 2012)

연해주와 인접한 목단강 유역에서도 자이사노프카 문화와 같은 성격으로 생각되는 앵가령 유적이 있다. 그 중에서 하층은 신석기시대로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마지막 문화와 성격이 같다고 많이 언급되었다.
그런데 연해주와는 달리 주거지 벽면에 돌담이 확인된다. 물론 이 지역의 집자리가 모두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양성으로도 볼 수 있다. 연해주와 비슷한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지만 집의 모습은 달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림 5. 앵가령 하층 문화의 주거지(김재윤 2012)

자이사노프카 문화에는 앞선 시기와는 달리 여러 집의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2?category=714181


앞서 집 안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경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압록강 유역과 멀지 않은 요동남부에서는 이 시기가 되면 단독으로 무덤이 확인되는 유적이 있는데, 비교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