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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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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28 러시아의 오클라드니코프
  2. 2017.11.27 고토기(古土器)
  3. 2017.11.23 연해주와 아르세네프
  4. 2017.11.22 베이징 조약과 연해주
  5. 2017.11.17 오산리식? 토기


러시아인을 두고 ‘동양인의 사상을 한 유럽인’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와 꼭 맞는 예를 전공하고 있는 고고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제 000기념논총 이런 것이 거의 없어지다 시피 했다. 정년기념논총, 회갑기념논총 등 대학자 혹은 스승을 기리는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아직도 그런 것을 만든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보수적이다.
이런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오클라드니코프가 있다. 이 분은 돌아가신지가 30년이 넘었지만 필자가 유학할 당시 2008년에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을 보았다. 새삼 러시아에서 그 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림1. 오클라드니코프 선생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

대략 러시아 고고학의 아버지? 정도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련아카데미 아카데미 학술회원이고 연해주를 포함해서 시베리아 전역을 누비며 수많은 조사를 하였다.


*한국에서 연구자는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지만, 러시아에서는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길 바란다. 소련시절에는 3D업종이 대학교수,의사였다고 하니...(아이러니 하게도 공산주의 시절에도 돈 많이 못 버는 직업이 가장 비 인기직종이었다. 두 그룹이 가장 돈 못 버는 계층이라고 한다. 현재는 그 정도는 아님). 연구자는 아카데미의 연구원을 거쳐서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이다. 대학교수는 아카데미 연구원이 되지 못하면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러시아도 교육체계를 대학 중심으로 많이 바꾸고 있긴 하지만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대학의 상위기관이다(학부제도가 없고 전문가 양성기관으로 대학원만 존재한다). 중국(사회과학원), 북한(사회과학원) 등 기타 공산국가들도 모두 이 제도를 표방하였다.

그가 조사한 유적은 시베리아의 부레티 동굴 유적부터, 앙가라 강의 신석기시대 유적, 아무르 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안, 콘돈 유적, 루드나야 프리스탄, 수추섬, 시미파트나야, 수추 섬 등 다양하다. 아직도 각종 논문에서 거의 첫 장에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이 유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조사한 사람은 오클라드니코프 다’

(그림 2. 사카치 알리안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3. 메드베쥐야 소프카 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4. 세레미테보 암각화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대략 만 년 전부터 시작된다. 만 년 전에는 자연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고, 인간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 간 갱신세의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모습, 한반도의 지형도 이 때 형성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보며, 이를 기점으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최초의 토기는 원시적인 토기라는 뜻으로 고토기(古土器)(그림 1, 2)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저화도에서 구웠으며, 태토(토기 만든 흙)에 유기물질을 섞어서 다는 의견이 있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최근에는 태토에 섞은 것이 아닌 바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태토에 유기물질을 섞은 토기는 고토기에서만 확인된다.

(그림 1. 제주도 고산리에서 출토된 고토기)

(그림 2.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2. 토기 편에 보이는 홈은 유기물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이런 신석기시대 고토기가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의 고산리 유적이다. 그리고 청도 오진리에서도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절대연대가 제주도 보다는 늦다. 한반도의 육지에서는 아직 확인된 정확한 예가 없는데, 욕지도의 신석기시대 석기를 보고 가능성을 예측한 학자도 있다. 한반도 육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강원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자료로는...

(그림 3. 제주도 고산리 유적)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르세네프는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으로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를 조사한 사람이다. 장교이자, 탐험가, 지리학자, 고고학자로 알려져 있다. 1880년에 시데미 패총을 발굴한 얀콥스키 다음 세대의 연해주에서 유적을 찾은 사람이다.

(그림 1. 아르세네프)

188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극동으로 사람들을 대거 파견하였다. 서양제국들이 식민지를 찾은것 처럼....

러시아에서 극동은 신비의 땅이었고, 지도도 작성해야 했고, 사람들에 대해서 파악도 필요했다. 이를 담당한 사람 중에 한명이 아르세네프이다.


지도는 아르세네프가 직접 그린 것으로 붉은 선은 그가 탐험한 경로를 그려 놓은 것이다.
우수리강과 시호테 일란 산맥을 직접 다니면서 지질, 지리조사 및 연해주의 성곽 유적을 대거 확인하고 기록에 옮겨 놓았다. 뒤에 책도 저술했는데, 『우수르 지방 탐험기(1921)』, 『데르수 우잘라(1923)』 등이 있고, 그 중 데르수 우잘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련 자본으로 일인 감독이 제작했으며 소련 배우가 출현해서 소련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쉽게 구할 수 있음). 데르수 우잘라는 팩트 소설인데,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림 2. 아르세네프의 탐험경로, 아르세네프 직접작성)

(그림 3. 영화 데르수 우잘라)

현재 러시아의 연해주 주립박물관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아르세네프 박물관’이다.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중앙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https://www.google.co.kr/maps/dir/43.1161604,131.8820854/43.1161376,131.8820697/@43.1138917,131.8846935,16.46z

-->연해주 주립박물관 위치)

아르세네프카 조사한 연해주의 중세시대 즉 여진과 발해 성은 최근에 댜코바 박사가 다시 연구해서 저서가 출판되었다(필자가 번역했으나,,, 아직 출판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번역서는 스폰서가 없으면 출판사에서 꺼려한다고 직접들었다)
아르세네프가 확인한 유적은 발해와 여진의 성인데, 발굴을 직접한 것은 아니고, 성곽은 드러나 있는 유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해서 지도에 표시하는 정도이지만, 러시아 인들은 그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높이 샀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두만강 북쪽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1860년)을 기점으로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을 할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와 청은 자기네 국경 관리를 시작하였다. 흑룡강의 좌안은 러시아령, 우수리강의 서쪽은 청, 동쪽은 러시아와 청이 공동관리 한다는 다소 애매한 조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림1. 베이징 조약 당시 러시아 총독으로 참가한 이그나티예프의 초상화와 오른쪽은 베이징 조약 당시를 그린 것이다)


(그림 2. 베이징 조약 이후 극동의 총독이었던 푸탸틴과 러시아의 극동지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러시아 연해주의 고고학 조사는 19세기 후반 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얀콥스키가 해안가의 패총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1880년이다. 그 후에도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모스크바에서 파견나온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르세네프가 연해주의 지질조사를 하면서 발견된 성을 기록에 남겨 놓았다. 이것이 연해주 고고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얀콥스키의 패총발굴이야기와 아르세네프가 남긴 연해주의 발해와 여진 성 이야기는 다음으로..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사진 1. 고성 문암리 출토, 오산리식토기)

오산리식토기는 한반도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 최초로 출토되어서 명명되었다.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입술주의)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다.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주로 시문구(문양을 그리는 도구)로 ‘찍는 방법’이다. 시문구의 찍히는 모양이 원형, 삼각형(사진 1) 등인데, 간단하게 비유하면 도장같이 생각하면 된다. 문양이 다른 도구로 찍은 것(사진 2)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문양 찍는 도구 중에서는 빗처럼 생긴 다치구를 위에서 설명한 도장시문구와 함께 시문한 것(사진 3)도 포함된다.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 주변에만 문양을 찍어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2. 고성문암리 출토, 오산리식 토기)

(그림 3. 양양 오산리 유적의 C지구 출토, 오산리식 토기)

오산리식 토기는 동해안에서 융기문토기(http://eastsearoad.tistory.com/97)와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오산리 유적의 c지구의 예로 보면 융기문토기보다 이르지만.

오산리식 토기는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융기문토기와 함께 한반도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식민주의사관을 깨는 확정적인 물증자료이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토기로 생각된 바닥이 뾰족한 토기 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당시에 크게 바닥이 편평하지 않은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남부와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북부가 있었다. 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지역이 강원도 고성, 양양 정도이고, 좀 더 내려온 죽변부터 남해안과 훨씬 밀접하게 이어질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강원도의 영향도 있다.
 물론 고고학개설서에는 5개의 지역구분이라지만, 1980년대 주장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이유는...알지만 밝히지 못하겠다. 한국 모든 학문의 근본적 병폐정도로 밝힐 수 있다). 어디서부터 굴비를 다시 엮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논문이 필요할지...

그리고 한반도 남부 중에서도 남해안에서 유적도 많이 확인되며, 밀집되어 있고, 연대도 이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