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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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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영동지역의 자연환경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지리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 중세시대 발해(628~936), 여진(1115~1234) 및 동하국(1217~1234)을 구성하던 민족의 이동이 연해주의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는데, 영역문제 및 국가의 흥망과도 관련이 있다.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소비에트 시절에는 러시아 전체에서 극동의 남쪽지역에 해당하지만(소련 자연지리에 의한 지역구분』 1968),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해당된다. 이는 소비에트 시절의 극동 개념에 포함했던 시베리아 남부와 시베리아 북동, 사할린(니콜스카야 1974) 등이 모두 개별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본고에서 지리적 영향을 크게 미치는 시호테 알린 산맥은 극동의 남부의 동쪽에 뻗어 있는데, 이곳은 연해주에서는 북동쪽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흥미로운 성곽들이 현존하고 있다.
 시호테-알린 산맥은 동해바다를 따라서 1200km정도로 뻗어 있고, 가장 넓은 부분은 300km이고, 평균높이는 800~1000m에 달한다. 산맥 가운데서 가장 중앙부분은 타르도키-야니 산으로 높이가 2078m으로, 산맥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은 8개의 북북동 방향으로 병풍 같은 산이 서로 연결되었으며, 봉우리가 높다. 강의 많은 지류가 계곡을 따라서 흐르고, 협곡과 폭포도 많이 확인된다. 가장 북쪽분수령은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산맥에서 꺾어져, 동해바닷가와 교차고, 그 아래쪽으로 동해와 평행하게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르강의 서쪽 지류는 강이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한데, 동쪽 지류의 강은 서쪽에 비해서 길이가 짧고 강수량도 적은편이다. 아무르강은 시호테알린 산맥과 부딪치면서 우수리, 이만, 비킨 강 등 지류가 되고, 그 일부는 산맥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두만강, 코피강, 사마르강)은 길이가 짧지만 빨리 흐른다. 신생대 제3기에 화산활동에 의해서 많은 협곡이 형성되었다.
 시호테알린 산맥의 서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며 열편퇴적층의 부드러운 저지대이고, 동쪽의 경사는 매우 가파르고 지질도 아주 단단한 암벽이다(다비도바 외 1960).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해안가에는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이다. 대체적으로 유적은 인간이 살기 좋은 곳에만 발견된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짧고(100~200km) 빠르다. 강의 상류에서는 하나만 흐르다가 중류와 하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면서 500~700m에 달하고 가장 끝에는 거의 흔적만 있다.
 연해주 동북쪽 강의 너비는 10~40m에 달하고, 깊이는 2m가 넘지 않고, 평균 속도는 2~2.5m/s이다.
 연해주 동북쪽의 해안선 모양은 산맥과 거의 평행하고 있는데, 올가 만부터 시작해서 아무르강 하류 까지 이어지고 있다(다비도바 외 1960).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바다가 접하고 있는 부분은 신생대의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강의 하류인 삼각지 부분은 해진 현상에 의한 것이다(쿠랄코프 1972). 강의 체계에 대해서 최근에는 대륙의 융기활동과 관련해서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도 있다. 대륙의 융기활동 방향은 강을 두 쪽으로 나누어 지류를 형성하게도 하고, 강의 방향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서쪽 경사면에 흐르는 강은 중요한 수계(우수리강, 이만강, 비킨 강, 호르 강)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의 상류는 대체적으로 높이가 600~800m 되는 지점(산맥 중 낮은 편)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둘로 나눌 듯이‘ 힘차게 하류로 흐르고 있다. 강 상류의 집수지는 대체로 높이도 높지 않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 중요한 수계의 단층과정은 서쪽 경사면이 더 우세한 것으로 베루후네-반친스카야, 타두시킨스카야 강 등이 이를 반증한다(후댜코프, 쿠알코프, 코로트키, 1972).

아무르-연해주 지역은 신생대 초기에 이미 육지화 된 곳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아주 좁게 갈라진 곳이 있었다. 신생대 제 3기에 갈탄층이 형성되어, 관입한 자원이 되었다. 이곳에 현재 광산의 입지(올가-테튜헤 지구에는 광산이 많음)와 관련이 있다(댜비도바 외 1960). 4기 초에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완성되었다.

아무르-연해주의 지역과 연해주의 동북지역은 아시아대륙의 가장자리이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기후이다(비트비치키이 게. , 1969). 동아시아 몬순풍의 영향을 받는데, 계절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4계가 뚜렷하다(다비도바 외 1960).

산의 계곡과 분지는 산의 경사면과 접하면서 공기가 찬데, 온도가 아주 많이 내려간다. 찬 온도의 결과로 겨울에는 아주 온도가 하강하고, 봄에는 천천히 따뜻해진다. 이는 식물의 생육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친다(다비도바 외 1960).

겨울의 강우량은 낮은데 10~40cm정도이며, 아주 추워진 이후에야 눈이 내린다. 봄은 날씨가 좋은데, 온도변화가 심하고, 이른 봄까지 눈이 날린다.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여름 몬순 비가 내리는데, 강이 심하게 불어나고 일년 중 강우량의 70%정도가 이때 발생한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의 북쪽에는 일 년에 700mm가량이 내리는데, 산에는 1000mm가량이 내린다.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로 따뜻하고 건조한 온도인데, 10월 중순까지 이런 날씨가 지속된다.

극동의 식물상은 거의 1800여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4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동시베리아 식물군은 잎갈나무가 가장 대표적으로 오호츠크 혹은 얀 형이라고도 하며,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등도 포함한다. 만주 혹은 우수리 식물군은 신갈나무가 대표적이다. 들베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라임다우, 자작나무는 다우 식물군이고 시베리아 식물군은 나래새, 시베리아 이끼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는 시베리아, 오호츠크, 만주, 다우르 식물상과 함께 동물상도 다양하다(보로빈스키 1967). 시호테 알린 산맥의 식물상은 신생대 제3기 초에 처음으로 갈라진 것이고 빙하의 지역적 분리와도 관련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1l_NdlG44

(링크 해둔 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약간 살펴 볼 수 있다. 러시아어이지만 충분히 감상가능함)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955년 레닌그라드 대학교(역자 주. 현재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의 동방학과를 졸업 후에 오클라드니코프 밑에서 고고학을 연구하고자 한 학자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예.붸.샤프쿠노프로 후에 발해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연구를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왔는데, 소련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의 극동지부의 역사연구실에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후에 자신의 제자들이 된 극동대학교의 역사학과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림 12. 에른스트 블라비미로비치 샤프쿠노프 . 샤프쿠노프의 저작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젊은 역사학자는 특히 발해와 여진의 유적들에 관심을 많이 기우렸는데, 샤이긴스코예 성지를 30년 동안 연구하였다. 이 성지는 나중에 연해주 여진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특히 동하국(1217~1234)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부세, 표드로프, 오클라드니코프 등의 연구결과를 따라서 샤프쿠노프는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지를 계속해서 조사했었다. 특히 1960~70년대 그와 함께 이러한 성지를 조사한 제자들-레니코프,베.데., 세메니첸코, 엘.예., 호레프 붸. 아., 볼딘, 붸.,갈락티오노프, 오.세. 등은 연해주 성지 연구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조사한 성지는 노보고르데예프카, 오를로프카, 스토고프카, 시클라예프카, 마리야노프카, 유르코프스카, 노보파크로프카-2, 라조프카, 예카테리노프카, 니콜라예프카, 마이스카, 크라스킨노, 콕샤노프카-1,3, 프라호트뉴킨스카, 두보바야 소프카, 노보네진스카, 스몰린노프카, 스테클뉴하-1 등인데, 이 유적들은 여진 고고학연구에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세 번째 단계-전문적인 연구 단계가 시작된 시점이다.


1953년부터 고고학자인 오클라드니코프 아. 페(1908~1981)(그림 11)가 극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극동고고학 발굴대가 편성되고,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의 학문적인 연구가 체계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는 문서국에 보관된 모든 자료들을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마아카와 베뉴코프의 탐험으로 찾은 유적들, 파랄라디 신부의 발견, 부세와 크로포트킨의 유적 연구, 표드로프의 발굴, 아르세네프의 업적, 시테른베르그와 쉬로크고로프의 고고학 유적 등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알려주는 정보 등도 유용하였다. 이러한 모든 연구들의 총체가 1959년 『Далекое прошлое Приморья(연해주의 지난 먼 과거)』가 출간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인용되는 책이다. 특히 이 책에서 오클라드니코프는 러시아 동방학자 들이 남긴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역사적 사건에 대입하려고 했던 것이 큰 업적이다. 그 결과 극동의 중세시대(역자 주. 말해 및 발해~여진) 유적은 중국의 역사적 기록과 왕조의 연대와 상응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클라드니코프는 문헌에서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적인 연대와 비교해서 발굴조사를 하였고, 고고문화로서 말갈, 발해, 여진의 문화를 구분하였으며, 이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를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시대의 퉁구-만주족의 민족학적 특징 등 여러 가지 그가 논의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그림 11.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오클라드니코프 


 오클라드니코프는 아주 드문 인물이다. 그는 유라시아의 고고학과 민속학적 유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거대 담론으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리고 학문적 사실을 분석해서 재빨리 결과물로 내어놓았으며, 엄청난 직관력으로 고고학 유적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논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유능한 젊은 학자로 러시아 전역에 등극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 중세시대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비타리 예피하노비치 라리체프 이다. 그는 오클라드니코프와 함께 파랄라디 신부의 일기장에 따라서 고고학 유적 조사를 함께 하였다. 그는 유능한 학자로써 연해주 중세시대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나가는 거장이었다(라리체프 1961).
 오클라드니코프가 이끄는 극동 고고학 발굴대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의 동북부 해안과 블라드보스톡 사이의 지역들을 연구하였다. 그 지역은 포시에트 항구에서부터 수분하 강의 하류까지, 마이헤 강과 테튜헤 만, 나호드카 시, 아르툠 시 부근 등이었다(라리체프 1960). 이미 알려진 성곽 뿐 만 아니라 새로운 것도 발견하였다.
 오클라드니코프는 현장에서 30년간을 연구했는데, 연해주의 성곽들도 많이 포함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보구슬라프스코예, 루다노프스코예, 프르세발스키 언덕위의 성지, 콕샤로프카-1,2,3, 추구예프카, 고르니 후토르, 이즈베스토프카, 스몰리노프스코예, 고르바트카, 고르노레첸스코예-1,2, 노보러시야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지리학적 입지나 국가나 문화적인 편년, 그 성곽이 존재한 시기, 역사적 맥락 등을 연구하였다 .  


  오클라드니코프는 특히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곽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는데, 1953년부터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성곽, 크라스노야르소코예 성곽 등을 보로비요프 엠.베. 자벨리나 엔.엔, 라리체프,베.예,, 샤프쿠노프.예.베.(1930~2001)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그림 12). 1960년에 보로비예프는 크라스코야르스코예 소프카의 사원의 금당지(6번 건물지)를 조사하여서, 유적은 단층위 유적으로 11~12세기 여진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보로비요프 1975). 나중에 그는 러시아동방학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았는데, 극동 중세사 연구의 기초를 만든 학자로 업적을 평가 받았다. 그는 고고학적 사실과 기록에 남아 있던 역사적 사실을 대입했을 뿐만 아니라 아르세네프의 연구에 기초해서 산지성과 평지성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였다(보로비요프 1975).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913~1916년까지 우수리스키 지역에 있는 고대 성곽들은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아주 심하게 파손되기 시작하였는데, 학교 선생님인 페드로프가 이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9).

그림9. 표도로프

그는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지 뿐 만 아니라 수분하 강 유역의 고대 유적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의 일부분 등도 연구하였다. 그는 아주 정밀하게 발굴도 했는데 그 결과물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의 초석, 고대 도로와 방어시설물에 대한 연구가 모두 공간되었고, 1916년에는 고고학 유적 지도도 발표하였다. 팜플렛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서 확인한 유적과 그의 성곽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페드로프 1916). 페드로프는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지의 다층위 유적을 처음으로 연구하였고, 아래층은 발해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성지는 우수리스크 시내의 것으로 현재는 완전히 파손되었지만, 수이빈 도시(발해 솔빈부의 중심부)로 여겨졌다. 상층은 여진의 것으로 발해성 위에 재건축한 것이다(그림 10).

그림10. 니콜라프스코예-우수리스크 성곽. 1885년 표드로프 작성


연해주 고대 성지 연구에 있어서 아주 큰 기여를 한 또 한 사람은 하르라모프이다. 그는 1928년 극동지역 유적 답사기를 작성하였는데, 모두 27개의 유적이 기술되었는데, 19기의 성지와 도로를 포함한다. 수술로바 반도에 위치한 해자가 있는 성벽은 토성으로 남색 기와가 깨어진 채로 확인되었고, 훈춘 강의 좌안 지류인 세디미 강을 따라서 고대 도로, 시코토보 지구의 노보네지노 성지, 유드존네 강의 성지, 드지기트 항구, 니콜라예프카 마을의 성지(수찬스키-파르티잔스크 지구), 올가만과 가까운 쵸르토비 절벽 위의 성지, 테튜헤 강에 있는 블리디미로-모노마호보 마을의 성지, 테튜헤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있는 성지, 해안에서 60 verst 떨어진 타케마 강의 성지, 암구 강의 성지, 토호베 강 하류의 해안가 성지, 추구예프카 마을에서 가까운 우란헤 강의 성지, 시마코프 지구의 마랴노프카 마을에서 가까운 성지, 시마코프 지구의 벨초보 마을의 성지, 이바노프 지구의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마을에서 5verst(역자 주. 5.335km) 떨어진 성지, 스파스크 지구의 젠코프카 마을의 성지, 이만 강에서 3 verst(역자 주. 3.201km)떨어진 성지, 이만 강에서 60verst(역자 주. 64.02km) 떨어진 곳에 성지가 있다(하르라모프 1927).


연해주 중세시대 성곽연구의 두 번째 단계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연구는 아르세니예프와 표드로프의 연구이다. 이 기간에는 대부분 연해주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 유적들의 문화적 특징 및 민족학적 특징과 문제점 등도 지적되었다. 또한 각 성지들의 연대와 축조 목적, 건축의 전통, 유형 분류, 유적의 지리적 특징과 입지, 성지의 행정적인 용도, 도로 등 극동 고대사와 중세사의 성지들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극동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크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 (1872~1930)가 남긴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1900년에 젊은 장교로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왔다. 그는 사냥단의 대장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극동 영토에 대한 조사연구였다(그림 7), 당시 러시아는 새로운 자신의 영토의 지도가 필요하였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교통로가 되는 고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길을 낼 수 있는 곳, 원주민들이 사는 장소와 인구 수, 습관과 사상 등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식물상과 동물상, 방호참을 파기 쉬운 편한 장소 등도 조사에 포함되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수집한 정보로 평범한 군인장교가 아니라 만물박사로써 학자로 통하게 되었다.

그림 7.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는 우수리스크 지방에서 30년간 살면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1906년에는 러시아 지질학회의 아무르 지역분소의 과업으로써 시호테-알린 산맥의 연구를 위해서 탐험대를 구성하게 된다. 시호테 알린 산맥과 해안선을 따라서 올가 만에서 우수리와 볼샤야 우수리 강의 상류까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첫 번째 탐험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는 ‘우수리스크 철도 시마코프카 역에서부터 출발해서, 우수리 강, 울라헤, 푸드진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아브바쿠모프카 강까지 인데, 북쪽 올가 만 쪽이다. 그리고  북위 45〬 에 위치한 테르네이 항구에서 부터 다시 산호베 강을 따라서 시호테-알린 산맥을 넘어서, 이만 강을 따라 이 역까지 다시 오는 것이 그 계획이다(아르세네프 1906)’고 기술되었다.
 많은 성지 중에서 시호테-알린 산맥의 푸드진(파블로프카) 고개에서 타투수(제르칼나야 강)까지의 조사된 성지들은 지금까지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조사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세 번째 탐험기의 내용은 아주 흥미롭다.  이오드지헤 강(드지기토프카 강)에서 아주 이상한 토성을 보았는데, 여기에서 뻗은 길은 산호베까지 이른다고 (아르세네프. 베. 케., 『세 번째 탐험기: 1906년 탐험』-1906년) 기록되었다.
 그 다음해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과 연해주의 동해안가를 계속 조사하였다. 1907년 답사에서는 린드 만에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나하타후 강까지, 그리고 투수쿠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서 비킨 강까지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아르세네프는 ‘유적은 아무르 강 하류의 계곡을 따라서 티르스키 절벽까지 유적들은 계속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올가 해안가에는 고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올가 해안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유적이 많고, 북쪽으로는 드문 편이다. 소수노 절벽 부근까지 유적이 끊어진다(아르세네프 1927).
 1908~1910년까지 아르세네프는 19개월 동안 가장 힘든 조사를 단행하게 되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북쪽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구역에는 테튜헤 강의 북쪽, 디오드지헤(드지기토프카 강), 시치(세레브랸카), 콜룸베(페쉐르나야), 암구(암구 강), 소요나(지보피스나야), 쿠즈네초바, 샤오 케마(말라야 케마), 타케마(벨리카야 케마), 사마르가 강 등이 포함되었다. 아르세네프는 강에서 몇 개의 성곽들을 발견하였고, 그 곳으로 가는 길과, 그곳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대에서부터 이용되었던 길 등을 조사하였다(그림 8).

그림 8. 1908~1909년 사이에 아르세니예프가 조사한 연해주 영동지역의 성곽 위치도(지도의 점선표는 아르세니예프가 추정한 옛날도로)

 1911~1912년 아르세네프는 우수리스크 타이가 지역으로 가면서 고대 유적 연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그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러한 유적들이 곧 파손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비록 허술한 유적의 평면도라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고 썼다. 그리고 탐험기록에 많은 성의 입지와 그 특징들을 기록해 두었고, 이들 중 많은 것들이 그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많은 수의 성곽들이 파괴되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날 연해주 북동지역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찾기 힘든 것이 많다.
 아르세니예프는 극동에서 12번의 조사를 한 유일한 학자로써 시호테 알린 산맥을 25번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우수리 지역의 전체 영역을 거의 모두 조사했다. 매우 열악한 조사조건이었지만, 그는 사진을 찍고, 평면도를 작성하고, 유적의 크기를 재고 기록하였는데, 모두 128개의 유적이고, 그 중에서 수십 기의 성지가 포함되었다. 베뉴코바 고개의 성, 소프카 류보비, 예디킨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부르리보예, 소욘스코예, 리스벤노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 평지성과 산지성, 페세르노예 성 등 모두 지도에 표시되었다.(러시아지리학회 연해주 분소의 기록, 『아르세네프 대장의 탐험 보고서(1900~1910년 우수리 지역에 대한 여행기)』  1927, 『아르세네프 도시에서 작성한 시의회 보고문에서』. )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우스리스크 지역의 고대 유적의 겨우 10분의 일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1916년 아르세니예프는 하얼빈에서 개최된 러시아 동방학자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였는데, 연해주의 고대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그 발표에서 연해주의 유적을 모두 10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거기서 4번째 유형이 본 연구와 관련된 것이다.
 1. 12~13세기의 성지로 만주인과 원주민의 전쟁 시 축조된 것
 2. 산지성과 평지성, 12~13세기
 3. 고대도로
 4. 경계를 표시하는 장성(아르세니예프 1947)

 물론 당연히 후대에 그의 유적 유형화에 대한 내용은 수정되었는데, 제일 첫 번째가 유적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지형이나 위치적인 것은 거의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고, 장성이라 불리는 용어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주 지역 선사시대부터 여진시대까지 고고학 유적을 시대구분 하였다. 선사시대-8~12세기까지, 발해-14세기까지, 여진제국-19세기까지 문명의 쇠퇴기로 편년된다(아르세니예프 1922). 그는 ‘이러한 나의 짧은 이야기가 좋은 연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마도 전체 역사연구에서는 거의 없어질 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밑바탕 정도이다’(아르세니예프 1912)라고 자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르세네니예프가 죽은 후에 그가 남긴 고고학 유물과 그림들은 그의 아내 마르가리토프카 니콜예프카가 동방학연구소(레닌그라드 소재)로 전달하였다. 아무르 지역 연구회의 재단 소속의 댜코프와 사크마로프는 우연하게 아르세니예프의 연구물을 받았다는 카자케비차의 메모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1937년 카자케비차는 남편을 죽이고 카자흐스탄에서 1940년에 죽었다고 그 뒤에 알려졌고, 업적물은 행방물명 되었다(댜코프˙사크마로프 1996).


역자주: 

아르세니예프(В. К. Арсеньев, 1872-1930)19세기 초반에 러시아가 극동을 개발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군인신분이지만 지리 및 지질학 조사를 하면서 고고학유적에 대하나 기록을 남겼는데, 극동의 고고학자 1세대로 여겨진다(클류예프 2003).

아르세네니예프가 시호테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겪은 내용을 소설로 남겼다.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나중에 같은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나나이족의 사냥꾼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데르수 우잘라를 만나서 그의 도움 받은 이야기를 그의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는 이 내용을 일본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영화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자본을 지원하고 소련 배우가 출현했기에 소련영화로 알려져 있다

설 데르수우잘라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영어책이 아닌 노역한 것이다.

*영화 데르수우잘라는 쉽게 구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영화에서도 확인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