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마 강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부터 시작하는 큰 강으로, 이 강의 수원지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접하고 있다(사진 49, 그림 78). 강은 북서쪽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동해의 시토르마야 항구로 흐른다. 길이는 119km이다. 이 강의 왼쪽 지류가 세레브랸카, 브루스니치나야, 돌리나야 강이고, 오른쪽 지류는 스메호프카, 포로지스타야, 자파드나야 케마, 탈니코바야 강이다.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에 위치하며, 이 지역의 산은 산맥에서도 울퉁불퉁하고 높지 않은 곳으로 아주 많은 강이 흐르고 있다. 산의 높이는 1000~1400m로, 강의 하류역은 400~600m가량이다. 강의 하류에는 아주 넓고, 편평해서 사람 살기에 적합하다.
1907년에는 아르세네프는 타케미에서 살기에 적합한 곳은 강 하류에서부터 2.5베르스타(약 2.7km) 떨어진 곳이라고 하였다. 강 유역의 전 지역은 침엽수림이 많은데, 강의 상류는 툰드라 식물들로 덮여 있었다.
케마 강 유역에는 4개의 성이 확인되었는데, 동해의 시토르마야 항구로 흐르는 강의 상류에서부터 우스티 일모, 켐스코예 돌리노예, 켐스코예 스칼리스토예 , 캠스코예 모르스코예 성이 있다.
1. 우스티-일모 성곽
벨리카야 케마 마을에서 북쪽으로 17km 떨어진 탈니코마야 강 입구에서부터 서쪽으로 0.5km 떨어진 곳으로 케마강의 오른쪽 강가에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성은 아르세네프에 의해 1907년에 성의 평면도가 작성되었고, 1992년에 크바신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2001년에는 도굴꾼이 트렌치를 파고 금속탐지기로 작업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2002년에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대가 조사하였는데, 이때 정확한 평면도와 수혈을 조사하였다.
그림79. 1907년 아르세네프가 육안으로 작성한 우스티 일모 성곽의 위치 및 평면도
성은 높이 10m가량의 테라스에 위치하는데, 이 곳의 동쪽면은 현대도로가 거의 성벽이 있는 곳까지 놓여서 테라스를 잘라먹은 상태이다.
성의 형태와 성벽은 자연적 입지를 아주 잘 따르고 있는데, 남쪽과 동쪽은 테라스의 경사면이 아주 가파르기 때문에 성벽은 하나이고, 북쪽과 서쪽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이 없이 테라스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유적이 4개의 부채꼴 모양의 성벽과 해자가 있는데, 북서쪽의 모서리가 평행한다. 기본적으로 성벽은 폐쇄형으로 성의 평면형태가 거의 방형인데, 긴쪽의 길이가 50m이고, 평면적은 2500㎡이다.
그림 80. 우스티 일모 성의 평면도
성에는 문지가 동쪽과 서쪽에 서로 마주보고 2개 위치한다. 문의 너비는 1m, 깊이는 0.25~0.3m가량이다. 동쪽문으로 도로가 하나 지나가며,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두 번째 도로는 테라스에서부터 올라와서 북동쪽 모서리에 있다.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절개면과 0.5×0.7m 크기의 수혈이 하나 있다.
성의 내면은 서쪽으로 갈수록 2m가량 높아진다. 그 곳에서 많은 수혈 등이 확인되었는데, 대략 면적은 15~25㎡이다. 그 곳에서 토층을 조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알 수 있었다.
1. 부식토의 두께 0.1~0.15m
2. 암갈색 사양토 두께 0.3~0.4m, 문화층
3. 명갈색 사양토로 발해토기가 확인됨. 주춧돌
가장 안의 내 성벽은 폐쇄형으로, 큰 돌로 축조된 석벽이다. 하지만 이 돌의 크기는 각기 다른 것으로 10×20, 40×30, 50×30cm로 다양하다. 몇몇 장소에는 돌이 아주 많이 쌓여 있는 곳도 있다. 내성벽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는데, 북쪽벽은 0.3~0.5m, 동쪽은 0.9m, 너비는 5~7m 가량이다. 성벽의 정상부는 편평하고 너비는 1~1.5m이다.
외 성벽은 흙과 돌로 제작되었는데, 내 성벽과 내성벽에서 부터 첫 번째로 위치한 성벽 사이에는 깊이 0.5m의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성벽은 테라스를 두고 축조되었는데, 이 성벽의 높이는 0.3~0.6m로 일정하지 않다 세 번째 성벽의 너비는 2~4m, 네 번째 성벽의 너비는 7m이다.
*우스티 일모 성곽은 언덕형으로 평면형태는 방형에 가깝다. 내부에는 테라스, 내부성, 보루 등이 없고, 성벽의 구조물로써 치는 없지만 옹성이 설치된 문이 2개 있다. 소형으로, 취락 방어용으로 제작되었다. 성의 축조시기는 출토된 토기로 보아 발해시기이며, 10세기 말에서 12세기 초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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