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타이족은 누구와 맹약을 하든 다음과 같이 한다. 큼직한 토기 항아리에 술을 붙고 거기에 계약 당사자들의 피를 섞는다. 그들은 송곳으로 몸을 찌르거나 칼로 몸을 조금 베거나 하여 피를 뽑느다. 그리고 칼, 화살, 투부, 창을 항아리에 담그며 길게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계약 당사자들과 그들의 수행원들 가운데 요인들이 술과 피가 섞인 것을 마신다(헤로도투스 2009)’
번역서에 따라서 술은 포도주로도 해석되었다.
러시아학자들은 헤로도투스가 설명한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물을 솔로하유적에서 출토된 가로 세로 2.5cm의 황금제 치레걸이로 예를 든다. 솔로하 유적에서는 300여개의 작은 장식판이 출토되었는데, 피장자의 옷에 부착되었다고 본다(그림1).
황금치레걸이의 두 남성이 들고 있는 것은 뿔잔 1개이고, 술 혹은 어떤 음료일 것이다. 왼쪽남성이 차고 있는 것은 칼이 있지만, 주변에 다른 전쟁용 도구는 있지 않다. 두 사람은 머리스타일과 옷이 다르기 때문에 스키타이족과 다른 종족일 가능성이 많은데 먼가 협약이나 맹약을 하는 장면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장면에서 이야기한 토기는 솔로하 유적 출토품에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어떤 맹세를 위한 장면임은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무기들을 담근 채 기도 한 후, 술과 피를 섞어서 마신다는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다.
틀리기도 하지만, 맞는 것도 있다. 읽다가 보면,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림1. 솔로하 유적 출토, 1913년 베셀로프스키 발굴, 에르미타주 소장
참고문헌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네모꼴 나무방패를 살펴보다가 우리는 ‘솔로하’라고 하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빗에도 비슷한 유물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유물이 소장된 곳은 표트르 1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사람들은 표트르 대제라고 하는 러시아 차르의 겨울궁전인 에르미타주(Эрмитаж, Hermitage ‘에르미타시’라고 쓰는게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데, 필자가 계속 에르미타주라고 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이미 한국에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대로 번역하면 ‘표트르 대제 시베리아 수집품(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Великого, the Siberian collection of the Peter the Great )’ 이다. 현재 총 240점이 전해진다.
그는 1689년부터 재위했는데, 러시아 영토가 된 모든 곳의 민족 고대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715년에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표트르에게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황금 유물 10점을 바쳤다. 표트르는 이 유물의 중요성을 바로 알았고, 비슷한 유물을 수집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1718년의 날짜가 적힌 포고령에는 시베리아의 유물을 수집하고 출토품을 모으라고 강요했다. 특별포고령에 의해서 고대 유물을 숨기거나 녹이는 것을 매우 금지시켰다. 17세기 말경부터는 도굴로 엄청난 양의 황금유물이 황금을 얻기 위해서 녹여졌기 때문에 이를 금지시킨 것이다.
1715년~1718년에 시베리아에서 가가린이 수집한 금제품 240개가 보내졌다. 가가린은 농민들로부터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농민들은 고분을 도굴해서 그에게 팔았다.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봉분이 있는 무덤은 쉽게 눈에 띈다. 그리고 도굴되었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가 죽은 후 1727년에 이 수집품들은 러시아의 첫 번째 국립박물관인 쿤스트카메라(Кунсткамера, Kunstkamera)(그림1)에 기증되어 전시되었다. 그 뒤에 1859년에 제국 고고학 위원회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이송시켜 보관했다.
그림 1.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유물이 처음 보관된 쿤스트카메라, 1741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과학아카데미 건물이었던 쿤스트카메라의 모습을 동판화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현재 에르미타주에 보관되어 있다. Christian-Alber Wortmann작품. 47cm, 62.6cm
쿤스트카메라는 처음에는 매우 작게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매우 커졌다. 1714년에는 수백마리 물고기, 새, 뱀이 항아리에 보존되었고, 1698년부터 해부학에 관심을 가져서 기괴한 해부학 작품도 많다. 1716년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동물 등이 보관되었고, 1717년에는 동물 해부학표본, 식물과 나비 박제 등도 구입해서 전시했다. 식물동물표본 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와 도구도 모았다. 쿤스트카메라는 에르미타주와 매우 가까운데, 한번 가보시길 바란다. 필자가 들렀을때는 한국관도 있었는데, 주로 민속품 등이 전시되었다.
시베리아 콜렉션이라는 명칭은 19세기 후반의 스피친이라는 고고학자가 표트르 1세의 유품들을 정리했는데, 그 때 시베리아에서 온 골동품이 담긴 소포, 여러 편지와 목록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스피친이 이 유물들을 시베리아 콜렉션이라고 했고,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함께 붙여서 그를 기념했다.
쿤스트카메라에 유물이 있는 동안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인 흑해북안의 쿠르간 발굴유물도 함께 보관되었는데,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유물과 함께 에르미타주에 보관되었다. 그래서 에르미타주에 시베리아 유물 뿐만 아니라 흑해 북안 고분의 유물도 함께 있게 되었다.
표트르 1세가 남긴 편지 등에서 알아낸 것은 시베리아 수집품의 출토지역은 가가린이 총독으로 있던 토볼스크와 톰스크 외에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에 발굴품을 토대로 시베리아 콜렉션은 오비강, 이르티스 강, 알타이의 서쪽 지대와 현재 카자흐스탄 북부(시베리아 남부)라는 주장이 강한데, 이에 대한 반론도 크다고 한다.
어쨌든 시베리아 콜렉션을 두고 이견이 없는 것은 스키타이 문화권 혹은 스키타이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동물문양장식이라는 점이다.
그림 2.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3.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4.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5.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6.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7.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8.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참고문헌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말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말 9마리가 묻혔다. 7마리분의 마구가 확인되었는데 5마리는 착장된 채 였고, 2벌은 말 옆에서 확인되었다.
말을 부리는 데 기능과 관련된 마구 및 이를 뒷받침 하면서 장식을 하는데 담당한 굴레(말꾸미개는 이미 소개 했다. 그런데 말무덤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유물은 방패 였는데, 이 방패는 안장에 묶인 채 부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안장이 있었다는 이야기 인데, 이 유적에서는 안장을 덮은 안장꾸미개가 앞서 설명한 별명 ‘얼음공주’에서도 출토되었는데, 훨씬 화려하다. 펠트에 동물문양 장식의 아플리케를 덧붙인 정도이지만, 이 유적의 유물은 ‘치렁치렁’하게 장식했다.
말은 부장될 당시에 등이 위로 가고, 다리는 굽히고, 머리는 내린 자세로 매장되었다. 말꼬리는 땋아서 말총으로 처리되었다. 말머리와 두 전사의 머리는 같았는데, 동쪽 방향이었다. 그러나 말 부장공간을 덮은 돌의 무게와 일시적으로 무덤 내부가 녹으면서, 말과 관련된 도구들의 위치는 뒤엉킨 상태였다.
이 무덤에는 가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마구와 관련된 유물을 연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안장덮개는 두 장의 펠트를 맞대어 꿰맨 후 그 안에 잡초를 넣어 쿠션처럼 만들었다. 4장이 출토되었다. 말 안장을 구성한 가죽은 이미 없어졌지만, 안장 덮개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안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두꺼운 펠트로 덮혔고, 그 위에는 ‘메달’이라고 불리는 마름모형태의 장식을 덧붙였다. 안장의 장식하는 부분으로 생각하시면 된다.
안장덮개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62×56.5cm(그림 1-1)이고, 황색계통의 펠트로 제작되었다. 덮개의 상단은 꽃잎 4장이 있는 꽃으로 장식되었고, 사람 눈 모양의 안장장식 메달(그림 1-2)이 붙어 있다. 메달은 날개를 펼친 그리핀이 서로 대칭되는 방향(그림 1-2)으로 배치되었다.
물고기 모양의 펠트제 치레걸이는 여러 색의 펠트를 오려서 만들어 붙였다. 전체적인 모양은 물고기이지만, 여러 동물의 요소가 들어 있다. 눈은 둥글고 눈 안에 눈동자를 표현했다. 쉼표 모양의 코도 표현되었다. 눈 아래에는 4개의 부채꼴 모양의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는데, 아가미를 표현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양편에 각각 3개씩 표현되었으며 가장 중앙에는 도식화된 그리핀을 형상화 했을 가능성이 크다(그림 1-3).
왜냐하면 안장덮개는 모두 동물모양장식의 치레걸이가 붙어 있는데, 3점의 안장덮개는 물고기 모양이 붙어 있고, 1점은 늑대이다. 물고기모양의 치레걸이 중에 한 점에는 정확하게 중앙에 날개를 접고 있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어서, 나머지 2점의 물고기모양 치레걸이는 중앙에 도식화 된 부분이 그리핀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안장덮개의 메달모양은 그리핀 2마리가 서로 대칭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추상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안장덮개 복원도 1
두 번째 말 안장덮개는 꽃잎 모양 아플리케를 붙여서 제작한 펠트제 안장덮개(그림 2-1)이다. 안장덮개의 앞쪽 장식은 메달모양인데, ‘S’자모양으로 두 마리 그리핀이 대칭되게 서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2-3). 물고기 장식 4마리가 함께 부착되었다. 길이 80.5cm, 머리너비 17cm인데, 중앙에는 그리핀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다. 얼굴은 독수리이며, 귀가 달렸는데, 2마리가 한쌍이고, 4마리가 물고기 장식 중앙에 붙었고, 꼬리까지 표현되어 있다(그림 2-2).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안장덮개 복원도 2
안장덮개 가운데 안장의 앞이나 뒤에 메달이 달리지 않고 덮개만 2조각이 남아 있는 유물도 있다. 그 위에는 산악염소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그림 3), 큰 뿔, 꼬리와 턱수염이 표현되고, 날개가 표현되었다. 염소와 날개장식의 조합은 파지릭 유적의 2호 남성미라의 오른손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림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산악염소 아플리케 장식, 안장덮개 자체는 그림이 없었다.
메달(그림 4-3,4)과 안장덮개의 물고기모양 치레걸이(그림 4-1,2)로, 그리핀 장식이 표현된 유물도 확인되었다. 중앙에 4마리 그리핀이 붙어 있는데, 머리를 뒤쪽으로 향해서 날개방향으로 표현하고, 깃털을 아래로 처지게 표현했고, 꼬리와 발톱이 표현되었다. 메달에도 똑같은 표현의 그리핀이 확인되었다.
모든 메달과 치레걸이의 가장자리는 감침질로 두가지 색 실로, 한 땀씩 돌려서 마감되었다(그림 4-4).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45~50세 남성의 무덤을 다시 보자.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통나무관, 오른쪽이 45~50세 남성전사이고, 오늘 설명하는 바지 입은 주인공이다.
남성의 무덤에는 바지와 신발이 신었다. 양모로 만든 붉은색 바지인데, 색은 많이 바랬다. 옆에 있는 소년 전사의 무덤에서도 바지의 흔적은 있으나 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역시 붉은 색이었다고 전한다.
바지는 모두 6조각의 천을 기워서 만든 것이다(그림2).
4조각은 긴네모꼴인데, 발목 가까이는 사다리꼴로 접혔으며, 다리의 앞판과 뒷판을 구성한다. 1조각은 삼각형에 가깝고, 나머지 한 조각도 긴네모꼴이지만, 다리를 구성하는 판이 아니라 삼각형은 허리의 앞쪽(그림 2-a, 4, 그림 3-b)을 대었고, 긴 네모꼴(그림 2-5)은 접어서 다리 사이에 부착되었다. 바지의 다리를 이루는 긴 네모판은 너비 27~28cm, 길이는 102~104cm가량이다.
바지의 다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긴 네모꼴이지만, 발목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스타일이다. 안쪽으로 접은 부분의 길이는 0.7~0.8cm로, 아랫단의 너비가 20.5~21.5cm가량이다. 바지의 입구(허리부분)은 바깥으로 접어서 감침질 되었다.
앞판의 허리부위에 삼각형을 덧댄 스타일(그림 3-b)은 또 다른 남성 무사의 무덤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1호와 3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다. 삼각형 판을 댐으로써 낸 효과는?
허리 사이즈를 늘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혹시 살이 쪄서 바지를 수선했던 건 아닐까? 어쨌든 이 바지는 허리를 늘인 흔적(그림 3-b)이 있다.
바지의 소재는 양모를 짠 것인데, 천을 바이어스 방향으로 이용했다.
천을 바이어스(사선) 방향으로 이용하면, 신축성이 좋아진다. 바지가 헐렁해서 신축성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천을 좀 더 오랫동안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축성이 필요한 옷은 주로 몸에 달라 붙는 옷에 많이 필요하다. 허리를 늘린 이 바지와 수선흔 흔적,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바지들이 수선된 흔적 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의복은 경제적인 문제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도 자세히 살펴보면 씨실과 날실 방향으로 천을 재단해서 옷을 만든 것이 있고, 바이어스 방향으로 이용한 옷도 있다. 주로 여성의 스커트 중 플레어 스커트에서 많이 확인된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입고 다니던 교복이 딱 플레어 스커트였는데, 바이어스 방향으로 재단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과목 중 세상에 쓸모없는 과목이 가정이었다고 생각했는데...갑자기 미안해진다.)
허리 사이즈 조절은 끈으로 조절했는데, 소년관에서 바지의 흔적과 함께 끈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사진을 보시면 뭔가 어정쩡하지 않은가? 예전에 일명 ‘똥싼바지’가 유행 했었는데,...비슷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품이 커서이기도 하지만 밑위보다 다리사이에서부터 발목까지의 길이가 짧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다리가 짧을까?
타이즈를 신었기 때문에 바지의 다리 길이가 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1에서도 바지의 흔적은 발목까지 그려져 있지 않다. 이 무덤에는 타이즈가 남아 있지 않지만, 또 다른 남성 무덤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전사는 바지를 입고 타이즈를 신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45~50세 남성전사의 붉은 바지.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45~50세 남성전사의 붉은 바지 2, 그림 2와 같은 유물, b가 앞면으로, 삼각형 양모천을 덧대서 허리를 늘렸다는 것이 잘 보인다. 그림 2-a와 같은 방향.
참고문헌
폴로시막, 바르코바 2005,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시막, 바르코바, 2005, 기원전 4~3세기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 의복과 직조물)
폴로시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16세 가량의 소년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소년과 장년기의 남성이 어떤 물건과 함께 부장되었는지 살펴 보았다.
이 유물은 매우 이데올로기적 유물이다. 활통 혹은 화살통집의 부속품인데, 거기에 꼭 동물문양장식을 그려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혹은 활통의 덮개가 필요했을까.
그래서인지, 러시아학자들은 이 유물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활은 스키타이 인들에게 천상의 상징이라고 죽은 사람이 신의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활과 함께 그렸다고 한다(사보스티나 1983). 이런 활통에 화려한 장식을 새기거나 덮개를 씌운 것은 천상세계에서 신과 함께 있음을 표현한 것이나, 혹은 살아 있는 경우는 왕의 앞에 있는 경우를 표현한다고 한다(폴로시막 1994).
스키타이 인들이 매우 용맹하고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헤로도투스는 묘사했지만, 사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활통의 덮개를 열지 않는 시간을 기대한 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활통, 화살통 출토 위치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관에서 출토된 활집 혹은 화살통 장식
그런데 그 가운데 소년의 관에서 출토된 동문문양이 그려진 나무막대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소년의 왼쪽 엉덩이 쪽에는 길이가 64cm인 나무로 만든 장식(그림 2)이 출토되었다. 구멍이 뚫려 있음으로 어딘가에 달기 위한 장식성이 강한 유물이다. 멧돼지 2마리, 표범 2마리와 함께 가장 앞쪽에는 그리핀 머리(그림 2-1)만 조각되었다. 그리핀 머리 아래로 멧돼지 한 마리를 두 마리의 표범이 사냥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마지막의 표범 엉덩이에는 멧돼지가 머리를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있다(그림 2-2). 그리핀은 보고서에는 독수리라고 되어 있지만, 귀를 둥글게 표현했는데(그림 2-1), 표범의 귀와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어서 독수리와 표범이 합체한 단순한 독수리가 아닌 그리핀이다. 표범과 멧돼지는 이빨까지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통에 부착되는 부분은 일직선(그림 2-3)인데, 거의 동일한 간격으로 26개의 구멍이 있고, 동물조각이 없는 하단에는 짧은 면에도 구멍이 있다. 동물문양 나무막대 옆에는 노끈이 달린 술 장식과 7개의 골제 화살촉, 활의 부속과 활대 등이 확인되었다.
시베리아 무기를 오랫동안 연구한 솔로비예프(2003)는 나무판이 활집을 지지하는 판이 될 수도 있고, 화살통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그림 3. 솔로비예프가 복원한 화살통집 1, 파지릭 유적 및 알타이 고원의 예로 무덤의 예를 참고로 복원
그림 4. 솔로비예프가 복원한 또 다른 활통과 화살통집, 오비강 유역의 유물을 참고로 복원
그런데 소년관 옆의 45~50세의 전사 관에서는 동물문양이 그려진 장식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나무 목판 위로 왼쪽 어깨에서 두 조각(붉은색과 녹색) 고깔형태의 펠트조각이 출토되었다. 여러 유적에서는 이 고깔형태의 펠트조각과 노끈 등이 활통 뚜껑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출토되었다. 앞서서 소년관과 이 남성관에서 유일하게 같은 형태의 유물인 매듭도 화살통집에 달렸던 매듭인데, 활통도 고깔형태의 뚜껑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5~50세 중년 남성의 관에서 출토된 목판의 길이는 63.5cm, 활집의 길이는 66~67cm으로 추정되며, 활의 전체 길이는 90cm가량이다(그림 5).
그림 5. 아크 알라하 1 유적의 1호분, 장년 남성의 관에서 출토된 활집복원도, 매듭과 가죽끈이 달려 있다. 앞에서 설명한 동물문양이 그려진 네모판의 장식을 활집통의 부속품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벨트 장식에 동물문양장식은 많은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 복원도도 여러 정황으로 복원한 것임으로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깔모양의 덮개를 이해하는 용도로 이해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솔로비예프 2003, Соловьёв А.И. 2003 : Оружие и доспехи: Сибирское вооружение: от каменного века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3. 224 с.(솔로비예프 2003, 석기시대에서 중세시대까지 시베리아의 무기)
Савостина Е.А. К символике изображений лука на Босфоре // СА. 1983. №4. С. 45-56.(사보스티나 1983, 보스포레에 그려진 활 표현에 대한 상징성에 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