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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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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터는 우코크 고원을 떠나서 파지릭 계곡의 스키타이 무덤 유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이라고 붙인다.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파지릭 유적의 무덤 덕분이다.

 

알타이 산맥에는 특히 우슬라Урсула, Ursula 강의 왼쪽 지류인 카툰Катуни, Katun 강 유역과 아르구트Аргут, Argut, 추이Чуи, Chui 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서 산악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주 많은 고분이 존재한다. 파지릭 지역은 투바 자치구와 접해 있는 알타이 동부의 추리시만Чулышман, Chulyshman 강을 끼고 있는 계곡이다.

 

파지릭 유적은 우코크 고원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110km 가량 떨어진 곳에 파지릭계곡이 위치한다(그림2). 해발고도 1400m가량이다. 2500m 였던 우코크 고원보다는 훨씬 낮다. 파지릭 계곡에는 영구동토층이 연속분포하는 구역의 외부에 대형 고분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 데 사용된 수백그루의 나무는 낙엽종(자작나무)이 주를 이루었고 가문비나무도 약간 있었다. 그런데 해발 1500m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고, 인접한 바시카우스(Башкаус)강과 추리시만(Чулышман)강에서 자작나무가 자란다(그림2).

자작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덤이 발견될 당시에 봉분의 상부가 내려 앉아서 봉분의 가장 꼭대기는 움푹들어가거나 편평하다. 현재 파지릭 고분의 주변에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가문비 나무이다. 

 

 

 

그림 1. 위의 사진은  파지릭 계곡의 무덤 전경(발굴당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1호를 발굴하는 장면이다.  위의 사진은 정확하게 몇 호를 찍은 사진인지는 표기되지 않았다. 루덴코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호부터이다. 1호는 1929년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는데, 이 사진은 루덴코가 찍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이 1929년에 찍힌 것인지 1947년에 2호 발굴당시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1호를 찍은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1호라고 표시되어 있다. 요즘같으면 무덤의 돌을 다 걷어내었겠으나, 어쨋든 무덤 최상부에서 무덤방으로 곧장 들어가서 발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아주 춥다. 인간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알타이 산을 이루는 굽이굽이 계곡에는 초원지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산악초원(그림 1-1)이라고 한다. 일종의 높은 곳에 있는 분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특히 알타이 산맥의 초목에는 많은 양의 염분이 함유되어 방목해서 키우는 동물의 성장과 발달에 유리하다.

동물은 염분이 없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 

 

 

 

 

그림 2. 파지릭 고분의 위치(×). 나뭇잎 그림은 파지릭 유적에 사용된 자작나무를 구해온 바시카우스 강과 추리시만 강의 위치이다. 붉은색 점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보시면 파지릭 고분이 있는 곳에 사진이 있는데, 해발 2300m이상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이다.

 

 

이 계곡의 고분은 모두 40여기 정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대형 고분 5기에는 1~5호의 번호를 붙였다. 북쪽의 2기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 중앙에는 1호와 2호가 위치한다. 그 외에 번호가 붙은 것은 9기로 6~14호까지 번호 있는 무덤이 있다. 번호를 매기지 않은 고분은 외형은 고분이지만 제일 상층에 돌이 돌아가는 것 외에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1924년에 알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파지 않았다. 이 외에도 알타이 산맥에는 봉분(표토층 위로 올라온 무덤상부구조)는 있으나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림 2. 파지릭계곡의 무덤분포도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계속 포스팅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앞에서 소개 해 드린 2개의 무덤과는 달리 소년의 무덤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미세하게 따지고 들면 다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는 차이점을 추려보도록 하자.

 

우선 앞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일명 얼음공주),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남성 2인)무덤에서는 나무로 짠 무덤방에 시신을 바로 안치하지 않고, 그 안에 관을 따로 두었다. 관은 큰 통나무를 파서 만든 통나무관이다. 그런데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무덤에는 무덤방에 바로 소년이 안치되었다. 이 무덤에는 통나무관은 없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말이 9마리나 들어가 있고, 그 말을 장식하던 굴레가 7벌 확인되었다. 굴레를 장식하던 주요 동물문양장식이 그리핀이었기 때문에 그리핀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설명하는 소년의 무덤에는 그리핀은 있었을까?

(뭔가 있으니깐 물어 보는 거 겠지요?)

 

소년의 무덤에는 완전하게 남은 그리핀은 없고, 이미 망가졌지만 있었다.

말이 한 마리 있었지만, 굴레장식은 없었고 입에 물린 재갈만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한점은 소개한 소년의 고깔모자 장식 중에서 정수리 위에 달던 동물문양장식 말고 소년의 머리 바로 위에서 확인된 그리핀 날개이다. 머리부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깔모자에서도 낮은 부분에 부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8세 소년, 2번이 고깔모자 장식, 금제품(그림 2), 6번-투부(그림 3)의 위치,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8세 소년의 머리장식 중 그리핀 날개, 금제

 

 

한 점이 더 있다. 그 한점은 소년의 무릎 주변에서 모피의 조각 아래서 나온 투부(전쟁용 도끼)에 부착되었다. 투부의 전체 길이는 12.5cm가량이다. 앞서서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출토품이 65cm였기 때문에 이 유물도 소년의 체격에 맞게 작게 만든 것이다.

투부는 허리띠에 달아서 착용했을 것이다. 나무 손잡이와 청동제 날부분은 T자 모양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가죽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 가죽의 끝에는 고리를 만들었고, 고리 끝에 그리핀 머리, 좀 더 정확하게 부리가 달려 있다. 멧돼지 송곳니로 제작되었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 유적의 2호분 8세 소년의 투부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소년의 부장품, 번호 없는 유물이 멧돼지 송곳니로 제작된 그리핀의 부리. 앞에 포스팅에서 번호 없는 유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했는데, 투부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었다. 정정한다.

 

 

 

소년도 그리핀을 고깔모자와 투부에 달고 무덤속에서 영원한 잠을 청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 속에 있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이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2구의 남성이 확인되었다. 1명은 45~50세 정도의 남성이었고, 다른 한명은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2호분의 8세 소년 보다는 나이가 많은 남성의 무덤이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2호분이 먼저 설명한 1호분 좀 더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어디서 그럴 정황이 드러날까? 그냥 2호분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앞에서 2호분 적석(돌을 쌓은 모습)이 처음 드러난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 (앞선 포스팅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ㅋㅋ)

거기에 힌트가 있다.

포스팅을 보시면 오른쪽 아래에 1호분의 무덤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적석이 놓인 모양이 2호분이 1호분을 덮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설명하는 2호분이 더 나중에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은 1호분과 친족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비교적 높은 계급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8세 소년이었지만, 어른 무덤에 부장되는 것은 대부분 있었다. 말은 1마리만 부장되었으나 어찌되었던 있었고, 동검, 투부, 화살촉 등 소년의 크기로 축소 시켜서 부장한 점도 이를 반증한다. 1호분의 남성무덤과의 관련성은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 목걸이, 귀걸이 뿐만 아니라 동물문양버클장식도 이를 대변한다. 동물문양버클장식은 부서져서 반만 남아 있지만 꼬리가 긴 동물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4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에 매달던 호랑이 장식품(4,5,6), 1,7-말의 재갈멈치, 2,3-말머리 장식(당호). 목제품.

 

 

그림 2. 에르미타주 소장, 시베리아 콜렉션, 표범. 펜던트의 버클, 금제품

 

 

 

그림 3. 영국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제 버클, 그리핀(우)과 호랑이(좌)의 싸우는 장면.

 

 

현재 설명하고 있는 유적의 유물은 아니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 형상화 된 꼬리가 긴 동물은 호랑이(그림1) 혹은 표범(그림 2), 그리핀이 있다. 꼬리가 긴 그리핀(그림 3)은 몸이 새가 아닌 육식동물의 몸통에 새 날개가 부착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허리띠 버클 장식도 그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의 스키타이문화권에서도 알타이 지역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은 8세 소년의 무덤이다. 고깔모자, 토기, 금제 귀걸이, 청동 목걸이, 투부(전투용도끼), 모피, 칼집과 청동칼, 화살촉, 목기등이 소년과 함께 묻혔다.

그 중 목기는 남아있지는 않지만 양뼈조각이 있었고, 다른 유적들의 예로 보아서 목기 위에 고기덩어리가 올려진 장면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미라, 일명 얼음공주의 무덤에서도 뿔, 나무, 흙으로 만든 그릇이 확인되었다.

 

2020/01/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미라'의 무덤] -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투르크-몽골 계통의 민족들에게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특별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그릇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담았다고 한다. 야쿠트인들은 신에게 거대한 가죽조끼, 목제 잔, 우유를 담..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이 유적에는 없지만, 이 유적이 속한 파지릭 문화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솥이다. 바닥에는 솥을 지지하기 위한 높임 다리가 있으며, 양 쪽에는 손잡이가 있고 자작나무 껍질이 감긴 채로 확인되었다. 안에는 돌이 들어 있었다. 함께 출토된 막대기가 6개(1.2m 가량) 있었다.

 

 

이 솥과 막대기는 같은 공간에서 출토되어서 세트이다.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솥은 금이 가 있고, 솥 안에는 탄화된 대마씨가 발견되었다. 금이 간 이유는 뜨거운 돌의 열기에 의했을 가능성이 많고, 대마씨가 탄화된 것도 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생각이 맞다면, 청동솥과 막대기는 대마씨에 나오는 연기 흡입용이다.

6개의 막대기를 묶고 그 위를 펠트로 씌우면 일종의 텐트가 된다. 그 텐트 안에서 청동솥에 달군 돌을 넣고, 대마씨앗을 뿌려서 그 향을 맡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탄화된 대마씨가 가득 들어간 가죽주머니도 같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스키타이 부족에 대한 내용은 러시아학계에서는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이 유물이 발굴된 후에 약간 시각이 바뀌었는데, 그가 설명한 스키타이 인의 정화의식에 대한 내용 중에 이 부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헤로도투스가 74~75절에 썼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위의 유물과 일치해서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마지막에 스키타이 사람들의 정화의식을 그리스의 증기욕과 관련시켰다(그리스, 로마 사회의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을 발굴한 루덴코(1953)는 직접 반박했다. 헤로도투스의 내용과 이 유물이 연기흡입과 관련된 건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스의 목욕문화와는 헤로도투스의 착각이라고.

청동솥 위에 뿌려진 대마씨 때문에 연기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 증기욕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유물은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되었고, 루덴코는 그 유적의 2호분을 직접발굴한 사람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 나온 청동솥과 막대기 6개는 용도는 명료해진 것도 있지만 문제가 복잡해지게 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와 인접한 흑해 북안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는데, 그가 설명한 부분이 알타이 산맥의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청동솥과 막대기, 가죽주머니 안의 탄화된 대마씨는 의료용일지 모른다. 지금도 마약은 의료용으로 사용된다. 스키타이 인들은 죽은 사람의 내장을 걷어내고 미라를 만들던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미라가 2구 확인되었다.

 

 

그림1.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높이 13.8cm, 동최대경 9.8cm), 청동솥(2)과 막대기(3), 손잡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키르기스스탄의 송쿨. 해발 3000m, 7월 모습

 

스키타이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로 헤로도투스를 꼽는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실제로 보거나 방문해서 알아낸 기록이라기 보다는 전해들은 내용이 많고, 설화적인 내용이 많다. 헤로도투스 자신도 00족에게 들었다고 많이 밝히고 있다. ‘외눈박이 부족’이라던지,....엄격한 기준으로 보자면 말도 안되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남아서 신화화 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의 역사기술이 서양을 중심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인 그 책이 아직까지 bible처럼 여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스키타이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또 다른 이가 히포크라테스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히포크라테스는 실제로 스키타이 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의 저서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이 춥고 건조한 기후에 따라서 외모와 출생률에 대한 기록을 서술했다.

 

이런 구절이 있는데 ‘저런 피지컬이면 출생력은 뛰어나지 않을 것 같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28장’) ‘말을 자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종양이나 관절염, 통풍 등으로 고생을 심하게 하기 때문에 성적인 즐거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성적 능력을 상실하는 문제 때문에 그들은 항상 바지를 착용했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30장).‘스키타이 인들은 상위로 올라갈수록 내시가 많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29장)’

 

이 기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점은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육체적 조건, 의복 및 고위 계급의 특징도 그리스와는 매우 달랐다. 히포크라테스가 스키타이 인들을 언급한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면 그리스 사회일 수 있다.

특히 ‘스키타이 인들은 상위로 올라갈수록 내시가 많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히포크라테스)가 속한 사회와 달랐기 때문에 이런 구절을 쓸 수 있었다.

 

필자는 ‘내시가 많다’라는 말을 종교를 직업으로 한 사람을 일컬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종교관련인이 결혼하지 않은 사례는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을 들 수 있다. 단인장이 드문사회였으나 혼자 묻혔다면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이 샤먼이면서 고위층인사였다는 점은 상위층이 가질 수 있는 목걸이나 실크 블라우스, 높은 머리 장식등으로 알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언급한 스키타이 인들의 낮은 가임율은 환경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고원지대의 환경은 생물학적 가임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성관계 가능 기간을 포함한 모든 성장을 늦춘다고 한다(코마로바 1991).

 

필자가 해발 3000m의 송쿨이라는 곳에서 말을 작년에 한 시간 정도 타 본적이 있다. 재미는 있었는데, 점심 먹고 바로 뻗었다. 한 여름이었으나 낮에도 겨울옷을 입어야 했고, 밤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확실히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지금 계속 이야기 해 드리고 있는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아랄하 1유적이 있는 우코크 고원은 2500m정도 되는 곳이다. 거기도 비슷하다.

 

현재와 같이 모든 정보가 누구의 것이 아닌 사회에서도 서로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마당에 당시에 서로 다른 이들에 대한 충격은 아마 상당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도 그런 충격속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헤로도투스처럼 외눈박이 부족 등의 표현은 없다. 필자는 ‘외눈박이 부족’이라는 구절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코마로바 1991, Комарова О.Д. Демографические аспекты этнической экологии // Этническая экология. Теория и практика. М.: Наука, 1991. С. 44-77.(코마로바 1991, 민족생태학에서 본 인구학적인 측면)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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