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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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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알타이 산에서 파지릭계곡에 위치한 파지릭유적의 무덤 중에서 2호를 집중살피고 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문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좀 더 좁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문화가운데서도 알타이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유적이다. 2500년 전 유적인데, 이때 동아시아에서 알려진 문화는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막바지, 한국도 현재 연구된 바로는 청동기시대이다.

 

어제 2호분에서 얼음을 처음 걷어낸 무덤방의 내부를 잠시 공개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무덤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말의 매장된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우코크 고원의 유적을 예로 들어서...

 

2호분은 다른 유적 혹은 이 유적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말이 매장된 위치가 무덤 구덩이에서 매우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포스팅에서 무덤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0/03/1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 2500년 전 알타이 산 무덤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2500년 전 알타이 산 무덤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eastsearoad.tistory.com

 

말 무덤이 확인된 곳은 무덤의 표토층에서 0.7m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말은 세 마리가 매장되었고 향나무와 낙엽송의 가지로 덮은 채로 확인되었다. 말을 묻은 후, 무덤의 가장 윗부분은 적은 양의 흙과 함께 대량의 통나무와 큰 돌로 채워졌다.

 

특히 2호분은 1호분과 함께 무덤방의 위쪽으로 통나무가 9층이 높여 있었고, 말을 매장한 후에 2층을 더 쌓아 올렸다. 통나무의 수는 모두 240개였다. 통나무의 길이는 6.5~6.9m로 무덤구덩이의 크기보다 작아서 8개의 통나무를 동서방향으로 2층 놓아서 마무리 했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흙은 구덩이를 파낼 때 사용했던 토양으로 채워져 있으며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흙 위에는 돌을 쌓았다. 붉은 석회암 사암으로 계곡 경사면에서 확인되는 돌이다. 화강암도 파지릭계곡의 경사면에서 수집되는 것이다.

무덤구덩이는 보통 무덤 봉분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파지릭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3호분과 4호분이 그렇다.

 

통나무로 만든 무덤방에는 대형 통나무를 파서 만든 통나무관이 있다. 2호분에는 길이가 4.2m, 너비가 87~95cm, 두께는 72cm가량의 통나무관이 1개 확인되었다.(남녀 미라가 확인되지만, 관은 1개이다)

통나무 관의 외부는 매끈하지만, 내부는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배닥은 편평하고, 양쪽 끝에는 한 쌍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통나무관을 옮길 때 두꺼운 밧줄을 끼워서 옮겼을 가능성이 있고, 운반할 때도 사용했을 것이다.  통나무 관의 측벽 두께는 3~4cm, 바닥은 9~13cm, 양쪽 끝벽은 25~30cm인데, 두향쪽이 넓다.

 

관의 두껑은 낙엽송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2호분은 거의 파손되어서 잘 알 수 없다(그림 4). 1호분의 것을 참고로 하면(그림 1),  높이는 22~30cm이고, 두께는 3~4cm에 불과하며 좀 더 크다. 관보다 훨씬 가벼우며 전체적으로 아치형모양이다. 덮개의 크기는 관 보다는 약간 커서 하부의 관을 완전히 덮도록 만들어졌다.

 

그림 1. 2호분의 통나무관 상태는 좋지 않아서, 현재 남아 있는 통나무관은 1호관이다. 에르미타주에 보관 중이다. 길이 3.71 m, 너비 65-78cm, 높이 58-60cm이다. 

 

2호분에서 확인된 통나무관의 가장자리 측면에는 사슴모양의 아플리케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화려한 뿔로 보아서 북쪽 사슴, 즉 순록이다. 관의 양쪽 측면에 아주 작은 못으로 시계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재밌는 점은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삼격형 구멍이 뚫려 있다. 무덤방의 바닥은 두꺼운 검은색 펠트로 덮여 있었다.

 

그림 2. 2호분의 통나무관 측면에 부착되었던 사슴(순록)모양 아플리케장식(흑백과 같은 유물)

 

그림 3. 야외에서 유물 수습해서 보존처리 하는 장면(1), 하단의 그림은 5호분에서 확인된 펠트를 복원하는 중이다. 1948년.

 

 

그림 4는 무덤방의 내부를 공개한 것이다. 통나무관의 위치 뿐만 아니라 각종 유물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다. 번호는 유물의 위치이고, 유물의 종류는 아래에 표시해놓았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림4. 파지릭 2호분의 무덤내부. 얼음층 아래를 걷어낸 후 처음 모습.

 

1.통나무관 및 그 의 부자제, 2-사슴가죽조각, 3-첫 번째 연기흡입용텐트 막대기, 4-두번째 연기흡입용 텐트의 막대기, 5-남성미라의 시신 일부, 6-여성시신의 일부, 7-여성신발, 8-여성 머리장식 일부, 9-수닭장식의 붙은 여성머리장식, 10-9번 머리장신에 붙어 있던 검은색 모피의 일부, 11-목걸이 일부, 12-금제, 귀걸이에 달던 펜던트, 13-허리띠 일부, 14-은제 허리띠 버클, 15-은제, 말모양 치레걸이, 16-말모양 치레걸이로 벨트, 17-은제 거울이 담긴 가죽주머니, 18-청동거울이 담긴 모피주머니, 19-고양이장식이 있는 모피 주머니, 20-대마씨가 담긴 가죽 주머니, 21-그리핀 부리모양의 사슴머리장식, 22-같은 장식인데, 약간 모양이 다른 것, 23,24-목제로 제작된 그리핀 머리, 25-목제 사슴머리, 26-계단모양의 목제뚜껑, 27-목침, 28-목침을 담는 통, 29-액체용기를 담는 토기편, 30-나무잔에 달렸던 뿔 손잡이, 31-양의 뿔, 32-하프(악기)일부, 33-철제 칼, 34-목제 칼, 35-뿔로 만든 화살촉, 36-뿔 망치, 37-수술이 달린 양모로 짠 수건, 38-여성용 타이즈, 39-남성용 타이즈, 40-남성용 옷(일종의 가운), 41-여성용 옷, 42-구리제 도장모양의 장신구, 43-소매가 있는 여성용 의복, 44-담비제 모피, 45-검은색 말(종마) 모피코트, 46- 붉은색 모피 옷, 47-갈색 모피 가죽에 붙었던 구슬장식, 48-붉고 갈색인 천으로 만든 옷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1940년대에 발굴되었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무덤을 흙과 돌로 채운 공간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의례와 관련된 부서진 토기 등은 종종 다른 문화에서도 출토된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구덩이를 발굴하는 동안 내내 뭔가를 기대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무덤방 바깥에는 주로 말이 매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파지릭 유적 보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코크 고원에서 보았다.

 

그런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흥미로운 것이 당시에 무덤을 축조할 때 사용했던 도구 들이 무덤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무덤방 위에서 나무로 만든 삽도 있었다.

2호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 부근만 아니라 무덤구덩이 여러 곳에서 목제 쐐기(그림 1)와 망치(그림 2)가 발견되었다. 나무쐐기(그림1)는 길이가 30~73cm가량으로, 머리부분은 타원형이었을 테지만 도끼로 내려쳐서 끝은 변형되었고, 끝의 뾰족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호에서는 나무망치(그림2)는 낙엽수림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부분이 이용되기도 했다. 전체길이는 46~70cm이고, 손잡이의 직경은 12cm, 손잡이 길이는 25cm가량이다. 매우 무겁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흔적이 타격흔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유물은 특히 2호분에서 대량의 나무쇄기와 망치가 발견되었다. 2호분에는 자갈과 흙을 섞어서 무덤구덩이를 충전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3. 4호분과 무덤을 채운 흙이 모래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그림3.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의 자작나무 무덤방, 왼쪽은 발굴되었을 당시를 설명하고, 오른쪽은 원래 무덤이 축조되었을 당시를 복원한 모습이다.

 

2호의 무덤구조 중에 다른 호수의 무덤과 다른 점은 가장 아래 바닥이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아래에 돌을 깨서 두께 10cm정도로 깔고 그 위에 검은 흙으로 덮고(5cm)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2호는 이중 나무방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다. 무덤방의 상부는 가장 위 무덤방 위에는 많은 자작나무로 채웠고, 외부 무덤방 천장은 두터운 자작나무로 덮은 다음 그 안에는 자작나무껍질을 깔고, 마지막으로 관목(Potentilla dasiphora fruticosa L. Rybd.)으로 덮었다.

 

안의 무덤방은 높이 1.53m, 평면형태는 3.65×4.92m이다. 외부의 무덤방은 높이 2.1m, 평면형태는 4.15×5.7m이다. 내부무덤방의 바닥은 나무판으로 제작되었는데 두께 5~6cm가량 너비 12~24cm의 17개로 구성되었다. 무덤방의 가장자리에는 가로 8개(북과 남쪽), 세로 7개(동과 서쪽)로 짜여있고, 천장은 20개로 구성되었다. 외부 무덤방에는 천장은 28개의 통나무이고, 벽은 남쪽과 북쪽은 10개의 통나무로 짜여있다. 동과 서쪽의 개수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림 4. 파지릭 유적의 2호분 천장을 열고 본 무덤내부. 유물을 아직 수습하지 않은 상태.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파지릭유적은 2500년 전 혹은 보다 약간 더 오래된 시간에 만들어진 무덤이 주요한 장소이다. 이 유적은 좁게는 파지릭문화에 속하고, 넓게는 스키타이 문화이다. 파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권)에서 알타이 지역에 있던 무덤을 중심으로  밝혀졌다. 앞서 살펴보았던 얼음공주로 유명한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도 이 문화의 유적이다.

 

파지릭 유적은 1929년 1호를 그랴즈노프가 발굴하기 시작해서, 1947~1949년에 발굴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각 유적에 대한 리포트가 나온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및 저서가 나오지 않고, 유적발굴이 곧 자신의 저작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자의 형태는 중국과 러시아 등 광대한 범위의 국가에서는 약간의 변명처럼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면 5000~4500년 전 사이에 유적이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되었다면 그 자체로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2~5호의 파지릭 유적은 대부분 1953년에 발표된 책에 기술된 내용이다. 그래서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지만,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어서, ‘파지릭문화’를 규정하려 했다.

 

예를 들면 파지릭 유적의 무덤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루덴코는 전체적으로 남들과 다른 고분을 ‘콕’ 찝어서 특히 설명을 많이 한다.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본 평면형태는 1~4호의 대형 고분에는 동쪽으로 돌이 길게 배치되어 이어지지만 5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앞의 4개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5호 무덤 주변에는 평면형태가 고리모양인 적석구조물이 확인된다(그림 1). 5호분의 적석 범위는 재는 곳의 위치에 따라서 5~7m이다. 남쪽에는 봉분에 붙어서 직경 3.5~3.7m의 것이 2개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2.5~3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평면형태. 다른 무덤의 평면 모습은 1953년 책에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2호와 5호를 중심으로 책에 기술되어 있다.

 

2호분을 비롯해서 가장 크기가 작은 4호분을 제외하고는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51~55㎡이다. 4호무덤구덩이는 30㎡이다. 깊이는 표토층에서부터 4m정도이다.

2호의 무덤구덩이의 평면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가 바닥보다는 약간 크다.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발굴모습, 1-무덤의 최상부를 절개해서 파내려가는 장면, 2-무덤구덩이의 입구모습. 1947년 발굴당시의 모습.

 

파지릭 유적에서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보이지 않던 유물이 발견되는데, 바로 무덤구덩이를 발굴해 내려가면서 확인되는 삽, 말뚝과 망치들이다. 이는 그 때 당시에 스키타이 인들이 무덤을 파는 도구로 생각된다.

특히 2호분에서는 무덤구덩이의 북쪽에 있는 무덤방 위에서 발견되었다. 2호분에서 출토된 목제 삽은 두 점의 손잡이 길이가 다르다. 115cm(그림 3-b), 127cm(그림 3-c)이고, 삽의 작업면은 길이 35~38cm, 너비는 약 12cm이다.

 

 

 

 

그림 3. a-3분에서 출토된 나무망치, b,c-2호분에서 출토된 나무 삽. 축척1/9

 

혹시 이 유물을 보고 삽이 아닐꺼라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삽은 삼각형의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삽이 맞다.

손잡이에 아무런 고리가 없지만, 이런 모양의 삽은 현재 러시아에서 사용된다.

물론 삽의 앞부분은 다르다.

삽의 크기는 신체에 비례한다. 러시아 삽은 자루가 매우 길고 단면이 두꺼워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유학당시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러시아와 공동발굴을 했었는데 첫 해가 지나자 한국사람들은 한국삽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2호분의 삽의 자루가 다른 것도 사용하다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고,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의 삽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고고학자는 부러진 것을 표기할 때 사용하다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원래 그 길이었는지를 관찰해서 적어둔다. 루덴코도 나름 예리한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원래 길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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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파지릭계곡에는 크고 작은 고분(봉분이 있는 무덤)이 40여기 정도 존재한다. 무덤의 최상부에 해당하는 봉분은 가장 위는 돌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하부에는 흙과 돌로 채워졌다. 가장 높은 부분은 발굴하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데,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로 두른 후 그 안을 다시 돌로 채운 형태이다.

어제 살펴본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무덤 하부에 형성된 영구동토층이라고 부르는 렌즈모양의 얼음창고와 상부에 쌓인 돌의 범위가 거의 일치했다.

 

40여기의 무덤 가운데서 1~5호가 가장 대형으로 계곡의 입구(남쪽) 쪽에는 5호가 위치했고. 가장 북쪽에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가 위치했다.

1호는 그랴즈노프가 1929년에 발굴을 처음 시작했고, 2호는 루덴코가 1947~1948년, 3호와 4호는 1948년, 5호는 1949년에 발굴했다. 소형고분 6~8호는 같은 해에 발굴되었다. 봉분이 있는 구조물이 모두 무덤은 아니고, 그 아래가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드리아노프(А.В. Адрианов)는 여러해 동안 알타이에서 6~8개의 둥근돌이 돌아가고 흙을 덮은 흔적이 있는 고리모양의 구조물을 발굴했으나, 어떤 유물도 없어서 어떤 문화인지, 연대 등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대형고분은 봉분이 있는데, 그 단면은 가장 상부가 편평하게 된 반구형의 모습이다. 봉분의 높이와 직경의 비율은 1:10정도이다.

대형무덤의 경우 중간에 꺼짐 현상이 있는데, 이는 무덤방 속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들어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도굴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무덤방에는 빈공간이 있을까?

앞서서 살펴보았고, 또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은 유물로 꽉 채우지 않는다(그림1).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 무덤과 같이 얼음으로 꽉 차지 않는 경우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으로 가장 높은 곳의 흙이 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적이 파지릭 계곡의 무덤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가운데 무덤방 가장 중앙, 왼쪽-단면도, 오른쪽-상층의 흙이 쓸려 내려오지 않았을 경우를 복원한 모습

 

 

필자가 어제 ‘영구동토층’이라고 무덤아래에 형성된 얼음층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그림 2).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의 설명이었다. 영구동토층의 생성원인은 이해가 가는데, 무덤빈 공간으로 최상부의 흙이 바닥까지 쓸려들어가는 현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무방과 나무관이 썩으면서 무덤의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내려갔을 꺼라 생각했는데, 루덴코의 단행본을 읽다보니 약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영구동토층'이라면 나무방과 나무관은 썩지 않아야 한다. 만약에 오랜 시간으로 인해서 썩었다고 한다면 나무방은 전체적으로 썩어야지 어떻게 가장 중앙에만 썩을까?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루덴코의 설명처럼 영구동토층이 무덤의 반을 채운 돌이 열 전도율을 막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긴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틀림없이 그 조건이 바뀌어서 무덤방을 둘러싼 얼음이 녹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봉분의 붕괴현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소빙기때 이미 예전에 형성된 얼음동토층 모양대로 다시 돌아갔을 수 있다.

 

그럼 파지릭계곡의 도굴도 그때? 그런데 루덴코의 설명에는 도굴은 무덤방까지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굴로 판 구덩이 덕분에 무덤속에 많은 물이 흘러들어가 무덤방이 다시 얼어붙었다고 루덴코는 설명한다. 결과론 적으로 도굴로 인해서 들어간 외부의 물이 다시 얼어 붙으면서 다시 무덤을 감춘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복잡하게 설계된 무덤은 다행히도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많다. 필자가 자꾸 무덤의 빈 공간을 이야기 했는데, 무덤의 내부를 보면 알 수 있다(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고 싶은 무덤은 2호분이다. 비슷한 시기의 여성무덤, 남성무덤, 아이무덤까지 살펴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묻힌 무덤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덤의 남성은 문신이 있는 미라로 발견되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의 미라와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그리고 또 다른 유적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남성미라에서 확인되는 문신은 같은 사람이 새겼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이야기 한다. 세 유적은 동 시대로 생각된다. 물론 파지릭 유적이 약간 더 이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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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알타이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산과 계곡의 지형조건이 맞을 때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건축물로 인해서 영구동토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파지릭 유적의 위치)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ll=50.47243177143555%2C89.1016403521484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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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호분은 영구동토대의 가장자리에 축조되었고, 2호분은 영구동토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남쪽에 위치한 파지릭계곡의 입구에는 영구동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여름에 매우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의 무덤 아래에 있는 영구동토층은 자연조건만이 아닌 일종의 '계산된 행위'로 생각했다. (계산된 행위는 필자의 표현이다. 루덴코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앞에서 우코크 고원에서 이 문화 사람들의 무덤구조를 알아보았다. 무덤방을 크게 파고 그 아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는 흙으로 무덤을 채운 후 무덤의 반 이상은 돌로 채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지릭 유적도 비슷한데 무덤구덩이의 크기가 대체적으로 50㎡이고, 깊이는 4m이다.(4호는 30㎡) 무덤방은 무덤구덩이 보다 작으며(1호-17㎡, 2호-13㎡, 5호-8㎡)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반 이상이 자작나무와 큰 돌로 채워져 있다. 무덤구덩이의 중심높이에서 0.9~2m는 흙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1.3~1.7m까지 돌로 덮인 구조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발굴은 주로 여름에 한다. 극동은 늦봄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6월이고, 대부분 7~8월에 집중되고, 늦으면 9월까지이다. 파지릭 유적도 여름 하반기에 발굴했다고 한다.

 

영구동토층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무덤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동토층의 가장 중앙에 그리고 무덤구덩이의 위치가 동토층이 시작하는 부분과 딱 맞닿아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영구동토층은 렌즈형태로  범위는 무덤 가장 위층의 적석(쌓은 돌)범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덤의 상층 가장 중심부는 무너져 내려서 고분을 채운 돌과 무덤방 아래까지 그 돌이 떨어져 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구동토층 가장 상층 부에 있는 토양도 무덤바닥에 떨어졌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무덤 하부구조, 1947년에 발굴한 탓에 유구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영구동토층'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얼음층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이유는 무덤을 반 이상 채운 '돌' 때문이고, 부수적으로 자연조건이 맞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돌은 열 전도율이 매우 낮고 습기를 냉각시킨다. 우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알타이에서 무덤은 주로 늦 봄과 늦 가을에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덤을 만든 후 첫 번째 겨울에 무덤을 채운 돌과 무덤방은 얼어 붙는다. 그 다음해 여름까지는 4m나 되는 깊은 무덤 구조 덕분에 봉분 아래의 흙은 온도가 그렇게 올라가지 않는다. 돌은 열 전도율이 낮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 얼어 붙고, 이런 과정의 반복하게 되면 여름이 되어도 영하로 유지된다.

 

즉 무덤 아래에 거대한 냉동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구동토층 덕분에 파지릭 계곡의 무덤에는 나무, 펠트, 가죽, 모피, 비단과 사자의 미라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호분이다. 

인간의 염원이 만든 얼음층이라고 해야하나?

우리는 인간의 염원으로 인해서 온 세상을 전염병으로 뒤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따위의 얼음층 정도야, 기후조건이 맞으면 충분히 가능하고 놀랍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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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