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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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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르잔 유적 1호분'에 해당되는 글 16

  1. 2020.05.11 3000여년 전 시베리아 무덤 안의 무덤방 1번.
  2. 2020.05.10 직경 80m 높이 3m의 무덤쌓기, 3000년 전
  3. 2020.05.09 시베리아 3000년 전 무덤 속의 말 무덤과 호랑이 장식
  4. 2020.05.08 3000 년 전 시베리아, 차르의 땅 위 무덤3
  5. 2020.05.07 왕들의 무덤 계곡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투바(현재)에 위치한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는 이름하여 ‘왕의 무덤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이름이 아르잔인데, 3000여년 전 무덤이 남아 있는 유적의 이름도 ‘아르잔’이다. 아르잔에는 왕의 무덤이 수십기가 분포한 것으로 그랴즈노프가 보고 했는데, 발굴된 무덤은 2기이다.

 

그림1. 아르잔 1호의 무덤방평면도 

 

아르잔-1호는 전체 평면형태가 원형으로 그 직경은 120m이고, 주변의 호석을 제외하고 무덤방의 너비는 80m가량이다. 모든 무덤방에 사람과 말을 채운 것은 아니다. 특히 말과 인간이 함께 매장된 곳은 중심 매장부를 제외하고 13번, 26a, 26b번방은 확실하다. 31번 방에는 통나무관 2개가 남아 있고, 전체 평면도에는 말이 표시되었지만, 본문에서는 누락되었으나, 청동제 재갈은 출토되었다. 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부의 무덤방에는 사람 10인과 말 6마리가 묻힌 곳이다. 

 

가장 중앙 무덤방에는 주인공을 위한 2차 무덤방이 따로 있고, 그 주변(북, 서, 남)에는 별도의 무덤시설이 따로 있다. 동쪽에는 말이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2차 무덤방(그림 1-1, 그림 2)은 직경 20~25cm의 통나무를 촘촘하게 쌓아올렸는데 높이는 1m 가량이다. 중심 무덤방의 천장은 남아 있지 않았고, 바닥에 직경 20cm의 통나무 17개가 깔려 있었다. 중심 무덤방은 이미 천장이 없어지고, 통나무관의 덮개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도굴 때문에. 매장된 사람의 다리지골 4개만 확인되었는데, 남성은 노인성 뼈 변화가 관찰되었고 여성은 노후의 징후는 없었다.

 

 

 

그림 2. 아르잔 1호의 중심 매장부

 

중심부의 2차 무덤방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차 무덤방 안에는 무덤방 안에 통나무관을 넣은 곳(그림 3-2), 나무방만 있는 곳에도 사람이 묻혔다(그림 3-5). 그 외에 통나무관은 모두 7개이다. 2번 나무방(2.5×1.2m)에는 통나무관(2.2×0.8m)에는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고, 금제행엽, 원통형장식, 터키석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5번 나무방(1×0.5m, 높이 0.35m)(그림 3-5)은 2번 보다 크기가 작다. 나무방에서는 40~60세 남성이 확인되었다.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누운 채였다. (굴신장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통나무관은 대체로 크기가 1~1.4m이다. 4번 통나무관(그림 3-4)에는 18~20세의 남성, 6번(그림 3-6)과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는 60세 가량의 남성, 8번 (그림 3-8)통나무관에서는 40세가 채 안된 남성, 9번(그림 3-9) 통나무관에서도 남성이 묻혔다. 9번 남성은 나이가 기록되지 않았다. 3번 통나무관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 3. 아르잔-1호의 중심 매장부에서 확인된 통나무관, 그림 2의 번호와 일치(필자편집)

 

주인공 2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8인(3번 통나무관을 포함한)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말은 중심 무덤방에서 6마리 분이 출토되었다. 만약에 성별구분이 정확하다면 이 무덤방에는 2차무덤방 내에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3번 통나무관은 확실치 않지만, 주변부가 모두 남성이며, 담비가죽, 청동화살촉 등 다른 통나무관과 같은 유물이 출토됨으로 남성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는 2차 무덤방 안의 여성 1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다.

 

 출토된 유물은 중심 무덤방(그림 2-1)과 이 무덤방 밖의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담비가죽과 모직 옷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4번 통나무관에서는 담비가죽과 모직 옷을 제외하고 청동단검, 골제화살촉,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2번 무덤방에서는 금제의 마구장식과 원토형 장식 및 터키석 구슬등이 출토되었다. 중심무덤방에서는 담비가죽, 모직옷조각, 터키석구슬, 마구장식 등이 남아 있었는데, 도굴이 심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통나무관의 크기가 2번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1.4m이다. 5번 무덤방의 길이가 1m가량임으로 비슷한 크기이다. 길이가 1~1.4m정도라면 이곳에 매장된 사람들은 5번 무덤방(그림 3-5)이나 7번 통나무관(그림 3-7)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통나무관은 크기가 큰 2번방 안의 통나무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형태이다. 측면의 모양은 사다리꼴을 반대로 해 놓은 모양인데, 지면의 바닥이 통나무관의 입구보다 크다. 관의 머리쪽과 다리쪽 모양이 다르다. 통나무관의 바닥이 둥글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관을 고정하기 위해서 바닥에 지지대를 설치했다. 남아 있는 곳은 6(그림 3-6), 8(그림 3-8), 9번(그림 3-9) 통나무관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스키타이 초기의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0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자락의 해발 1050m가량의 우육 고원에는 그랴즈노프가 ’왕(짜르)들의 무덤계곡‘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아르잔 유적이 있다. 그 중에서 아르잔 1호는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되었다. 이상하게도 이 유적은 그 규모에 비해서 정보는 많지 않다. 30여년 전에 나온 파지릭 고분보다 더 소략하다. 그래서 여러분의 궁금증을 채우기에는 많은 정보가 없지만 그에 비해서 아르잔 유적의 2호는 비교적 최근에 발굴되었고 2017년에 이와 관련된 단행본이 출판되어서 아마 전해 드릴 것이 많다.

 

그래도 아르잔 유적 1호분의 무덤구조는 이해가 필요함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까지 할 것이다. 무덤은 납작한 판석으로 덮었다고 했는데, 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는 곳이 유구의 평면도에서 동쪽 벽의 a부분이다(그림 1-1). 높이가 20~40cm가량 높이까지 남아 있고, 납작한 석회암은 큰 경우 70~80cm도 있다. 무덤방 50호 앞(북쪽)에도 석벽이 남아 있었지만(b) 동쪽 벽 보다는 훨씬 덜 하다.

 

무덤방을 만드는 목제를 쌓는 방법은 이미 설명드린 바 있다. 매장 주체부의 가장 중심부는 가로방향과 세로방향을 한 단씩 교차시켜서 가로 3단 세로 3단을 높이 2.6m까지 올린 것이다. 무덤방이 대부분 그런 방법으로 축조되었는데, 무덤의 가장자리도 마찬가지이다. 통나무 집의 벽은 완벽하게 바르지는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무덤방의 전체 높이는 2.4~3m가량이다. 무덤방 2번과 5번은 2.1~2.8m가량이다.

무덤의 아래쪽 절반 전체는 높이가 2.5~3m가량인데, 가장 상단은 목재로 빽빽하게 덮었다(그림 1-2 중에서 가장 아래쪽 그림에 상단을 목재로 빽빽하게 덮은 것이 확인된다). 무덤방 50호와 7호 앞에는 무덤의 가장자리 둘레를 따라서 목재를 연속적으로 놓은 것이 확인된다(그림 1-2,3). 이런 부분은 무덤가장자리를 따라서 5곳에서 남아 있다. 

 그랴즈노프는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있어서 무덤의 높이를 대략적으로 맞추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림 1. 아르잔 1의 무덤구조, 1-전체평면도, 2- 무덤방 15번의 단면도, 3- 7번 무덤방 앞의 목재

 

 

무덤의 주변을 둘러싼 부분을 제외하고 매장주체부의 직경은 80m이고, 무덤방은 70개이며, 5000㎡에 달한다. 대부분 유용한 무덤방은 네모꼴인데, 전체 무덤 평면은 원형이어서 모서리에 짜투리 공간이 생긴다. 예를 들면 무덤의 남동쪽에 있는 무덤방 22~24번이다. 크기가 15~130㎡정도이고, 이곳을 포함한다면 무덤방의 숫자는 거의 100개에 달한다. 이 공간에는 23번과 같은 경우는 나무를 쓰지 않았고, 40~44번 무덤방을 만들기 위해서 매개가 되는 공간이다.

 

그랴즈노프는 무덤구조가 모든 방이 같지 않기 때문에 숫자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무덤방은 연속적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서 축조되었다. 무덤의 서쪽은 반 이상이 날라가서 구조를 아는 것이 불가능했고, 북쪽과 동쪽이 가장 잘 남아 있었으며, 남쪽은 북, 동쪽과 다른 구조이다.

 

남쪽의 무덤방 15번은 최소 6개의 방으로 보이지만 무덤방의 번호는 15번으로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림 1-2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중심부(북동-남서)로 향하는 나무의 길이가 길기 때문이다. 다른 방과는 달리 긴 나무(3~4m)를 이용해서 중간에 방향이 다른(북서-남동)쪽으로 나무를 끼워 넣지 않으면 긴 나무는 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21번 무덤방도 있는데, 긴 나무를 이용했다(평면도를 확대해서 보시면 알 수 있다). 

 

내가 무덤을 축조했다면, 전체 형태는 원형이 되면서  그 안에 네모방을 많이 넣는 것이 가장 관건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대체로 비슷한 높이로 맞추어야 할 것인데, 이는 앞에서 설명했지만 무덤벽에서 깃대어 내려온 가장자리의 목재가 그런 역할을 했을 것 같다(그림 1-2). 직경 80m의 무덤을 일정한 높이로 맞추는 것..측량도구도 없이..대단한 기술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투바에는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대략 2800~2900년 전 쯤인데, 필자는 말하기 좋게 3000년 전이라고 할 것이다.

(러시아는 연방국가이고, 소수민족들이 중심이 되는 공화국이 러시아연방국가 안에 있다. 투바도 투바공화국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와 비슷하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자치적인 권력을 인정해준다. )

 

그곳은 러시아 시베리아 투바공화국의 해발 1050m의 투란-우육 고원에 위치한 아르잔에서는 3000년 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지상에 설치되었는데, 나무로 만든 무덤방 70여개 이상으로 낙엽송 통나무 6000개 이상이 사용되었다.

 

무덤방은 앞에서 살펴본 우코크 고원과 파지릭 계곡의 무덤과는 달리 땅을 파지 않고 땅위에 설치되었다. 가운데 중앙의 무덤방을 가장 먼저 만들었는데, 네모꼴로 가로와 세로방향을 한 단씩 교차시켜서 쌓아올렸는데, 높이 2.6m이다. 중심부의 무덤방 뿐만 아니라 이 무덤의 모든 무덤방은 지상위에 가로와 세로 나무를 교차시켜서 쌓아올렸다.

이 점은 메인 무덤방의 단면도(그림1)를 보면 알 수 있다. 무덤방의 동서방향 단면은 그림 1-1인데, 이를 복원하면 그림 1-2이고, 무덤방의 남북 단면은 그림 1-3이고, 이를 복원하면 그림 1-4이다.

 

메인 무덤방의 외곽의 무덤방을 1차, 안의 무덤방을 2차무덤방이라고 하자. 내부에 있는 무덤방의 바깥에는 돌을 쌓아서 고정시킨 것(그림 1-2)이 관찰된다. 이는 무덤의 평면도에도 확인된다.

 

무덤에서 70여개의 무덤방 가운데 중앙의 메인 무덤방을 제외하고는 말이 매장된 무덤은 13곳이고, 그 중에서 3곳에는 사람도 함께 매장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말이 매장된 곳은 메인 무덤방 바로 옆에 위치한 무덤방 2번(그림 3)이다. 30마리의 말과 함께 골제와 청동제 재갈, 3공 재갈멈치, 골제, 청동제 화살촉, 장식드리개(행엽)과 환 등이 출토되었고, 몸을 말고 있는 호랑이 장식(이미 설명드린 바 있는)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아르잔은 직경은 120m이지만, 높이는 3~4m밖에 되지 않는다. 봉분은 무게 20~50kg이고 두께 20~40cm의 납작한 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자갈돌을 덮었다. 이 외부에는 납작한 돌을 높이 2.5m까지 쌓아 올린 것이다(이 부분은 남아 있는 도면이 없다). 구글 위성사진에 남아 있는 흔적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무덤의 외곽에는 15~30m떨어진 지점에 2~3열로 석열이 돌아가는데 길이가 300m이다. 이 곳을 동남쪽 방향에서 조사해 본 결과 돌무더기로 확인되었고, 유물은 없었고, 염소, 소, 말 멧돼지 등 각종 동물뼈가 확인되었는데, 의례와 관련된 제사기단으로 추정한다. 이 석열은 무덤을 전체 다 돌아가지 않고 무덤의 반 정도만 돌아갔다.

무덤주변에 동물뼈를 뿌리는 관습은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에도 관찰된다.

 

 

 

그림 1. 아르잔-1호분의 단면도(1: 동서방향단면도, 2: 1동서방향 단면도 복원도. 3: 남북방향단면도, 4: 남북방향단면복원도, A~D는 그림 2와 비교하시기 바람)

 

그림 2. 아르잔-1호분의 메인 무덤방.

 

그림 3. 아르잔-1호분의 무덤방 2번, 이곳에서 호랑이 장식이 출토되었다.

 

그림 4. 아르잔-1호분의 무덤내부, 평면도에서 가장 바깥쪽의 무덤라인 안쪽으로 점선이 있는데, 높이 2.4m의 석열이 돌아가는 부분을 표시한 것이다.

 

그림 5. 아르잔-2호분의 무덤내부, 아르잔 1호분의 무덤 외곽도 이런 납작한 돌을 쌓아올려서 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무덤은 1호에 비해서 대략 200년 가량 늦고, 무덤구조도 차이가 있지만, 같은 지역에서 확인되었고 납작한 돌을 쌓는 전통이라는 점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그레르, 2017,Чугунов К.В.,2017,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그레르, 2017, 투바의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2)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르잔 유적의 1호는 봉분이 있는 직경이 120m가 넘고, 봉분을 제거한 후에 드러난 나무방은 직경이 80m가량이다. 직경 80m안에는 무덤방이 70여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림2). 무덤은 현대에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무덤방의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다.

 

무덤방은 지름 50~85cm가량의 낙엽송을 이용했으며, 가장 중앙에 주인공의 무덤방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방이 설치되었는데, 각 방의 크기와 모양은 다른데, 각 방의 면적은 15~150㎡이고, 전체 사용된 통나무의 수는 6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림 1. 아르잔 1호분의 발굴광경

 

 

그림 2. 아르잔 1호분의 무덤내부

 

중심부의 메인 무덤방은 크기가 8×8m, 높이는 2.6m이다. 그 안에는 다시 2차무덤방이 설치되었는데, 4.4×3.7m이고, 높이는 1m인데, 안에는 남녀의 통나무관 2개가 설치되었다. 바닥에도 지름 20cm나무를 깔았다. 1차 무덤방과 2차 무덤방 사이에는 통나무관 6개와 작은 나무방 2개가 따로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그림 3-2)에는 통나무관이 따로 들어가 있었다. 동쪽에는 마구를 착용한 말이 6마리가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메인무덤방에서는 모두 8명의 사람이 확인되었는데, 가장 중심의 2차 무덤방 안(그림 3-1)에 통나무관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묻혔고, 외부의 작은 무덤방(그림 3-5)에는 남성 1명(40~60세), 통나무관에는 한 곳(그림 3-3)을 빼고는 모두 남성이 묻혔다. 나이는 다양하다. 20세가 채 안된 남성 1명, 60대 2명,  40대 1명이다.  그런데  그림 3-2의 작은 나무방안의 통나무관과 그림 3-3 통나무관에도 관이 있기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10명이 메인 무덤방 안에는 있었을 것이다.

 

 

그림 3. 아르잔 1호분의 중심 나무방

 

무덤방은 나무를 쌓아 올렸는데, 한 단씩 가로와 세로를 교차해서 올린 것이다. 여러분은 해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성냥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 성냥으로 쌓는 놀이를 한적이 있다. 성냥을 쌓는 방법은 가로와 세로를 한단 씩 교차하는 방법인데, 이 무덤이 딱 그렇게 축조되었다.

 

아직 아르잔 1유적의 외부무덤구조를 설명드리지 않았지만, 어제 포스팅한 도면에서 이미 파손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무덤의 봉분을 돌로 덮었고, 가장 중심의 매장주체부는 도굴이 심했으나, 외부에서 온 남겨진 유물로 보아서 대단한 인물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아르잔 유적의 1호는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해 볼 때 무덤구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를 비교해서 보정한 결과는 가장 오래된 연대는 기원전 885년 가장 늦은 연대는 기원전 790년 이다(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1998.). 이 연대는 그랴즈노프가 발표한 책에서도 비슷한 연대가 발표되었다. 필자가 먼저 인용한 이유는 좀 더 최신의 기계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과도 비교해볼 때 300년 이상 빠르다.

zaitseva_gi_et_al_a_treering_and_14c_chronology_of_the_key_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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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동안 무덤구조가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무덤구조는 매우 심하게 차이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개별 무덤방의 차이 등 너무 많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적은 무덤을 땅위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 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 1998. A tree-ring and 14C chronology of the key Sayan-Altai monuments. Radiocarbon 40(1):571–8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은 18세기 초반에 수집된 유물로 발굴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당시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이 표트르 1세에게 보내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서 유물은 황제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하게 어떤 유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출토지가 시베리아인 점은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추정하는 것은 몸을 말고 있는 호랑이(혹은 표범) 장식이다. 필자가 이미 이 유물에 대해서는 소개한 바 있다. 이 유물이 가장 이르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된 유적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 아르잔 유적의 1호분이다.

 

 

그림 1. 지도에서 보라색 표시가 있는 곳이 아르잔이 위치한 곳이다. 필자가 앞에서 지도를 링크해 둔 적이 있는데, 이를 찾아서 들어가면 필자의 지도를 공유할 수 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기원전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거는 무덤의 소재가 된 통나무 6000개이다. 1호는 1971~1974년에 발굴되었다.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우코크 고원(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과 파지릭 계곡(파지릭 유적의 1호분, 2호분, 5호분) 보다 최소한 300년~400년은 빠른 무덤이다. 연대차이가 있기 때문에 무덤 구조가 차이가 크다. 아르잔 1호는 무덤의 직경이 120m가 넘어서 아직도 구글지도(그림 2)에 흔적이 남아 있다. 호석(무덤 주변을 두른 돌)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림 2. 아르잔 유적의 무덤, 아직도 무덤 주위의 흔적이 희미하게 둥글게 남아 있다. 그림3-1과 비교해 보면 도로와 앞에 있는 건물의 위치가 그대로 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 아르잔 유적 발굴 모습, 1- 전경, 2- 무덤방 7호의 가장자리에 놓인 통나무, 3-무덤방 3번의 말, 4-무덤천장덮개를 제거한 후 무덤방 26b, 5-무덤 봉분을 제거 한 후 드러난 무덤방의 모습, 동->북동방향

 

아르잔 유적 1호분이 책으로 출간된 것은 1980년이고 발굴책임자인 그랴즈노프가 출판했다. 그랴즈노프는 ‘아르잔’ 유적이 있는 곳(해발 1050m)은 주변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계곡인데, 왕의 계곡이라고 불렀다. 아르잔은 이 곳의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서 서쪽으로 반경 4km 내에 6개의 무덤이 줄을 서서 있다고 한다(그림 4-1). 또한 마을에서 서쪽으로 4-5km 에는 무덤 11기, 6km 떨어진 곳에는 무덤이 3개 확인되었다.

 

그림 4-1에서 7번 지점에는 2줄 로 3km 가량 무덤이 열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 13개, 12개가 확인되었다.

 

아르잔 마을 주변의 많은 무덤 가운데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눈에 띄고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그림 4-1에서 1, 2, 8번이다. 2번이 먼저 발굴되어 아르잔 1호로 명명되었고, 1번이 아르잔 2호이다. 직경 120m, 높이 3~4m로 워낙 직경이 크고 무덤의 봉분이 완만해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림 4. 아르잔 유적, 1- 아르잔 마을 주변에서 확인되는 무덤(2~8번 숫자가 적힌 것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반경 4km 내의 무덤이다), 2-아르잔 1호분의 봉분과 주변의 제사유구.

 

아르잔 1호 주변 무덤의 남동쪽에는 2~3줄의 원형 돌무더기가 무덤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림 4-2). 이 곳을 발굴한 결과 일정한 크기로 비슷한 간격으로 돌 무더기가 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종의 제사유구(그림 5)로 생각된다.

 

 

그림 5. 아르잔 1유적의 외곽, 그림 4-2에서 A부분.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스키타이 초기의 차르 무덤, 아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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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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