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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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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에 해당되는 글 194

  1. 2020.12.24 쌍두마차 탄 스키타이 태양신
  2. 2020.12.23 흑해의 스키타이 전사
  3. 2020.12.21 고대 스키타이 사람들의 세계관
  4. 2020.11.09 흑해 스키타이 무덤에서 나온 아킬레스
  5. 2020.11.08 흑해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 무덤과 그리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확인되는 전차의 모습을 2종류를 보았다. 알타이 파지릭 5호분에서 발견된 4륜의 나무로 된 마차와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2륜의 마차이다. 각각 4륜의 마차(파지릭 5호) 및 2륜의 마차(아무다리야 퇴장지)로 견인 막대가 2개 있는 형태였다.

파지릭5호분의 4륜마차는 멍에가 2개였기 때문에 2마리 말이 끌었을 것이다.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나온 전차모형에서는 견인대는 2개 였으나, 각 견인대에 멍에가 2개씩 달리면서 4마리 말이 끄는 형태의 마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흑해 지역에서 전차가 나오는 유물은 없을까?

 

기원전 4세기 카라고데우야쉬흐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판에 쌍두마차가 발견되었다. 장식판은 세 부분으로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눠지지만, 각 칸 아래에 다른 문양대가 들어간다. 가장 윗부분은 여신상이 위치하고 가운데 부분에 쌍두마차를 끌고 있는 전사가 발견된다. 두 마리 말 사이를 연결하는 막대가 발견되었고, 전사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아닌 전차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발 밑에는 그리핀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아르타모노프는 그를 스키타이 신 가운데 태양의 신인 고이토스르라고 생각했다.

가장 아랫 부분에는 스키타이 여신 아르김파사로 추정되는 여신이 앉아 있다. 이 여신이 입고 있는 의상은 스키타이 스타일인데, 머리에 고깔모양의 관모를 쓰고 있다. 그녀의 왼쪽(목이 긴 항아리)과 오른쪽(각배)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그릇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서 있다. 그녀의 발 아래에도 얼굴형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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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신화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가 자신의 저서에 기록을 남겨놓아서 각 신의 명칭 및 역할을 알 수 있다. 

 

‘헤스티아는 모든 신들보다 높고, 그 다음은 제우스와 땅, 그 다음은 아폴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헤라클레스, 아레스이다. 이 신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숭배하고 스키타이 왕족 또한 포세이돈에게 희생물을 바친다. 스키타이에서 헤스티아는 타피티(Табити, Tabiti), 제우스는 파파이(Папай, Papai), 땅은 아피(Апи, Api), 아폴론은 고이토시르(Гойтосир, Goytosir), 아프로디테 우라니아는 아르김파사(Артимпаса, Artimpasa 혹은 Argimpasa) , 포세이돈은 파기마사다(Фагимасада, Fagimasada) 라고 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 IV권, 59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은 여성이라고 생각되지만 얼굴이 불분명하고 가장 하단에 있는 아르김파사와는 다른 복장이다. 그리스 복장이라고 한다.

 

 

그림 1. 카라고데우야쉬흐 무덤 출토, 길이 21cm

 

 

그림 2. 그림 1의 착용 예

 

 

이 유물의 용도는 장식판의 가장자리를 돌아서 뚫린 구멍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데, 아르김파사가 쓰고 있는 관모장식과 유사하다(그림 2). 게레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장식판(말탄 전사와 전투장면이 표현된 장식판),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서 출토된 고리트의 장식판에서 관찰되는 스키타이 스타일의 제작방법이다. 그러나 그리스 복장을 한 여성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서 그리스 스타일이 가미된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흑해의 쿠반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석실묘로 네 벽에 벽화가 남아 있는 무덤으로 스키타이 무덤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석벽은 회반죽으로 덮여 있었다. 바닥은 불분명한데, 바닥에 나무를 깔고 돌을 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입구는 서쪽이고, 입구는 긴 복도로 이어지는데, 상부에는 장식으로 덮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3. 카라고데우야쉬흐 유적의  무덤방 평면도. 1888년 발굴

 

그리스 여성 혹은 여신과 스키타이 재지의 신인 고이토시르와 아르김파사가 함께 표현되었을 수 있는 이유는 케르치 해협(흑해와 아랄해 사이)에 있던 보스포로스 국가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세력을 넓히면서 쿠반 지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아르타모노프 1966).

 

 

기원전 4세기경에 흑해에서는 쌍두마차가 끄는 전차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해졌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리스 복장의 여성은 왜 얼굴이 뚜렷하지 않을까? 하단 두 칸의 인물들은 얼굴이 매우 뚜렷하며 심지어 손에 쥔 그릇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까지 표현할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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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랄해로 흘러가는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지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다양한 남성들이었다.

인간형상물이 유적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인데, 흑해지역과 시베리아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전통은 계속이어지는데, 시베리아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순동시대에는 인간형상물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다가, 청동기시대 오쿠네보 문화가 되면은 다시 여성상이 등장하며, 남성상도 출토된다. 물론 후기구석기시대에도 남성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인간형상물이 있긴 하지만, 약간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시베리아의 오쿠네보 문화(기원전 15~19세기)에서는 남성은 여성과 분명하게 구분되면서 남성상이 등장한다(김재윤 2020).

오쿠네보 문화와 연대적 차이는 있지만 초기철기시대문화인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다양한 인간형상물이 확인되는데, 특히 흑해 지역에서 많이 나온다. 반면에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서는 인간형상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흑해지역의 인간형상물은 매우 구체적인데, 아마도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남성들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원전 5세기 이전 유적인 코스트롬스카야, 멜구노프,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남성모습의 인간형상물은 없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대량으로 등장한다. 아시다시피 기원전 5세기 이후 흑해지역에서는 그레코-스키타이 유형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대량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 인물들이 여러 곳에서 관찰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키타이 남성들의 모습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는 스키타이 남성이 표현된 유물 가운데 갑옷과 투구를 쓴 모습의 남성이 발견되었다. 말탄 무사는 상대방의 목을 창으로 찌르고 있는 장면이다. 두 무사는 미늘 갑옷, 정강이 가리개와 화살통을 차고 있다.  투구는 기원전 4세기에 흑해에서 유행한 그리스식 투구인 코린트식 투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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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갑옷: 한국에서는 찰갑이라고 부른다. 작은 철제판을 가죽 끈으로 이어서 붙인 갑옷이다. 철제판의 가장자리에는 구멍이 있다. 흑해에서 찰갑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과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코린트식 투구: 기원전 7세기 코반 유형과 달리 이마 아래에도 철판이 덧대어진 것으로 볼만 가린 것과 눈만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있다. 

 

사람에 비해서 말이 매우 작게 그려져서 약간 이상한 느낌?도 들지만 말에도 보호장치가 있고, 특히 안장깔개가 눈에 뛴다. 

이 유물의 용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물의 가장자리로 구멍을 뚫었는데,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에서 출토된 화살통 장식도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그래서 이 유물은 스키타이 초기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유물이 출토된 곳은 드네프르강 하류의 게레메스 유적으로 기원전 4세기의 유적이다. 유적은 자벨린이 1859년에 발굴했으며, 전차와 마구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전차는 두 무더기로 발굴되었다고만 전해지고, 그 전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마구와 다양한 그리핀이 발견되었다.

 

그림 1. 게레메스 유적 출토, 금제 장식판, 19×14cm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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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기원전 5~3세기대의 유물이 출토되어서 유적도 그 당시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키타이 스타일의 동물문양장식과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유물도 있지만 그리스 스타일도 있고,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유물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유적에서 출토된 금 제품은 아케메니드 왕조의 금제품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아직 알려드리지 않은 유물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핑크스처럼 생긴 반인반수가 원판형 속에 들어가 있는 것도 있다. 앉아 있는 스핑크스로 오른쪽 앞발을 올리고 있고, 반구형의 모자를 쓰고 있고 이마 경계에는 진주?알 문양의 목걸이가 돌아간다. 모자 아래에는 머리카락을 뒤로 모은 스타일이다. 날개의 윤곽을 따라서는 깃털을 표현했고 그 끝에는 맹수가 달려 있다. 이 유물은 옷의 장신구(직경 5cm, 직경 4.2cm)이다.

사람얼굴 대신 날개 끝에 붙은 동물의 얼굴만 있는 유물도 있다(그림 2).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반인반수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사자얼굴그리핀

 

이 원판 속의 반인반수는 동물과 인간이 한몸으로 표현된 것이다. 사람얼굴과 마주보는 동물의 얼굴은 사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사자와 다르다. 오히려 코가 짧고 갈기 표현이 없어서 호랑이?와 가깝다. 옷에 원판을 다는 스타일은 고대 이란 민족을 포함해서 아주 널리 퍼져 있던 유행으로 원판을 단 것으로 만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반인반수(맹수몸통+새 날개+ 인간얼굴)는 이미 아케메니드 왕조 이전의 근동 지역에서 제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유적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제이말 1979).

 

 

 

제이말이 이야기한 근동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 지역에 앗시리아가 존재했을 때 그 보다 북쪽산악 지역에는 우라르트가 번성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앗시리아 보다 우라르트가 훨씬 강성했다고 알려졌다.

우라르트의 고대 도시인 토파흐 칼레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청동으로 제작된 유물 가운데 반인반수 상이 알려져 있다(그림 2, 그림 3).

 

그림 3. 우라르트의 반인반수, 높이 16cm

 

그림 4. 그림3과 동일 유물.

 

청동솥에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날개를 편 새의 모습에 인간 얼굴이 달려 있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알리샤르 유적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림 5. 우라르트의 알리샤르 유적 출토의 청동제품

 

스키타이 문화에서 반인반수는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아르김파사가 그려진 은제거울에서 이미 나온다. 맹수몸통에 날개를 달고 머리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며, 그들은 스키타이 표범장식을 발 아래에 밟고 있다.(아래 포스팅에서 거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2020/08/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흑해 스키타이 여신, Argimpasa

 

흑해 스키타이 여신, Argimpasa

기원전 8~7세기 흑해 스키타이 문화가 번성했을 때 인접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유물이 있다. 그리스, 우라르트, 앗시리아에서 제작된 유물은 스키타이 인이 주문해서 제작했던 것이다.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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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나온 스핑크스 모습을 그리스 스타일이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반인반수, 스핑크스, 인간얼굴이 달린 그리핀 모두 인간과 동물이 동등하다고 생각될 때 만들어질 수 있는 물건이지 않을까?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1959 :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М.: 1959. 260 с.(피트로프스크 1969, 우라르트 제국)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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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북안의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톰리크 무덤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중심무덤방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방 옆에 또 다른 방 들이 만들어진 구조이다. 그런데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앞서 소개한 바 있는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도 중심무덤방 옆에 또 다른 무덤방이 만들어지는 구조이다. 기원전 4세기의 유적이다.

 

체르토믈리크 무덤은 그 규모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로도 유명한데, 고리트를 감쌓던 황금 장식판, 의례용 철검과 금제 검집이 함께 출토되었다. 무덤 입구를 통과하면 처음 들어가는 무덤방에서 남쪽에 위치한 일종의 감실(k)(그림 1)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림 1. 체르토믈리크 무덤의 평면도(Алексеев А.Ю., Мурзин В.Ю., Ролле Р. 1991, 필자편집, 본문의 내용대로 넘버링)

 

고리트의 본체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드러진 것이지만 남아 있지 않고 금판장식만 남아 있다. 상하단에는 동물투쟁문과 식물문양이 타출되어 표현되어 있다. 타출은 반대편을 도구로 두드려서 다른면이 튀어나오도록 하는 기법이다. 기본적으로 여러 판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 2. 체르토믈리크 무덤에서 출토된 고리트 장식판(Алексеев А.Ю. 2012)

 

 

중앙은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은 상단왼쪽 에 있는 활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가 아킬레스다(그림 3-위). 두번째 장면은 스코로스 섬의 리코메데스 궁전에 아킬레스를 여장해서 숨기는 장면, 리코메데스의 딸 사이에서 아킬레스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그림 3-아래), 리코메데스 왕에게 아킬레스가 작별인사하는 모습이다.

 

 

 

그림 3. 그림 2의 상단(Алексеев А.Ю. 2012)

 

하단은 리코메데스의 아내이자 데이아미아(리코메데스의 딸로 그의 궁전에 숨어서 연애함, 아킬레스의 연인?)의 어머니인 여왕, 리코메데스의 다른 딸과 작별인사하는 장면이다(그림 4의 위). 벽에 기대고 있는 인물이 아킬레스이다.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를 보여주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은 아가메논이라는 설이 있다. 또 아킬레스가 트로이왕 프리암(프리아모스)이 아들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 받으러 온 장면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란계 영웅서사시를 묘사했다는 설도 있다(그림 4의 아래). 하단의 마지막 장면은 파리스에게 화살을 맞아 죽은 아킬레스의 유골을 항아리에 운반하는 그의 어머니 테티스를 묘사한 장면이다(그림 5).

 

 

 

그림 4. 그림 2의 하단(Алексеев А.Ю. 2012)

 

 

 

그림 5. 그림 2의 하단 가장 마지막(Алексеев А.Ю. 2012)

 

이 유물을 분석한 알렉세예프는 유물이 제작된 곳은 보스포러스 왕국(케르치 해협에 위치, 스키타이 유목민족과 그리스 인이 특징이 함께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 대표적인 유적 쿨-오바)의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다른 부족과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의식적이고 권위 있는 물품을 배포해서 외교정책을 한 Perisade I(Paerisades I)때로 기원전 330~320년에 제작되고 배포되었던 것으로 본다.

 

체르톰리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스키타이 문양(동물)과 함께 그리스 신화가 묘사된 것으로 확실히 스키타이 특징만 나타난 지역에서는 제작되기 힘들었던 유물이다. 그래서 드레프르강 하류의 체르톰리크 유적이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 보다는 당시에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 나타난 캐레치 해협(흑해와 아조프해의 연결반도)보스퍼러스 왕국의 공방이 제작지였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캐레치 해협의 기원전 4세기 쿨-오바 유적은 보르포러스 왕국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스키타이 차르의 체르톰리크 무덤과는 전혀 다른 무덤구조(포스팅 참고)이다. 확실히 이 시점에는 흑해 스키타이 지역은 각 지역마다 자신의 지역색이 뚜렷해졌다.

 

이 유물이 그리스 신화로만 구성되었다면 별로 재미없었을 것인데, 가장자리는 동물과 식물문양을 넣어서 장식했다는 점은 중요한 점이다. 특히 상단에 위치한 동물이 투쟁하는 문양의 특징은 스키타이 특유의 문양이다.

 

참고문헌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Алексеев А.Ю., Мурзин В.Ю., Ролле Р. 1991 : Чертомлык.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IV в. до н.э.). Кие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91. 416 с.(알렉세예프, 무르진, 롤레 1991, 체르토믈리크(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차르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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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에서 기원전 4세기는 시베리아 알타이 뿐만 아니라 흑해 지역에서도 자신의 특징이 흐렷해진다. 우랄남부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도 이 유적 보다 늦은 사르마트 문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난 유물들이 벌써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다.

흑해지역에서는 지난 여름에 소개해 드린 쿨-오바 유적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흑해와 아조프해를 잇는 지역에 위치한 쿨-오바 유적은 아르타모노프가 스키타이 귀족의 그리스화라고 부를 만큼 그리스 유물이 많이 출토된 곳이다.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리스적인 특징의 결합으로 ‘보스포러스 왕국’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2020/08/3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보스포러스 왕국의 사슴장식판

 

보스포러스 왕국의 사슴장식판

흑해의 크림반도 끝은 케르치 해협이라고 불리고 이곳을 케르치 반도라고 한다. 흑해와 아조프해를 연결하는 곳으로 다리처럼 생긴 지형이다. 이곳에는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리스의 특징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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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지역에서 쿨-오바 유적과 같은 시기에 케르치 해협이 아닌 비교적 내륙으로 드네프르 강 유역의 체르톰리크 유적에서도 이색적인? 혹은 자신과 다른 색채의 유물이 왕창 발견되었다. 드네프르 강 하류에 위치한 유적이 위치한 곳은 평지이다. 높이 20m, 직경 350m의 고분이 들어섰다면 거의 산을 하나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국경내에 위치하는데, 니코폴 시의 북쪽에 위치하며 1862~1864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유적을 발굴한 자벨린은 아래(그림1)와 같은 유적의 평면도(그림 1-2, 그림 2, 그림 3)와 단면도(그림 1-1)을 남겼다. 무덤의 외관은 봉분의 끝이 편평한 점은 이 지역의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과는 비교된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1. 체르토믈리크 유적 단면도(위)와 평면도(아래), 평면도는 그림 2와 방향이 다름, 이 그림에서 북쪽은 오른쪽, 자벨린 작성( 알렉세프외 1991)

 

그림 2. 체르토믈리크 유적 평면도, 자벨린 작성( 알렉세프외 1991), 무덤을 둘러싼 호석을 벗기고 난 후 무덤 바닥의 평면도, 무덤의 입구는 ‘P’, 북쪽은 화살표의 끝방향

 

그림 3.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중심무덤방의 평면도, 자벨린 작성( 알렉세프외 1991), 그림2에서 가장 센터에 위치한 무덤방을 자세하게 그린 것이다.

 

유적의 중심부에 위치한 주인공의 무덤방은 깊이 11m 깊이에 위치하고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고 4개의 무덤방을 따로 만들어 그곳에 유물을 부장했다. 그래서 도굴은 면할 수 있었다. 날개처럼 달린 무덤방은 일종의 동굴처럼 만든 장소이다(그림 3의 단면도 확인). 특히 북서쪽 방향에 위치한 무덤방은 안쪽으로 계속 연결되어 넓은 공간이 따로 마련되었다. 이곳은 북서쪽에 위치한 무덤의 입구(그림 2-P)와 연결되었다. 말이 매장된 곳은 중심무덤방의 동쪽에 따로 3개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북서쪽 방향에 위치한 무덤방은 주인공이 묻힌 곳인데, 통나무 무덤방 안에 여성이 매장되었다. 북서쪽 무덤방의 양쪽에 위치한 무덤방에는 남성이 매장되었고, 북서쪽 무덤방과 대각선으로 위치한 무덤방에는 동물뼈(개?)와 유물이 부장되었다. 주인공 무덤과 연결된 무덤방(무덤입구와 바로 연결되는 무덤방)에는 남성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유적에는 도굴의 흔적이 있었지만 무덤의 최상부를 뚫고 들어오다가 흙이 무너져서 붕괴되어서 중단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복잡한 무덤 구조 덕분에 주인공이 매장된 곳과 이곳과 연결된 무덤방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림 4. 체르톰므리크 출토, 고리트(활과화살을 함께 담는 스키타이 특유의  통)를 감싼 장식, 27.3×46.8cm

 

참고문헌

Алексеев А.Ю., Мурзин В.Ю., Ролле Р. 1991 : Чертомлык. (Скифский царский курган IV в. до н.э.). Киев: «Наукова думка». 1991. 416 с.(알렉세예프, 무르진, 롤레 1991, 체르토믈리크(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차르의 무덤)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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