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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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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는 스키타이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고 흑해 남쪽 세계에는 그리스, 흑해의 우측에는 우라르투, 그 아래에는 앗시리아가 배치된 것이 기원전 7세기의 유라시아 서쪽 끝의 모습이다. 흑해 북쪽의 스키타이 문화에는 위에서 말한 국가의 유물이 모두 발견된다.

 

드네프르강 하류에 위치한 베레잔이라고 불리는 섬에는 기원전 7세기경부터 이오니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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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잔’이라는 명칭은 이란어로 ‘높다’라는 의미가 있는 ‘berezant’에서 왔다는 의견이 있다. 터키인들은 ‘늑대의 섬’이라고 불렀다. 슬라브인들은 자작나무 ‘берёза’가 그 어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인들은 베레잔 섬의 도시와 드레프르강을 모두 ‘보리스펜’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고대 그리스 강의 신(Фоант, Thoas)의 아버지가 ‘보리스펜’이다. 우크라이나 축구클럽 중에 하나가 보리스펜(FC Borysfen Boryspil)이다.

 

유적은 188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학술적인 발굴은 아니었다. 프레델은 그 지역의 귀족으로써 지적 호기심으로 발굴했으며, 1900년부터 스카도프스키(Г. Л. Скадовский)가 발굴한 것부터 아카데믹한 조사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후로부터 지속적으로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에서 발굴조사했다.

 

섬의 북쪽에 주로 유적이 위치했고, 남쪽에는 현대의 건축물이 많이 들어선 상태이다(그림 1).

 

그림 1. 베레잔 섬의 유적, 검은색으로 색칠된 부분이 발굴된 구역이다. C는 현대건축물이다.

 

 

이 섬에서는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유적이 있었고 처음에는 반 수혈 주거지(그림 2)가 있다가 기원전 6세기 중반 이후부터 석제로 된 초석에 회색의 점토벽돌을 올린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반수혈 주거지: 반지하식 집터

 

그림 2. 베레잔 섬의 반지하식 집터

 

그림 3. 베레잔 섬의 회색 점토벽돌로 된 집텁

 

 

참고문헌

Борисфен-Березань. Начало античной эпохи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СПб.: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2005(에르미타주 박물관, 2005, 보리스펜-베레잔, 흑해 북안의 그리스 상고기의 시작유적, 유적 발굴 120주년 기념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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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흑해 북쪽의 스키타이 유적에서는 그리스 유물도 출토된다. 흑해 아래쪽에 그리스가 위치했기 때문에 너무 당연한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문외한인 나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스의 문화가 흑해 북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세기 경부터이다. 당시에 그리스는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경작지가 부족하게 되면서 토지 쟁탈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스인들 가운데 매우 부자들이 생기면서 토지 쟁탈전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가 계급투쟁 사회로 변화하게 되었고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메트로폴리스를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농사를 지을 노예가 필요해서 이웃한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 다른 원인은 상업이었다.

 

결국 그리스가 인접한 국가들로 눈을 돌리게 된 원인은 한마디로 ‘부(富)’를 쌓기 위해서이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흑해북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살던 메트로폴리탄과는 상당히 다른 도시가 흑해 북안에 건설되었다.

 

 

그리스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은 드네프르강 하류의 부그 만 지역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조사되고 유명한 유적은 베레잔 이라고 불리는 하중도이다. 기원전 7세기경의 그리스인들 주거 유적으로 물고기뼈가 많이 발견되었다. 유적에서는 그리스 내에서도 이오니아 그룹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곳에서 만들어진 채색토기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화적인 장면과 식물과 동물 그림들이 그려진 토기가 발견되었다. 토기로 판단해서 기원전 7세기 경의 유적으로 생각된다.

 

그림 1. 흑해 북안의 베레잔 섬에서 출토된 기원전 7세기 채색토기, 이오니아 제작

 

러시아 국경내에서 연구된 그리스 관련 유적으로 스키타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들 자료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Борисфен-Березань. Начало античной эпохи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СПб.: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2005(에르미타주 박물관, 2005, 보리스펜-베레잔, 흑해 북안의 그리스 상고기의 시작유적, 유적 발굴 120주년 기념 특별전)

Антич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 Отв.ред. Г.А. Кошеленко, И.Т. Кругликова, В.С. Долгоруков; авт. Е.М. Алексеева, А.К. Амброз, Т.М. Арсеньева и др. М.: Наука, 1984. 392 с.(코세렌코 편집, 1984, 흑해북안의 그리스 상고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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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6세기경 유물이라고 추정되는 청동용기의 손잡이에는 날개달린 여성이 표현되었다. 이 여성은 무릎을 굽히고 날개를 달고 있는데,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각배에 표현된 여성도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여성은 혀(그림 1)를 내밀고 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여성은 그리스의 메두사고르곤이라고 여겨진다. 청동용기의 손잡이에 표현된 여성은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는데 그리스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이 그리스에서 제작된 것일까?

 

그런데 메두사는 유물에서 표현될 때 대부분 머리만 표현되지 전신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청동용기도 그리스에서 주로 사용한 암포라(그림 4, 그림 5)와는 기형에 차이가 있다.

 

그림 1.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용기의 손잡이

 

 

그림 2.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용기의 손잡이의 측면

 

 

그림 3. 그림 1이 부착된 청동용기

 

그림 4. 은제 암포라, 체르토믈리크 유적 출토

 

 

그림 5. 그리스의 토제 암포라, 엘리자베틴스키 쿠르간 출토

 

 

그런데 이와 같은 청동용기는 우라루투의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스키타이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직수입된 그리스 청동그릇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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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산맥의 이남 우라루투 유적인 반 호수 부근 절벽에서 발견된 므헤르의 문이라고 불리는 유적에는 우라루투의 신들 이름이 적힌 문자판이 발견되었다.

모든 신 중에 으뜸인 칼디 신, 전쟁과 천둥의 신 테이시바, 태양의 신인 시비니가 3신으로 불린다.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그들에게 받쳐진 동물의 수도 가장 많았다. 이 외에도 역할이 있는 신은 달의 신인 세라르디, 칼디 신의 무기도 별도의 신으로 취급되었다. 동굴의 신인 아리아이니, 도로의 신 하라, 산의 신 아르니, 땅의 신인 예반니, 산위의 국가 신인 바바니아가 있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역할을 알 수 없는 남성신은 세비투가 있고 아르디니 도시의 신, 투시파 도시의 신도 따로 있다. 제일 먼저 언급한 3신만 아내가 있었는데, 칼디 신은 아루바이니, 테이시바 신은 후바, 시비니 신의 아내는 투시푸에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츠누아르디 신도 여성이다.

 

하지만 판독 가능한 신만 언급한 것이고 대략 79명의 신이었었다.

 

이중에 달의 신인 세라르디인데, 메소포타미아의 신(Sin)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세라르디가 그려진 점토인장은 초생달 아래 그가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

 

그림 1. 우라루투의 세라르디, 점토인장, 아르메니아 카미르-불루르 언덕에서 출토됨.

 

이미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는 우라루투와 메소포타미아의 신은 서로가 서로의 신을 겹쳐서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달의 신(sin)은 검색하면 나온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달이 모두 초생달인지 궁금하다. 보름달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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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루투와 지비예 유적 자료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하다. 우라투우 유적을 처음 발굴하고 보고한 피오트로프스키는 2011년에 새로운 책을 냈다. 그가 직접 낸 것은 아니고 아마도 후학과 동료들이 낸 듯 하다. 그는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관장을 했고, 1990년에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에도 박물관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온라인 뮤지엄에서 피오트로프스키가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이 우라루투를 발굴한 그 사람인줄 알았다.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서...그런데 그는 죽었고, 그의 아들 피오트로프스키()라고 한다. 아들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는데 기간은 잘 모르겠다. 2016년 기사에서 2020년까지 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것만 발견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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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와 많은 관련성이 제기된 지비예 유적은 현재 이란 국경에 위치한다. 지비예 유적은 기원전 7세기경의 유적으로 스키타이 스타일? 혹은 스키타이의 유물 뿐만 아니라 우라루투, 앗시리아 유물 등이 함께 발견되어서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하지만 발견 뒤에 지비예에서 나왔다고 주장된 유물들의 숫자가 늘어가면서 그 진위여부도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처음 지비예 유물을 소개한 프랑스 고고학자인 앙드레 고다르도 자신의 말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적은 2번 발굴이 되었다. 1964년에 3주간 로버트 다이슨 주니어와 무스카렐라가 발굴했고, 1976~1998년까지 이란의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하지만 유적의 도면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첫 발굴에서 진흙으로 된 벽돌로 만든 방이 3개있는 성곽이 발굴되었다. 입구 계단과 여러 기둥 기초 및 매우 두터운 벽돌로 요새벽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조각과 자루 끼우는 부분이 있는 청동 화살촉과 토기 등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1998년 이란 고고학자가 발굴했는데, 64년 발굴을 확장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토기 등잔, 상아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스키타이 스타일로 보고되었다. 이 외에도 독수리로 장식된 파란색 그릇 등 인접한 지역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적에서 우라루트의 루수이 II세(Rusa II세)의 점토로 된 도장(원기둥 혹은 사각기둥모양)이 발견되었다(유물은 알려지지 않음). 이 왕의 인장은 우라루트의 유적인 토프크 칼레(터키 국경내), 테이시바이니 유적과 베스탐 II유적(이란 국경내)(그림 1) 등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 유적들은 모두 루수이 II세가 남긴 것이다. 연구자들은 실제로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우라루투 왕의 점토 인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소한 우라루투와 지비예 유적이 외교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과소’ 평가 했다.

지비예 유적의 발굴에서 확인된 것은 그 이전에 고다르 등이 지비예 유물이라고 했던 유물과는 사뭇 달랐다고 알려졌다.

 

 

그림 1. 베스탐 유적 출토, 우라루투의 점토인장의 문양(생명의 나무 양쪽에 서 있는 날개달린 칼디 신의 묘사)

 

프랑스 고고학자인 고다르가 처음 유물을 산 사람에게 듣고 그 다음해 그 곳의 위치를 지비예라고 추정했는데 이 장소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지비예 유적을 발굴한 후 건물의 특징을 사진이나 도면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석연치 않다. 또한 발굴후 유적에서 화재가 나서 소실되었다는 점도 약간 의아하다. 그럴수 있다고 해도 유적을 발굴하고 나면 그 신빙성 때문이라도 사진이나 도면등은 공개할 수 밖에 없는데.....

 

우라루투 루수이 II세가 남긴 유적이 아닐지?

 

그림 2.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렌 박물관 소장, 황금판

 

그림 3.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란 박물관 소장, 은제 접시

 

그림 4.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란 박물관 소장, 은제 접시의 디테일

 

참고문헌

Луконин В. Г. Искусство древнего Ирана. М., 1977(루코닌 1977, 고대 이란의 예술)

Погребова М. Н., Раевский Д. С. Ранние скифы и Древний Восток. М., 1992.(포그레보바, 라에프스키 1992, 초기 스키타이와 고대 오리엔트)

O. W. Muscarella, “‘Ziwiye’ and Ziwiye: The Forgery of a Provenience,”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4, 1977, pp. 19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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