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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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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에 해당되는 글 45

  1. 2021.11.30 태양신의 사원 투쉬파
  2. 2021.11.29 아르메니아의 태양 신(神)?이 표현된 문양
  3. 2021.11.27 기원전 8세기 우라르트에서 발견된 하수관
  4. 2021.11.26 코카서스 남부의 예레부니 성곽 유물
  5. 2021.11.25 기원전 8세기 칼디 신의 사원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사르두리(Sarduri) II세 때의 수도는 투쉬파였다. 현재 터키 국경내에 있으며 반 호수에 있는 절벽 위에 사원(그림 1)을 만들고 그곳에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반(Van) 절벽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연구자인 슐츠로 19세기 초에 발견했다. 슐츠는 처음에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남긴 연구를 밝히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반 호수 기슭에 건설된 도시가 아시리아 여왕의 명령이라는 내용이었고, 슐츠는 반 호수 기숡에 세워진 사원지가 앗시리아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발견한 암석과 설형문자가 새겨진 비문을 스케치 했다. 그러나 그는 1829년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작업은 184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후에 슐츠가 스케치 한 비문은 앗시리아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중세 아르메니아어 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영국박물관의 원정대와 독일 원정대가 투쉬파를 발굴하고 그 때 가져간 유물은 현재 영국과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그 내용이 출판되었다.

 

1915~1916년 동안 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점령되는 동안 러시아 제국고고학회(그림 1)가 투슈파에서 발굴을 했는데 그 때 동쪽 경사면의 틈새에 있는 사르두리(Sarduri) II세의 비문(그림 2)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기원전 764~735년 동안 제위했다.

 

그림 1. 러시아 제국고고학 위원회의 발굴, 군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짐

 

그림 2. 사르두리 II세의 비문

 

러시아 제국고고학회의 발굴 이후에는 대규모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영국 탐험대가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불법적인 도굴이 만행되던 곳이었다.

 

*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있었던 기원전 9세기부터 존재했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8세기경에 세워진 에레부니 성곽과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남겨둔채 멸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무너뜨린 것은 스키타이 사람들로 알려졌지만, 우라르뜨가 완전히 망한 것은 기원전 585년 메디아 인들의 침략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흑해 북안에 살던 스키타이 사람과 키메르치 사람들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복잡한 지형만큼이나 민족도 다양하고 역사도 그랬던 것 같다. 우라르트가 있었던 지역은 기원전 6세기 이후에 아케메니드 왕조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레부니 유적에는 기원전 5~4세기 문화층에서 아케메니드 왕조의 은제 각배 등도 발견되고, 칼디 신의 사원도 방형으로 개축되어서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3신을 믿었는데,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다. 칼디 신은 믿음의 신이고, 테이시바 신은 전쟁의 신이며,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아르티니스 이다. 아리티니스는 현대 아르메니아 언어에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디 신은 사자를 타고 있고, 테이시바 신은 소를 탄 모습이지만, 시비니 신은 머리에 청동으로 된 솥을 얻고 있다(그림 1). 유물에서 청동 솥(그림 2, 3)에 붙은 날개 달린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은 시비니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라르트 종교의 대부분 요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차용되었다. 시비니 신은 앗시리아 신 샤마쉬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투실라는 시비니 신의 사원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실라는 우라르투의 기원전 735~675년의 수도였는데, 반 호수를 마주보는 반 절벽에 세워진 도시이다.

 

그림 1. 시비니 신의 모습

 

그림 2. 청동솥에 표현된 시비니 신

 

그림 3. 청동솥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리 2세의 헬멧에 표현된 사람들

 

사실 필자가 이렇게 우라르투를 파고 있는 이유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있는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거울과 철검의 검집에 새겨진 문양 때문이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신(神)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찾는 과정 중에 와이너리, 맥주 양조장, 참기름 제조공장 등 어마어마 한 곳을 발견하기는 했다.

세상에는 신이 너무 많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기원전 8세기 유적인 예레부니는 물 공급 및 배수 시스템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물을 공급했던 장치가 있는데 원통형 돌 파이프를 통해서 지하의 물을 중력을 이용해서 공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 사원 바닥의 시스템

 

 

그림 2. 하수구관으로 사용된 돌 관

 

 

그림 3. 하수구 관의 돌 관 배수구 단면

 

원통 모양의 돌 파이프 외경은 40cm, 내경은 10cm가량이며, 파이프 사이는 점토로 밀봉되었다. 수원은 예레부니에서 7km 떨어진 가르니 산의 샘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수관은 바닥에 구멍을 파고 보이지 않도록 설치되었는데, 성곽이 포위될 경우에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수관에서 나오는 물은 도시의 전 구역에서는 사용되기에는 물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성곽의 안뜰에서는 빗물을 모아서 배수하는 장치가 발견되었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기원전 8세기경 성곽인 예레부니는 기원전 5~4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망하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개축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문화층에서는 은제 각배가 출토되었다.

 

그림 1. 예레부니 유적에서 출토된 아케메니드 왕조 시대의 각배

 

그러나 예리부니의 우라르트 시대의 문화층에서는 유물이 많지 않다. 가장 많은 것은 토기편인데, 사발과 쿱신이다.

 

유적에서는 포도주를 저장하던 붉은 방이 발견되었고, 땅에 포도주를 보관하던 토기 카라스를 땅에 뭍고 보관하던 것이 발견되었다. 용량을 알기 위한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림 2.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방, 붉은 색

 

그림 3. 예레부니 유적의 포도주 저장용기, 카라스

 

그림 4. 카라스에 남아 있는 기호

 

이곳에서도 스키타이식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이웃한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이를 근거로 예레부니는 테이시바이니 유적보다 더 오랫동안 존속된 것으로 보았다.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9세기부터 존재한 우라르트에는 최대 전성기 때 세워진 에레부니 성곽도시가 위치한다. 그 곳에는 2개의 사원이 존재하는데, 수시 사원은 에레부니 성곽을 세운 아르기시티I세가 Ivarsha 신을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수시 사원은 고대 오리엔트 건축양식으로 지워진 것이라고 한다.

 

칼디 신의 사원은 1968년에 발견된 문자판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아르기쉬티 I세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사원은 정방형(7.2×7.2m)의 다용도 방(a)과 큰 홀(7.2×37m)(b)로 구분되었다. 그레이트 홀의 바닥은 바닥에 나무가 깔려 있었다. 사원 안에 있는 방형의 안뜰 구조(c)는 고대 오리엔트 건축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라르트에서도 알려진 것이다. 안뜰의 지붕은 12개의 기둥으로 지지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아래에는 바닥 아래에 하수 배수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안뜰 옆방에는 계단이 있는 탑이 있는 공간이 발견되었다(d). 메소포타미아 지구라트와 유사하다는 의견도 있다. 사원의 은 파란색 배경에 벽화 그림이 그려진 것인데, 칼디 신으로 추정되는 그림도 남아 있다.

 

예레부니 성곽은 우라르트가 망한 뒤에도 사용되었는데, 기원전 V~VI세기 문화층이 발견되었고 건물의 일부가 재건되었는데, 페르시아 스타일의 사원지가 지어진 것이다. 이때 칼디 신의 사원이 정방형으로 개축되었다(그림 1-1). 기원전 V~VI세기 문화층에서 페르시아 동전 2점이 발견되었고, 페르시아 재갈도 발견되었다.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와 그리스 문헌에서는 ‘아르메니아’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은 예레부니 성곽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한 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 1. 예레부니 성곽의 평면도, 1: 예레부니 성곽의 최후 평면도, 2,3: 예리부니 성곽의 칼디 신의 사원

 

 

그림 2. 칼디 신의 사원 복원도

 

그림 3.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의 사원벽

 

그림 4.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의 사원벽에 그려진 칼디 신

 

 

개축된 칼디 신의 사원은 아케메니드 왕조때 반은 생활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나머지 반은 궁전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림 5. 기원전 V~VI세기 개축된 칼디 신의 사원

 

 

 

참고문헌

Оганесян К.Л. Арин-берд. I. Архитектура Эребуни по материалам раскопок 1950-1959 гг// Изд-во АН Армянской ССР, 1961. — 116 с. —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раскопки в Армении, №9).(오가네샨 1961, 1950~1959년 발굴된 자료로 본 아린-베레드 I유적, 예레부니 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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