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에 해당되는 글 45

  1. 2021.12.21 기원전 6세기 스키타이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손잡이
  2. 2021.12.20 우라르투 달의 신, 세라르디
  3. 2021.12.19 이란의 지비예 유적에서 발견된 우라루투 점토인장
  4. 2021.12.18 고대 이란의 지비예 유적
  5. 2021.12.17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리톤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6세기경 유물이라고 추정되는 청동용기의 손잡이에는 날개달린 여성이 표현되었다. 이 여성은 무릎을 굽히고 날개를 달고 있는데,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각배에 표현된 여성도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여성은 혀(그림 1)를 내밀고 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여성은 그리스의 메두사고르곤이라고 여겨진다. 청동용기의 손잡이에 표현된 여성은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는데 그리스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이 그리스에서 제작된 것일까?

 

그런데 메두사는 유물에서 표현될 때 대부분 머리만 표현되지 전신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청동용기도 그리스에서 주로 사용한 암포라(그림 4, 그림 5)와는 기형에 차이가 있다.

 

그림 1.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용기의 손잡이

 

 

그림 2.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용기의 손잡이의 측면

 

 

그림 3. 그림 1이 부착된 청동용기

 

그림 4. 은제 암포라, 체르토믈리크 유적 출토

 

 

그림 5. 그리스의 토제 암포라, 엘리자베틴스키 쿠르간 출토

 

 

그런데 이와 같은 청동용기는 우라루투의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스키타이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직수입된 그리스 청동그릇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산맥의 이남 우라루투 유적인 반 호수 부근 절벽에서 발견된 므헤르의 문이라고 불리는 유적에는 우라루투의 신들 이름이 적힌 문자판이 발견되었다.

모든 신 중에 으뜸인 칼디 신, 전쟁과 천둥의 신 테이시바, 태양의 신인 시비니가 3신으로 불린다.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그들에게 받쳐진 동물의 수도 가장 많았다. 이 외에도 역할이 있는 신은 달의 신인 세라르디, 칼디 신의 무기도 별도의 신으로 취급되었다. 동굴의 신인 아리아이니, 도로의 신 하라, 산의 신 아르니, 땅의 신인 예반니, 산위의 국가 신인 바바니아가 있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역할을 알 수 없는 남성신은 세비투가 있고 아르디니 도시의 신, 투시파 도시의 신도 따로 있다. 제일 먼저 언급한 3신만 아내가 있었는데, 칼디 신은 아루바이니, 테이시바 신은 후바, 시비니 신의 아내는 투시푸에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츠누아르디 신도 여성이다.

 

하지만 판독 가능한 신만 언급한 것이고 대략 79명의 신이었었다.

 

이중에 달의 신인 세라르디인데, 메소포타미아의 신(Sin)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세라르디가 그려진 점토인장은 초생달 아래 그가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그림 1).

 

그림 1. 우라루투의 세라르디, 점토인장, 아르메니아 카미르-불루르 언덕에서 출토됨.

 

이미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는 우라루투와 메소포타미아의 신은 서로가 서로의 신을 겹쳐서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달의 신(sin)은 검색하면 나온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달이 모두 초생달인지 궁금하다. 보름달이 아니라...

 

 

더보기

우라루투와 지비예 유적 자료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하다. 우라투우 유적을 처음 발굴하고 보고한 피오트로프스키는 2011년에 새로운 책을 냈다. 그가 직접 낸 것은 아니고 아마도 후학과 동료들이 낸 듯 하다. 그는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관장을 했고, 1990년에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에도 박물관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온라인 뮤지엄에서 피오트로프스키가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이 우라루투를 발굴한 그 사람인줄 알았다. 생김새가 너무 비슷해서...그런데 그는 죽었고, 그의 아들 피오트로프스키()라고 한다. 아들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는데 기간은 잘 모르겠다. 2016년 기사에서 2020년까지 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것만 발견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와 많은 관련성이 제기된 지비예 유적은 현재 이란 국경에 위치한다. 지비예 유적은 기원전 7세기경의 유적으로 스키타이 스타일? 혹은 스키타이의 유물 뿐만 아니라 우라루투, 앗시리아 유물 등이 함께 발견되어서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하지만 발견 뒤에 지비예에서 나왔다고 주장된 유물들의 숫자가 늘어가면서 그 진위여부도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처음 지비예 유물을 소개한 프랑스 고고학자인 앙드레 고다르도 자신의 말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적은 2번 발굴이 되었다. 1964년에 3주간 로버트 다이슨 주니어와 무스카렐라가 발굴했고, 1976~1998년까지 이란의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하지만 유적의 도면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첫 발굴에서 진흙으로 된 벽돌로 만든 방이 3개있는 성곽이 발굴되었다. 입구 계단과 여러 기둥 기초 및 매우 두터운 벽돌로 요새벽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조각과 자루 끼우는 부분이 있는 청동 화살촉과 토기 등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1998년 이란 고고학자가 발굴했는데, 64년 발굴을 확장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토기 등잔, 상아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스키타이 스타일로 보고되었다. 이 외에도 독수리로 장식된 파란색 그릇 등 인접한 지역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적에서 우라루트의 루수이 II세(Rusa II세)의 점토로 된 도장(원기둥 혹은 사각기둥모양)이 발견되었다(유물은 알려지지 않음). 이 왕의 인장은 우라루트의 유적인 토프크 칼레(터키 국경내), 테이시바이니 유적과 베스탐 II유적(이란 국경내)(그림 1) 등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 유적들은 모두 루수이 II세가 남긴 것이다. 연구자들은 실제로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우라루투 왕의 점토 인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소한 우라루투와 지비예 유적이 외교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과소’ 평가 했다.

지비예 유적의 발굴에서 확인된 것은 그 이전에 고다르 등이 지비예 유물이라고 했던 유물과는 사뭇 달랐다고 알려졌다.

 

 

그림 1. 베스탐 유적 출토, 우라루투의 점토인장의 문양(생명의 나무 양쪽에 서 있는 날개달린 칼디 신의 묘사)

 

프랑스 고고학자인 고다르가 처음 유물을 산 사람에게 듣고 그 다음해 그 곳의 위치를 지비예라고 추정했는데 이 장소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지비예 유적을 발굴한 후 건물의 특징을 사진이나 도면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석연치 않다. 또한 발굴후 유적에서 화재가 나서 소실되었다는 점도 약간 의아하다. 그럴수 있다고 해도 유적을 발굴하고 나면 그 신빙성 때문이라도 사진이나 도면등은 공개할 수 밖에 없는데.....

 

우라루투 루수이 II세가 남긴 유적이 아닐지?

 

그림 2.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렌 박물관 소장, 황금판

 

그림 3.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란 박물관 소장, 은제 접시

 

그림 4. 처음 입수된 지비예 유물, 테헤란 박물관 소장, 은제 접시의 디테일

 

참고문헌

Луконин В. Г. Искусство древнего Ирана. М., 1977(루코닌 1977, 고대 이란의 예술)

Погребова М. Н., Раевский Д. С. Ранние скифы и Древний Восток. М., 1992.(포그레보바, 라에프스키 1992, 초기 스키타이와 고대 오리엔트)

O. W. Muscarella, “‘Ziwiye’ and Ziwiye: The Forgery of a Provenience,”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4, 1977, pp. 197-219.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북쪽에 위치한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중에는 원형맹수장식이 달려 있는 유물이 있다. 원형맹수장식은 켈레르메스 유적 발굴 전에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수집품 가운데서도 발견된 바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라루투의 남쪽에 위치한 현재 이란의 삭키즈(Saqqez) 부근의 마을에서 1947년 화려한 황금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별 다른 유구는 발견되지 않은 퇴장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유적의 유물구성은 어떤 특정 지역의 것만 출토된 것이 아니다. 앗시리아, 우라르투, 초기 이란양식(고대 오리엔트 특징+유라시아 스텦지역 특징) 등이 복합되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청동거울

 

이 유적에서도 원형맹수장식이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연구자도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 9세기 유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발굴품이 아니라 20세기 초반 유적들의 운명처럼 우연하게 발견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발굴이 아니라 농민들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시장에서 구입해서 고고학자들이 입수한 것이다.

 

그림 2. 지비예 출토 원형맹수장식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지비예 유물을 처음 알린 것은 1948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고다르인데, 유물을 판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유물을 박물관 카달로그에 게시했다.  농민들이  요새가 있는 높은 언덕의 큰 청동용기 안에서  금, 은, 청동, 상아 및 토기 등의 유물이 있었다고  고다르에게 전해 주었다. 그 다음해인 1949년에 유적의 위치가 지비예 마을인 것을 확인했고, 유물들은 ‘지비예 보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지비예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이 이란의 상점에서 팔려나갔고, 미국, 유럽 및 기타 지역의 개인 수집가와 박물관 그리고 다수 특별 전시회에 전시되었다(Muscarella, 1977)

 

그런데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프랑스고고학자인 Ghirshman는 지속적으로 이 유적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30여개체나 늘여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근동 미술실에도 지비예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유적의 유물을 최초로 알린 고다르는 1950년에 하나의 용기에서 유물이 뭉치로 출토되었다고 했지만, 1951년에는 이를 부정했다. 과연 하나의 용기에서 수백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알려진 유물 중에 아주 많은 양이 위조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Muscarella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유적에서 여러 나라의 유물 특징이 한꺼번에 위조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인정된다.

 

참고문헌

O. W. Muscarella, “‘Ziwiye’ and Ziwiye: The Forgery of a Provenience,”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4, 1977, pp. 197-219.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지역의 코카서스 북쪽 스키타이 세계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코카서스 남쪽 우라루투에서 제작된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거울, 각배, 철제 검 등이 그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각배는 거울과 같은 인물이 그려져서 두 유물이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여성 외에도 온몸에 털이 나 있는 인물은 거울과 각배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각배의 인간은 하반신 부위에 맹수와 겹쳐그려져서 반인반수처럼 보이는데 각배가 잘 남아 있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각배의 동체부는 둥글게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 방향으로 그림이 도안되어 있다. 가장 큰 중앙의 인간과 가지가 양쪽으로 벌어진 나무, 그 왼쪽에 그려진 사자와 싸우는 남성, 그 아래에는 기둥 2개가 방향이 달리 표현되어 있다. 2개의 기둥은 각배가 떨어져 나가면서 완전치 않지만 꼭대기가 불룩한 연꽃 형태인데, 우라루투의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과 유사하다(그림 2).

 

그림 1.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각배의 상세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

 

켈레르메스와 각배가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각배와 거울 각 조각의 가장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눈김이 새겨진 띠이다. 거울의 문양판은 은제 거울 위에 붙인 금제풉인데, 각 조각은 중간에 눈김이 있는 띠를 매개로 붙인 것이다. 각배에서도 같은 띠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또 각배에서 반인반수가 발 밑에 두고 있는 꼬임문양은 거울에서도 반인반수 문양 아래서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두 유물은 같은 장소에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참고문헌

Максимова М.И. 1956 : Ритон из Келермеса. // СА. XXV. 1956. С. 215-235.(막시모바 1956, 켈레르메스에서 출토된 리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