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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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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의 추야강 지류인 유스티드 강과 바르부르가지 강 유역의 스키타이 무덤에는 나무로 만든 말, 사슴, 산양몸통에 사슴 장식이 많이 확인되는데, 대부분 머리맡에서 출토되어 모자장식이라고 생각한다. 바르부르가지 강과 가까운 말라투 유적에는 머리맡에서 금판으로 된 동물문양 장식이 여러 점 확인되는 무덤이 있다. 이 유적 자체에는 동물문양장식이 거의 없어졌다고 이미 이야기 했다. 그 중에서 18호는 약간 예외?적인 상황이다.

 

18호에는 뿔에 마디가 있는 산염소(그림 2-4)와 산양(그림 2-6,7)이 표현된 금판 장식이 있다. 그림 2-4를 산염소 뿔로 추정하는 근거는 투엑타 1호분에서 목제로 산 염소 뿔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외는 특정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목제로 된 사슴장식(그림 2-22,23)을 발견했다. 역시 모자가 있었을 법한 위치에서 확인되었다(그림 1-22,23). 그림으로만 보기에는 잘 모르겠다.

 

이 무덤에는 남(투부와 화살을 가진 자)녀가 함께 매장된 무덤이다. 남성부근에서 출토된 동물장식은 2점(그림 1-8,10, 그림 2-8,10)이고, 그 외는 여성 머리위와 왼쪽 무릎 아래에서도 한점 출토되었다. 여성 주변에서 확인되는 것은 사슴, 산양, 산염소이고, 남성주변에서는 약간 다른 종류의 동물인 듯 하다.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그림 1. 말라투 IV유적의 18호 평면도 1,2-토기, 3-11: 금박을 눌러서 표현한 동물문양장식, 12, 13-모형 칼, 14-칼, 15, 16-모형 투부, 17-단추, 18, 19-청동거울, 20,21-칼, 22, 23-사슴장식조각, 24-멧돼지 송곳니 모형, 25-원판형 펜던트, 26-화살, 27-링모양 귀걸이, 28-목제 쟁반, 29,30-돌베개, 31-검은색 물감의 범위(1,2-토기, 3~11-금박, 12, 16-19, 27-청동, 13, 15-청동과 목제 , 14,22~25, 28-목제, 20, 21-철제)

 

 

그림2. 말라투 IV유적의 18호 유물, 번호는 그림1을 참고

 

말라투 IV유적에서 18호는 거의 유일하게 동물장식이 그나마 출토되는 유적이다. 이곳에서도 18호 외에도 몇몇 무덤에서 모자에 부착했던 금판 장식이 확인되지만 매우 소략하다.

 

역시 쿠바레프도 동물문양장식과 무덤의 구조물을 보고 18호 무덤은 이 유적에서 가장 빨리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18호와 함께 만들어진 무덤은 3호, 9호, 19호, 25호이다. 기원전 4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생각했다. 특히 25호 무덤에는 골제 화살촉(그림 4-11~14)이 출토된다. 화살촉 머리가 삼각형이고, 단면은 정삼각형이고, 화살대를 끼우는 구멍이 있다. 이 유물은 아크 알라하-1 유적(기원전 5세기)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비슷하다. 이 보다 더 늦은 형식의 화살촉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자루대가 없는 화살촉의 경우, 단면이 마름모형이다. 그런데 쿠바레프는 이 유적의 25호 무덤은 아크 알라하-1 유적 보다도 늦은 기원전 4세기라고 생각했다. 화살촉은 거의 비슷해서 말라투 IV유적 내에서 빠른 것은 맞지만 무덤방을 결구하는 방법도 다르고, 말도 부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 3. 말라투 IV유적의 25호 무덤 평면도, 1-토기, 2-모형 검, 3-검 집, 4,5-칼, 6,7-원판형 펜던트, 8-모형 투바 9-청동거울, 10-멧돼지 송곳니 모양, 11-14: 화살촉, 15-청동 못, 16-금박편, 17-돌 베개, 18-검은색 물감의 범위 (1-토제, 29-청동, 3,6,7, 10-목제, 4,5,15-철제, 8-청동과 목제, 11-14: 뼈)

 

그림 4. 말라투 IV유적의 25호 유물

 

고고학자들은 늘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를 해석하려는 노력은 결국 2~3 개로 귀결된다. 시간, 지역차이다. 시베리아 초기 철기시대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에는 하나 더 해서 늘 ‘급’의 문제와도 결부시킨다. 앞에서 살펴본 미라 출토되는 유적과는 너무나 다른 무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이나믹 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어느 스키타이 가족의 공동묘지인 바르부르가지 I 유적에는 최소 5그룹의 가족이 묻혔다. 1~5호(1그룹), 6~8호(2그룹), 9~14호(3그룹), 17, 18호, 21~25호(4그룹), 26~30호(5그룹)이다. 남성을 중심으로 앞뒤로 여성과 아이가 배치되는 현상이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첫 번째 열에서 확인된다. 2번째 열에는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을 묶어서 4그룹과 5그룹으로 나눈 것이다.

 

이 중에서 3그룹은 11호 남성과 13호 남성을 중심으로 아이와 여성을 기준으로 구분했다. 이 그룹의 처음 무덤인 9호 무덤은 8호 무덤과 구분한 이유는 8호의 인골 두향 때문인데, 서향이다.

 

3그룹에는 말이 2마리 있었으며 각각 여성과 남성과 함께 매장되었고 무덤의 시설물은 나무로 된 무덤방이다. 유적전체에서 비율로 보아서 석관묘에 묻힌 경우는 2곳을 제외하고는 말이 부장되지 않았다. 이 그룹에서도 석관묘에 묻힌 경우 말이 부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11호 남성은 나무무덤방에 안치되었지만 말이 없는 경우이다. 말이 부장된 13호 남성과 비교해 볼 때 무덤방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지만(표 참고) 무덤상부를 덮은 돌의 범위는 작다. 또 무덤방을 만든 나무의 직경이 크지 않다.

 

 

  이 그룹에서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같아서 서로의 짝이 있어 보이지만, 9호 여성은 유물이 한점도 출토되지 않아서, 유물의 공통성을 통해서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유물의 공통성을 통해서 서로의 짝을 찾는 것은 아르잔-2호의 5호무덤에서 알 수 있다. 아르잔-2호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유물에는 서로가 공통된 동물문양장식을 하고 있었다. 남성의 철제 칼에 장식된 금박 장식은 여성의 목걸이 장식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잔-2호 0606, 0602 포스팅 참고). 물론 아르잔-2호의 5호무덤은 남녀가 합장되었기 때문에 이런 점이 아니라도 서로가 짝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 서로가 비슷한 문양을 가지고 있는 관계가 서로의 짝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0호 여성무덤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1호 남성무덤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3호 남성무덤

 

10호 여성의 경우는 동물문양장식이 머리맡에서 나와서 모자에 달았다(그림 1-4,5). 그러나 11 호남성은 동물문양 장식이 없고 모자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3호 남성의 머리 위에서 금박(그림 3-9)이 남았는데, 산염소의 뿔 형상과 비슷하다. 모자의 장식이었을 것이다. 10호와 13호 남녀가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무덤호수

성별

그룹

무덤시설

크기

말 매장

상부직경(m)

시설(cm)

첫 번째열

 

1

아이

1그룹

통나무관

 

0

 

5세기

2

나무무덤방

 

1

 

 

3

나무무덤방

 

2

 

 

4

석관묘

 

0

 

 

5

나무무덤방

 

0

 

 

6

아이(남향

2그룹

나무무덤방

 

0

 

 

7

남녀

나무무덤방

 

2

 

 

8

여성(서향)

나무무덤방

 

0

 

 

9

여성

3그룹

석관묘

7

140×80

0

 

 

10

여성

나무무덤방

7

160×100

1

 

 

11

남성

나무무덤방

5-6

230×140

0

 

 

12

아이

석관묘

7

160×110

0

 

5세기

13

남성

나무무덤방

7

240×150

1

 

4~3세기

14

아이

석관묘

5

120×100

0

 

 

15

남성여성남성

 

나무무덤방

 

1

 

 

16

여성

 

석관묘

 

0

 

4~3세기

17

여성

4그룹

석관묘

 

0

 

4~3세기

18

남성

석관묘

 

0

 

투르크시대

19

 

투르크

 

 

 

20

 

투르크

 

 

두번째열

4~3세기

21

남성

석관묘

 

0

 

 

22

남성

나무무덤방

 

2

 

4~3세기

23

남성

석관묘

 

2

 

 

24

무덤없음

무덤없음

 

 

 

4~3세기

25

남성

석관묘

 

1

 

5세기

26

남성

5그룹

나무무덤방

 

2

 

 

27

여성

나무무덤방

 

0

 

 

28

여성

나무무덤방

 

0

 

 

29

여성

나무무덤방

 

2

 

 

30

남성

나무무덤방

 

1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 통나무관은 1기가 확인되었고 다른 아이는 6호, 12호, 14호 석관묘에 매장되었다. 특히 6호의 아이는 두향이 남향을 하고 있다. (앞에서 14호를 나무무덤방으로 잘못 표기했음. 14호는 석관묘(돌널 무덤임)이다)

 

이제 기억이 안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크 알라하-1 유적의 2호에도 나무무덤방에 아이가 매장되었다. 이 아이는 함께 부장된 유물이 거의 어른과 동일하다. 소형무기(활과 화살, 투부, 검) 및 목걸이, 고깔모자, 귀걸이 등을 착용한 상태였다.

 

2020/02/2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알타이 산의 남자아이 무덤

 

2500년 전 알타이 산의 남자아이 무덤

러시아 알타이 산맥 가운데 가장 높은 곳 중에 한 곳인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펴보았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무덤의 바로 옆 북쪽에 바짝 붙어서 무덤이

eastsearoad.tistory.com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 1호(위)와 2호(아래)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 6호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 유적 12호

 

그림 4. 바르부르가지 I유적 14호

 

 그러나 이 유적의 어린아이 무덤에는 거의 유물이 없었다. 1호가 속한 그룹은 기원전 5세기, 14호는 기원전 4~3세기이다. 12호는 14호와 같은 그룹이지만 13호와 함께 만들어져서 14호보다 더 빠를 수 있다. 그래도 100년 정도이다. 기원전 아크 알라하–1유적의 2호가 2500년 전 기원전 5세기 유적이기 때문에 유물이 많지 않은 어린아이의 무덤은 시간 차이로 설명할 수 없다. 통나무관 자체가 유물 부장을 많이 할 수 있는 무덤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석관묘 속의 아이는 아크 알라하-1유적 2호와는 너무 차이가 크다.

아크 알라하-1 유적과 바르부르가지 I유적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조차 유물의 차이가 확인되는 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것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를 비교한 이유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조차 유물차이가 나는 것은 부(富)를 가지고 있는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의 차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크 알라하-1유적 2호분과 같이 어린아이가 많은 유물을 부장할 수 있는 이유는 어른이 물려주었을 기 때문이다.

 

유스티드 XII유적,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 확인되는 통나무관의 어린아이 무덤에는 유물이 많지 않다.

 

특히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는 나무무덤방도 아니고 석관묘에 아이를 매장했다.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에서 통나무관에 묻은 어린아이는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통나무관도 아니고 나무무덤방도 아닌 석관묘에 묻힌 아이는 그런 부활의 의미 조차 부여 받을 수 없는 존재였을까?

 

 

 

무덤호수

성별

그룹

무덤시설

말 매장

첫 번째열

 

1

아이

1그룹

통나무관

0

 

5세기

2

나무무덤방

1

 

 

3

나무무덤방

2

 

 

4

석관묘

0

 

 

5

나무무덤방

0

 

 

6

아이(남향

2그룹

나무무덤방

0

 

 

7

남녀

나무무덤방

2

 

 

8

여성(서향)

나무무덤방

0

 

 

9

여성

3그룹

석관묘

0

 

 

10

여성

나무무덤방

1

 

 

11

남성

나무무덤방

0

 

 

12

아이

석관묘

0

 

5세기

13

남성

나무무덤방

1

 

4~3세기

14

아이

석관묘

0

 

 

15

남성여성남성

 

나무무덤방

1

 

 

16

여성

 

석관묘

0

 

4~3세기

17

여성

4그룹

석관묘

0

 

4~3세기

18

남성

석관묘

0

 

 

19

 

투르크

 

 

 

20

 

투르크

 

두번째열

4~3세기

21

남성

석관묘

0

 

 

22

남성

나무무덤방

2

 

4~3세기

23

남성

석관묘

2

 

 

24

 

무덤없음

 

 

4~3세기

25

남성

석관묘

1

 

5세기

26

남성

5그룹

나무무덤방

2

 

 

27

여성

나무무덤방

0

 

 

28

여성

나무무덤방

0

 

 

29

여성

나무무덤방

2

 

 

30

남성

나무무덤방

1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 무덤 28기가 확인된다. 한 계곡에 함께 매장되었으니 한 친족 집단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룹이 있다. 쿠바레프는 남북방향으로 서 있는 무덤 가운데 중앙에 남성의 무덤이 위치하고 앞과 뒤쪽에 여성 무덤이 들어선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2호와 3호는 남성무덤, 그 앞 1호는 아이, 그 뒤는 4호와 5호는 여성무덤인데, 한 그룹으로 보았다. 6~8호도 7호의 남녀의 합장 무덤 앞 뒤로 아이와 여성무덤이 배치된 경우이다. 9~14호도 하나의 그룹이다. 11호와 13호 남성을 중심으로 아이와 여성이 앞 뒤로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남성을 중심으로 앞 뒤에 아이와 여성이 배치되는 구조는 바르부르가지 유적에서 3그룹이 있다. 쿠바레프의 자세하지 않은 설명이다.

 

17~25호를 한 그룹으로 묶었다. 17호와 18호는 열이 다르지만 출토된 유물이 21~25호 무덤과 비슷해서 묶은 것이다. 특히 17호와 18호에서 출토되는 동물문양은 목제로 제작된 것으로 ‘알타이 동물문양장식’(그림 2-3,6)이라고 명명했다. 19호와 20호는 투르크 시대 무덤이고, 24호는 아래에 아무런 무덤이 없는 덮힌 돌만 발견되었다. 16호는 무덤이 매우 소략해서 17호와 같은 석관묘이지만 같은 그룹으로 묶지 않았다.

 

 

무덤호수

성별

그룹

무덤시설

말 매장

첫 번째열

 

1

아이

1그룹

통나무관

0

 

5세기

2

나무무덤방

1

 

 

3

나무무덤방

2

 

 

4

석관묘

0

 

 

5

나무무덤방

0

 

 

6

아이(남형

2그룹

나무무덤방

0

 

 

7

남녀

나무무덤방

2

 

 

8

여성(서향)

나무무덤방

0

 

 

9

여성

3그룹

석관묘

0

 

 

10

여성

나무무덤방

1

 

 

11

남성

나무무덤방

0

 

 

12

아이

석관묘

0

 

5세기

13

남성

나무무덤방

1

 

4~3세기

14

아이

나무무덤방

0

 

 

15

남성여성남성

 

나무무덤방

1

 

 

16

여성

 

석관묘

0

 

4~3세기

17

여성

4그룹

석관묘

0

 

4~3세기

18

남성

석관묘

0

 

 

19

 

투르크

 

 

 

20

 

투르크

 

두번째열

4~3세기

21

남성

석관묘

0

 

 

22

남성

나무무덤방

2

 

4~3세기

23

남성

석관묘

2

 

 

24

 

무덤없음

 

 

4~3세기

25

남성

석관묘

1

 

5세기

26

남성

5그룹

나무무덤방

2

 

 

27

여성

나무무덤방

0

 

 

28

여성

나무무덤방

0

 

 

29

여성

나무무덤방

2

 

 

30

남성

나무무덤방

1

표.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무덤(김재윤 작성)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6호(상)와 17호(하)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17호 유물

 

마지막 그룹은 26~30호인데 나무무덤방에서 매장된 그룹이다. 앞뒤로 남성이 배치되고 중앙에 여성이 배치되었다.

앞서 살펴본 울란디르크 계곡의 유적과 유스티드 계곡, 파지릭 계곡의 유적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빨리 만들어진 무덤은 2,13,26호로 기원전 5세기의 무덤이다. 14호, 17, 18, 21, 23, 25호 무덤은 기원전 4~3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속해 있는 무덤의 그룹은 만들어진 순서가 정해질 것이다.

 

2호,13호, 26호가 속한 1그룹(표 참고)과 5그룹, 3그룹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3그룹 무덤 가운데 14호 무덤은 기원전 4~3세기 가량임으로 1그룹과 3그룹 보다는 늦게 만들어졌을 수 있다.

 

1그룹, 5그룹-> 3그룹-> 4그룹의 순서로 무덤이 들어섰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8기 무덤은 가장 앞 열과 뒷 열의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중앙을 채워가는 방법이다. 물론 쿠바레프는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룹화 된 무덤과 연대를 바탕으로 필자가 복원한 것이다. 2그룹과 15호, 16호는 유물을 비교하면 좀 더 정확하게 유적에 들어선 무덤 순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 그룹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와는 어떻게 다른 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룹이 모여서 할 수 있는 행위는 같이 밥 먹기, 같이 이동하기 등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탄소연대측정은 딱 1기에서 확인되었는데, 4호 무덤이다. 보정연대로 기원전 490년에 해당된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답답하실 것이다. 왜 좀 더 세밀한 분석을 못하는지에 대해서..이 유적을 발견한 것은 1968년이고 유적 전체를 발굴완료한 것은 1978년이다. 바르부르가지I유적이 보고된 책이 나온 해는 1992년이다. 1991년은 소비에트 연방이 망한(페레스트로이카) 해이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측정이 단 한건만 이루어진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모든 게 뒤바뀌면서 배급이 끊어지고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그 지원이 끊긴 상황에도 그래도 책을 낸 쿠바레프 박사와 이를 지원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응원을 보내야 한다..늘 느끼는 거지만 국가의 재력은 학문의 수준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의 추야 강 지류인 바르부르가지 강 유역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러시아연방 내의 알타이 공화국이다. 이 유적 보다 북쪽에 위치한 부구준 강 유역에서도 스키타이시대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말라투 IV유적이다. 이곳은 거의 알타이 공화국을 벗어난 투바 공화국에 위치한다. 물론 러시아 연방의 연방국가 중에 하나이다. 투바는 우육 계곡의 아르잔-1 유적이 있던 곳이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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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투 IV유적에서는 스키타이 시대 24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으나 이제까지 본 유적과는 다르다. 열을 이루는 듯 해 보이지만 세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물론 바르부르가지 I유적도 2열로 있었으나 1열과 2열 사이에는 거리가 멀지 않았으나, 말라투 IV유적은 확연하게 거리를 두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한 듯 해 보인다.

 

 

그림 1. 말라투 IV유적, 26번은 투르크 시대 무덤 그 외는 스키타이 무덤.

 

말라투 IV유적에서는 대부분 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었다. 어제 살펴본 바르부르가지I유적처럼 돌널무덤(석관묘)가 사용되지 않았다. 무덤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세 그룹의 무덤이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매장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1번 그룹과 2번 그룹 사이에 매장된 9번은 중간의 공간을 이용한 무덤으로 가장 늦은 무덤으로 생각했다. 부장된 유물도 거의 없다.

이 유적에서 말이 매장된 무덤은 11~13호와 9호이다. 그 외는 말이 없었다.

특히 비슷한 시기의 타샨타 유적에서 대부분 발견되던 목제의 말 모양이나 산양모자장식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금박종이에 동물문양이 남아 있는 무덤은 말이 있는 무덤에서는 확인된다. 말이 있는 무덤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유물은 간단한 칼이나 무기류이다. 가장 다양한 동물문양장식이 남아 있는 무덤은 18호로 말은 부장되지 않았다.

타샨타 유적과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몇몇 무덤에서 발견된 맹수달린 목걸이도 이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재갈멈치에도 거의 장식이 없었다.

즉 이 유적의 사람들은 모자에 목제로 된 동물인형이나, 맹수달린 목걸이 장식을 하지 않았다.

 

 

그림 2. 말라투 IV유적의 9호분

 

 

그림 3. 말라투 IV유적의 11호

 

 

그림 4. 말라투 IV유적의 12호

 

그림 5. 말라투 IV유적의 13호

 

 

그림 6. 말라투 IV유적의 13호 유물

그림 7. 말라투 IV유적의 18호 유물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는 맹수 달린 목걸이 장식을 한 무덤이 4호(늑대), 10호(불명확), 17호(호랑이), 18호(산양), 26호(늑대)에서 확인된다. 목걸이 끝을 장식한 동물은 늑대와 호랑이 장식이다. 타샨타 I유적 2호분에서는 재갈멈치에 호랑이가 부착되었고, 늑대모양 맹수 끝장식을 단 무덤이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호랑이와 늑대는 같은 지역 내에 거주하지 않는 동물로 알려졌다. 원래 호랑이 장식이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부터 목제로 확인되고, 좀더 이전인 아르잔-2호에서는 금판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동물장식이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되면 호랑이도 있지만 같이 살지 않는 늑대도 나타난다(늑대는좀 더 이른 시기에도 있으나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그런 동물문양이 없어지는 말라투 VI유적과 같이 있다. 혹시 이 시점 쯤에 호랑이는 전설의 동물이 되고, 대신 늑대가 그를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추야강의 지류인 바르부르가지 강 유역의 스키타이 무덤인 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는 서른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근현대에 들어선 수로 덕분에 무덤은 2그룹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 축조 될 때부터 2열로 축조되었다. 그 중앙을 후대에 공교롭게도 수로가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른기의 무덤가운데 고대 투르크시대의 것은 19,20호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 평면도

 

보통 한 계곡에 1열로 무덤이 들어서지만, 이 계곡에는 특이하게 2열로 무덤이 형성되었고 이 무덤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하나의 유적으로 보았다. 16호와 17호 사이에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에서 18호까지를 첫 번째 열, 21호부터 30호까지를 두 번째 열이라고 하자. 첫 번째 열에서 말이 없는 무덤은 13기나 된다. 두 번째 열에서는 24호를 제외하고 말 없는 무덤은 3기이다. 24호는 무덤처럼 보이는 덮는 돌만 발견되었고 아래에는 무덤시설이 없었다.

 

무덤호수

무덤시설

말 매장

첫 번째열

1

통나무관

0

 

2

나무무덤방

1

 

3

나무무덤방

2

 

4

석관묘

0

 

5

나무무덤방

0

 

6

나무무덤방

0

 

7

나무무덤방

2

 

8

나무무덤방

0

 

9

석관묘

0

 

10

나무무덤방

1

 

11

나무무덤방

0

 

12

석관묘

0

 

13

나무무덤방

1

 

14

나무무덤방

0

 

15

나무무덤방

1

 

16

석관묘

0

 

17

석관묘

0

 

18

석관묘

0

 

19

투르크

 

 

20

투르크

 

두번째열

21

석관묘

0

 

22

나무무덤방

2

 

23

석관묘

2

 

24

없음

 

 

25

석관묘

1

 

26

나무무덤방

2

 

27

나무무덤방

0

 

28

나무무덤방

0

 

29

나무무덤방

2

 

30

나무무덤방

1

 

 

첫 번째 열에서는 석관묘가 6기, 나무 무덤방이 11기 발견되었는데, 석관묘에는 모두 말이 없었다. 나무로 된 무덤에도 말 없는 비중은 거의 50% 가까이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열에서는 말 없는 석관묘는 21호 뿐이다. 25호 무덤에서 미라가 발견되었고, 다른 무덤 보다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도 전통적으로 미라의 무덤방 재료로 만들어진 나무가 아닌 돌이다. 인접한 유적도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에서만 특히 돌로 만든 석관묘를 많이 사용했다.

 

이 계곡의 첫 번째 열에 묻힌 가족집단은 말을 매장하지 않은 혹은 말을 매장할 수 없는 조건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열이라고 불리는 21~30호 무덤이 먼저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석관묘(돌널무덤)은 이미 아르잔-2호에서부터 확인된 무덤 시설이고, 그 이후에도 많지는 않지만 확인된다. 유스티드 XII유적 및 울란드리크 I유적 5호 에서도 석관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4세기 가량으로 보았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미라가 발견된 석관묘에는 바닥에 나무판 4개를 깔았는데 목곽묘(나무무덤방)의 바닥시설이다. 어쩌면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열에서 25호 석관묘는 유스티드 XII유적, 울란드리크 I유적의 석관묘 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수 있다. 목곽묘(나무무덤방)의 전통이 남아 있는 혹은 채용한 혹은 스타일 등등 용어는 붙이기 나름이다.

미라가 발견되고, 다른 유적에 비해서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점(바르부르가지 I유적 25호)을 보아서 석관묘가 목곽묘(나무무덤방)보다 ‘못한’ 무덤 시설로 볼 수 없다. 오히려 돌로 만든 무덤은 스키타이 이전 청동기시대 전통에 더 까깝다.

 

시베리아에는 청동기시대부터 무덤 시설로 사용된 것은 돌로 만든 돌널무덤이다. 청동기시대로 거슬러가서 스키타이 문화와 가장 가까운 문화인 카라숙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오쿠네보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역순)에서는 모두 돌널무덤이다. 무덤을 둘러싼 호석(무덤울타리)이 모두 발견된다. 사실 청동기시대 이전 신석기시대에도 간략하지만 돌을 무덤 시설로 사용했다. 말을 통째로 매장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 카라숙 문화 이후에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로 알려진 아르잔-1호에서 통나무 6000개를 사용해서 나무로 만든 무덤 이후부터 나무가 무덤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돌이 무덤의 시설로 이용되지만 나무도 함께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가 되었던 추야강의 지류인 바르부르가지강에도 스키타이 시대 여러 유적이 산재한다.

그중에서는 바르부르가지 I유적 25호분과 같이 미라가 출토되는 유적도 있지만 대부분 미라는 없다.

25호와 인접한 23호 유적도 스키타이 시대 돌널무덤이다. 23호(위의 덮은 돌 범위 6m, 300×210×200cm)에도 무덤 안에는 2마리 말과 사람 2명이 부장되었다. 그러나 무덤구덩이는 바닥까지 파서 말을 매장했다. 25호와 같이 계단처럼 단을 지게 무덤바닥 시설을 하고 그 위에 말을 매장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덤방 바닥에 나무를 깔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도 미라가 출토된 무덤에 비해서 소략한 편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3호, 1~3: 마구장식(목제), 4-재갈(철제), 5~8: 목제 목걸이와 이를 덮은 금박종이, 9,10-칼(청동), 11-송곳?, 12-모형 전투용 투부, 13-갈고리 모양 장식(청동), 14-실크 조각, 15- 토기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 23호의 유물

 

그림 3.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미라무덤) 유물, 1-목제쟁반, 2-칼, 3-목제 잔(손잡이가 둥근), 4-의복조각, 5-목걸이를 둘러싼 금박종이 조각

 

그림 4.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 6-이마장식, 7,8-목제 말모양 인형, 9-사슴머리, 10-산양몸통의 사슴,11~14-원뿔모양의 펜던트, 15-빗, 16-모형 검, 17-칼, 18-모형의 전투용 도끼, 19~21: 모형 활, 22-화살통 일부, 23-목제 말뚝,

 

그림 5.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유물 24, 25-허리띠 장식, 26~28: 허리띠 장식, 29-전투용 투부에 부착된 장식판, 30-화살통 장식, 31,32-단추, 33-멧돼지 송곳니 모양 장식, 34-거울, 35, 36-물고기 모양의 장식. 37-토제 항아리, 38-돌 베개, 39-아주 얇은 가죽, 40-펠트조각

 

2020/10/2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바르부르가지 강의 유적] - 알타이의 미라와 부활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북쪽에 위치한 26호 무덤(직경 9.5m, 300×250×220cm)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나무무덤방 안에 2인이 매장되었고, 말 2마리가 있었다. 나무무덤방은 긴 나무통을 그대로 이용해 동서의 단벽을 쌓고 남북의 긴 벽을 이용한 무덤이다. 바닥에는 통나무를 깔았다.

 

그림 6.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1,5-철제 재갈, 2,3-구멍 뚫린 장신구, 4,6-동물장식이 달린 재갈멈치, 7-이빨모양 장식판, 8- 동물문양장식금판, 9~12: 새 모양 장식판(금판), 13-산양뿔 모양 장식판, 14, 15-원뿔모양 장식판, 16-목걸이, 17,18-거울, 19-20-펜던트, 21,22-칼, 23-끈 벨트의 걸쇠, 24-단추형 장식판, 25-목제 검집, 26-목제 쟁반, 27-2개의 토제 항아리, 28,31-돌 베개, 29-검은색 물감의 범위, 30-허리띠 장식판(1,22,25-철제, 2,3-뼈, 4,6,14,24,26,28,30-목제품, 5, 17-21,23-청동제, 7-13, 15-금박, 16-청동+목제, 27-토제, 31-돌)

 

그림 7.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6호 유물

 

 

 흥미로운 점은 미라가 나온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바로 남쪽에 위치한 24호로 명명된 무덤은 사실 무덤이 아니었다. 위에만 돌을 직경 5m가량으로 덮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3~25호가 거의 붙어 있는 무덤이었고, 25호 북쪽에 위치한 26호무덤은 약간 떨어져서 확인되었다. 23~25호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이고, 26호는 무덤의 시설물과 유물의 차이로 보아서 시간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25호 무덤에서 나온 목제쟁반(그림 3-1)은 이제까지 출토된 쟁반과 달리 바닥에 받침이 붙은 모습이다. 당장 26호에도 목제쟁반의 바닥(그림 7-26)은 편평하다. 이 유물 26호와는 시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든 무덤과 그렇지 않은 무덤(23호)은 말의 부장과 무덤시설에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미라가 들어간 무덤의 유물은 의례용 무기를 더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단순한 비교이고,  최소한 같은 유적에서 같은 시간대에 만들어진 무덤 안에서 비교할 때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에서 고대로부터 교통로로 사용되어 온 추야강의 지류인 유스티드 강과 울란디르크 강 유역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추야강의 또 다른 지류인 바르부루가지 강에서도 흥미로운 유적이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I유적에서는 모두 30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된다. 남쪽에는 1~18호, 북쪽에는 21~30호가 있다. 두 그룹 사이로 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수로가 지나가는데, 붕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이제까지 본 무덤과는 약간 다른 구조의 무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25호 무덤에는 남성미라 1구가 발견되었다. 미라로 처리한 부위는 두개골, 손, 발로 피부상태가 좋았다. 그 외의 부위는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은 돌판을 무덤으로 쓴 돌널무덤(석관묘)이다. 석관묘의 바닥에는 4개의 나무판을 깔았고 석판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덮었다. 무덤 구덩이는 보통 단을 만들지 않지만 말을 부장하는 구덩이의 북쪽에 단을 만들고 말을 넣어서 석관묘의 높이와 맞추었다. 무덤의 깊이는 120cm, 크기는 290×240×205cm이다. 이 무덤 상부의 돌을 덮은 범위는 (적석) 6m이다.

 

그림 1.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의 평면도

 

그림 2.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상부와 단면도

 

 

앞에서 유스티드 XII유적과 울란디르크 I유적에서도 돌널무덤이 있었으나, 무덤바닥에 나무를 깔고 여러 겹으로 덮는 것, 무덤구덩이에 단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미라의 머리 아래에는 돌침(돌베개)가 사용되었다.

 

알타이에서 발견된 유적은 지난 겨울~봄에 살펴본 아크 알라하-3유적,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파지릭 유적 2호, 5호 등이다. 2600~2500년 전 유적으로 기원전 6~5세기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의 25호 무덤에서 발견된 미라는 2600~2500년 전  미라 처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고 부장된 유물이나 무덤 등도  차이가 있다. 바르부르가지 I유적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만들어진 곳으로, 미라가 나온 25호는 기원전 4세기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쿠바레프 1992).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라로 전신의 관절을 끊지 않았고, 그 내부를 풀과 동물의 털로 채워넣었다. 반면에 바르부르가지I유적의 25호 미라는 사실 흉내만 낸 미라이다. 머리, 팔, 다리만 미라가 되도록 했고 몸통은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전성기인 2600~2500년 전 이후의 미라의 존재와 그 상태 등이 늘 궁금했는데,,약간은 해결된 듯 하다.

 

 통나무관에 어린아이를 묻는 장법이나 미라를 만드는 장법 등은 모두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 2400년 전 작은 무덤에 묻힌 사람에게도 그런 것을 누군가의 염원을 담았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지역에서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미라를 대신해서 사람을 닮은 인형을 무덤 속에 묻어 두었다. 청동기시대(오쿠네보 문화), 순동시대(글라스코보 문화), 신석기시대(키토이문화, 세로보문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모두 발견된다. 물론 시대별로 생김새와 재질은 차이가 있다. 

 죽은 자와 함께 넣은 미니어쳐 혹은 미라는 살아 있는 사람의 염원이 담긴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그리며 넣은 ‘재생’, ‘부활’에 가까울 것 같다. 설마 노잣돈의 의미로 넣은 것은 아닐테니...바르부르가지 I유적에서도 우코크 고원이나 파지릭계곡의 유적과 같이 화려한 무덤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를 담아서 무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는 가장 뒤에 위치한 13~15호가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점을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럼 울란드리크 I 유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무덤은 무엇일까? 5호와 7호이다.

5호는 이제까지 무덤방이 석판으로 만들어진 석관묘(돌널무덤)이다. 유스티드 XII유적에서도 있었던 무덤이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는 다르다. 앞서 보여드린 유스티드 XII유적의 7호는 두향이 동향이고 바닥은 여러 매의 돌을 깐 것이다. 울란디르크 I 유적의 5호는 북향에 가깝고 바닥에는 돗자리? 같은 나무막대기를 엮어서 깔아두었다.

 

그림 1. 울란드리크 I유적 5호

 

울란드리크 I유적의 7호분은 이제까지 보여 드린 울란드리크 강 계곡의 여러 무덤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덤방 바닥에서 북쪽 부분의 바닥은 나무를 하나 빼 두었지만, 이 무덤방에는 전면에 나무를 깔았다. 무덤방의 결구방법은 단벽인 (동서방향의 벽을 쌓고 긴 벽인 남북뱡향의 벽을 쌓는 방법으로 기원전 5세기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보던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늦은 시기의 무덤 축조 방법은 나무의 가장 끝단에 요철을 내어 결구해서 위와 같이 쌓지 않고 돌아가며 벽을 쌓는다)

 

그림 2. 울란드리크 I유적 7호

 

그림 3. 울란드리크 I유적 2호

 

이런 무덤방과 같은 무덤은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2호, 7호, 8호가 있다. 7호에서 채취한 목탄으로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470년으로 판명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울란드리크 I유적 5호분에서도 기원전 390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베레프는 이 유적이 크게 3번의 시기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무덤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그룹이고, 그 이후에 3호, 4호, 6호, 12호가 만들어지고, 다시 13, 14, 15호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4. 울란드리크 I유적 평면도

 

쿠바레프는 1호, 9호, 11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통나무관인 4호와 9호는 제외하자.)

울란드리크 I유적의 1호는 무덤방을 만든 구조가 설명과는 약간 다르다. 통나무 끝에 요철을 내어 결구해서 벽을 돌려서 쌓았으나, 그림에는 동벽의 그림이 약간 이상하다.

 

그림 5. 울란드리크 I유적 1호

 

그렇다면 이 무덤도 가장 오래된 그룹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비슷하게 무덤을 만든 2 그룹 혹은 3그룹에 속할 수 있다. 9호는 무덤 결구방법이 단벽을 쌓고 긴벽을 쌓은 방법이고, 11호는 1호와 마찬가지로 쌓은 것이다. 그렇다면 9호의 출토유물도 차이가 크지 않으니 대략 7,8화 같은 시점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 뒤에 11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7~11호(10호는 투르크시대무덤)는 7,8,9호가 같은 그룹에 속하며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지고, 그 뒤에 11호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덤 4기는 한 단위 가족?일 수 있다.

(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1~2년의 단위가 아니라 한 세대 안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뒤돌아보니 크게 의미 없는 시간차이로 이야기 되지만, 아마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느낀 아날로그 같은 표현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부분도 정확해 질 수 있다. 탄소연대측정법이 있지만 오류도 만만치 않다)

 

 

울란드리크 IV유적에서도 무덤 3기, 울란드리크 V유적에서는 2기, 타샨타 II유적에서 4기가 발견되었다. 이 정도가 한 가족일 수 있다.(가족의 범위는 정확하지 않음)

 

그렇다면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열을 이루는 무덤일 경우 앞의 있는 무덤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7호 이후가 해당된다. 7호와 비슷한 시점?에 만들어진 5호와 2호는 만들어질 당시에 7호와 떨어져서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3호, 6호와 1호가 들어셨다. 즉 열의 순서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7호와 5호는 전혀 다른 무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가장 이른시기의 무덤으로 생각된 2호도 7호와 멀리 떨어져서 만들어졌다. 아마도 이 점도 알타이 파지릭문화의 가장 마지막 모습일 수 있다.

울란드리크 I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1그룹은 기원전 5~4세기, 2그룹은 기원전 3세기, 1그룹은 기원전 2세기이다.

 

울란드리크 I유적과 마찬가지로 무덤이 4기 이상 있는 유적은 울란드리크 II유적(스키타이 무덤 12기)과 울란드리크 III유적(스키타이 무덤 8기)이다. 이 유적 에서도 가장 뒤에 위치한 울란드리크 II유적 11, 12호, 울란디르크 III유적 6,7호가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림 6. 울란드리크 II 유적 평면도

 

그림 7. 울란드리크 III유적 평면도

 

 

울란드리크 V유적은 무덤이 2기만 있는데, 2호에는 말이 부장되지 않아서 늦은 시기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다. 가족장이라는 점에서 울란디르크 V유적은 2호가 만들어진 시점과 1호가 만들어진 시점은 비슷할 것이다. 울란드리크 V유적의 1호 출토유물은 울란디르크 III유적의 6호와 유물이 비슷하다. 그래서 울란드리크 V유적은 전체가 가장 늦게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림 8. 울란드리크 V유적 평면도

 

그림 9. 울란드리크 V유적의 1호

 

그림 10. 울란드리크 V유적의 2호

 

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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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울란드리크 강 유역의 8개 유적 가운데 맹수장식이 달린 목걸이는 남성의 유물로 모든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앞에서 울란드리크 I유적의 12호분에는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남성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바 있다.

 

울란드리크 강 유역이지만, 타샨타 마을과 가까운 곳은 마을의 행정명을 따라서 타샨타 유적이라고 명명된 곳이 있는데 타샨타 I유적 1호분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타샨타 I유적에는 무덤이 2기 뿐이다.

 

그림 1. 타샨타 I, II 유적, 타샨타 I유적의 2호는 통나무관이다.

 

타샨타 I유적 1호분에는 말 3마리와 남성이 한명 묻혔다. 말은 재갈과 재갈멈치로, 굴레장식이 착장되었다. 그 가운데 말 1마리(무덤방과 가까운 말)는 멧돼지 송곳니 모양 굴레장식만 있고, 재갈과 재갈멈치는 없는 상태로 매장되었다. 말은 방패(그림 3-9)를 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타샨타 I유적의 무덤, 1~3: 목제 재갈멈치, 4-철제 재갈, 5-목제 멧돼지모양송곳니장식, 6-목제 장식판, 7-목제 말머리 장식, 8-목제 말 장식, 9-목제 방패, 10-목제 장식, 11-목제 조이개의 부분, 12-목제 고리트(활+화살통)의 지지대, 13-자루를 끼운 청동투부, 14-청동검, 15-목제 검집, 16-목제 원판 장식, 금박으로 마감됨, 17-목제 말 장식(모자), 18-청동거울, 19-목제 말 장식, 20,21-목제 장식, 22-목걸이 끝장식, 23-목제 사슴장식, 24-목제 장식판, 25-목제 버클 장식, 26-목제 화살통 장식, 27-활과 화살의 부속품, 목제

 

그림 3. 타샨타 I유적의 무덤, 그림 2의 번호와 일치

 

그림 4. 타샨타 I유적의 무덤, 그림 3의 번호와 일치

 

이 남성의 목걸이(그림 4-22)는 양쪽 끝에 동물문양으로 장식하는 속성은 같지만, 앞에서 본 울란드리크 I유적 12호분과는 다른 종류의 동물이다. 울란디르크 I유적 12호분은 앞다리 부위에 동심원문양을 표현해서 일종의 합성동물이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호랑이에 표현된 날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남성의 목걸이는 단순한 맹수로 늑대종류일 가능성이 많다.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에 맹수류는 호랑이, 늑대 종류가 확인되고, 합성동물인 그리핀도 있다. 호랑이와 늑대는 실제로보면 전혀 다른 동물이지만 목제로 만들었을 때 별로 차이가 없는 듯 해 보이지만, 두 동물은 귀의 표현이 전혀 다르다. 실제 호랑이와 표범 등의 고양이과 맹수는 귀가 둥글지만, 늑대과의 동물은 귀가 뾰족하다. 이 무덤의 말 재갈에 달린 장식은 호랑이(그림 3-1,3) 얼굴이다.

 

 

그런데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에는 늑대가 거의 없다. 호랑이가 사라진 지역에 늑대가 들어온 예가 연해주와 아무르지역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급격하게 사라진 호랑이를 대신해서 이 지역에 늑대의 개체수가 늘어났다.

 

늑대장식이 있는 대표적인 유적은 아크 알라하-1 유적이다. 이 유적의 1호분에는 안장에 늑대모양을 달아서 장식했다. 이 남성 전사 2인의 무덤에서는 호랑이와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굴레장식은 독수리 머리 그리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샨타 I유적 1호분에서 호랑이와 늑대의 조합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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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Кубарев В.Д. 1987 : Курганы Уландрыка. Новосибирск: 1987. 304 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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