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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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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시베리아 알타이에 위치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 파지릭 유적을 살펴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흑해 북안의 유적들의 유물도 간간히 필자가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이 남긴 유물인 동물문양 가운데 늘 사슴문양이 있다. 사슴은 양, 염소, 말과 같은 우제류이긴 하지만 기르지 않는다. 사냥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슴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가장 인간이 많이 잡은 동물일 것이다.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가장 많은 그림 중에 하나이고, 패총에서도 사슴뼈가 많이 출토된다. 시베리아 알타이의 암각화에도 사슴은 가장 많은 주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사슴은 아니다.

 

왜 사슴과 같은 특정 동물이 금 혹은 목제로 만들어져서 정해진 자세로 표현되어서 여기저기 다 장식되었을까?

왜 호랑이 혹은 표범은 둥글게 몸을 말아서 표현했을까? 이 동물은 흑해 북안부터, 알타이, 투바, 미누신스크 지역에서 출토된다. 심지어는 이란의 지비예 유적에서도 출토된다(그림 2).

 

필자가 앞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란 제외)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유적의 무덤구조나 토기 등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는 명칭을 쓴다.

 

파지릭 1호분에서는 말 10마리가 매장되었는데, 그 중에서 3번 말의 안장 덮개(그림 1, 그림 2)는 펠트로 제작되었다. 가죽, 말꼬리, 금은 부속물로 사용되었다.

우선 안장덮개는 안장 위를 덮는 유물이다. 펠트 안장덮개 아래에는 가죽방석이 따로 만들어졌고 그 위를 덮은 유물인데, 가죽방석에 고정되었다.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 혹은 풀로 채워졌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분의 3번 말 안장덮개, 길이 119cm, 너비 60cm, 펠트로 제작됨. 말안장 끝에 붙은 양머리 장식의 털은 말총을 이용, 양의 눈에는 금박장식, 펠트덮개 아래에 가죽방석이 있음. 고정됨.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과 마른 풀로 채워짐.

 

 

 

파지릭1호의 안장덮개에는 그리핀이 영양을 공격하는 구조로 펠트 조각을 덧붙여서 표현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리핀은 여러 동물이 합성된 동물이다. 두 동물이 공격하는 구도의 동물문양은 늘 갑과 을이 정해져있다. 공격자는 그리핀이나 맹수류이고, 공격당하는 쪽이 야생염소, 사슴, 양, 염소 등이다. 파지릭 1호분의 그리핀은 알타이에서 출토되는 독수리머리라기 보다는 사자의 얼굴이다. 공격당하는 야생염소는 뒷다리가 뒤집어진 상태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매우 사실적이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푸른색, 황색, 검은색 등을 배열해서 매우 화려하다.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은 사실적이지만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동물의 종(種)구분이 가능하지만, 부분적인 표현- 눈과 입모양, 귀모양, 뿔모양 등은 매우 과장되었다.

추상적 표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리핀이다. 세상에 없는 동물이지만 그리핀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의 조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파지릭 1호분 안장덮개의 사자머리 그리핀은 아케메니드의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이 의미는 이 유물 자체가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다. 펠트조각을 이어서 만드는 기법은 알타이에 이미 있던 기법이다.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사람들이 만들었다). 알타이에서는 주로 독수리머리 그리핀이 확인된다. 바깥의 표현과 내부의 표현이 함께 표현되었다. 매우 사실적이지만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핀은 페르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와 만만치 않게 시베리아 기원설도 대두되어 있다. 알타이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핀이 유물로 표현된다.

 

그리핀이란 동물문양장식은 각 지역마다 특색은 있지만 여러 동물을 합체해서 만든다는 기본 아이디어 혹은 아이덴티티는 같다. 그리핀을 예로 들었지만 몸을 말고 있는 표범장식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렇게 널리 퍼져있었을까?

 

그림 2.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환상의 맹수. 1~5: 흑해북안의 유적, 6~10: 카자흐스탄(천산산맥의 유적), 12-이란 출토품, 이외에도 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 문화)에서도 환상의 동물은 출토된다.

 

부족의 상징이었을까? 깃발과 같은 상징? 그러나 깃발은 하나이다. 스키타이 동물문양은 여러 개의 표현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동물문양장식은 각 개개의 동물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어떤 기호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호에 대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널리 사용된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같은 동물의 종(種)이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그러나 세부적 표현은 다른 유물이 널리 퍼져있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환상의 맹수는 ‘양 1000마리’. 혹은 환상의 맹수는 ‘오늘부터 전쟁 중..’ 머 그런...

 

현대의 인터넷 환경에서와 같이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사회가 이미  있었지 싶다...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참고문헌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계곡의 모든 무덤이 같은 크기는 아닌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 고분은 5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1호는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 1호에서는 나무 삽 조각, 이미 깨진 말뚝 4점, 말뚝을 박는데 사용된 일종의 나무 망치와 마차의 부속품이 확인되었다. 이음쇠 2개, 쐐기, 끝이 뾰족한 막대기 2개 등이다.

 

무덤방 안에서는 통나무관과 통나무관을 장식한 수탉 아플리케 장식(가죽)(어제 포스팅 참고), 산양머리조각(가죽)(그림1-6,7), 무덤방 벽에 붙었던 사자머리 아플리케(그림2)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양모로 제작된 그릇 받침대로 둥근 고리모양이다. 숫양의 꼬리뼈도 출토되었는데, 고깃덩어리를 부장했을 것이다. 목제 상의 다리(그림3-1), 목침(그림4-a), 목제 손잡이 달린 망치(그림 5-1,2), 토기 파편, 나무와 금제 잎으로 장식된 가죽 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산양머리조각(6,7)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사자머리아플리케

 

그림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 상다리(1)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침(1). 루덴코는 이를 나무의자로 보았으나 목침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림 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망치(1,2)

 

무덤방의 바깥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모두 10마리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10마리가 부장되기 때문에 잘 정리되어 들어갔는데, 앞선 포스팅에서 말의 매장순서를 간략하게 모식화 한 것을 이미 공개했다.

말은 10마리 모두 재갈 뿐만 아니라 고삐를 연결하고 말 얼굴을 둘러싼 굴레와 안장이 모두 착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면장식을 쓴 말은 2개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이라도 파지릭 2호와 5호에서 출토된 말은 모든 말에 장식이 착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랴즈노프는 10마리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그림 6~23).

 

그림 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

 

그림 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6과 동일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2번 말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

 

그림 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8과 동일

 

그림 1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

 

그림 1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10과 동일

 

그림 1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

 

그림 1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

 

그림 1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의 굴레장식, 그림 13과 동일

 

그림 1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6번 말의 굴레

 

그림 1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

 

그림 1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의 굴레와 안장, 그림 16과 동일

 

그림 1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그림 16과동일

 

 

그림 1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 이 말의 굴레장식은 이미 공개되었음

 

그림 2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

 

그림 2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3와 동일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발견되었다. 한 계곡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되는데, 주로 가족 혹은 친족들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 시절 이 곳에는 매우 큰 무덤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안에는 무덤방과 통나무관을 안치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무덤은 아니고 소형무덤도 있다. 파지릭계곡에서 큰 무덤은 모두 5기이다. 어제 소개한 1호 무덤은 상부에 드러난 돌의 범위가 직경이 47m,높이는 2.2m정도이다. 그 안에 무덤 구덩이 크기는 7.2×7.2m가량이다.

 

무덤 구덩이 안에 무덤방 안은 관을 넣어두는 공간을 빼고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고, 무덤구덩이를 통나무 300개와 흙, 돌을 차례대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대단히 계획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덤방안에서 관은 한쪽 벽에 치우치게 배치되어 정중앙은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아마도 파지릭 인들은 무덤 구덩이가 내려앉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그들 조상의 무덤을 보아서도 관은 한쪽 벽으로 부쳐두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2500년 전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바샤다르 유적이 있는데, 파지릭 유적보다 약 100여년 빠르다. 파지릭 유적에 매장된 혹은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바샤다르 유적을 알았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그림 2.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복원

 

1호 통나무관은 관은 길이가 371cm, 너비 65-78cm, 높이가 58-60cm가량이다.(어제 포스팅에 잘못된 수치를 넣었다.) 뚜껑은 길이 371cm, 너비 54-61cm, 높이가 25-27cm이다.

이 관은 낙엽송의 하부를 이용한 것이다. 관의 구멍은 무덤으로 내려간 밧줄을 지탱하기 위한 구멍이다. 관의 바닥 두께는 9~11cm, 측벽 두께는 1.5~3cm, 상단 끝의 두께는 최대 25cm이다. 뚜껑은 큰 청동못으로 관에 고정되었지만, 이미 제거된 상태이다. 주로 나무못을 많이 사용하는데, 베렐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에서는 청동못을 사용했다.

 

통나무관의 길이는 주인공의 계급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족장은 3.25m에서 긴 것은 5m까지, 귀족은 2.5~3m이고, 일반인은 관 대신에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경우도 많다. 아이의 무덤은 무덤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1~1.3m의 나무판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만든다.

 

파지릭 1호 통나무관의 측벽에는 나무 마개가 삽입되었는데, 비슷한 마개가 다른 관에서도 관찰된다. 통나무관의 뚜껑에는 금이 가 있는데, 이는 관을 만드는 동안에 생겨서 가죽끈으로 이를 보수한 흔적이 있다.

 

관은 가죽이나 자작나무껍질로 장식된다. 파지릭 무덤의 1호 관에는 통나무관의 양 측벽에 14개의 가죽아플리케가 조각되어 있다. 가장 중앙(그림 3-1)에는 수탉 머리와 날개가 표현된 가죽장식이 부착되었고(그림 2), 양 쪽에는 수탉의 전신(그림 3-2, 그림 2)이 가죽을 잘라서 만들어서 붙였다. 두 가죽 장식 모두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자른 것이다.

 

수탉은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독수리 보다 늦게 등장하는데, 큰 동물의 뿔과 갈기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다. 닭이 이 지역에서 길렀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중국북부(만주)에는 암탉이 존재했다. 수탉은 의복, 토기, 못의 대가리, 문신 등에서 머리 혹은 머리의 벼슬만이 주로 확인된다. 러시아 학자들은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예를 보이는 것이 베렐 유적에서는 거울 손잡이에 독수리와 수탉이 함께 장식된 유물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1호 관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 1-길이 18.5cm, 너비: 12cm, 2-길이: 18.5cm, 15.5cm.

 

그런데 정말로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사진은 좀 그렇습니다..내용상.....

 

 

2500년 전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의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2호분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되었다. 2호분은 40대 가량의 여성과 55~60세 가량의 남성이었다. 골격의 특징으로 보아서 몽골로이드로 판명되었다. 요즘 같으면 DNA분석법을 썻겠지만, 1947년에 발굴하고, 1953년에 나온 단행본에서는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 의존했다.

 

5호분의 남성은 대략 55세 가량이다. 그런데 2호분의 남성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고 한다. 머리크기는 중간정도인데(두개골 계측치 78), 이마는 높고 길고 턱이 돌출되었다. 광대뼈는 넓은 편인데, 그렇게 돌출되지는 않았다.(광대뼈 사이의 직경은 146mm)이다. 코는 길고 좁으며(32×54mm) 강하게 돌출되었다.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아 강 사이가 민족의 기원지로 밝혀진 오늘날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스탄 인의 얼굴 가운데서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이 남성의 키는 175~176cm이다. 이 남성의 머리색은 검고 약간 곱슬기가 있는 편이다.

5호분의 여성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고, 미라처리에 관한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통나무관에서 확인된 남성의 모습

 

 

5호분의 남성은 미라처리를 했으나, 2호분의 미라와는 다르다고 했다. 어떤 점이 다를까?

 

미라처리를 했다는 말은 두개골의 뇌를 제거했고, 신체에서도 근육과 장기등을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의 두개골 뒤쪽에는 정수리에서 약간 왼쪽을 통해서 뼈를 잘라내었다. 11cm가량으로 꿰맨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남성의 뒷면은 목 아래 3cm 척추까지 세로 절개선이 남아 있다. 이 절개면은 어깨를 가로지르는 절개면과 교차된다. 어깨부위의 절개면은 5cm간격으로 꿰매었다. 목 부위의 절개면은 어깨면을 묶은 끈 보다 가는 끈을 이용했다(그림 2).

몸에는 겨드랑이에서 갈비뼈까지 절개한 흔적이 있는데, 말총으로 꿰맨 흔적이 선명하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신체에 절개흔적이 남아 있고 말총으로 꿰매었다. 가슴의 피부는 겨드랑이 부분에서부터 여섯 번째 갈비뼈까지 찢어진 상태이다. 흉부의 절개면 9cm아래에서부터 복부 절개가 시작되는데, 배꼽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타구니까지 남아 있다. 배꼽 옆에는 2~3cm가량의 작은 절개면이 있다(그림3).

팔의 절개면은 겨드랑이 안쪽에서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있다. 손과 손가락 바깥쪽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다. 손근처와 팔뚝 바깥쪽에 길이 4~5cm가량의 절개면이 남아 있다. 남성의 오른손의 중지와 남성의 성기를 관통해서 실로 묶였다.

하반부의 천골 안쪽 가장자리로부터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절개면이 연결된다. 무릎 뒤에만 3~4cm 간격이 남아 있다. 발목뼈에서 둘째 발가락까지 이어지는 절개면이 있다.

남성의 몸에 있는 절개면은 모두 말총꼬리를 사용했는데, 손가락을 고정시키는 부분에만 양털을 이용했다.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남성 두개골 뒷모습

 

그림 3. 파지릭 5호분 남성의 전신

 

 

여성은 엠블링하는 방법이 약간 달랐는데, 두개골은 측두골과 두정골 사이의 왼쪽에 남아 있는데, 절개면은 꿰매져 있었다(그림 4). 후두부에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2개의 절개면(4cm, 10cm)이 남아 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귀 앞과 왼쪽 뺨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목과 쇄골에는 반원형으로 절개되었다.

몸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가슴 양쪽 겨드랑이에서 유두부위까지 절개면이 남아 있다. 흉부의 가장 아래쪽에는 오른쪽 배꼽과 장골 뼈를 통과하는 절개면이 있는데, 치골과 대퇴골 사이의 허벅지 안쪽에서 마무리 되었다. 팔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겨드랑이에서 손까지 절개면이 잇는데, 팔꿈치 뒤에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손에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절개면이 남아 있다.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한 모습이다(그림 5). 

여성의 등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양쪽 어깨에 절개면이 있고, 목과 척추에 세로의 절개가 있다. 목에는 절개면이 10cm, 척추에는 6~7cm가량이다. 왼쪽과 오른쪽 천 골 아래에서 다리까지 무릎 부위 4~5cm정도만 제외하고는 절개되었다. 왼쪽 다리에는 절개면이 하나 더 있다.

 

그림 4. 파지릭 5호분의 여성 뒷모습

 

 

그림5 . 파지릭 5호분의 여성미라

 

파지릭 2호분의 미라와 다른 점은 파지릭 5호분의 남성은 근육을 모두 제거 했지만, 2호분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 모두 절개면을 말총으로 꿰매었다. 남성의 손을 묶는 부분만 양모를 사용했다. 미라의 처리를 할 때 꿰맨 흔적을 말총으로 하는 것은 같은 시기의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일명 얼음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루덴코는 절개를 하고 근육을 제거한 것은 방부제를 바르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바르코바의 연구에 따르면 파지릭의 미라 피부와 머리에는 송진과 밀랍을 사용했는데, 송진은 특히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다마르(dammar)와 셀라크(shellac) 라는 것이 밝혀졌다(바르코바,  고흐만 2001). 미라 처리할 때 쓴 발삼 물질이 밝힘으로써 교류지역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폴로스막은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중국과 접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발삼을 대신 다른 물질을 이용했다고 한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되는 남성와 여성미라의 몸의 수많은 절개면은 근육제거를 위한 것도 있지만 피하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클 수도 있다. 가장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바르코바, 고흐만 2001 Баркова Л.Л., Гохман И.И. 2001 : Ещё раз о мумиях человека из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35. СПб: 2001. С. 78-90.(바르코바, 고흐만 2001, 파지릭 고분의 미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오늘은 사진이 좀 그렇습니다....그래도 양해바랍니다..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묻힌 무덤이다. 안타깝게도 도굴로 인해서 유물의 위치와 시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지난번에 살펴본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일명 ‘얼음공주’는 미라였다. 파지릭 유적은 얼음공주보다도 무덤의 크기나 부장품으로 보아서 상위계급에 속한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얼음공주는 전직 샤먼이었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남성은 55~60세 가량이고, 여성은 40대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필자가 공개한 유물의 위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과 남성의 신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매장할 당시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도굴꾼의 소행으로 생각된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출토위치

 

남성의 목걸이는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여성의 목걸이는 잘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한 바 있다. 남성도 목걸이를 했을 가능성이 큰데,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두 남성이 모두 목걸이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무덤의 여성과 남성은 모두 목이 잘려진채 확인되었다. 특히 여성미라는 훼손이 심한데, 팔찌 등을 가져가기 위해서 오른손 뿐만 아니라 무릎관절 아래가 다 잘려진채 확인되었다. 덕분에 무덤에 관이 하나인데 어떻게 시신을 안치했는지 대한 궁금증은 영원한 미스테리이다.

 

관 통째로 도굴꾼이 가져 간 것이 아니냐고? 그럴 수 없는 것이 무덤관이 놓일 장소가 없다. 파지릭 유적 뿐만 아니라 아크 알라하 1유적의 예로 보아서 무덤방에 관이 2개인 경우 관은 나란히 놓인다.

 

그런데 왜 도대체 시신을 심하게 훼손했을까?

 

루덴코는 여성이나 남성의 미라에서 먼가를 얻기 위한 행위로 생각한다. 그 예로 든 것이 파지릭 5호분의 남성미라인데, 이 남성미라의 손이 오른손이 아래로 왼손은 위로 가게 해서 ‘×’모양으로 교차하고, 생식기 위에 피부를 뚫고 실로 고정시킨 것에 착안했다. 만약에 이 무덤의 미라가 같은 자세로 처리되었다면, 그리고 도굴꾼이 탐을 낸 것이 목걸이나, 팔찌 였다면?(이 유적에서 확인된 혹은 미처 못 가져나간 여성용 목걸이는 목제였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은 전투용도끼에 세 번 맞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눈썹에는 칼자국이 있고, 오른쪽 관자놀이에도 미세하게 찢겨져 있었다. 머리의 두피는 벗겨진 상태이다. 나머지 모발은 미라 처리시 뇌 제거를 위해서 구멍을 뚫기 전에 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개골에는 뼈가 제거된 흔적이 1곳 이상에 남아 있다. 고대에는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뼈를 제거하기도 했겠지만 파지릭 2호분의 남성 두개골은 뇌조직을 제거하고 뇌를 토양, 소나무껍질 및 낙엽송 등으로 채워서 미라로 처리하는 과정에 의한 것이다.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미라도 그 내부가 전부 흙과 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두개골에 천공한 위치는 다르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미라 두부(루덴코 1953)(위-남성, 아래 여성)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두부, 그림 2의 상단과 같은 미라.

 

 

2호분의 남성미라의 두부는 소련과학아카데미 군의학 치과부서에서 이바첸코(G. M. Ivashchenko)가 분석했다. X선 촬영결과 오른쪽 턱 아래의 첫 번째 어금니가 망가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치아에는 낭포가 생겨서 여포성낭종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 어금니의 압력 때문에 남자는 평생동안 치아가 아팠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남성은 몽골로이드로 전체 얼굴높이는 146mm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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