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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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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의 무덤을 필자는 6가지로 구분한다.(앞선 표에서는 숫자로 했으나, 여러생각 끝에 형식명칭을 바꾸었다. 1->가, 2->나, 3->다, 3`->다`, 4->라, 5->마, 6->바).

 

그림.우하량 유적의 무덤형식(김재윤 2019)

 

매장주체부

석관묘의 벽석

석관없음

묘역

형식

그림번호

지상

지하 토광(깊이)

여러 매

한매

토광묘

있음

없음

여러 단

한 단

가로

비스듬

수직

비스듬

 

 

 

 

 

 

 

 

 

1

 

 

 

 

 

 

 

 

 

2,3,4

 

 

 

 

 

 

 

 

 

5,6

 

 

 

 

 

 

 

 

 

7

 

 

 

 

 

 

 

 

 

8

 

 

 

 

 

 

 

9

 

 

 

 

 

 

 

10

표의 그림번호는 그림번호와 일치한다.

 

그 기준은 매장주체부(시신을 안치하는 곳)이 지상인가, 지하인가부터 시작한다

지상(그림1), 지하(그림2~10)를 살피는 경우는 선사시대에는 거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다 지하에 있으니깐.

그러나 우하량 유적에서는 딱 1곳(그림1)이 있다. 그래서 구분한다.

생각해보면, 매장주체부를 지하에 둘 것인거, 지상에 둘 것인가는 엄청난 차이이다.

 

엄청난 차이?

 

1. 축조방법의 차이

무덤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고, 드는 비용도 어마하게 차이가 났을 것이다.

필자는 왜 이런무덤이 한 곳만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매장주체부를 지상에 두는 것과 지하에 두는 것은 차이가 크다. 그래서 당연히 둘은 구분되어야 하고, 무덤의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번 기준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곽대순은 이를 무시하고 ‘중심대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그림 1,2,3,5를 모두 같은 형식(카테고리)안에 묶었다. 이런건 바로 까야 한다.

 

2. 묘광의 단수

매장주체부가 지하로 들어가 있는 건 공통이지만, 한단파는것과 여러 단 파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크다. 역시 노동력과 드는 비용이다.(나는 그런식으로 생각하며, 이런 구분 기준을 마련한다.)

주로 나형식으로 구분된 무덤이 여러 단 판 것이다. 곽대순은 중심대묘라 부르는 것은 그림 3과 같이 양단을 판 것과, 그림 4번과 같이 한쪽 만 판 것을 계단식묘라 하여 구분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카테고리로 보았다. 그림 2는 한쪽만 깊이 팠지만, 곽대순은 중심대묘라고 부르는걸 보아서 본인도 구분 기준이 모호하다.

필자가 그림 3과 그림 2,4를 같이 묶는 이유는 드는비용과 노동력이 한 단파는 것 보단 많이 들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까지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즉 구분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로 잘라서 설명하면 모든 유물과 유구는 그냥 다 다르다고 결론이 난다. 그러면 모든 유물과 유물은 그냥 인간생긴대로 다 다르다는 결론은 좋은 유추법이 아니다.

 

3. 석관의 벽석

무덤을 만들 때 토광을 파고 그 다음은 석관을 넣는다.

석관도 납작한 돌을 쓰는 경우와 덩어리돌을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우하량 유적에서는 보이는 대로 구분은 되지만, 그 구분의 의미가 모호했다. 가령 그림1은 덩어리 돌을 사용했지만, 그림 2, 3과 4는 납작한 돌과 덩어리돌을 섞어서 썼다. 만약에 납작한 돌을 가령 좀 더 노동력이 더 투여된 무덤에서 주로 쓴다면 그림1~4번에 집중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별꺼 없어보이는 그림 8과 같은 무덤에도 납작한 돌은 쓰인다. 또 이차장(뼈만 추려서 넣은 경우)무덤인 그림 7에도 납작한 돌은 사용된다. 그럼 덩어리 돌이 납작한 돌 보다 노동력이 더 투입되는 무덤에서 주로 쓰이는가?도 살펴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그래서 이 유적에서는 납작한돌과 덩어리돌은 그렇게 좋은 구분의 기준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벽석의 구분에는 여러 매를 쓰는 경우와 한 매를 쓰는 경우로 나누었다.

 

4. 석관묘없음

당연히 석관묘 없는 것은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노동력과 석관제작에 드는 비용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유적에서 무덤의 형식이 계급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이 토광묘 때문이다. 토광묘에서도 옥기가 출토되며, 사구통형기라고 했던 그 유물도 출토되기 때문이다. 만약 곽대순이 주장한바 대로 우하량유적에 묻힌 사람들이 홍산문화의 제사장무덤으로서 계급대로 묻혔다면, 토광묘에는 옥기가 없어야 한다. 반대로 석관묘에는 대부분 옥기가 있어야 하지만, 다 형식의 경우는 옥기가 없는 무덤이 허다하다. 가장 큰 그림 1에는 옥기가 하나도 없다.

 

5. 묘역

무덤의 가장자리를 묘역이라고 한다. 이것도 노동력과 축조비용이 듬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묘역도 단순한 석관묘와 토광묘에서 확인된다.

 

6. 일차장과 이차장

만약에 모든 무덤이 신체크기와 비슷한 크기였다면, 이 부분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적에는 이차장 무덤이 몇 기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 부분도 고려되어야 함으로, 일차장과 이차장도 나눌 수 있다.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 석관묘이다. 구체적으로 다형식으로 보이는 석관묘이다. 그래서 다`라고 명명했다. 일차장과 이차장이 아니라면 거의 무덤구조는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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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1. 무덤의 가짓수

 

환단고기 역주본에서는 ‘사구통형기’라 불리는 옥기를 신과 소통을 위한 도구로 설명된다고 앞서서 포스팅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곽대순이라는 중국학자가 먼저 이야기했다.

먼저 포스팅에서는 유적에서 18개나 출토되는데, 신과 소통을 위한 도구가 그렇게 많은지 의심한 내용이다.

 

2018/02/0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요서지역 흥륭와 문화의 옥기 및 토기와 한반도비교] - 환단고기비판: 관(crown)인가?

 

환단고기비판: 관(crown)인가?

그림 1. 홍산문화의 사구통형(斜口筒形)옥기: 입구가 비스듬한 옥기 2012년 환단고기에서는 홍산문화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옥기에 주목하고 있다. 옥기에 관한 해석은 중국은 지극히 민족주의적 시각에 의해서 이..

eastsearoad.tistory.com

 

곽대순은 사구통형기 혹은 고(箍)라고 불리는 옥기는 구운형옥패, 동물형옥기와 함께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옥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 중심대묘(곽대순의 주장에서 가장 급이 높은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를 살피기 위해서 우하량유적의 옥기를 각 무덤 별로 조사했다.

가령 1호라는 무덤이 있으면, 무덤의 생긴형태+옥기의 종류+양을 살피는 것이다.

즉 A라고 생긴 무덤의 기준을 정하고, 이렇게 생긴 무덤에서 출토되는 옥기가 어떤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아래의 표1이다.

이 표를 바탕으로 필자가 파악한 우하량유적의 무덤을 설명할 예정이다.

 

표1. 우하량 유적의 무덤형식과 옥기의 상관관계(김재윤 2019)

사실 이 작업은 우하량유적을 해석할 때 최초로 했어야 할 작업이다. 곽대순은 우하량유적의 ‘계급’을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우하량유적은 홍산문화 제사장의 무덤이며, 4등급으로 나누어진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9/03/06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우하량 유적의 1지점을 왜 여신묘라고 주장했을까?

 

물론 곽대순은 우하량 유적의 유물을 4등급으로 나누었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덤 그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석관의 제작방법에 따라서 6가지 형식으로 구분했고, 표의 가장 마지막 칸을 설명할 수 있다. 석관을 파기 위한 토광의 단수, 석재의 가로쌓기와 세로쌓기, 묘역, 일차장과 이차장 여부 등이 그 기준이 된다.

먼저, 6개의 형식은 곽대순이 의미한 등급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덤 짓는데 품이 많이 들게 생긴 무덤 안에는 옥기가 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아이러니 같은 무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형식’은 설명을 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표2이다.

표1을 만들기 전에 표 2부터 했고, 표2를 바탕으로 표1을 만들었다.

 

 

표2. 우하량유적의 무덤형식(가짓수)(김재윤 2019)

 

재미는 없으시겠지만,, 필자가 가장 잘하는 것 중에 하나가 표만들기이다. 유적별로 표만들고, 그런 표를 집합해서 필자는 지도를 위에 점을 그리고, 그걸 시대별로 정리해서...결국 또 표를 만든다. 오늘 포스팅은 그림없이, 표만 넣었는데, 쓰고 보니 역시 재미가 없다. 표는 그림과 세트가 되어야 하나보다.

그러나 오늘은 문장 한 구절을 쓰기 위해서 내가 하는 세밀한 작업을 보여드리고 싶은 날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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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냐하면, 이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와 조합식석인검은 시베리아의 특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혹자는 홍산문화의 유적이라고 하고, 혹자는 홍산문화와는 다른 문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 쪽이고, 후자 가운데서도 중국사람들과는 생각이 좀 다르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시간은 없다....

 

통요시(그림 1)에서 대략 60km 떨어진 곳에 합민망합(哈民忙哈)유적(그림 2)이라는 곳이다.

 

통요시의 위치
그림 2. 합민망합 유적의 위치

통요시는 내몽골에서도 작은 도시이지만, 중국 고속철의 경유지(그림 3)이기도 하다.

그런 작은 도시에서도 생전 누가 찾을 까 싶은 곳에 박물관(그림4~6) 이 있다.

유적을 그대로 남겨둔 유적박물관과 유물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3. 통요역. 고속철의 경유지
그림 4. 유적지의 입구.
그림 5. 유적 박물관

 

그림 6. 유물전시관 입구

 

 

이곳은 2011년 전국십대고고발굴로 뽑히기도 했고, 중국 학계에서 엄청나게 소개된 유적이다.

 

그림 7. 유적 박물관 내부. 발굴된 집터. 목채는 집의 구조물이다. 화재난 집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유적에서 이러한 집터가 여러 채 있고, 특히 세간의 관심을 받은 집터는 40호이다. 집을 무덤으로 사용했는데, 집 안에 인골이 98기가 접혀서 확인되었다. 하지만 40호 집은 이 사진의 앞에서 두 번째 위치한 곳이다. 이 집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 집에 대해서는 이미 출간된 책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소개해 드리겠다. 

 

그림 8. 나는 참 싫어하는 유리로 만든 바닥이다. 이렇게 해서 발굴된 집터 위에 설치해서 좀 더 잘 볼 수 있게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바닥이 너무 싫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서 사진도 흔들렸다. 중국박물관에는 이런 곳이 많다. 유리바닥으로 된 전시관.

 

앞서서 이곳을 홍산문화 유적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옥기 때문이다. 이 유적의 집 내부에서 우하량유적에서 출토된 옥기와 비슷한 것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기와 석기 등은 홍산문화와 차이가 크기 때문에 단순히 홍산문화 유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 9.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

 

그림 10.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 2

 

이 토기의 문양을 중국에서는 ‘망점문’이라고 하던데, 일종의 타날문이다.

타날문은 앞서 시베리아 신석기문화를 소개하면서 설명한 바 있다.

방형의 나무판에 노끈을 감아서 만든 도구를 박자라고 하는데, 이 박자를 두드려서 만든 것이다.

 

앞서, 홍산문화의 토기를 설명한 바 있는데, 홍산문화의 토기 특징은 압인之문양으로, 도구를 눌러서 之문양으로 찍은 것이다(그림 11). 

 

그림 11. 적봉박물관에서 소개한 지자문양새기는방법

 

그림 9,10에 소개한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와 아래 홍산문화의 토기(우하량 유적)와는 매우 차이가 있다.

 

 

그림 12. 우하량 유적에서 출토된 압인지자문양토기

 

필자는 이 유적의 토기를 직접 보고 싶었고, 조합식석인검(그림 13,14)도 직접 보고 싶었으나, 이 유적의 출토품은 보지 못했고, 대신 이 이전부터 매우 오랫동안 이 조합식석인검이 이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여러 보고서를 통해서 알았으나, 눈으로 확인했다. 기뻤다. 

 

그림 13. 7000년 전 조조합식석인검
그림 14. 그림 13의 유물을 다른 각도에서 찍음.

그리고 할 일이 너무 많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중국의 최근 박물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포스팅을 했다.

 

장춘에서 길림대학교박물관을 한 곳 더 보았으니,

총 7개의 박물관을 보고, 그 중에서 3곳은 유적위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유적과 유물전시관이 세트가 된 곳이다.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은 중국의 고속철 역이 드러설 정도로 정성?을 들인곳이다.

심양에서 출발해서 우하량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림 1. 우하량역
우하량유적의 위치
우하량역에서 국가고고유지까지

 

 

우하량 역에서 우하량 유적의 국가고고유지공원까지는 대략 30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유적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4개의 전시관을 만든 공원이다. 전시관과 전시관은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한다. 전시관 사이에는 화단도 가꾸어져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9시 반 정도였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곳에 그렇게 꾸며 놓았다.

홍산문화를 얼마나 철저하게 국가차원에서 다루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 공간이다.

예전 포스팅에서 왜 여신묘가 여신묘가 되었는지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온 인물이 소병기이다. 이곳의 1관은 그를 철저하게 우상화하고 있었다.

1관의 입구, 소병기 동상

 

 

 

2관은 유물전시관이다. 아쉽게도 이곳은 아직 유물로 채워지지 않은 빈 전시장도 있었지만, 옥기, 중요토기들은 대부분 복제품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토기와 석기만 전시되어 있었다. 우하량에서 C자형 동물모양 옥기가 3점이 출토되었는데, 복제품 1점이 있었고, 1지점에서 출토된 여신상의 마스크 토제품도 복제된 것이었다.

2관입구

심양에 있는 요녕성박물관에 우하량 출토 C자형 동물모양옥기가 1점 있었고, 그곳에도 여신상마스크는 복제품이었다. 아마도 베이징 국가박물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3관은 우하량 1지점인 여신묘라고 추정되는 건축물의 상부를 덮어서 대략적인 모양을 표시해놓았다. 그곳은 발굴된 적이 없고, 토제마스크와 가슴으로 추정되는 토제품, 동물모양의 토제품 등이 몇몇 출토되었을 뿐이다.

 

3관 내부, 여신묘의 표시

 

3관 내부에 전시된 유물은 모두 복제품이다. 3관 자체가 여신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식발굴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가 많은 곳이다.

 

4관은 우하량2지점의 무덤을 발굴해서 노출한 채로 그대로 살려두고, 전시하는 유적전시관이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장과 같은 성격이 강한듯 했다 여기저기 애들을 위한 패널이 보인다. 

 

4관 내부

 

필자가 부러워하는 부분은 이런 전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적을 살려서 전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문화재연구소와 같은 국가차원에서 하는 발굴은 보존하려고 애는 쓰지만, 대부분 도로나 아파트 공사를 위한 곳에서 이뤄진 발굴은 그런 사치?는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우하량유적은 중국국가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홍산문화를 문명화 한다든지, 중국동북지방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철저하게 자신의 역사로 관리하는 모습은 씁쓸하고도 우리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투브에서 환단고기 관련 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홍산문화 관련한 내용을 플러그인하는 기능이 막혔다.

실험삼아서, 다른 유투브 동영상은 플러그인이 되는데, 아마도 일부러 막은것이 아닐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미 퍼 놓은 필자의 글에 있는 것을 새로 인용해야 한다.

 

2019/03/1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환단고기 역주본과 유투브

 

 

환단고기 역주본과 유투브

오늘 기사를 보다가 유투브의 파워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국내1위 검색포탈사이트 네이버와 거의 비슷하다.(관련기사링크) https://news.v.daum.net/v/20190314175821694 http://www.dt.co.kr/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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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유투브에서 2분이 넘어가면 홍산문화에서 용이 확인되어 중국에서 공작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사실과 달라서 알린다.

1. 사해유적은 홍산문화의 유적이 아니라, 홍산문화보다 이전 시기의 흥륭와문화의 유적이다.

 흥륭와 문화는 대략 7500년 전 부터 시작되는데, 가장 이른 절대연대는 흥륭와유적에서 확인된다.

 그렇지만 사해유적은 흥륭와문화의 유적으로 이 유적에서 알려진 절대연대는 1개인데, 대략 7000년 전이다. 

 (필자의 예전 글들이 플러그인이 안되네요..최근 글들은 되는데, 필자의 글 카테고리에서 환단고기비판에서 요서지역 흥륭와문화라고 된 곳을 찾아서 들어가시면됩니다.)  

 

홍산문화는 6000년 전 부터 시작된다.(중국에서는 6500년 전 부터 시작된다고 하나 이는 신뢰할 수 없다. 이는 필자가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2. 사해유적에서 확인된 석소룡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주장이다.

 아래는 사해유적의 유적 평면도인데, 가운데 중앙에 용형퇴석이라고 적혀있는 곳을 이야기 한다.

 사해유적은 수십기의 집터 중앙에 무덤이 있고, 그 옆에 이 집석유구가 확인되었다.

 

사해유적평면도. 중앙에 있는 고불거리는 돌의 집석이 용이라고 주장함. F는 주거지, 집터, M은 무덤, H는 회괭이다. 중국 보고서에는 모두 이런 약칭으로 표시한다.

 

 이를 두고 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용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중국의 측의 내용이다. 중국인의 상상력 정도 된다.

 

3. 그럼 왜 중국에서 용이라고 주장하는가?

  이것은 홍산문화를 정치화 하려는 목적과 일맥상통한다.

 우하량 1지점의 알 수 없는 유구를 여신묘로 주장하려는 내용과 같다.

 

2019/03/06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우하량 유적의 1지점을 왜 여신묘라고 주장했을까?

 

 

 즉 중국동북지방 중에서 적봉일대에 위치한 신석기문화 중 홍산문화 보다 이전 부터 용이 확인되며, 

 이를 홍산문화와 함께 정치화 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는 사해유적의 무덤옆의 집석유구를 용으로 해석한 중국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한국역사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그들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내가 포스팅을 계속하는 이유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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