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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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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국립박물관은 역시나 광장에 위치한다. 광장과 박물관은 대부분의 유라시아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도 국립역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중앙광장에 연해주주립박물관이 있다. 중국의 국가박물관도 광장에 있다.

조지아의 국립박물관도 광장과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한다.

 

 

그림 1.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광장

 

그림 2. 예레반 광장 앞의 박물관

 

아르메니아는 박물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박물관 관리도 부실 한 편이었다. 물론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조지아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박물관도 매우 관리를 많이 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현대사 혹은 현대정치와 관련이 많은 듯 했다. 아르메니아는 옆의 나라인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와 매우 사이가 않좋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아직도 분쟁(혹은 전쟁)중이고, 튀르키예와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 기독교국가, 그리고 자신들의 성지인 아라라트(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는 곳)를 빼앗다는 것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과 등지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고대역사 연구도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 앗시리아와 견줄 만큼 강성했다고 하지만 우라르투의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림 3. 예레반의 예레부니 성곽에서 보이는 아라라트, 눈으로는 이것보다는 잘 보였다.

 

반면에 조지아는 러시아에서 탈출하는데 힘쓴다.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러시아말을 알아도 아는척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다 러시아말을 안다. 국가명도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변경하는 것 만 봐도 그렇다. 박물관에도 이런 점들이 녹아 있다.

 

분명히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 화살촉들이 Trell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대신에 Cochian culture 문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까지 지속된 문화로 설명한다. 특정 고고학문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좀 억지 스럽다. 특히 기원전 700-400년 사이는 Colchis 라고 조지아의 해안(흑해)가 따라서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에서 말한 유적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주로 이 문화는 남쪽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하지 코카서스 산을 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박물관 가장 위층에서 답을 찾았다.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만행을 전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차칸 까지 떼어내어서 전시중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왜 조지아 사람들이 스탈린을 숨기고 싶어하는지.

 

 

 

너무 당연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다.

조지아 대통령궁전의 화려함과 그와 관련된 비리도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와중에 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코카서스 남쪽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영역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사실과 스키타이 문화 보다 청동기시대에 더 뚜렷하게 코카서스 북쪽과 닮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마도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막기 위한 완충제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또 그럴 것이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유역(좀 더 정확하게 남부그 강)에는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라고 하는 매우 지속력이 강한 농경문화가 자리 잡았다. 문화는 기원전 5200~5000년경에 시작된다. 이 문화의 후기인 기원전 3700년경에는 대형 집락이 들어선다.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둥글게 지어진 것이다. 마이단네츠케, 탈얀키, 도브로보디 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을 일컬어서 도시라고 하지는 않았다. 도시에는 행정관청이나 사원 혹은 매우 집중화된 권력이 나타나야 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점에 흑해의 우안에 위치한 코카서스 산맥의 북부 쿠반 강 유역에서는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취락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우 강력해 보이는 권력을 가진 남성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높이가 11m가 넘고 직경이 100m가량의 남성 무덤이다. 이 남성은 코카서스 보다 남쪽의 우루크 지역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 마이코프 남성의 의복과 일부 부장품은 거기서 가져온 물건이기 때문이다. 목걸이로 사용된 구슬은 더 먼 동쪽 타지기스탄, 파키스탄 등에서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마이코프 문화를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화적 코드는 무덤인데, 쿠르간이다. 기원전 4400~4200년경 드네프르강 유역에 말을 타고 나타났던 스레드니 스톡 문화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쿠르간은 동유럽 전체에도 퍼졌고,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부장품을 풍부하게 묻었다. 이 문화는 기원전 3700년까지 영위되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고 그 이후에는 미하일로프카 I문화가 들어섰다. 이때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마이코프 문화가 생겨나면서 쿠르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미하일로프카 I문화에서도 쿠르간이 만들어지지만 훨씬 더 큰 쿠르간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생겨났다.

 

그림 1. 코카서스 북쪽 마이코프 문화의 쿠르간

 

그림 2. 드네프르 강 하류의 미하일로프카 I 문화의 쿠르간

 

마이코프 문화 이전에는 스보보드노예 문화가 있었고, 집이나 토기 제작기술은 이곳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단지 무덤양식의 변화만 마이코프 문화에서 있었다. 마이코프 문화는 재지의 문화이지만, 인접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매장방법을 따르면서 쿠르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마이코프 문화의 토기는 붉은 색으로 광을 내서 만드는 항아리형 토기이다(그림 3).

 

그림 3. 마이코프 문화의 토기

 

마이코프 문화에서는 토제 원통형 인장(그림 4)도 발견되었다. 크라스노바르데이스코예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사슴과 나무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비슷한 문양이 아나톨리 지역에서 점토판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코카서스 남쪽 도시의 우루크 중~후기에 돌로 되어서 메소포타미아 상인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림 4. 원통형 토제 인장

 

기원전 3700~3400년경 마이코프 유적이 위치한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권력자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는 동시대의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교류했던 흔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데이비드W. 앤서니. , 바퀴, 언어. 에코리브르. 2015.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2. 9. 11:04 스키타이 동물장식

 

유라시아 초원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스키타이 문화권을 연결하는 것은 스키타이 3요소라고 불리는 동물문양장식, 무기, 마구이다.

 

동물장식은 여러 동물이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생물도 있는데, 그리핀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흑해 우안의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가장 먼저 그리핀이 나타나면서 이 동물문양장식이 어디서 기원했는가에 대한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유적에서 발견된 간두령에 달린 동물장식, 거울 속의 동물, 투부에 표현된 동물 들은 여러 지역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동물문양장식이 이 문화권을 대표한다고 여겼기 떄문에 동물문양장식의 기원은 스키타이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권의 기원문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바꾼 것은 시베리아 유적을 발굴하고 나서 부터이다)

 

흑해지역은 대단히 지정학적인 위치이고 스키타이 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에 인접한 우라루투와 앗시리아지역은 문화적으로 융숭했고 실제로 유적에서 많은 요소들이 확인되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유적에서 나타난 인접한 문화의 동물장식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간두령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북쪽에 위치한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중에는 원형맹수장식이 달려 있는 유물이 있다. 원형맹수장식은 켈레르메스 유적 발굴 전에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 수집품 가운데서도 발견된 바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라루투의 남쪽에 위치한 현재 이란의 삭키즈(Saqqez) 부근의 마을에서 1947년 화려한 황금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별 다른 유구는 발견되지 않은 퇴장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유적의 유물구성은 어떤 특정 지역의 것만 출토된 것이 아니다. 앗시리아, 우라르투, 초기 이란양식(고대 오리엔트 특징+유라시아 스텦지역 특징) 등이 복합되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청동거울

 

이 유적에서도 원형맹수장식이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연구자도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 9세기 유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발굴품이 아니라 20세기 초반 유적들의 운명처럼 우연하게 발견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발굴이 아니라 농민들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시장에서 구입해서 고고학자들이 입수한 것이다.

 

그림 2. 지비예 출토 원형맹수장식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지비예 유물을 처음 알린 것은 1948년에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고다르인데, 유물을 판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유물을 박물관 카달로그에 게시했다.  농민들이  요새가 있는 높은 언덕의 큰 청동용기 안에서  금, 은, 청동, 상아 및 토기 등의 유물이 있었다고  고다르에게 전해 주었다. 그 다음해인 1949년에 유적의 위치가 지비예 마을인 것을 확인했고, 유물들은 ‘지비예 보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지비예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이 이란의 상점에서 팔려나갔고, 미국, 유럽 및 기타 지역의 개인 수집가와 박물관 그리고 다수 특별 전시회에 전시되었다(Muscarella, 1977)

 

그런데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프랑스고고학자인 Ghirshman는 지속적으로 이 유적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30여개체나 늘여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근동 미술실에도 지비예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유적의 유물을 최초로 알린 고다르는 1950년에 하나의 용기에서 유물이 뭉치로 출토되었다고 했지만, 1951년에는 이를 부정했다. 과연 하나의 용기에서 수백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비예의 보물이라고 알려진 유물 중에 아주 많은 양이 위조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Muscarella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유적에서 여러 나라의 유물 특징이 한꺼번에 위조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인정된다.

 

참고문헌

O. W. Muscarella, “‘Ziwiye’ and Ziwiye: The Forgery of a Provenience,”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4, 1977, pp. 197-219.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지역의 코카서스 북쪽 스키타이 세계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코카서스 남쪽 우라루투에서 제작된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거울, 각배, 철제 검 등이 그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각배는 거울과 같은 인물이 그려져서 두 유물이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여성 외에도 온몸에 털이 나 있는 인물은 거울과 각배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각배의 인간은 하반신 부위에 맹수와 겹쳐그려져서 반인반수처럼 보이는데 각배가 잘 남아 있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각배의 동체부는 둥글게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 방향으로 그림이 도안되어 있다. 가장 큰 중앙의 인간과 가지가 양쪽으로 벌어진 나무, 그 왼쪽에 그려진 사자와 싸우는 남성, 그 아래에는 기둥 2개가 방향이 달리 표현되어 있다. 2개의 기둥은 각배가 떨어져 나가면서 완전치 않지만 꼭대기가 불룩한 연꽃 형태인데, 우라루투의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과 유사하다(그림 2).

 

그림 1.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각배의 상세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

 

켈레르메스와 각배가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각배와 거울 각 조각의 가장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눈김이 새겨진 띠이다. 거울의 문양판은 은제 거울 위에 붙인 금제풉인데, 각 조각은 중간에 눈김이 있는 띠를 매개로 붙인 것이다. 각배에서도 같은 띠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또 각배에서 반인반수가 발 밑에 두고 있는 꼬임문양은 거울에서도 반인반수 문양 아래서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두 유물은 같은 장소에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참고문헌

Максимова М.И. 1956 : Ритон из Келермеса. // СА. XXV. 1956. С. 215-235.(막시모바 1956, 켈레르메스에서 출토된 리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