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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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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나무방무덤과 돌널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가족 규모가 달랐을 것으로 구분했다. 나무방은 대가족이고 2세대가 함께 묻힌 것이고, 돌널무덤은 2인 혹은 1인이 묻혀서 소가족으로 분석했다.

 

아직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나무방에 묻힌 사람은 총 116명이다. 최소 2명부터 최대 9명까지 나무방에 매장되었다. 여러 명(?, 기준이 정확하지 않음)이 매장되었을 때 2세대가 매장되었다. 마모노바(형질 인류학자, 뼈를 분석)의 의견에 따르면 무덤 속의 뼈에서 유전병의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서 친족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3호 무덤의 인골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굽히고 매장되었다. 11호, 23호, 31호에서는 한 그룹은 오른편, 다른 그룹은 왼편으로 누었다.

돌널 무덤에서는 혼자 묻힌 남성은 5인, 여성은 3인, 남녀와 어린아이가 매장된 경우는 2번 확인된다.

결혼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한 두 세 개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 모두가 대가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노보고르도바는 보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두 세대가 한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노보고르도바는 비슷한 가족관계가 확인되는 울란곰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투바(미누신스크 분지)의 사글리-바쥐 II유적의 예를 참고해서 울란곰 유적에서도 추가 매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스키타이 지역문화는 타가르 문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고분은 살브익 유적인데, 그 곳에서도 복도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포스팅 참고)

 

2020.12.03 - [교과서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문화] -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시베리아 기원전 7세기 미누신스크 수장의 무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

eastsearoad.tistory.com

 

사글리-바쥐 II유적 층위조사에서 집단매장된 가족묘에서 무덤구덩이로 들어가는 곳에 추가매장을 위한 갱도, 일종의 복도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통로에는 나무를 깔아서 만든 것이고, 무덤 방의 덮개에 문이 따로 달려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다(그라치 1980).

이런 무덤구조라면 울란곰 유적에서도 두 세대가 묻힌 무덤이 발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무무덤방에는 2세대가 묻힐 수 있었고, 돌널무덤은 단인장 혹은 최소단위의 가족이 매장되었을 수 있다.

 

앞서 보여드린 울란곰 유적의 나무방 덮개의 중앙이 파손된 경우가 많았는데, 도굴의 흔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설명에는 없었지만, 노보고르도바가 자신의 저서에서 ‘도굴되지 않은’사글리 –바쥐 II유적이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자신이 발굴한 유적은 도굴 당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다. 울란곰 유적은 이미 채석으로 인해서 인접한 도시에서 건축할 때 봉분의 대부분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그 가능성은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남성 두개골, 투부, 철검 등에 맞은 흔적

 

울란곰 유적에서는 죽음을 강제로 당한 여성의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개골에 창상이 있는 인골은 남성들이며, 한번에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노보고르도바는 자연사하거나 혹은 창상이 있는 남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단기간(전투)에 만들어진 무덤이라고 보았다. 무덤에 매장된 남성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모노바도 고분축조가 매우 빠르게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나무방 무덤 가운데 6기에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무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분석된 같은 시대의 무덤에서 어린아이의 비율은 31.6~61.4%에 달하지만 이 유적에서는 현저히 낮기(21.2%) 때문이다.

 즉 다른 무덤 유적은 자연 스럽게 죽은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에 죽은 아이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른 무덤에서는 아이의 비율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울란곰 유적에서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낮은 점은 자연스럽지 않고 어떤 큰 변이가 있었다고 판단가능한 것이다.

마모노바는 이 시기의 다른 고분에 묻힌 어린아이의 비율 총계로 여성이 낳은 어린아이의 수를 계산했는데 평균 6명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고 밝혔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몇 개월 된 아이 등이 매장되었다(마모노바 1978).

 

 

울란곰 유적에서는 청년과 장년의 남성이 많이 매장되었고, 남성노인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데, 나이들도록 살지 못했거나 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노인들은 남성노인에 비해서 비율이 높다.

노보고르도바는 여성을 강제로 죽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죽었을 때 여성을 함께 죽이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대규모 집단 매장은 추가장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참고문헌

Грач А.Д. 1980 : Древние кочевники в центре Азии. М.: ГРВЛ. 1980. 256 с. (그라치 1980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민)

Мамонова Н. Н. Демография Улангомского могильника (Саяно-Тувинская

культура V—III вв. до н. э.).— Археология и этнография Монголии. Новосибирск, 1978 (마모노바 1978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의 인구통계)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발견되는 공격용 무기는 화살, 검, 전투용 도끼가 있다. 실제 유적에서 유물도 출토되지만, 사슴돌에는 허리띠에 이 유물이 새겨져 있다.

사슴돌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돌기둥으로 입석(立石 세워진 돌)인데, 유라시아 초원의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된다. 특히 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에는 사슴이 많이 그려져서 사슴돌로 부른다. 사슴 뿐만 아니라 허리띠에 달린 무기, 장신구 등도 그려진다.

 

스키타이 문화의 서쪽지역에서는 주로 무기가 그려진 사슴돌이 확인된다. 무기만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모양은 시베리아 혹은 몽골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다.

 

주보프스키 후토르 유적 뿐만 아니라 우스티-라빈스키(Усть- Лабинский, Ust' Labinskiy), 키즈부룬(Кызбурун, Kyzburun)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모두 카프카스 산맥 북쪽이다(주보프스키 후토르는 정확한 지점은 찾지 못했는데, 켈레르메스 유적 부근이라고 알려졌다)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우스티 라빈스키 유적의 돌기둥(1.75m)도 무덤 입구에 새워졌는데, 바로 아래에서 철제와 골제 화살촉, 석탄조각과 구리판 등이 발견되었다.

우스티 라빈스키, 키즈부른 유적의 돌기둥은 전체적인 형태가 같다. 키즈부른 유적의 돌기둥은 한쪽은 부러졌지만 상단부는 비스듬하고 그 아래에 침선으로 털을 만든 후 그 아래에 둥근 고리표현, 체인, 허리띠가 시문되었다. 허리띠에는 검과 고리트가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투부가 걸려 있다. 키즈부른 돌기둥에는 긴 검 옆에 단검이 한점 더 있고, 허리띠의 매듭도 표현되었다.

 

그림 1.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사슴돌(코발레프 2000), 1-주보프스키 유적, 2-우스티 라빈스키, 3-키즈부른 유적의 돌 기둥, 각각의 번호에서 같은 유물을 여러 번 그린 것은 연구자마다 무기의 모양을 약간 씩 다르게 인식해서이다.

 

흑해 북쪽에서 출토되는 전투용 도끼는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청동제이다.

 

그림 2.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이른 시기 전투용 도끼(코발레프 2000)1-주보프스키 유적의 사슴돌, 2-우치쿨란(Учкулан, Uchkulan), 3,4-피춘드스키(Пицундский, Pitsundskiy) 10-베르흐네 코반스키(Верхнекобанский, Verkhnekobanskiy) 무덤

 

사슴돌에 그려진 검은 날이 직인이며, 손잡이 끝이 반원모양이다. 실제 유적에서는 철검(그림 3-9~12)과 청동검(그림 3-13~17)이 나온다.

 

그림 3.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이른 시기 검(9~12:철, 13~17: 청동) 9-수보토프스키(Субботовский, Subbotovskiy 마을유적, 10-수보로보(Суворово, Suvorovo 유적, 11-무게르간스키(Мугерганский, Mugerganskiy 12-모그-카 파르스(мог-ка Фарс, mog-ka Fars, 13~15: 알타이 출토, 16-세미파라틴스키(Семипаратинский, Semipalatinski) 17-안드례프스코예 오제로(Андреевское озеро, Andreevskoe lake 유적(코발레프 2000인용)

 

앞서 보여드린 켈레르메스 유적과 멜구노프 유적의 철검은 금으로 제작된 검집으로 인해서 실제 칼은 주목받지 못했으나, 실제로 사용된 유물은 아주 심플하다. 손잡이 꼭지는 반원모양이고 검의 손잡이(병부)에는 침선이 새겨진 유물이 있으며, 날은 직선이다.

 

 

사슴돌에 그려진 전투용 도끼는 앞의 날이 부채꼴 모양이지만, 날이 뾰족하고 반대면은 날이 서지 않은 형태의 투부(그림 4)도 존재한다. 물론 기원전 7~5세기 유물이다.

 

그림 4. 기원전 7~5세기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출토된 전투용 도끼(알렉세예프 2003 인용)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장식판을 단 전투용 도끼와 황금집에 들어간 철검은 의례용이다. 의례용 검과 도끼는 우라르트-스키타이 양식으로 스키타이 인의 주문에 의해서 외부에서 제작된 것이다. 반면에 실제로 사용된 스키타이 무사들의 공격용 무기도 검과 도끼가 있었고, 외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지역 내에서 제작된 것이다.

 

 

 

참고문헌

 

Савинов Д.Г. 1977 : О культурной принадлежности северокавказских камней-обелисков. // Проблемы археологии Евразии и Северной Америки. М.: 1977.(사비노프 1977, 북 카파카스 지역 돌 기둥에 새겨진 문화적 특징

Ковалёв А.А. 2000 : О происхождении оленных камней западного региона. // Археология, палеоэкология и палеодемография Евразии. М.: «ГЕОС». 2000. С. 138-180. (코발레프 2000, 유라시아 서부지역 사슴돌의 기원)

Алексеев А.Ю. 2003 : Хронография Европейской Скифии VII-IV веков до н.э.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03. 416 с(알렉세예프 2003, 기원전 7-4세기 유럽스키타이문화의 편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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