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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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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프카 문화의 유적은 어떤 유적이 있을까?


유적은 대부분 연해주의 해안가에 위치하는데(그림 1), 리도프카 및 시니가이 문화 유적보다 서포항 유적은 해안가 남부에 위치한다. 리도프카-1 유적(상층), 블라고다트노예-3, 모나스트르카-2유적 등이 있다(1). 


그림1. 연해주의 리도프카 문화의 유적(김재윤2018)


리도프카-1 유적은 블라고다트노예-3 유적과 모나스트르카-2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 기존의 알려진 리도프카 문화(리도프카-1 유적 상층) 이외에도 수보로보-6 유적(하층)과 같은 시니가이 문화층에 해당하는 층(리도프카-1 유적 하층)이 있는 것으로 정리되었디(김재윤 2018). 리도프카-1 유적을 하나의 문화층으로 규정(댜코프 1989)했기 때문에 리도프카 문화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지(쿠루뱐코·얀쉬나 2002,클류예프· 얀쉬나 2005)도 생겨났다.

이 유적들은 모두 주거 유적이지만 주거지 발굴 상태가 좋지 않아서 호수별로 유물을 구분하기는 한계가 있다. 보고된 유물 가운데서 다른 유형이 보이지는 않는다.

 리도프카 문화의 유적 가운데는 마을 유적 외에 토성이 확인된다. 두브로빈스코예유적은 3중 토성벽이 확인되었다(그림 5). 주로 동해안가에서 확인되는데, 리도프카 문화에서 방어벽이 있는 유적은 현재까지 11기가 확인되었다(댜코바 2009). 




그림 5. 두브로빈스코예 토성벽(김재윤 2018)



 절대연대는 시니가이 문화가 끝나는 2500년 전부터 2300년 전이다(1). 리도프카 문화 내에서 지역성이나 시간성은 크게 연구된 바 없다. 시도렌코는 리도프카 문화를 철기시대(기원전 15~기원후 1세기)까지 포함해서 4유형으로 나누었으나(시도렌코 2007) 무의미하다(김재윤 2018). 오히려 댜코프가 처음 설정했던 리도프카 문화(댜코프 1989)가 더 확연하게 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유적

입지

조사연도

조사성격

시대

유적성격

참고문헌

리도프카-1

동해안

해안대지

1974

1975

1979

발굴

청동기시대

시니가이문화동부2유형과 리도프카 문화

취락

댜코프 1989

블라고다트노예-3

동해안

하안대지

1975

1980

발굴

청동기시대

리도프카문화

마을

모나스트르카-2

동해안

하안대지(루드나야강

1980년대

발굴

리도프카문화

마을

두브로빈스코예

동해안

해안절벽(리도프카 강)

2001

시굴

리도프카 문화

마을과방어벽

댜코바 2009

 

리도프카-1상층

동해안

해안대지

상동

2610±45(СОАН-1390)

취락

댜코프 1989

댜코프 1989

2535±40(СОАН-1424)

2570±60(СОАН-1388)

2450±50(СОАН-1389)

수보로소-6상층

동해안

해안대지

1993

발굴

2320±55(СОАН-3022)

취락

쿠루피얀코· 얀쉬나 1993

2540±40(АА-36623)

미스 스트라시느이

동해안

해안절벽

2000

발굴

2575±45(СОАН-4414)

마을과방어벽

댜코바 2009

쿠즈민 외 2003

수보로보- 8

동해안

해안대지

1997

발굴

2560±90(СОАН-4305)

문화층

쿠루피얀코·타바레프 2004

2465±60(СОАН-4309)

2400±55(СОАН-4310)

2350±35(СОАН-4308)

2336±60(СОАН-4307)


1. 리도프카 문화의 유적과 절대연대(김재윤 201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에르미타쥬 박물관...

러시아 최초로 동방정책을 시작한 표트르 대제의 겨울궁전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자체가 박물관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박물관이 정말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박물관이 없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박물관, 일본 동경박물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등 동아시아는 건물은 현대식이고, 유물만 예전의 것으로 전시된 경우가 많다.

그 나름대로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유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도 있지만.

이런 환경에 익숙한 내가 정말 머리를 한대 꽝 맞은 느낌을 받은 곳이 에르미타쥬이다.











모두 박물관의 모습이다.


작년에 한국에 온 러시아 연구자와 이야기 하다가

한국의 박물관이 너무 좋다는 거다..현대식건물..

난 반대로 이야기 했다.

역시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거가 맞는 얘기 일까?


하지만 우리나라도 먼가 한 곳은 이런 느낌을 받는 곳이었으면 한다.

이런 느낌이라는건...건물과 전시된 유물 모두 오래된 느낌.

덕수궁박물관이 일부 그렇지만.. 거긴 한 나라 역사 전체를 보여주는 곳은 아니다.


에르미타쥬는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물 부터 거장의 그림까지...

정말 탁월한 박물관이다.


이런곳은 바라지 않더라도.

중요한 유적 발굴된 곳에 이것을 살려둔 박물관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은 발굴되고 난 뒤에 대부분 유적은 사라진다...유물은 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지지만.

그런데 중국 박물관은 요즘 새로 지어져도 이런 곳을 살려 두고, 유물은 그곳에 전시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베이징 이야기가 아니라...지방인 낙양 같은 곳에도 그런 곳이 여러 곳이었다.



레고랜드...웃긴다. 아마도 거기다가 고고학유적을 그대로 살려둔 박물관을 지었다면.

한국에서도 독보적인 곳이 되었을 꺼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독자를 위한 설명을 하나 하겠다.

 

이 블로그를 읽다가 보면 ‘A유적이면 A유적이지 하층은 뭐고 상층은 뭐야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알고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고고학과 1학년 들에게 질문해도 이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설명하면...


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00 유적이라도 시대만 혹은 한 단계의 층만 확인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주로 시대와 반대로 퇴적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층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어떤 한 문화가 퇴적 된 뒤에 뒤시기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파 뒤집어지고 그 뒤에 다시 퇴적이 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와 패총과 같이 파도에 의해서 쓸려서 내려가서 한 유적에서도 높은 곳과 바다와 접하는 낮은 곳이 층이 뒤집어 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퇴적 된 순서가 시간순이라고 생각한다. 지질학적인 용어기도 한데,,, ‘지층 퇴적의 법칙혹은 지층 누적의 법칙이라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몇 시대가 계속 퇴적 된 경우가 있어서 그럴 경우에는 대부분 00유적 1, 2, 3.. 시대 순으로 이름을 붙인다.

 

미송리 유적은 하층과 상층으로 구분되는데, 하층은 신석기시대 층이고, 상층은 청동기시대 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 유적명을 사용할 때는 대부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많이 생략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학문적인 글일수록 구분되어야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포스팅에서 역사를 연구하지만 고고학이 다른점을 설명한 바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51)


역사학은 사료 즉 남겨진 역사서를 중심으로 연구하지만, 고고학은 옛 사람이 남긴 유적, 유구, 유물이 연구대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적과 유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유적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00 유적
예를 들면 부산의 동삼동 유적,, 동래 읍성, 만덕사지 절터,  부여 송국리 유적 등이 있다.

유적은 부동산의 개념이라고 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
좀 더 들어가면, 부여의 송국리 유적은 행정구역 명에 따라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이 곳의 성격은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다(그림 1). 마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집이 있었겠죠. 집이 여러 개 모이면 마을(그림1)이 된다. 송국리 유적에는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환호라고 하는 둥근 구덩이가 있었다. 일종의 울타리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그림 2)한다.

(그림 1. 부여 송국리 유적, 집터를 두르고 있는 것이 환호이다. 집터와 환호는 유구이며, 이 송국리 유적은 여러 용도의 유구로 이루어졌다).

(그림2. 환호복원추정도 야요이시대, 한반도 청동기시대 송국리 문화는 기원전 8세기 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북부구주 야요이시대에 송국리형 주거지가 나타나는데, 그 기원은 한반도 남부로 부터 이주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학계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유구는 무엇을까?
집, 환호, 배수시설 등 유적을 이루고 있는 개개의 장소를 유구라고 한다.
여러 용도의 유구가 모여서 어떤 특정한 유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유적에는 한 성격의 유구만이 여러 개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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