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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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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9세기부터 등장하는 우라루투에서 남긴 많은 유물은 앗시리아의 것과 구분이 안되는 것이 많은 점이 문제이다. 도굴로 자행된 유물이 그냥 사고 팔고 한 상태였고, 후대의 학자들도 이를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나마 테이시바이니 성곽이나 예레부니 성곽은 유적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현재 그루지아의 상징과 같은 곳이 되었다.

 

터키 국경에 있는 반 절벽의 세워진 성곽은 수도 투쉬파가 있던 곳으로 알려졌고, 이곳에는 ‘므헤르의 문’이라고 하는 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신의 이름과 의식을 치를 때 제물로 받친 동물의 종류와 양이 적혀 있어서 이를 토대로 우라루투의 신(神)에 대한 연구가 약간 진행되었다. 필자가 이 부분을 추적하는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코카서스 북쪽에서 나오는 우라루트 유물들 때문이다. 대부분 의례용품이고 문양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라루투의 3신은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다. 칼디 신의 역할은 불분명하고, 테이시바 신은 전쟁의 신이자 폭풍의 신이라고 알려졌다.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이다.

 

칼디 신은 사자 위에 선 모습으로 인간 형태로 묘사되어 있는데, 앞서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의 사원에서 벽에 남아 있는채 발견되었다. 칼디의 상징이 날개 달린 태양 원반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다시 이는 시비니 신으로 의인화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칼디 신의 아내는 아루바니이고,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청동상으로 의인화되어서 출토된 바 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칼디 신의 아내, 아루바니

 

전쟁의 신 테이시바는 카미르-블루르 언덕의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발굴하는 동안 긴 옷을 입고 수염이 없는 모습의 남성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머리에 특징적인 뿔 장식이 있고, 양 손에 투부(전투용 도끼)와 곤봉을 가지고 있는데, 테이시바 신으로 간주된다. 그의 아내는 ‘후바’라고 불리는데, 손을 공중에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아이, 왼쪽에는 나무가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테이시바 신, 청동 남성

 

태양신 시비니는 날개 달린 둥근 접시를 상징한다. 우라루투의 물개 혹은 새 문양, 동물 머리에서 종종 날개 달린 접시 모양이 발견되는데, 시비니를 상징했을 수 있다. 그리고 시비니의 아내는 청동솥에 자주 표현되는 날개 달린 여성이 아내인 투시푸에아 Tushpuea일 수 있다.

 

지난번에 시비니 신으로 소개한 청동솥에 붙은 날개 달린 인물은 여성이며, 그의 아내인 투시푸에아이다. 잘못 소개했는데, 정정한다.

 

그림 3. 시비니 신의 아내 투시푸에아, 앙카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9~8세기의 우라루투는 앗시리아와 적대적인 관계 였다.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우라루투 전사들의 이미지로 보아서 가죽이나 나무로 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히타이트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앗시리아의 Shalmaneser III는 우라르투의 사르두리 I세때 우라루투를 침약해서 약탈적인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우라루투는 군대를 앗시리아와 비슷하게 개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앗시리아가 더 강했기 때문에 군대를 비슷하게 개혁한 것으로 알려짐)

 

우라루투 기원전 VIII세기부터 보병은 철검, 활로 무장했고 청동헬멧과 찰갑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유물은 앗시리아의 후기 유물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왕이 전투 최고 사령관이며,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쟁과 토너먼트가 열렸고 개인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투쉬파 수도에 동굴의 요새를 건설하에는 늘 앗시리아에 당했고, 그 후에는 막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앗시리아를 먼저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방어전쟁을 벌였다. 우라루투의 Ishpuini 왕 군대는 100개의 전차병, 10,0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이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림 1. 우라루투의 전차기병(우라루투의 아르기쉬티 I세의 헬멧에 남아 있는 모습)

 

그림 2. 우라루투의 아르기쉬티 I세의 갑옷(찰갑)

 

그림 3. 카미르 블루르 언덕의 테시이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우리 II세의 헬멧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8세기 문화는 사실 다 비슷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앗시리아나 우라루투나...쐐기 문자를 쓰고, 남겨진 물질문화도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우라루투의 종교도 역시나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shpuini와 Menua왕의 통치 기간 동안 반 절벽 위에는 신의 사원이 지어졌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 전해진다.

신에 대한 숭배 의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구라트 꼭대기는 움푹 들어간 방이 있었고 그곳에서 의식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 절벽의 요새 중에 한 곳(그림 1)에는 우라루투의 신 79명이 적혀 있고 그들에게 희생되어야 하는 동물의 수가 적힌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그림 1. 므헤르의 문. 반 절벽 부근의 능선 절벽에서 발견됨. 이곳에서 79명의 이름이 있는 쐐기문자가 발견됨. 1910년 아르메니아 역사가가 발견.

 

그 중에서 칼디, 테이시바(전쟁의 신), 시비니(태양의 신)신이 제일 먼저 적혀져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각각 17마리의 황소, 34마리 양, 6마리 황소, 12마리 양, 4마리 황소 8마리 양을 그들의 희생물로 받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 2. 칼디 신(왼)과 테이시바 신(우)의 모습, 칼디 신은 사자, 테이시바 신은 황소를 타고 있다. 카미르 블루르 언덕에서 발굴된 청동 버클장식,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 소장

 

그림 3. 시비니 신(왼)과 그리핀의 모습, 카미르 불루르 언덕에서 발굴된 청동버클 장식,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 소장

 

아르딘(무사시르) 도시는 반 호수 남동쪽에 위치했고 칼디 신의 본당은 이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앗시리아의 북쪽 도시와 접하고 있다. 이 도시는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II세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에 칼디 신의 숭배는 점차 희미해졌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투는 기원전 8세기 중반에 가장 강성했었다고 알려졌다. 현재 터키의 반 호수 부근에 위치한 반 절벽 위에 요새를 지었고, 코카서스 남쪽까지 영역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기쉬티 I세, 메뉴아와 그의 아들 사르두리 II세 때가 가장 강성했다(그림 1). 그리고 그때 문화적으로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림 1. 기원전 8세기 중반 우라루투의 영역

 

많은 유물이 발굴로 인해서가 아니라 무덤에서 약탈해서 재판매 되고 세계의 박물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출처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이들은 앗시리아의 것과 너무 유사하다. 브리티시 뮤지엄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각각 일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림 2. 우라루투 왕좌의 왼쪽 장식, 날개달린청동황소, 에르미타주 박물관, 같은 유물로 왕좌의 오른쪽을 장식한 유물은 브리티시 뮤지엄에 보관되어 있다.

 

전해지는 쐐기문자는 우라루투의 것과 앗시리아 문자가 매우 흡사하고 하다.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있는 카미르 블루르 언덕 위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통에는 사루두우리 II 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차를 타고 있는 모습인데, 앗시리아의 궁전벽화에서 보이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 3. 카미르 블루르 유적 출토 청동 화살통

 

 

그림 4. 그림 3의 세부

 

뿐만 아니라 테이시바이니 성곽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는 흔히들 오리엔트의 문양으로 알려진 식물그림(그림 5)이 그려져 있다.

 

그림 5. 테이시바이니 성곽에서 발견된 식물그림

 

 

 

참고문헌

Дьяконов И.М. Урартские письма и документы. — Москва — Ленинград: Издательство АН СССР, 1963.(댜코노프, 1963, 우라루투의 글자와 문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루투는 코카서스 북쪽에 있던 스키타이 세계와 앗시리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루지아 국경인 예레반의 수도에는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남아 있고, 터키에는 반 호수 부근에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이 발견된 성곽이 남아 있다. 우라르투의 수도였던 투쉬파 혹은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투쉬파는 사르두리 II세 이전부터 중심지로 사용되었는데, 사르두르 I세(기원전 844-828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반 절벽의 서쪽기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인 Ishpuini(기원전 828-810년) 왕이 통치할때까지는 늘 앗시리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철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암벽을 파서 동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되었고,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라르투의 수도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우라루투가 수도를 삶은 이유를 환경적인 요인으로 삶는데,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륙성기후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은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요새의 역할을 했고, 시비니 신의 숭배가 반 암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사르두르 I세의 아들 Ishpuini 통치 이후 그의 아들 Menua(기원전 810~786년)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Ishpuini는 우라르투의 신 칼디를 포함한 사원지를 건설했다. 당시에 동굴을 파고 왕실의 방도 만들어졌다. 여러 층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모형화 한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1).

 

 

그림 1. 건물과 탑의 모형물, 청동제품, 탑의 높이는 16.5cm, 건물의 높이는 30.5cm

 

메뉴아는 투시파 주변에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로를 70km 가량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호수의 물은 염분이 많았기에 관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로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메뉴아 이후에 Argishti I(기원전 786~764년)과 Sarduri II세가 통치하면서 우라루투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아르기쉬티 I세와 사루두리 II세는 반 절벽의 다른 면에 자신의 연대기를 비문에 남겼다. 이 비문은 우라루투 설형문자가 남아 있는 가장 큰 것이다.

 

현재 터키 국경에 있는 투쉬파는 기원전 9세기부터 우라루투의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요새를 짓기전에는 강력하지 못했고, 요새를 짓고 난 이후 아르기쉬티 I세 지배기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앗시리아를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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