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잔-1호에서 처음 보이는 원형맹수장식은 가장 널리 오랫동안 사용된다. 삼각형 구도를 이루는 것은 기원전 5세기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에 검집 끝에서 발견되었다. 비슷한 유물은 이집트, 시리아, 박트리아 등지에서도 다양한 재질로 발견된다(페레보드치코바 1994)
그런데 아르잔-1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알타이의 투엑타 유적(기원전 6세기)에서는 호랑이의 몸통에 날개가 달린 것이 발견되었다. 호랑이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유물은 S자형으로 변화된다. 물론 두 유물은 평면과 입체 이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호랑이의 귀, 입, 눈은 변형 없이 날개만 부착되었다. 날개만 빼면 가장 사실적이다. 이 유물은 원형의 모티브 보다는 배제되고 호랑이라는 주제가 초점에 맞추어 진 것이다.
그림 1. 투엑타 유적의 날개 달린 호랑이
그런데 같은 유적에서 발견된 호랑이머리와 독수리머리가 합체된 굴레장식(그림 2)에는 호랑이의 귀 끝은 뾰족하다. 날개 달린 호랑이의 얼굴과는 차이가 있다.
딱딱하게 설명하지 않고 느낀 대로 설명한다면 이 동물의 얼굴은 대단히 희화되었는데, 처음에 봤을 때 웃는 느낌이었다. 필자가 생각할 때 이 동물은 호랑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하다(그림 2). 단순히 호랑이 얼굴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유물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림 2. 투엑타 유적 출토, 맹수장식
몸을 말고 있는 원형 맹수장식의 변화는 기원전 5세기 파지리크 유적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호랑이가 몸을 비틀어서 머리와 꼬리를 말고 있는 장식이다. 이 유물은 주둥이가 길어지고 귀의 모양도 삼각형에 가깝다. 호랑이라기 보다는 늑대에 가깝다(그림 4).
그림 3. 파지리크 유적 출토, 맹수 장식.
그림 4. 늑대장식
동물장식 가운데 귀가 뾰족한 것은 독수리 머리그리핀에 달린 귀에서 먼저 관찰된다. 기원전 6세기 바샤다르 유적과 투엑타 유적의 독수리 머리 그리핀에서 있다(그림 4).
알타이에서 19세기(1865년)에 발견된 스키타이 시기(파지리크 문화)의 대형 고분 중에 하나이다. 유적은 현재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카툰 강의 상류와 하류 강사이의 왼쪽 단구대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매우 우연하게 발견되었는데, 강둑 위에 설치된 19세기 말에 판 군대의 참호 때문에 무덤 구덩이가 우연히 드러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미 말의 매장부분은 파손되었다.
19세기 말에는 라즈돌로프가 발굴했고, 100년 뒤에는 가브릴로바가 새롭게 발굴했는데, 라즈돌로프가 발굴한 스키타이 시기가 아닌 그 뒷 시기(투르크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2020년에는 노보시베리스크 고고학연구소가 발굴해서 청동기시대(아파나시에보 문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탄타 유적에는 많은 고분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매우 도굴이 심했다. 라즈돌로프는 그 중에서 가장 큰 무덤인 높이 2.1m, 지름 40m의 무덤을 발굴했다(2호). 그 안에는 이중 천장이 있는 나무방이 발견되었다. 나무 방은 통나무 7~9개를 천장으로 쌓아 올린 형태였다. 나무 방 안에서는 관이 2개 발견되었다. 통나무가 8000개 정도 사용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림 1. 카탄다 유적의 1호(1~3), 2호(4~9) 무덤 발굴
이미 도굴이 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물이 잘 남아 있지 않았나. 모피코트가 잘 알려져 있다.
허리와 소매는 녹색, 노란색 및 갈색으로 염색된 모피이다. 모피에 달았던 아플리케는 비늘 모양으로 금판을 이어 붙인 것이다(그림 1). 금박은 3000여개가 붙어 있었다. 또 한 점이 알려져 있는데, 꼬리가 붙은 형태이다.
그림 2. 카탄다 유적의 모피코트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어제 보여드린 호랑이가 사슴의 목을 잡는 장면이 새겨진 나무장식과 함께 발견된 목제 동물장식이다. 여기에는 두 마리 동물이 투쟁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곰과 함께 신화적 동물이 그려져 있다고 라즈돌로프는 평가했다. 다리는 초식동물의 발굽이고, 새의 머리는 뿔로 장식된 그리핀이며, 몸통은 호랑이인 동물이 곰의 머리를 한 동물과 함께 엉켜 있는 장면이다(그림 3-2). 몸통을 표현하고 있지만 머리가 중점이 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동물장식이다. 곰이라고 본 동물은 가장 중간에 큰 머리가 있는 동물이다. 이 유물은 반구형이다(그림 4).
이 유적은 파지리크 유적과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림 3. 카탄타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장식. 목제품.
그림 4. 카탄다 유적의 유물, 반구형의 동물장식은 그림 3-2와 동일유물
참고문헌
Радлов В. В. Из Сибири: Страницы дневника. М.: Наука. 1989.— 749 с.;(라드롤로프 1989, 시베리아에서, 야장(일기장)의 한 장면)
스키타이 동물장식 가운데 두 마리 동물이 특정 구도를 이루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두 가지인데, 서로 마주보도록 구성된 것으로 마치 데칼코마니 기법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어 뜯는 장면으로 투쟁장면이라고 불린다. 대부분 힘쎈 맹수가 자신의 먹이가 되는 굽동물의 목을 무는 장면이다. 투쟁장면의 동물은 아주 역동적으로 표현되어서 두 동물의 신체는 S자를 이루며 옆으로 눕혀서 표현된다.
데칼코마니처럼 마주보도록 된 동물의 표현이 가장 먼저 관찰되는 유물은 흑해 지역의 기원전 7세기 고분인 켈레르메스 유적(그림 1-3)과 멜구노프 유적의 검집 끝에서 발견된다. 두 유물은 매우 유사하며 의례용으로 제작된 유물이다. 대칭적으로 마주보는 사자의 모습이다. 오스트라야 토마콥스카야 마길라 유적의 검날 멈치에서도 확인된다. 몸이 면으로 처리되고, 눈, 귀, 주둥이가 강조되는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이 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검집장식
마주보는 동물 구성장면은 스키타이 문화의 형성기 유적인 이란의 지비예 유적에서도 검집 끝장식에서 발견되었다(그림 2-1). 하트모양의 귀, 크고 둥근 눈, 과장된 주둥이 등이 강조되었고, 다리는 스타일화 되었다. 맹수는 상체만 표현되었는데, 흑해지역에서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림 2. 스키타이 문화의 인접 지역에서 발견되는 검집장식
두 동물이 싸우는 동물 투쟁문양은 기원전 5세기에 스키타이 문화에서 등장한다. 이 시점에는 그리스, 페르시아 지역과 매우 많은 교류가 있었던 시기이다.
페레보드치코바는 동물투쟁문양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쿠반 강 유역의 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무덤 4호에서 출토된 각배에 부착된 금속판에 새겨진 동물장식은 맹수가 사슴을 공격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 유적의 2호에서 출토된 토기의 덮개판에는 비슷한 그림이 표현되어 있었다. 각배의 금속판에 그려진 동물장식은 맹수는 아직 스타일화 되지 않은 채 원근법이 살아 있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사슴은 스키타이화 된 것이다. 몸통을 면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고, 사슴의 자세와 굽의 위치, 견갑부의 형태 모두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스키타이 스타일화 된 것이어서, 이웃한 지역의 동물장식을 차용하면서 혹은 인용하면서 동물투쟁문양이 생겼다고 보았다(페레보드치코바 1994).
기원전 5세기에 스키타이 문화에서 널리 사용되는 동물투쟁문양은 특히 파지리크 유적에서 많이 확인되는데, 두 동물은 모두 이미 ‘스타일’ 화 되었기 때문이다.
페레보드치코바는 동물투쟁문(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각배 장식판)에서 나타난 사실적 맹수+스타일화 된 사슴이 가장 먼저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적 표현이 먼저이고 스타일화(규격화되면서 추상화됨)된 동물장식이 나중이라는 의미이다.
사실적 표현이 먼저고 추상화된 스타일이 나중이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이 유물이 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각배 장식판에만 나타났다고는 볼 수 없다. 파지리크 유적의 유물을 보고하면서 아주 간단하게 보고된 유물 가운데 나무에 새겨진 두 동물이 있는데, 카탄스키 유적의 유물로 보고되었다. 두 동물의 표현은 원근법이 살아 있고 사실적이다.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대로라면 카탄다 유적의 유물에 표현된 사실적 동물 2마리 표현이 더 먼저 일 수 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금속의 동물투쟁문양은 기본적으로 네모 플레임 안에서 구현되는데 이를 카탄스키 유물은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림 3. 세미브라트노예 유적의 각배 장식판
그림 4. 알타이 카탄다 유적의 유물
페레보드치코바는 이와 같은 마주보는 구도의 동물장식은 기원전 5세기 파지리크 유적에서나 관찰된다고 여겼다(페레보드치코바 1994).
하지만 새로운 유적의 발견으로 같은 구도의 동물장식이 검에 표현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르잔-2호 주인공무덤인 5호묘의 남성 칼의 검날멈치에도 호랑이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 확인된다. 호랑이는 몸을 거의 말고 있는 형태이다.
그림 5. 아르잔-2호 5호묘
마주보는 두 동물의 구도는 1990년대의 연구성과와는 달리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스키타이 문화에서 흑해지역부터 시베리아까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검 집 장식으로 돌아가 보자. 검집 장식 가운데는 두 동물이 마주보는 장면도 있지만 이란에서 발견된 것과 같이 서로 몸을 꼬고 있는 장면도 발견된다. 로스토프체프(1929)는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상아로 된 유물(그림 1-7)을 주목한 적이 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재는 이 유물이 검집장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생긴모양으로 보아서 앗시리아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했다. 이 유물의 용도를 알 수 있게 한 것은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벽에 새겨진 조각 덕분(그림 2-4~6)인데, 모두 검집 끝을 장식했다. 이 검집 끝장식은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으며, 머리로 보아서 굽동물이고, 몸은 매우 추상화되었다.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은 이 동물 장식의 원형(原形)은 스키타이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으로 보았다(Bernard 1976, 페레보드치코바 1994).
비슷한 동물장식이 시리아 북부의 테베 –규욱(그림 2-8), 박트리아(그림 2-9) 등에서 발견되었다. 그럼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페르세폴리스에 검집 장식(그림 2-4~6)으로 새겨질 수 있었을까? 이 궁전은 페르시아가 이를 지을 당시에 인접한 국가 들의 장인을 모두 불러 보아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 장인들이 자신이 새긴 검집 장식의 원형(原形)에 담겨진 주제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검집장식이 삼각형에 가까워서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과는 다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항상 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7-6세기 테미르-고라(그림 6-1) 등에서 발견된 유물은 원(圓)형은 아니라 삼각형에 가깝다.
그림 6. 흑해 지역에서 발견된 원형의 맹수장식
Bernard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검집장식과 이집트에서 발견된 상아제 검집장식은 모두 아케메니드 시기로 보았다. 이 생각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검집장식이 페르세폴리스의 조각 보다 먼저 일것이라고 본 것을 부정한 것이었으며, 검집장식에 표현된 동물장식이 일정한 발전방향으로 모양이 변하면서 생겼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집트의 검집장식은 그 지역에서 재생산된 것으로 보았다. 페레보드치코바는 아케메니드 왕조에서 궁전을 지었던 일은 매우 큰 사건으로 이웃한 지역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여러 장인들은 이를 또 인용(차용, 모방)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대로 인용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전통에 맞게 고쳐서 해석했을 수도 있다. 만든 각자의 장인들은 상호간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대의 언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전통은 교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물장식은 그 매개가 된 것이다.
페레보드치코바는 페르세폴리스의 건조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폭발적으로 주변지역으로 전달된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경에 스키타이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까지 서로가 서로의 문양을 공유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지만 이미 그러한 계기가 된 어떤 이유는 기원전7세기(아르잔-2호)경에 나타났을 수 있다.물론 페르세폴리스의 건조도 더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원형의 호랑이 장식과S자형 호랑이 장식은 시베리아에서 먼저 나타났다.동물투쟁문양도 카탄스키의 예를 볼 때 알타이를 배제할 수 없다.동물투쟁문양에S자형 동물장식이 가미되는 것도 알타이에서 먼저 관찰된다.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동물의 결합인 하이브리드형 동물은 흑해 지역에서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 보다 이른 유물은 아직 없다.두 동물이 마주보는 구도의 동물장식은 좀 더 숙제가 남아 있다.몸을 말고 있는 원형의 맹수상 만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널리 사용된 예는 아직 없다.
페레보드치코바의 생각처럼 발전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고 어떤 큰 사건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인접한 지역으로 전달된 것은 맞지만, 마주보는 동물구도를 검집 끝에 장식하는 방법이 변형된 방법으로 변화되는 것은 발전 혹은 진화론 적인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참고문헌
Rostovtzeff M. The Animal Style in South Russia and China. Princeton, 1929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아르잔-1호에서 원형의 맹수장식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이 유적을 발굴한 그랴즈노프는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이 시베리아에 있을 수 있다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유형)라는 용어도 만들었지만 같은 논고(1978, 1980)에서 '다중심발생설'이라는 개념도 함께 설명했다. 시베리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완성된 형태가 각기 존재했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랴즈노프 뿐만 아니라 야첸코와 라엡스키(1980)도 설명했다.
그림 1. 아르잔-1호 원형의 맹수장식
유라시아 스텝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형태가 점진적인 진화 혹은 발전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폭발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이 폭발에 의해서 스키타이 문화라는 새로운 예술?문화장르가 등장했다고 보았다(야첸코, 라엡스키 1980).
이를 있을 수 있게 한 것은 흑해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등이 이웃한 문명과 접하고 있었고 ‘스타일 인용’ 혹은 ‘모방’ 혹은 ‘차용’해서 나타난다. 아르잔-1호가 매우 이르기는 하지만 기원전 7세기에는 흑해에서 시베리아까지 비슷한 시점에 폭발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유적 간의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의 차이가 사람의 이동 차이 사람이 이동하면서 함께 움직인 문화 이동의 차이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르잔-1호는 도굴로 인해서 주인공의 무덤 부장품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서아시아제 의복과 카펫 조각 등이 남아 있었다. 이미 이 시기에도 이미 서아시아지역과 시베리아는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그랴즈노프 1980). 이후에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타나는 서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특징은 분명 확인된다.
파르마콥스키의 이오니아 발생론도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그리스 예술에도 스키타이 문화의 변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가 고대 이란 예술에도 확인된다.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는 아나톨리 지역 및 고대 이란(서아시아) 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요소가 분명이 있고(그림 2), 시베리아에도 아르잔-1호 뿐만 아니라 파지리크 유적의 말 안장 덮개에 그려진 그리핀 등은 서아시아 지역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
위에서 이야기 한 대상의 주어는 동물문양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하게 된 것은 역시 실용적이면서도 그 안에 상징성이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루코닌(1971)과 페레보드치코바(1994)는 이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78 : К вопросу о сложении культур скифо-сибирского типа в связи с открытием кургана Аржан. // Ранние кочевники. / КСИА. Вып. 154. М.: С. 9-18. (그랴즈노프 1978, 아르잔 쿠르간의 발굴을 통해서 본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문화성격에 대해서)
Грязнов М.П.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Яценко, Раевский, 1980. Некоторые аспекты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й проблемы (обзорная статья). — НАА, №5.(야첸코, 라에프스키 1980. 스키타이-사르마토프 문제의 여러 관점에 대해서)
Луконин В.Г. 1971 : Искусство древнего Ирана (основные этапы). // История Иран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и культуры (к 2500-летию Иран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М.: 1971. С. 105-121.(루코닌 1971, 고대 이란의 예술품)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흑해 지역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거울과 함께 출토된 투부는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 보다는 이웃한 서아시아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아. 아르타모노프(1961)는 투부에 표현된 동물을 지비예 유물 및 서아시아 유물과 비교해서 이 지역의 것을 ‘차용’했다고 밝혔다. 흑해 지이지역 스키타이 문화의 형성기에 서아시아 지역의 것을 받아들였다고 본 것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는 동물을 표현하는 표면 기법에 차이가 있다. 동물의 종에 따라 드문데 맹수에는 비늘, 별모양 혹은 파상선으로 처리한 것이다. 동물의 털은 표면 전체 혹은 앞 부분만을 덮을 수도 있다. 멧돼지는 앞부분에만 있고 견갑부에는 없다. 반면에 굽동물은 맹수와 표면 처리가 다른데 매끈하다. 사슴과 말은 없고, 염소와 황소는 윤곽에 따라서 얇은 띠와 원이 줄을 이루고 있다. 황소는 모든 윤곽을 따라서 털 문양이 있고, 염소는 양 측면을 따라 아래와 뒷부분에만 있다.
그림 1.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투부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투부의 신부
얼핏보면 이 투부의 동물문양은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과는 보이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속성(특징)이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몸통 및 다리의 처리방식과 앞다리와 뒷다리의 연결부의 구성방식이다. 투부 속의 동물문양들은 각 종 마다 몸통 및 다리의 처리방식(자세)와 견갑부와 대퇴부의 표현법은 변화되지 않는다.
이 규칙?은 스키타이 동물장식에서도 관찰되는 점이다.
스키타이 동물문양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모방이라고 하지 않고 ‘스타일 인용(стиль цитаты, quote style)’이라는 표현을 했다.(루코닌 1971, 페레보드치코바 1994).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루코닌은 일정한 기호체계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유물 에도 적용되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어떤 문헌에서 필요한 경우 인용구를 꺼집어 내어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인용구는 원래의 의미를 상실 할 수도 있고, 인용한 자의 의도에 따라서 사용될 수도 있다.
어렵게 이야기 했지만 결국 스키타이 문화의 흑해 지역에서 동물문양은 인접한 지역의 방법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연구자들이 ‘스타일 인용’이라는 용어로 인접한 세계의 동물장식 속성이 스키타이 유물에서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은 결국 동물문양장식의 그 의미(기호로서의 장식품)를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기호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도 있고스타일 인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켈레르메스 투부와 같이 그렇게 골똘하게 쳐다보아야 할 만큼 의미를 매우 숨기려고 동물장식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누가보아도 알아먹어야 기호로서의 역할은 오랫동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와 비슷한 철제 검은 기원전 7세기에 잠시 나타났다가 더 이상 스키타이 문화 속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화장실 표식 같은 것은 누가봐도 만국공통어이다. 아마도 이런 특징의 유물도 있었을 것이고 꼭꼭 숨겨두고 싶은 의미를 담은 동물장식도 있었겠겠지...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1 : К вопросу о происхождении скифского искусства. // Omagiu lui George Oprescu cu prilejul împlinirii a 80 de ani. Bucureşti: Editura Academiei Republicii Populare Romîne. 1961. P. 31-46.(아르타모노프 1961, 스키타이 예술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
Луконин В.Г. 1971 : Искусство древнего Ирана (основные этапы). // История Иран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и культуры (к 2500-летию Иран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М.: 1971. С. 105-121.(루코닌 1971, 고대 이란의 예술품)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