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2021. 3. 7. 13:05 스키타이 무기

유라시아 초원의 초기철기시대인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화살이다. 이 문화의 무기는 투부, 검과 칼 등이 있고 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전 지역에서 소재를 달리해서 출토되는 유물이며, 무덤 까지 들고 들어가는 유물이다.

검은 손잡이가 화려하게 치장되어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다. 길이 짧은 검은 말탄 기마병에게는 유용한 무기는 아니다.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의 암각화에 그려진 기마병 들은 대부분 자루가 긴 일종의 동과나 동모를 들고 있었다. 말탄 전사가 활을 쏘는 장면도 발견된다.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견된 아크 알라하-1 유적의 2호분은 어린 소년의 무덤이었는데, 소년은 자신의 신체 크기에 맞게 조정된 목검과 화살통(고리트)과 함께 부장되었다(폴로스막 1994). 어린아이에게도 뭍어줄 만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유물이었을 수 있다.

 

알타이의 추야강과 우슬라 강의 스키타이 시기 무덤을 수 백개의 무덤을 발굴한 쿠바레프도 화살촉으로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유물이다. 그에 의하면 스키타이 화살통인 고리트는 모든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쿠바레프 1991).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의 시작점이라고 보는 아르잔-1호에서 화살촉은 도굴로 인해서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7세기 중반의 무덤인 아르잔-2호에서는 골제 화살촉과 청동제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청동제화살촉은 단면이 마름모꼴인 것(그림 1-3~8)과 원형에 능이 붙은 것(그림 9-10~13)이 있다. 앞의 것은 활대를 끼우도록 단면이 비어 있고, 뒤에 것은 자루를 끼우기 위해서 슴베가 있는 유물이다.

골제 화살촉은 단면이 삼각형이고, 자루를 끼우는 슴베가 뒤로 나와 있다.

 

그림 1. 아르잔-2호 출토 청동제 화살촉, 기원전 7세기 중반

 

그림 2. 아르잔-2호 출토 골제 화살촉(2), 기원전 7세기 중반

 

아르잔-2호에서 발견된 청동제과 골제 화살촉은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만 쿠바레프가 발굴한 알타이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아르잔-2호를 발굴하기 전이었지만, 이러한 형식의 화살촉이 가장 이른 유물이라고 보았다(쿠바레프 2007).

 

그런데 화살촉 단면이 원형이면서 능이 붙은 화살촉은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그림 3-1~3,5)에서도 발견되고, 산림지대의 아나닌스카야 문화(그림 4)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화살촉, 기원전 7세기

 

그림 4. 아나닌스카야 문화의 화살촉, 기원전 6~5세기

 

물론 스키타이 서부 지역의 유물에는 자루끼우는 부분이 단순하지 않고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알타이에서는 없는 형태이다. 아마도 용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인데, 정확하게 어떤 부분인지는 잘 모른다.

 

알타이 남쪽 카자흐스탄 동부 평지에 위치한 실릭티 유적의 화살촉은 단면이 원형이면서 능이 있지만 아르잔-2호와 알타이와는 다르다. 현재 아르잔-2호와 알타이에서 발견된 화살촉은 실릭티 화살촉처럼 생긴 것은 없고 오히려 흑해쪽(그림 5)에 가깝다.

포스팅

 

그림 5. 드레프르강 유역(흑해 북안)의 화살, 기원전 5세기 전후

 

참고문헌

Кузьминых С. В. Металлургия Волго-Камья в раннем железном веке: Медь и бронза. — М.: Наука, 1983. — 257 с.(쿠지미니흐 1983, 볼가-카마 강 유역의 초기철기시대: 순동과 청동 금속제작)

Алексеев А.Ю. 2003 : Хронография Европейской Скифии VII-IV веков до н.э.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03. 416 с(알렉세예프 2003, 기원전 7-4세기 유럽스키타이문화의 편년)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쿠바레프 1991, 유스티드 고분)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Кубарев В.Д., Шульга П.И. Пазырыкская культура (курганы Чуи и Урсула), Барнаул: Изд-во Алта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2007. 282 с.(쿠바레프, 술가, 2007 파지릭문화 유적(추야와 우르술라강의 고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남성 석인상은 헬멧을 쓴 남성 무사가 무기를 풀 착장한 채로 확인되기도 했다. 청동투구(헬멧)은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되면서 기원전 7세기에 사용되었던 방어용구이다.

 

청동헬멧을 쓴 남성 무사는 어떤 말을 타고 다녔을까?

 

베셀로프스키가 발굴한 켈레르메스 유적 1호에서는 모두 24마리의 말이 남서쪽벽에 나란히 매장되었다(그림 5). 서쪽벽에 말 12마리가 누워 있었는데, 그 중 10마리는 마구를 착장하지 않았다. 두 마리에는 은제 마구장식(말의 볼 가리개)(그림 1) 이 착장되었다. 남쪽벽의 말(13~18번)은 6마리는 황금 굴레장식, 나머지 6마리는 뼈로 만들어진 굴레장식(그림 2)을 착장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베셀로프스키 발굴), (Галанина Л.К. 2006 인용)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베셀로프스키 발굴), 동물이 새겨진 굴레장식, 뼈(Галанина Л.К. 2006 인용)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베셀로프스키 발굴), 황금 (Галанина Л.К. 2006 인용, 필자편집)

 

그중에서 말의 얼굴장식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남쪽벽의 13번 말이다(그림 3)

이마부터 콧 등까지 가리는 앞 장식판(그림 3-1)과 재갈멈치 위에 달린 볼 가리개(그림 3-2, 3)와 굴레를 감싼 장식판으로 구성된 것이다. 볼가리개는 양 면(그림 3-2,3)의 문양이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선문양을 배치했다는 점은 같으나, 왼쪽 뺨 가리개(그림 3-2)는 다섯 개의 동심원문양 안에 나선문양을 배치한 것이고, 오른족 뺨 가리개(그림 3-3)은 두 개의 동심원문양을 기본 프레임으로 한 것이다. 굴레를 감싼 다른 장식판에도 모두 나선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림 4.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베셀로프스키 발굴)의 복원도(Галанина Л.К. 2006 인용)

 

 

 

 

그림 5.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베셀로프스키 발굴)의 평면도(Галанина Л.К. 2006 인용)

 

 

 

 

고분에서 남과 서쪽으로 나누어서 말을 매장한 것은 왕실의 환경이 혼합민족을 구성을 암시하며 스키타이 인 뿐만 아니라 인접한 지역의 사람을 의미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말의 장식이 은, 뼈, 금으로 차등을 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위계를 반영한다고도 한다(갈라리나 2006).

 

갈라리나의 생각이 딱히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말의 장식을 만든 소재가 다른 것은 용도에 따라서 달랐을 가능성도 한 가지 덧 붙이고자 한다.  청동 헬멧을 쓴 무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거다.  의전용이라면 황금장식판을 단 말을 탔을 것이고, 전쟁에 나갈 참이었다면 뼈로 만든 굴레장식이 달린 말을 탔을 것이다.  동물장식은 일종의 부적(amulet)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3번 말의 굴레장식은 이 유적에서 출토된 우라르트-스키타이 양식의 유물과는 관련이 없는 지역의 특징적인 유물이다. 나선문양은 동물문양과 함께 흑해 스키타이에서 유행하던 유물이기 때문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금으로 장식된 검과 투부, 은제 거울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기원전 7세기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모든 것을 반영한다.

 

 

 

참고문헌

Галанина Л.К. 2006 : Скифские древности Северного Кавказа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Келермесские курганы.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06. 80 с. (Коллекции Эрмитажа)(갈라니나, 2006, 에르미타주 소장, 카프카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고분. 스키타이 문화유물)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는 높은 곳에 깊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말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식이 행해졌다. 2600년 전 이전에도 장례식 이후에 축조된 결과물은 다르지만 성대한 장례식은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파지릭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파지릭문화를 밝혀 낸 루덴코는 자신이 실제로 참석한 카자흐스탄 한 부족의 장례식 기념행사를 적어놓았다. 자신이 발굴한 유적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발트해부터 알타이 북동부 지역까지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을 가능성을 비추었다(루덴코 1960).

 

1927년 루덴코는 카자흐스탄 흑해로 흘러가는 이르티시 강 주변에 있는 한 부족의 장례식을 경험했다. 3월 25일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같은해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30개의 펠트 마차(펠트마차로 번역이 되지만 문맥 상 일종의 텐트와 함께 겸비된 것으로 일종의 캠핑카?정도로 이해가 된다)가 줄을 있었고, 그 중 5개는 죽은 이의 아들을 위한 것이다. 손님을 위한 것도 15개나 준비되었고 그 중에는 여성을 위한 것도 있다. 손님을 위한 음식은 4마리의 말, 6마리의 황소, 25마리의 숫양이 준비되었고, 2~3개의 큰 용기에 쿠미즈(양 지방 유제품)로 가득채워서 준비했다. 쿠미즈는 선반에 담겨서 옮겼는데, 아주 비싼 카펫으로 장식된 낙타가 행렬을 이끌었다. 낙타뒤에는 여자, 그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손님들도 양과 말을 장례를 위해서 가져왔는데 손님들이 가져온 30마리의 숫양 중에 25마리를 죽여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낮에는 차와 쿠미즈가 간식으로 아침과 저녁에는 고기가 손님들에게 제공되었다. 음식은 특별히 지정된 노지(화덕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고기는 신선하게 하기위해서 같은 장소에서 죽이고 같은 장소에서 음식을 했다. 음식은 2~4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실려서 손님이 끌고 온 마차로 배달되었다.

루덴코가 본 장례식에는 부족의 허락이 없어서 말 경주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말 경주대회가 장례식에 있었던 것을 그는 나이만족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1896년에 사망한 나이만족이 경험한 장례식은 매우 성대한 것이었다. 3일 동안 장례식이 치러 졌는데, 아주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모였는데, 심지어 해외에서도 왔다. 손님을 위한 텐트(마차)가 300개나 설치되었고, 손님을 위해서 각 마차에 한 사람, 말 한 마리가 배정되었다. 손님들은 쿠미즈(유제품)와 빵반죽을 직접가져왔다.

말 경주는 장례식 전날부터 첫 번째 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장례식 음식 준비를 위해서 음식하기 위한 구덩이를 판 날이고, 말 경주가 열린다.  말 경주는 첫 번째와 네번 째 날 열렸다.  네 번째 경주는 장례식 마지막 날 열리는 데 25마일을 달리는 것이었다. 최대 250여마리의 말이 참가했고 그 중에 20마리에게 상이 수여되었다. 1등 말은 말2마리, 낙타1마리와 은을 받았고 나머지 말은 말 1마리를 받았다.

세 번째 대회는 낙타경주이다. 50마리의 낙타가 경주해서 10개의 상이 수여되었다.

 

이러한 성대하고 체계적인 음식문화를 동반한 혼잡한 기념은 부자와 귀족 사이에서 가능했다. 다양한 대회와 음식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일수 있었고 거대한 토루 등의 건설은 짧은 기간에 가능했다.

 

비슷한 광경이 19세기말~20세기 초 뿐만 아니라 2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루덴코는 추정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6m의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루덴코가 목격한 장례식에서도 3월에 죽은 이를 9월에 묻었는데, 이는 2600년 전 파지릭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장례식은 봄과 가을에 치러진다고 했다. 20세기 초에는 그 사이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2600년 전에는 죽고 나서 묻기 전의  몇 달동안 시신은 미라로 처리해서 보관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에는 남성시신은 도둑맞았고 여성시신은 훼손이 심해서 죽은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1호분에는 부패가 심해서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미라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남아 있었다. 미라는 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 이 인골은 두개골과 여러 뼈에 미라처리 흔적만이 남아 있다. 두개골에 구멍을 파고 뇌를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1).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미라도 두개골에 그림 1과 같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바샤다르 1호분의 남성미라는 좀 다른데, 경추(그림 2-1), 척추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으로 방부제를 투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12번째 흉추(그림 2-2), 나머지 흉추(그림 2-3,4)에 청공되었다. 요추에도 뚫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멍이 잘 남아 있지 않다. 흉추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복강(배)은 내장을 추출하기 위해서 개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뇌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척추

 

미라처리의 관건은 뇌를 제거하고 피부는 남기고 그 밑의 지방과 근육을 제거하는 것인데, 뼈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근육이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의 남성도 미라이다. 아시다시피,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무덤구덩이가 깊지 않았고, 얼음층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 미라의 피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700여 년 전의 시베리아 투바의 무덤인 아르잔-2호는 단순히 하나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주인공 남녀가 묻힌 곳은 5호 무덤방이지만, ‘호석’이라고 둘러쌓인 일종의 무덤벽 안에는 말무덤을 포함해서 스키타이 시대의 무덤은 26개이다.

 

남녀 주인공의 무덤방 5호를 제외하고 2호, 11호에는 나무시설이 있고, 그 외는 전부 돌을 사용한 무덤이다. ‘무덤방’이라고 5호를 불렀지만, 각각의 무덤이다. 2호와 11호도 각각의 무덤이다.

그런데 각각 부를 때는 상관이 없지만, 아르잔-2호 유적의 무덤 5호라고 틀림없이 사람들은 혼돈된다. 2호안에 왜 또 5호가 들어갔지?.. 그래서 필자는 아르잔-2호의 각 무덤을 무덤방으로 부를 것이다.

 

5호와 같지는 않지만 어찌되었던 나무 시설이 있는 2호와 11호를 제외하고나면 전부 석관묘이다. 석관묘는 교과서에 돌널무덤으로 부른다. 납작한 돌을 사용해서 만든 무덤인데, 사실 돌널무덤도 소재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구분가능하지만, 아르잔-2호에서는 소재는 한 가지이다. 무덤의 상부를 덮었던 일종의 석회암 판석을 이용한 것이다.

 

 

그림 4는 지난번에 같은 그림을 제공했는데, 20호와 8호에도 사람이 매장되었는데, 정정하시기 바란다. 오렌지 색깔이 스키타이 시대, 주인공 남녀와 같은 시기에 매장된 사람과 말이다. 한눈에도 크기가 다른 것이 보이는데, 묻힌 사람의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2인장이고, 1인장도 있다.

 

혼자서 묻힌 사람은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으며, 단인장(혼자서 묻히는 무덤)이라도 크기가 차이가 있다.

 

그림 1. 아르잔-2호의 8호 무덤방

1-무덤의 상부, 납작한 돌로 덮음, 2: 1의 단면도 A-A'는 1에서 자른라인을 의미한다. 3-덮개를 열고 난 후 무덤의 내부 모습, 번호는 유물출토위치. 

 

8호 무덤방은 길이가 0.9×0.75m이다. 남쪽의 무덤벽은 이미 넘어진 상태(그림 1-2)이다. 납작한 판석을 사방으로 둘러서 마치 ‘상자’모양으로 무덤을 만들었고(그림 1-3), 그 위에 돌을 덮었다(그림 1-1). 인골은 북쪽벽에 붙어서 묻혔고, 40~45세 가량의 남성이었다. 왼쪽 측면으로 뉘운 상태였고 매우 뒤틀린 상태였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무덤방은 길이와 너비가 1m가 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사람을 이 속에 넣을 수 있을까?

답은 구겨서 넣는 것이다.ㅋㅋㅋ(매우 쉽게 말했지만 자극적인 말이다.)

 

이렇게 작은 무덤에 인골이 들어가는 경우는 보통 ‘2차장’이라고 부르는데, 살은 어딘가에서 썩히고 무덤안에 뼈만 추려서 넣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2차장이라고 하지 않았으나, 다리뼈가 머리부근에 가 있는 점은 의심스럽다. 그런데 보통 2차장은 뼈만 수습되기 때문에 매우 뼈가 흩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 무덤은 척추를 왼쪽으로 뉘웠다는 점에서 매우 의심스럽다. 완전히 살이 썩지 않은 상태였는지, 살이 남아 있지 않고 뼈만 추려서 넣은 건지...? 

 그런데 청동칼(그림 1-3에서 번호 1번)의 위치를 보면, 완전히 뼈만 남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보통 스키타이 문화의 칼은 짧아서 허벅지에 붙여서 찬다. 스키타이 전사 복원도를 제공한 적이 있는데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렇다고 어떤 상태로 무덤안에 들어갔는지 단정하기도 힘들다...??

 

무덤 안에서는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청동제(그림 2-1, 7~12)와 주석(그림 1~6)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청동제 칼(그림 2-1)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장신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2. 아르잔-2호 출토 무덤방 8호의 출토유물, 1,7~12: 청동제, 2~6: 주석

 

그림 3. 아르잔-2호 출토 무덤방 8호의 유물, 그림 2-1,2와 같은 유물

 

 

 

그림 4. 아르잔-2호 무덤방 내부, 8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유라시아 초원을 휩쓸었던 스키타이 문화는 초기철기시대로 알려졌고 기원전 9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알려진 아르잔 1호가 현재 알려진 오래된 유적이다. 필자가 계속 ‘스키타이 문화’라고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이다. 스키타이 문화권이 공통된 특징인 무기, 마구, 동물문양장식이 각 지역의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요소가 비슷하게 나타나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스키타이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흑해북안부터 시베리아를 벗어나서 중국동북지역 가운데 요서지역과 황하상류의 오르도스에도 특징 등이 보인다.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문화는 기원전 9세기부터 늦게는 기원전 4~3세기까지 영위된 문화로 본다. 그러나 이 문화가 나타나는 시점과 없어지는 시점은 지역마다 다르다. 또한 각 지역의 무덤문화나 개별 문화적 요소도 다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알타이의 기원전 5세기 가량의 유적인 얼음공주 무덤인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 파지릭 유적과 비교해 볼 때 아르잔 유적은 비교적 가깝지만, 시간상 300년 이상 앞서기 때문에 당연히 문화적 차이가 있다. 그래서 아르잔 유적을 기준으로 해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의 강 이름을 따서 ‘우육문화’라고 한다. 혹은 ‘투바문화’라고도 한다. 앞에서 보았던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 유적과 파지릭 유적을 파지릭문화라고 했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문화로 볼 수 있는 우육문화의 아르잔 유적의 1호분은 아쉽게도 도굴당해서 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주인공 남녀가 묻힌 곳에는 근동지역에서 들어온 옷과 담비가죽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금,은, 동, 터키석, 갈탄, 뼈 등으로 제작된 장신구(그림 1,2, 표)가 남아 있고 중심 무덤방의 동쪽에 위치한 말 6마리 사이에서도 마구가 많이 출토되었다(그림 4).

 

 

그림 1. 아르잔 1호 출토유물. 중심 무덤방. 표의 그림번호와 일치.

 

중심무덤방의 1호 무덤방 외곽에 위치한 통나무관 6개와 2호 무덤방에서도 유물이 출토되었다(표). 5호 나무방과 6호 통나무관을 제외하고 모두 유물이 출토되었다(표는 그림으로 제시된 것만 표로 만들었다). 2호 무덤방에는 통나무관도 있었는데, 금제품과 터키석 등이 출토되었다. 주인공 남녀가 묻힌 1호 무덤방은 도굴이 심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유물의 전체 수량이나 특징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1호 무덤방의 남쪽에 위치한 4호 관에는 청동단검 3자루(그림 1~3) 및, 모직 옷, 금제 귀걸이(그림 2-10,11) 등이 출토되었다. 4호 통나무관 박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 통나무관도 도둑맞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동물문양장식이 붙은 청동 검의 손잡이(그림 2-4)가 출토되는데, 4호의 것인 확률이 많다.

 

 

 

그림 2. 아르잔 1호 출토유물. 중심무덤방 중에서 주인공의 무덤방 및 주변의 통나무 관 출토품. 표의 그림번호와 일치

 

 

그림 3. 아르잔 1호 출토유물 말과 관련된 유물. 주인공 무덤방, 26호, 31호, 37호 통나무관 출토품

 

 

 

그림 4. 아르잔 1호 출토유물. 말의 굴레장식.

 

 

 

 

 

주인공

그림번호

가죽

청동

금제

은제

터키석

갈탄

멧돼지송곳니

Antigorite

Argillite(퇴적암)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남 녀, 사지골만

1-1.

 

꼬인동판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7.

 

장식판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2.

 

 

 

 

장식판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9.

 

 

 

 

장식판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10.

 

 

 

 

장식판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4.

 

 

 

 

 

고리모양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3.

 

 

 

 

 

 

고리모양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5.

 

 

 

 

 

 

고리모양

 

 

 

인간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1-6.

 

 

 

 

단추

 

 

 

 

 

(6)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1.

 

재갈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2.

 

 

 

 

 

 

 

 

?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4.

 

 

목제도 덧입힘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7.

 

 

장식판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8.

 

 

장식판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10.

 

 

장식판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6.

 

 

 

이마장식(w)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9.

 

 

 

 

 

 

 

장식판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3-12.

장식판(w)

 

 

 

 

 

 

 

 

 

중심무덤방

1호무덤방

4-1~6

 

 

 

 

 

 

 

굴레장식

 

 

인간

중심무덤방

2호통나무관

 

1-8.

 

 

 

 

장식판

 

 

 

 

 

인간

중심무덤방

2호통나무관

2-5.

 

 

장신구

 

 

 

 

 

 

 

인간

중심무덤방

2호통나무관

2-7.

 

 

장신구

 

 

 

 

 

 

 

인간

중심무덤방

3호통나무관

(18~20)

2-8.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1.

 

가죽집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2.

 

단검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12.

 

화살촉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10.

 

 

귀걸이(W청동)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11.

 

 

귀걸이(W청동)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2-13.

 

 

 

 

 

 

화살촉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밖

 

2-3.

 

단검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밖

 

2-4.

 

검 손잡이(금박)

 

 

 

 

 

 

 

 

인간

중심무덤방

4호통나무관 밖

 

2-6.

 

투부

 

 

 

 

 

 

 

 

인간

중심무덤방

6호통나무관

(60세이상)

2-9.

불을 만드는데 사용됨.

 

 

 

 

 

 

 

 

 

(11)

26호무덤방

26호무덤방

 

3-3.

 

 

 

 

 

 

 

 

 

?

31호무덤방

31호무덤방

사람 2

3-11.

 

 

장식판(w말총)

 

 

 

 

 

 

 

(13)

37호무덤방

37호무덤방

 

3-5.

 

 

장식판

 

 

 

 

 

 

 

표. 아르잔 1호 출토유물. 그림의 번호와 일치(표와 그림을 맞춰보시면 됨).

 

그랴즈노프는 4호 통나무관에서 담비가죽, 모피 옷,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서 다른 통나무관도 비슷한 사정이었다면, 이들도 높은 계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가장 중심부 만큼은 아니지만...

 

1호 무덤방의 주인공 남녀와 주변을 에워싼 8인은 어떤 관계였는지는 현재 였으면 바로 DNA분석을 했다면 어느 정도 단서가 나왔겠지만, 그렇지 않다. 친족관계였는지, 상하관계였는지, 혹은 가깝다면 얼마나 가까운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울러 중심 무덤방의 북쪽에 위치한 9호 무덤방에서는 통나무관이 겨우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졌는데 이곳도 1호 무덤방의 주인공을 호위하는 듯 한 8인과 같은 관계였을 것이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그 외에 31호 무덤방에서도 인간과 말이 함께 매장되고 장식판(그림 3-11)도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2 next